1970년대 일본 경제 - 1970nyeondae ilbon gyeongje

도쿄 북쪽 사야마시 혼다자동차 공장. ⓒphoto AP

일본에서는 광복 70주년 대신 ‘종전(終戰) 70년’ ‘전후(戰後) 70년’ 등의 표현을 쓰며 한창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8·15 아베 담화’가 다분히 주변국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신문·방송의 특집은 자국민에게 ‘영광의 역사’ 의식을 고취해 주려는 느낌이다. 특히 고도성장을 통한 자신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세대를 겨냥한 듯한 인상이 짙다. 한자어 조합과 응용은 물론 불리한 사실(史實)에 대한 다양한 톤 다운이나 물타기 노하우가 발달해 있어 ‘패전’이라는 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깝고도 먼 나라’답게 한국도 이런 이웃 나라의 경제발전 역사, 특히 경제발전 과정 부분은 애써 외면해 온 것 같다. 이 부분을 굳이 알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라는 우스개가 생긴 느낌도 있다. ‘한강의 기적’ 못지않은 이들의 치열했던 지난 시간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일본이 50년 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에 많은 원조를 해줬다고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한국이 일본의 중요한 성장기마다 결정적 거름을 뿌려줬다는 아이러니도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2차 대전 이후 폐허가 된 나라가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았다가 독립을 이뤄냈고, 다시 합심해 고도성장을 이뤄 메이저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는 게 일본인이 내세우는 전후 경제발전사의 주 내용이다. 2차 대전을 한국전쟁으로만 바꾸면 한국과도 전개방식이 상당히 닮았다. 물론 ‘폐허’나 ‘독립’ 같은 표현은 한국의 처지에서 보면 과장이다.

1945년 도쿄대공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30만여명이 죽고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외 영토에서 일본인이 270만명가량 사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본토 피해는 거의 없었다. 최남단 오키나와섬만이 미군과의 치열한 전장(戰場)이 되었을 뿐이다. 또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1945년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직후인 1952년까지 주둔하며 최고의사결정권을 행사했다고 하나 형식적으로 일본 총리도 있었고 행정기관 시스템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연속적으로 작동됐다.

2차 대전 후를 잘 알기 위해서는 먼저 두 번의 세계대전 이전, 20세기 전부터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서 잠재력을 과시한 일본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7세기 에도시대 때부터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물론 은(銀) 광산 개발이 이어지며 국부의 절대 규모가 상당했다. 1800년 기준으로 인구가 3000만명이어서 당시 유럽 3대 국가인 프랑스(2750만명)·독일(2500만명)·영국(870만명)보다도 시장 및 노동력 규모가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국(1400만명 추정)과도 꽤 격차가 있었다.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벌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당시 일본은 1년 예산의 4배인 2억냥(3억2000만엔)을 중국으로부터 배상금으로 받았다.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에 이견이 없는 이 돈을 바탕으로 관영 야와타(八幡)제철소를 짓고 방적(紡績)시설을 확대하며 ‘일본판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축적된 자본으로 금본위제를 도입, 일본은행을 창설하며 금융시스템을 공고히 구축함에 따라 세계적으로 엔의 신인도도 올라갔고, 이에 따라 현재까지 준(準)기축통화로서의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유니클로를 파는 퍼스트리테일링이나 인터넷쇼핑몰 라쿠텐, 통신업체 소프트뱅크 같은 대기업이 부각되었지만, 20세기 일본에서는 “전후(戰後) 대기업은 소니와 혼다밖에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오래된 기업이 많다. 섬유나 소비재, 유통은 에도시대로 창업자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제철·자동차·조선·기계·화학 등 중공업 업종은 특히 1930년대 이후 군수물자 생산에 국가적으로 역량을 집중한 덕분에 2차 대전을 기점으로 토대가 많이 닦였다.

1936년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 군수트럭이 미국 포드제였을 정도로 GM·포드·크라이슬러의 ‘빅3’ 회사가 일본 자동차산업을 지배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후 자국 자동차산업 육성에 나섰다. 미국 업체에 관세를 대폭 부과하고 자동차 업종을 정부 허가제로 바꾸면서 도요타와 닛산에 각종 세제 우대를 해주며 지원했다. 마쓰시타전기, 일본제철도 군수업으로 기반을 키운 업체들이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는 대개 1956년부터 1973년까지를 이른다. 이 17년간 평균 9.1% 성장률을 보였다. 1973년 중동전쟁 여파로 맞은 오일쇼크로 이듬해인 1974년에 전후 첫 마이너스 성장(-0.5%)을 하는 시기까지다. 1974~1990년이 안정성장기로 분류되며 연평균 4.2% 성장했다. 버블이 꺼지고 인구가 고령화되며 잠재성장률이 본격적으로 잠식되던 1991년부터는 ‘성숙기’로 불린다. 2014년까지 연평균 0.9% 성장이라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잃어버린 20년’ ‘잃어버린 25년’의 연장선상을 현재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앞서 일본 유사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평가받는 ‘진무(神武)경기’가 1954~1957년(6~9% 성장)에 걸쳐 진행됐다. ‘3종의 신기(神器)’라는 냉장고·세탁기·흑백TV가 집집마다 보급되며 내수성장의 질도 크게 높아지던 시절이었다. 일본도 2차 대전 당시 전시국채(戰時國債)를 막대하게 발행한 탓에 돈 가치가 많이 떨어지고 패전 후에는 200배나 물가가 오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1949년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엔 신권 발행을 통해 총수요와 물가를 억제하는 재정긴축안을 썼기 때문에 일본 역시 당시에는 빈털터리 상태였다.

이 어두웠던 시기를 서둘러 결말 지어주고 진무경기의 초석을 깔아준 것이 진무경기 직전 3년간의 한국전쟁이다. 일본에서는 ‘조선특수(朝鮮特需)’로 부른다. 군복·모포 제조 등 섬유산업은 물론 시멘트·강관·식품·차량·중장비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군의 발주가 일본 기업에 쏠렸다. 미쓰비시중공업·후지중공업·도요타자동차 등 불황에 시달리던 옛 재벌계 대기업들이 기사회생한 것은 물론 이때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바탕으로 산업 원재료와 기계설비 등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당시 설비투자의 ‘약발’로 5년 이상을 버텼던 일본은 1959년 도쿄올림픽 유치를 통해 또 한 번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으로 판을 키우는 계기로 삼았다. 1960년 집권한 이케다 총리가 ‘소득배증계획’을 발표하며 10년 안에 국가총생산(GNP)을 2배로 키운다고 공언했는데 실제로는 4년 만에 2배, 10년 만에는 4배로 확대됐다. 1964년에 아시아 국가 최초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하며 명실상부 ‘G7’으로의 위상도 다지게 된다. 1969년에는 당시 통계가 부실했던 소련을 제외하고 서방세계 중 미국에 이어 2위로 경제규모가 올라선다.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경험하며 1970년대 중후반부터는 조선·철강·화학 등의 중후장대(重厚長大) 업종에서 자동차·가전 등의 경박단소(輕薄短所)로 주력 업종을 갈아탄 일본은 특히 도요타·혼다의 소형차 및 소니의 워크맨 등을 앞세워 미국을 중심으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달성한다. 1972년부터 집권한 다나카 총리의 ‘열도개조론’을 바탕으로 지방을 중심으로 한 건설·토목 공사가 활황이었고 철도·고속도로도 확충돼 수출뿐 아니라 내수 규모 역시 더욱 확장된 계기가 됐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에즈라 보겔 교수가 ‘1등으로서의 일본(Japan as number one)’을 출간해 전 세계에 ‘일본 따라하기’ 붐을 일으킨 것도 1979년이었다.

미국 처지에서 막대한 무역역조는 본격적 엔고(高) 시대로의 인위적 조정을 의미했다. 30년 전인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선진 5개국 재무장관이 만나 엔화의 인위적 절상에 합의하는 ‘플라자합의’를 이뤄냈다. 1달러 240엔 하던 엔화가치가 정책 시행 2년 만에 120엔대까지 높아졌다.

일약 고평가된 엔화 자금은 자국의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유입되어 가치를 일거에 급상승시켰다가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붕괴했다. 그후 오랫동안 1%대 성장에서 정체 중이다. 주식시장만 보면 1989년 1월에 닛케이지수가 3만8915까지 갔다가 2011년 대지진 이후엔 7000대까지 추락했었다.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현재 2만500 선을 횡보 중이나 화려했던 옛날을 떠올리면 아직 갈 길은 멀다는 느낌이다.

경제 규모에서 한국과의 격차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혹은 25년)’ 덕분에 많이 줄어들었다. 1995년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이 10배 이상 차이가 났으나 2014년 기준으로는 4.3조달러, 1.4조달러로 3배 미만으로 줄었다. 2.6배 차이가 나는 인구 수(4800만·1억2700만)를 감안한 1인당 GDP 개념으로는 한국인 2만8000달러, 일본이 3만3000달러로 85% 수준에 도달했다.

최근 엔의 달러화 대비 약세 영향이 있긴 하지만 1980년만 해도 20%(한국 1750달러·일본 9200달러)에 미치지 못했고 10년 전인 2005년에도 50% 수준(한국 1만7000달러·일본 3만5000달러)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큰 변화다. 민간경제연구소들에 따르면 한국이 3%, 일본이 1%라는 현재 수준의 잠재성장률이 지속되면 2020년에는 양국 1인당 GDP가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조인직

고려대 영문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MBA. 동아일보 기자, KDB대우증권 국제영업부 팀장 역임. 현 KDB대우증권 도쿄지점장

1970~1980년대 일본 주식시장의 황금기는?
(2017년 11월 기사)

1970~1980년대 일본 주식시장의 황금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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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1월 기사)

안녕하세요? 그동안 들려드린 과거 미국 증권시장의 이야기, 재미있으셨나요? 오늘부터는 미국에서 한 걸음 벗어나, 70~80년 당시 떠오르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의 증권시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경제의 회복

1945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합니다. 1900년대만 해도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일본은 본토에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가 이뤄지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는데요. 그 이후에 일본인들로부터 '외국인 쇼군(중세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수장)'이라고 불리던 미국의 맥아더 원수는 일본에 군정을 설치, 통치를 실시합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commons.wikimedia.org)

당시 일본은 미국 본토에 최초로 공격을 가했던 사례(진주만 공습)를 가진 나라였고, 태평양 전쟁 중 연합국의 피해도 막대했기에 워싱턴 미국 정부에서는 일본의 덴노를 전범으로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을 정도로 일본에 비우호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50년의 한국 전쟁이었습니다. 전쟁기간 중에 일본은 우리 대한민국을 지원하는 병참기지의 역할을 수행했고,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면서는 미국의 아시아 전초기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기는 1955년이 그 시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그동안 전범기업이었던 미츠비시 등의 재벌 기업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기업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1960년대 일본 증시도 조금씩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이미 1960년대 일본에서는 은행에 예금을 드는 것보다 증권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가 솔솔 나왔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일본의 증권사들이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일본 정부의 특별지원 등으로 인해 위기 타개가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부터 일본의 증권시장은 고속성장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떠오르는 태양

1970년대 일본 니케이 지수는 2,000포인트를 돌파합니다. 사실상 1970년대에 이미 일본의 경제는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합니다. 실제로 미국 니케이 지수가 2,000포인트를 넘은 시점은 미국 다우존스지수가 2,000포인트를 돌파했던 때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이미 1975년에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8천 달러로, 1만 5천 달러에 그친 미국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실제 1970년대 2,000포인트를 돌파한 일본의 니케이 지수 역시 75년대 이후 5,000포인트를 돌파하며 순항합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commons.wikimedia.org)

1970년대 일본에 불어 닥친 오일 쇼크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연비를 앞세운 일본 자동차들이 해외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수출 중심에 자원의 해외의존도가 높았던 일본 입장에서 오일쇼크는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1973년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경기가 위축되면서 일본 정부는 건설경기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즈음 일본에선 부동산 거품의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플라자 합의, 일본의 버블경제가 시작되다

오일쇼크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성장은 계속됩니다. 일본의 니케이지수는 1985년 13,000대를 기록했는데 이는 15년 만에 6배 이상 성장한 수치이기도 합니다.

한편, 1980년대 일본의 비약적 성장에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일본의 주요 시장이었던 미국이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소득세는 줄이고 재정지출은 유지하면서 재정적자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기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면서 소위 쌍둥이 적자(재정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함께 일어나는 현상)라는 최악의 사태를 경험합니다.

이에 미국은 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G5 재무장관 회의를 엽니다. 여기서 미국은 달러화의 가치상승이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의 하나라고 지적, 달러의 평가절하를 요구합니다.

특히 집중 논의된 것은 G5 국가 중 독일과 일본의 통화였는데요. 이에 일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평가절상하기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1985년의 플라자 합의(The Plaza Accord)입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commons.wikimedia.org)

플라자 합의 결과 일본의 엔화는 달러당 240엔에서 1년 만에 120엔까지 뛰어오르는 등 그 파급효과가 컸습니다. 당시 수출주도형 경제로 엔고에 어려움을 겪던 일본 정부는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실제로 바로 일본 중앙은행은 86년 1월부터 87년 2월까지 5차례에 걸쳐 금리를 5%에서 2.5%까지 인하하고, 통화량(M2+CD기준)도 8~11% 속도로 팽창시켜 시장에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합니다.

이로 인해 시장에 공급된 유동성은 일본의 부동산, 금융 등의 가치를 끌어올렸습니다. 1986년 12월부터 1991년 2월까지 증권시장의 랠리가 계속되었는데요. 구체적으로 보면 일본 니케이지수는 30,000포인트를 돌파해서 38,000포인트에 이릅니다. 실제로 일본의 83~89년 니케이 지수의 상승률은 연평균 25%에 이르렀고 85~89년 사이에는 무려 170% 상승률을 기록합니다. 추후 일본 니케이 지수는 1987년 10월 19일 발생한 미국의 '블랙 먼데이(Black Monday)' 사태에도 별 충격을 받지 않았고 이는 일본 증시의 자신감으로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댓글목록

김광섭님의 댓글

김광섭

좋은 정보와 고객을 위주의 자료제공 웹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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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모님의 댓글

이갑모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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