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마블 모노폴리 - bulumabeul monopolli

보드게임 이야기

한국형 모노폴리 "부루마불"과 80세를 맞은 "모노폴리"

 '응답하라 1988' 중 부루마불 게임 장면

‘응답하라 1988’의 영향으로 ‘부루마불’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드게임 시장이 생성되기도 전인 1980년대에 출시되었던 부루마불은 게임으로서의 완성도 이전에,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지요. 한국사 연대기의 문화적 지층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응팔”에서 부루마불이 상징적 소재로 쓰인 것도 그런 점 때문일 것입니다. 80년대를 상징하는 수많은 지층 중에서 보드게임으로는 유일한 존재니까요.

그런 부루마불도 모노폴리의 아류작 중 하나라는 것은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완구를 비롯하여 1980년대의 어린이 대상 문화는 대부분이 국외 문물의 카피본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작권의 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였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법망을 피한 카피로 제작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상업주의가 어린이 대상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왼쪽은 모노폴리, 오른쪽은 부루마불

그런데, 부루마불의 경우는 그런 종류의 상품들과 단순히 똑같이 묶기는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카피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보드게임 자체가 생소하던 당시 한국 상황과 어린이의 눈높이를 고려한 흔적들이 있으니까요. 모노폴리의 주제가 되었던 미국식 독점자본주의(monopoly capitalism) 체제와 80년대 한국 산업 체제가 상이하다는 점을 고려해 모노폴리의 핵심요소인 “독점”을 과감히 빼버리고, 보드게임에 익숙치 않은 저연령층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게임을 단순화시키는 등의 개조를 거쳐, 어린이들을 매혹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모노폴리 자체가 세계적 성공을 거둔 게임 시스템이란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보드게임이라는 말 조차 낯설던 그 시기에 어린이들의 마음을 단숨에 점령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로컬라이징에 성공했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21세기가 된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게임을 낯설어하지 않고 한국의 경제체제에서도 독과점은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루마불은 사람들의 추억과 함께 소장용으로 사랑받고 있는 게임입니다. 부루마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모노폴리도 누적 판매량 10억개를 자랑하며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타사의 모작들 외에도 공식적으로 파생된 모노폴리 딜, 엠파이어, 전자카드, 밀리어네어 등도 함께 세계인의 가정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습니다. 얼마전에는 모노폴리 80주년 기념판이 나오기도 했죠.

롯데마트에서 오는 17일까지 열리는 보드게임 박람회에도 부루마불과 모노폴리 80주년이 함께 등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슷하지만 다른 게임, 한국 챔피언 부루마불과 모노폴리를 비교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네 이거 왠지 VS 시리즈가 될 것 같네요(...) 

부루마불 vs 모노폴리

비교할 샘플은 부루마불 구판과 모노폴리 80주년입니다. 부루마불은 신판이 나오면서 구성물의 디자인이 현대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디자인 바뀌었다고 새로 사기는 좀ㅜㅜ. 하지만 디자인 외에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니, 구판과 비교하는 것도 영 무리는 아닐 것 같네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부루마불은 모노폴리에서 몇가지 장치를 뺀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게임의 구성물을 비교해보면 무엇이 빠지고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 쉽습니다. 아래는 두 게임의 공통적인 구성입니다.

공통 구성물이라고는 했지만, 저 구성물들이 게임을 이루는 전부이기도 합니다. 두 게임 모두 주사위를 굴려 말칸을 전진시키고,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그 건물에 들르는 사람에게 임대료를 받아서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상대를 캐삭빵 파산시키는 게임이지요. 그렇다면 부루마불로 모노폴리를, 모노폴리로 부루마불을 할 수 있을까요? 답은 당연히 NO입니다. 구성물의 비율과 가짓수가 다르기 때문인데요. 결정적인 차이는 특수카드, 건물, 그리고 게임판 자체입니다.

모노폴리의 특수카드는 "사회사업기금"과 "찬스"카드 2종입니다만, 부루마불의 특수카드는 "황금열쇠" 1종입니다. 모노폴리에서 찬스카드는 뽑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사회사업기금은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카드지요. 부루마불에서는 이 두 카드를 합쳐서 황금열쇠로 단순화시켰습니다. 황금열쇠 카드는 이름만 들어서는 찬스카드이지만, 실제로는 복불복 카드인 셈이지요. 판도라의 상자 열쇠 이쯤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부루마불은 운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는 게임입니다. 물론 주사위를 사용하는 게임이 모두 어느 정도 그렇지만, 부루마불에서는 실력으로 불운을 커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모노폴리에서 지을 수 있는 건물은 호텔과 빌딩입니다. 호텔은 구입비용과 통행료가 비싸고, 빌딩은 호텔에 비해서 조금 싸죠. 부루마불의 경우는 여기에 별장을 추가해 3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자 그러니, 모노폴리를 부루마불 룰로 하려고 하면 아차, 별장이 없어서 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 부루마불에서도 이 별장이란 게 사실 좀 묘한 존재입니다. 구입비용이 굉장히 싼 대신 통행료는 그보다 더 싸기 때문에(!) 별장을 짓고 한번 상대가 그 땅에 걸린다고 해도 오히려 손해입니다. 실제 게임을 할 때 별장을 짓는 경우는, 파산 직전의 사람이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별장이라도 지어보자고 발악을 하는 경우입니다만... 부루마불은 엔간해서는 초반에 정해진 승부를 나중에 뒤집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처지가 되었을 땐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 솔직한 일이겠죠. 그래서 애초에 아예 별장을 빼고 게임하는 사람들도 흔히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돈을 원래 룰보다 좀 더 넉넉히 나누고, 별장을 호텔로 사용하는 변형룰도 존재하죠. 이것은 호텔이다 이것은 호텔이다 레드썬 사실 부루마불의 경우, 공식룰로 게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게임의 밸런스가 상당히 좋지 않기 때문에 초반 플레이에서 뒤처진 사람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재미가 없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게임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변형룰을 적용하거나, 혹은 아예 게임 밸런스를 더 화끈하게 무너뜨려 승자독주 방식의 게임을 즐기는 경우들도 있지요.

밸런스 밸런스 하는데, 부루마불의 게임 밸런스가 좋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루마불을 즐겨 해보신 분들은 다들 눈치채셨겠죠? 바로 이 녀석입니다.

88올림픽의 개최지라는 부가설명이 붙어있는 서울입니다. 88올림픽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쌉니다.(물론 21세기가 지난 지금에는 현실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만...) 이 녀석, 뉴욕이 35만원 밖에 안되는데도 자그마치 100만원이나 해요. 게다가 여기는 건물을 짓지 않고 그냥 통행료 200만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울 걸리면 땅 하나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룰을 변형하지 않으면 사실상 서울 잡기 게임이 되어버리죠.

지금 시각에서 보면 정말 험악한 밸런스지만, 게임에 익숙하지 않던 그 당시 한국의 어린이들에게는 이 쪽이 오히려 즐기기에 나았을 것입니다. 서울을 잡으면 이길 수 있다는 간단한 목표와(물론 주사위 운이 나쁘면 서울을 잡고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아 낭패를 보겠죠), 주사위 운의 절대적 영향, 복불복 황금카드 등은 게임을 익히기 정말 쉽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당시의 저연령 어린이들이 쉽게 게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 가장 큰 조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모노폴리의 핵심요소인 "독점"을 빼버린 것인데요, 아래의 게임판 비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각 도시칸 마다 윗부분에 색칠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모노폴리의 경우 이 색깔은 독점 룰을 위해서 필요한 색깔 구분입니다만 부루마불에서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지요. 모노폴리의 흔적에 불과한,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장치입니다.

자, 부루마불을 해봅시다. 첫 턴에서 주사위를 굴린 후 당신은 코펜하겐에 멈춰서 땅을 샀습니다. 호텔을 살 돈이 충분하니까, 호텔을 지어봅니다. 이제 누군가 코펜하겐을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임대료를 받으면 되겠죠?

이번에는 모노폴리를 해봅시다. 부루마불이나 모노폴리나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서 임대료를 얻는 게임이니까 같은 요령이면 되겠죠? 주사위를 굴려보니 군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자 호텔을 살 돈이 충분하니까 호텔을 사서 군산에 지으면...

헉 깜짝이야. 왜 안되는 걸까요?

모노폴리에서는 땅 하나를 샀다고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색깔의 땅을 모두 소유하고 있어야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독점'을 먼저 해야 건물을 사고 돈을 벌 수 있는 것이지요. 모노폴리와 부루마불의 대부분의 차이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모노폴리에서는 독점을 하지 않으면 거의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한 색깔을 독점하기 시작하면 상당한 힘을 얻어냅니다. 자 그러니 모노폴리를 할 때는 주사위를 잘 굴려서 같은 색의 땅을 순차적으로 따 내야겠지요? 주사위에 쇠구슬을 넣어둔다던가 주사위를 바꿔치기 한다던가 주사위를 세개 준비해뒀다가 한 손에...

동작그만 

그러시면 안되고요 ㅜㅜ. 주사위 운에 순전히 의거해서 연달아 닿아있는 땅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렵죠. 그래서 모노폴리에서는 거래가 중요한 요소가 된답니다. 내 땅만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땅을 확보하고, 그 땅을 묶어둬서 상대가 독점을 못하게 하거나 혹은 내가 독점하기 위해 필요한 땅과 트레이드를 시도할 수 있지요. 또, 주사위를 굴려 도착한 땅이 내게 필요 없어서 사지 않을 경우,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리가 주어져서 경매가 시작됩니다. 상대가 독점할 경우 내게 불리해지는 땅이라면 필요가 없어도 사게 되겠죠? 혹은 이후의 트레이드를 위해서 사기도 하고요. 이런 장치들 때문에 모노폴리는 부루마불과 달리 내 땅만 보면서 주사위 운을 노리는 게임이라기 보다는, 게임의 과정에서 상대와 전략을 겨루는 요소가 더 큰 게임입니다. 부루마불이 달리기라면, 모노폴리는 격투기인 셈이죠.

보시다시피, 모노폴리에서 몇가지 장치를 뺀 정도만으로 부루마불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되었습니다. 지금 해보면 다소 시시한 감이 있지만, 그 당시에 모노폴리 그대로 출판이 되었다면 그만큼의 인기를 끌 수 없었겠지요. 사실 부루마불은 게임성 보다는 역사성(한국 한정이긴 하지만)에서 의미를 가지는 게임입니다. 보드게임 불모지에서 최초의 상업적 히트를 쳤고,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는 게임이니까요.

부루마불이 나온지도 30년이 지났습니다. 30년 전에 부루마불을 쉽게 즐겼던, 이제 어른이 된 당신이라면,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한 모노폴리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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