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980년대 디자인 - hangug 1980nyeondae dijain

최범(이하 최): ‘한국 디자인의 성격’이라고 하면 굉장히 막연하게 느껴질 거예요. 한국 디자인에 관해 말하려면 먼저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 디자인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한국 디자인의 성격이라고 하니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1980년대의 한국 사회 성격 논쟁입니다. 사회 구성체 논쟁이라고도 하는데, 저 유명한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과 ‘식민지 반봉건 자본주의론’이었지요. 이러한 이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낯설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1980년대에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논쟁이 매우 활발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마치 1980년대의 한국 사회 성격 논쟁처럼 한국 디자인의 성격에 대해서 한번 논의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국 디자인을 근대화의 총아로 본다든지 아니면 한국 자본주의의 시각적 결과물로 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정병규(이하 정): ‘한국 사회의 성격론이 있다면, 그것이 나온 배경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시지요? 한국 사회의 성격론을 논하는 배경이란 것은 1980년대의 열기, 민주화, 한국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졌을 거예요. 그런데 그 전제를 한국 디자인에 관한 것으로 시점을 바꾼다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 시작점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최 선생님은 근대를 시작점으로 해야 하지 않냐고 했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한국 학계의 담론은 모두 ‘근대’라는 화두로 총력 경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디자인 담론이란 분야는 아직 이뤄진 것이 별로 없는데, 이런 현재 상황을 놓고 보면 다른 인문학이 토론하고 있는 영역에 뛰어드는 일은 약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한국 디자인의 성격론에 대한 논의는 현재 한국의 다른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고려, 나아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김종균(이하 김): 디자인의 성격과 정신에 관해 논해보라고 하면, 독일 같은 경우는 디자인의 사회성을 중요시하고, 미국은 상업성이 디자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디자인의 경우는 시기별로 각기 성격을 다르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디자인계가 자생적이고 주체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고 외부의 힘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며 성장해왔기 때문이지요. 각 시기의 디자인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해방 이후 시기에는 디자인이 교육의 차원에 머물렀습니다. 산업으로서의 디자인이 생기기도 전에 디자인 교육이 먼저 정착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서구의 디자인 발전과는 반대의 순서를 밟은 것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 근대화의 도구로서 모더니즘을 실현시키는 축’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프로파간다로서의 디자인’이라는 두 축으로 나누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국제화를 내세우기 위한 표상으로서의 디자인’, 1990년대에는 ‘수입시장 개방에 맞서기 위한 도구로서의 디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나 공통적인 것은 한국 디자인의 형태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외부의 힘에 끌려 다녔다는 점입니다.

김신(이하 디):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한국 디자인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최: 그렇지요. 성격이란 여러 가지로 규정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김종균 선생이 말한 성격이라는 것은 캐릭터나 아이덴티티에 가까운 것인데, 저는 좀 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성격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김 선생이 말한 것도 포함되겠지만, 제가 말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의 성격’이에요. 제가 제기하는 것은 ‘지금껏 한국 디자인에서 묻지 않았던 물음을 스스로 던져보자’라는 것이거든요. 저는 한국 디자인에서 묻지 않은 중요한 물음이 세 가지 있다고 봅니다. 한국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성격의 문제), 한국 디자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기점의 문제), 한국 디자인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역사와 패러다임의 문제). 이른바 한국 디자인에 대한 거시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죠.

정병규
"물질에 치우쳐 논하지 못했던 정신과 제도의 문제를 논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한글의 가로쓰기가 디자인에 미친 영향 같은 것 말이지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파리 에콜 에스티엔에서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한 후, 1975년 민음사 편집부장이 되었다. 1993년까지 민음사 북디자인을 했고 현재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회장이다. <정병규의 북디자인>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정: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 디자인의 성격에 관한 것은 거시적인 담론으로 접근하는 것인데 과연 디자인이 거시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인지를 세계 디자인의 문제와 한국 디자인의 문제로 나눠서 얘기해야 할 것 같고요. 뉴라이트의 역사 논쟁이 왜 한국 디자인의 역사 논쟁으로 이어지냐 하면, 이 두 가지가 서양의 근대 의식이라는 요소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뉴라이트의 접근법은 과정의 문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만, 한국의 근대가 얼마만큼의 성취를 이뤘나 하는 민감한 문제마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디자인에 대해서도 지금의 성과에 만족하는 쪽과 한국 디자인이 품고 있는 문제를 우려하는 쪽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마음이 기우네요. 그래서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에 디자인의 문제를 대입시켜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해야겠고, 두 번째로 그 사이의 디자인 과정이 오늘의 현실을 기준으로 봤을 때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생각해봐야겠고, 세 번째로 거기에 대한 디자인을 논의하는 입장을 세우는 것, 이렇게 세 가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우리는 먼저 논의가 되는 ‘디자인’이라는 대상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는 요즘 ‘디자인’을 보통 명사로 생각하는 말이 유령처럼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960~1970년대부터 시작된 허상이고 아직도 이런 생각이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거든요. 담론으로서의 디자인일 수도 있고 현대의 결과물로서의 디자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말하자면 디자인 방법론의 문제지요. 하도 답답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동안 한국 담론계에서 이뤄졌던 수많은 논의들의 주어를 디자인으로 바꾼다면 참 많은 암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면 질문 방식의 문제이고, 하나 덧붙이자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의 방법론은 긍정적인 태도로 깊게 수직으로 들어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인 의미로 대상을 가시화하고 문제화시킬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20세기 인문학에서 집중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접근 방법은 ‘~이 아니다’ 라고 대상을 드러내는 부정적인 방법이에요. 그런데 한국 디자인은 ‘~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다른 학문들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담론 자체가 너무 적기 때문에 논의의 핵심인 한국 디자인이 무엇인가라는 의문마저 사라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질문하고 있지 않나’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최: 최근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 교과서에 관한 것이 논쟁이 되고 있는데, 세부적으로는 뉴라이트 교과서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문명화 과정으로 본다는 관점에는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 디자인의 성격에 대해서 저는 크게 두 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19세기 말부터 지난 100여 년간 진행된 문명화 과정의 일부로 한국 디자인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화라고는 하나 그 성격이 대단히 물질적인 것에 치우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해서 말인데 이런 배경이 있지요. 일본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어떤 부분에선 박정희 이후 일본을 앞서고 있단 말이에요. 일본도 놀랐고, 한국을 보는 눈이 바뀌었으며 그중 하나가 뉴라이트 이론입니다.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산업화시킨 것이라 보게 된 이론이 등장했고 그 담론을 받아들인 것이 한국의 근대화론입니다.

최: 근대화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현실을 긍정하는 논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문명화 과정으로 보더라도 얼마든지 현실 비판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문명화 과정에서 성취된 부분 못지않게 결여된 부분이거든요. 문명화에서 결여된 것, 일탈된 것, 성취되지 못한 것에 주목하자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명화론도 두 갈래로 나누어질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는 한국 디자인을 그렇게 보는 거고요. 그렇게 볼 때 내용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솔직히 거시적인 관점과 구체적인 사실을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네요. 혹시 김 선생이 이 둘 사이를 잇는 데 어떤 징검다리가 필요한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나요?

김: 세계 보편성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문명화란 반쪽짜리 근대화일 뿐, 진정한 근대화가 아닙니다. 근대화는 항상 주체적인 개인이 등장해야 비로소 진정으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식민 상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후 독재정권하에서도 주체적 개인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해 근대화 과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역사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여러 가지 논의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 저는 근대화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범
"한국 디자인은 근대 문명화 과정의 일부로 이해해야 하고, 그 성격 또한 대단히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계약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희망제작소 부설 간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이 있다.

최: 그러니까 ‘식민지’ 근대화라는 것이지요.

김: 미국이 과거 전후 일본의 근대화 척도를 재는 단계에서 문명화에 관한 것만 논하고 사회 수준에 관한 것은 제외했다고 합니다. 일본도 우리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얼마만큼 살 만해졌으니까 근대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최: 그러니까 근대화 과정에서 성취와 결여 두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뉴라이트는 성취만 보고 결여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저는 근대화 과정에서의 결여에 주목하자는 입장이지요.

김: 문명화되었다고 해도 그 문명화의 주체가 누구이며 또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를 따져야 하는데, 일본이 한국을 산업화시켰다고 해도 대부분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한 시설물을 지었을 뿐 한국 민중을 위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근대 건축이란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일은 노가다뿐이고 일본이 우리에게 전파해 준 건축 기술이란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일본이 세운 건물마저 전쟁을 거치며 사라졌으니, 우리에겐 디자인 기술도 없었고 근대화도 없었으며 단지 ‘맛’만 보고 말았던 수준이겠지요.

최: 이야기하다 보니 결국 근대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정: 한국 디자인을 연구한 우리 선배들은 앞만 보고 담론을 폈습니다. 그것을 통렬히 비판해야만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근대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고 한국 디자인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보들레르가 1846년에 살롱에 대한 글을 썼지요. 그때 우리가 사진이니 미술이니 얘기하는 텍스트를 들고 나오는데 거기서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없다’라는 얘기가 나와요. 말하자면 ‘찰나’가 등장하는 것인데, 시간관이 변하고, 개인의 개성, 미적 성취를 존중해주는 인상파적인 관점이 드러납니다. 수정궁이 지어진 게 1851년인데 보들레르 5년 후이니 같은 시기이므로 분명 그 둘을 아우르는 새로운 가치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막상 물질 위주로 서술하는 서양 디자인 교과서에 등장하는 쇠, 유리, 철골 같은 것은 우리의 근대와는 상관이 없는 소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가치라는 의미에서 서양을 포함해서 디자인을 보자는 것인데 그 혼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근대를 서양식으로 얘기해서 가치의 개념으로 볼 것이냐 양식의 개념으로 볼 것이냐에 부딪히는데 가치의 개념으로 논할 때는 우리도 할 말이 있는데, 양식의 개념으로 갈 때에는 할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양식이라고 하면 선대에 있던 어떤 것에 관한 문제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조선 시대에 디자인이 있었냐 없었냐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가치’와 ‘근대성’을 결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디: 한국 디자인을 가치로 본다는 것은 무엇이지요?

정: 가치라는 것은 양식보다는 좀 더 정신에 가까운 것을 말합니다.

김: 하지만 디자인사를 연구하다 보니 양식과 정신은 별개가 아닌 거 같습니다.

정: 양식과 가치의 문제가 표리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은 오늘날 서양을 놓고 보았을 때의 이야기지요. 한국과 근대라는 것을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고희동 선생이 1909년에 일본에 갔다가 다시 동양화를 하는 것은 양식의 문제예요. 물론 아주 추상화시키면 양식과 가치의 문제는 그게 그거지만, 한국에서는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문제로 따질 수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서양의 양식은 자생적이고 문화적인 행위로서의 경험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자체적인 경험 없이 선험적(先驗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 경우에는 가치와 양식을 분리하지 않으면 상당한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디: 우리는 껍데기 양식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치 없이 양식만 발전했다는 거네요.

김: 디자인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도 근대화의 기준 문제가 모두 걸립니다. 근대라는 기준은 결국 르네상스 이후로 서양 사람들이 스스로의 성공을 그리기 위해 만든 것이니, 이 기준을 폐기하면 문제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 근대성을 배제하고 우리 역사를 논하자는 건가요?

김: 근대성을 억지로 끌어들이다 보니 영·정조 시대나, 구한말, 일제강점기 등을 근대로 분류하려는 혼란이 생기고, 진경산수나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 작품을 근대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정: 디자인 담론의 근본적인 그라운드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나는 한국 디자인이 어떤 측면에서 이제는 성숙해지고 성인식을 치러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과거를 얘기할 때 그 당시에 정말 그랬느냐를 따지는 것은 이제는 낡은 개념이고, 오늘의 결과가 그 당시의 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서양의 기준은 오늘의 현실과 미래의 좌표를 기준으로 해 근대를 만들어낸 것이고 그 기준을 고정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성 논의는 갈팡질팡해졌습니다. 기준이란 오늘을 비춰주고 미래를 내다볼 기준을 우리가 새로 만드는 거에요. 어떤 사실을 볼 때 기반과 형상을 나누어놓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자꾸 같이 보니 문제가 되는 거지요. 한국 문화를 볼 때 기반과 형상을 나누어놓고 보자. 그 기반이라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다른 영역을 비춰봄으로써 그 기반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한국 디자인사는 그 기본부터 다시 해야 하고 따라서 우리는 근대 문제를 다시 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가 문화 생성의 바탕이니까 한국에서는 이 근대라는 배경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최: 맞습니다. 한국의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핵심인데, 이제 우리도 단순하게 서구의 기준을 적용하는 수준은 벗어난 것 같고, 우리의 근대를 우리 방식으로 어떻게 설명해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지요. 저는 ‘한국의 근대성은 물질적 근대성이다, 나아가 아예 한국의 근대는 물질이다’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한국 근대의 성취는 물질이고 결여는 정신과 가치라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번 대선과 총선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근대적 ‘의식’을 가진 주체는 없고 근대적 ‘욕망’을 가진 주체만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물질적 차원의 문명화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19세기 말 우리의 근대화론에서부터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그것인데, 이것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입니다. 서양의 근대 문명이란 본질적으로 서양 근대 정신과 서양 근대 기술의 결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가지를 분리시켜버렸어요. 동도서기론의 정신은 우리 것을 유지하되 물질만 받아들이려 한 선별적 근대화였고, 그 결과 우리가 물질적으로만 근대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정: 글쎄요, 나는 한국 근대를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왕조가 파탄 나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제도’이지요. 디자인이라는 것도 잘 살펴보면 제도 실현의 측면이 강해요. 그중에서도 책이라는 것이 한국 사회가 가장 서양적인 것과 디자인적으로 만난 제도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양복이나 자동차보다도 먼저 들어온 것이 책이라는 서양의 제도예요. 그런데 지금 이 논의는 한국 디자인계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어요. 뭔가 자꾸 거래를 할 수 있는 상품, 이런 것만 자꾸 나오고 있고, 디자인사 박물관이란 곳에 가봐도 ‘물건’만 잔뜩 모아놨더군요. 물론 물건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닌데,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나서 디자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서양식의 책 만들기’라는 제도였습니다. 이 방식이 40년의 활자 만들기를 규정하게 되었고 많은 파급 효과가 있었지요. 서양식 책 만들기 제도가 들어온 것은 어떤 면에서 제도를 통해서 지배 계급의 파탄을 불러일으키는 통로일 수 있다는 겁니다. 구텐베르크가 종교 개혁과 만나 왕권을 무너뜨린 것처럼

최: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그런 측면이 ‘주도적이지 못했던’ 것이 한계가 아니었나 싶네요. 동도서기와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의 정신에 서양의 재주를 갖춘다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같은 이념이지만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요. 예컨대 일본에는 이른바 화풍(和風) 양식이라고 해서 일본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현대화시킨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화풍 양식은 일본 현대 디자인의 한 장르로 분명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동시대 스타일로서의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한국적 디자인’이라고 해서 전통 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냥 디자이너의 장난이지 한국 현대 디자인의 한 장르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요. 한국과 일본이 논리적으로 동일해 보이는데도 그 결과가 크게 다른 점에 대해서는 정말 연구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동도서기론의 결정적 맹점은 서구의를 물질적 일면만 보고 서구의 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뉴라이트가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 또한 물질로서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의미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에요.

정: 성공의 문제는 역사를 보는 구간 설정의 문제인데 일본이 과거에는 화혼양재의 양식으로 했다가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세계의 선두 국가가 되고 나니 근래에 와서는 ‘아니야, 서양의 근대라는 것도 있었지만 일본의 근대라는 것도 있었다’는 식으로 근대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버렸어요. 일본 자신이 성공하면서 일본은 스스로의 독자적 근대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거지요. 일본 디자인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50년 후에 디자인의 가치가 세계화되고 나면 우리도 우리 디자인을 보는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최: 맞습니다. 우리 역사를 100년 후에 보면 또 달라질지 모르지요. 역사의 평가는 언제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어요.

디: 구조에 대해 많이 연구하신 김 선생님이 한 말씀 해주시면 어떨까요? 산업화는 되었는데 정신은 근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디자인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종균
" 한국이 본격적으로 근대 디자인을 수용하고 자신의 양식을 고민한 것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미군정과 박정희 시대부터라고 봅니다."

서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디자인 역사를 연구했고, 홍익대, 숙명여대, 건국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월간 <플러스>, 월간 <디자인> 등에 기고문을 발표했고, ‘21세기 디자인포럼’ ‘디자인문화아카데미’ 등 여러 디자인·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김: 글쎄요. 저는 우선 화혼양재와 동도서기가 같은 거라고 인정 못하겠습니다. 두 가지는 결과의 차이가 아니고 본질이 다릅니다. 일본은 탈아입구를 주장하며, 열도 개조론을 통해 기존의 일본 정신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의 근대화라는 관점보다는, 미군정 이후 근대화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디자인계에 중점을 둔다면 더욱 그렇고요. 몇몇 선생님들이 일본에서 유학하긴 했지만 귀국 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석 선생님도 서울대 생기고 나서야 국내에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근대적 디자인 교육을 받았어도 한국에 돌아와서 무언가를 해야 한국 디자인의 시작이 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산업화를 막기 위해 도안 교육도 시키지 않았는데 미군정이 도안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치했지요. 일본의 건축은 신고전주의를 서양의 근대화 산물이라고 착각하면서 오히려 근대 건축의 출현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니 한국은 미군에 의해서야 비로소 양식적인 면에서 근대적인 것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아방가르드 미술도 실험되었지만 전시 체제로 접어들면서 순수 미술을 금지시켰고, 히틀러가 바우하우스를 금지시킨 것처럼 일본의 현대 미술도 한 번 싹이 잘립니다. 한국에는 미군정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멘트로 된 모던 스타일의 건물이 등장하지요. 50년대 말에 생긴 아르데코풍의 대한극장이 그 예입니다. 미군이 전후 복구 사업을 지원하면서 근대 건축이 알게 모르게 들어온 겁니다. 또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물자는 일부 상위 계층에만 스쳐 지나갔던 것인 데 비해 6*25전쟁을 거치면서 국내에 밀려들어온 미국의 구호 물자는 서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물건이 되었습니다. 럭키 치약의 50년대 광고를 보면 미제와 같은 재료와 품질임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공중파 방송이 시작된 이 시기부터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이것도 미국에 의해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혈맹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과 미국에 대한 선망으로 국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미국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주체적인 근대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 해방 이후 미국 물건이 일반인에게까지 받아들여진 것은 ‘수용’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지요.

정: 6*25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도 강하게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6*25 전쟁과 한국 디자인의 문제를 좀 더 강하게 얘기해야 비로소 미군정하에서 디자인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미군정하에 심어진 미국의 제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와중에 전쟁이 터지면서 한국 사회는 우리 스스로와 세계를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동시에 아무 것도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디자인에 대한 각성과 생각이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서양의 근대 디자인은 크게 말해서 세계 대전 전에 싹이 텄다면 한국의 디자인은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서양과 다른 개성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6*25 전쟁 당시 처음으로 조직화된 움직임과 그것에 부수되는 영역이 디자인을 지시하기 시작했단 말이지요. 상품으로서 디자인된 초콜릿, 계급장과 CI, 홍보 팸플릿과 전략 같은 것들이 그런 겁니다.

최: 이경성 선생이 쓴 <한국 근대미술 연구>에도 보면 한국 디자인의 시작을 한국전쟁부터 잡고 있는데, 미국의 무기와 군수물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어요. 지프, 드럼통, 탱크, 그라만 전투기 등 미국의 현대적 무기와 군수용품을 통해 현대적 디자인을 경험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역시 19세기 말부터 한국 디자인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식민지 근대라는 우리의 상황에서는 서구의 근대를 수용한 것이 먼저였으므로, 수용의 문제를 이해 못하면 한국 근대 디자인을 논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디자인 문화를 경험 중심으로 보는데, 첫 단계는 생산 없는 수용 단계로 19세기 말 이후 서구 문명의 수용이 이 시기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1960년대 이후의 생산 단계이지만, 이 단계는 고유 디자인이 아니라 모방에 의한 생산이었지요. 세 번째 단계가 고유 디자인의 생산 단계인데 이 시기가 언제부터인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예를 들면 1970년대 현대자동차 포니의 생산도 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거 같군요.

디: 포니는 그냥 주지아로의 스타일을 사 온 것이고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그런 디자인을 만든건 아니지 않습니까? 샤넬이 20세기 초반 아직도 코르셋이 남아 있을 때 갑자기 모던한 투피스를 만든 것은 일하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겠다는 디자이너의 자각이 있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생산했을 때도 그런 자각을 가지고 생산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 내 편견일 수 있는데, 한국에서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역사적인 접근을 이야기할 때 불만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올 때의 기준을 공업 제품의 생산으로만 보는 관점이에요. 물건을 기준으로 하면 공예와 만나게 되지요. 공예를 논하기 시작하면 조선 시대로 올라가서 디자인 의식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우리가 논하려 하는 것이 현대 디자인이라는 측면을 생각해보면 약점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제도의 문제에서 보자는 것인데, 기호, 정보, 생각 같은 측면에서도 얘기하자는 겁니다. 한국의 근대 제도에 관해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세 가지예요. 하나는 교육 제도, 둘은 병원, 셋은 종교인데 이 셋은 공통적으로 동양이 대단히 미개했고 시각적으로는 더럽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어요. 그런데 깨끗함과 더러움의 문제는 시각과 정보의 문제이고 그렇게 생각할 때 앞의 세 가지에서 빠뜨린 게 간행물 체계라는 제도예요. 이것이 서양 제국주의 방식의 한 표현이라는 거죠.

문명화의 전략, 문화의 가치를 슬쩍 가져온 것이 제국주의이고 그 이후 한국의 식민지성이 드러나는데 이런 사물과 물질은 유통의 문제이고 자본주의와 결합된 거예요. 그런 점에서 가로쓰기, 세로쓰기 문제와 한글 전용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특히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하나는 소비자들의 기호 내지는 선택 가치가 디자인계와 우리 산업계를 선도한 사건이라는 점이에요. 1980년대 중반을 거쳐 1990년대에 오면서 한국의 많은 간행물이 엄청난 돈을 들여 전부 가로짜기로 재편했어요.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지요. 말하자면 디자인이 투표를 해서 현장의 구조를, 생산물의 구조를 변경시켰다는 말이에요. 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전부 바꿔야 했고 그러다 보니 여러 불합리한 일도 일어났지만 매우 중요한 일에 틀림없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디자인계의 섬세하지 못함이 드러나게 된 일입니다. 디자인 교육과 타이포그래피의 문제인데 가로쓰기를 전제로 개발한 서양의 타이포그래피가 한국 타이포그래피 교육, 정보 생산 교육에 자연스럽게 정착해버린 거예요. 세로쓰기할 때는 타이포그래피의 개념이 디자인 현장에 적용되기 굉장히 힘들었는데 지금은 먼저 세상이 변하고 나니 너무나 편하게 적용이 되거든요. 그러니 그 두 가지를 한국 디자인 성격의 한 현상으로 제도적인 측면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산업화의 역군으로서의 성격 이외에 좀 미시적이고 문화적인 의미에서의 우리 디자인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최: 근대라고 하는 것이 제도적 차원도 있고 생산의 차원, 의식의 차원 등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하나씩 뜯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제도는 가시적 제도만이 아니라 습관과 규칙 등 넓은 의미의 규범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한국 디자인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이니 논의를 그쪽으로 좀 더 발전시켜보죠.

김: 한국에서 디자인계가 미술계로부터 분리된 것이 1970년대 중반 중화학공업 육성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때쯤부터인데 그래픽 디자인의 본격적인 등장도 그때이고 산업 디자이너도 본격적으로 분화됐다고 봅니다. 그 이전까지는 디자인하는 사람들의 직업 의식도 따로 없고 그냥 ‘실패한 미술가’ 정도로 생각되지요. 그러니까 그 무렵엔 당대 미술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디자인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술의 특징이 어떠했냐 하면 프로파간다였어요. 일제 강점기에 열린 선전에서 미술가들이 보였던 태도, 출세하기 위한 작업의 태도가 1960년대에 다시 한 번 반복된 것입니다. 국전에 추상미술 부문을 신설하고 추상 미술 작품에 몇 회 정도 대통령상을 주고 나니 미술 작가들이 추상 미술에 줄을 섰었습니다.

박서보 같은 사람의 경우를 보아도 백색 모노크롬을 한국적 추상이라며 가지고 나타났는데 디자인도 마찬가지로 한국적 디자인이라며 나타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마침 1966년 상공 미전, 그리고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관광 산업 육성과 궤를 같이하여 전통문화를 가지고 나와서는 한국적 디자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건축계에서도 한국적 건축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적 추상, 한국적 건축,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것이 범람했는데 이 한국적이라는 말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웠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선전 도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등장한 디자인은 모더니즘의 모방 일색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민족주의의 모더니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위 ‘한국적 디자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 부재를 만회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서의 시책을 눈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적 디자인’을 주장한 사람이 한두 사람도 아니었으며, 이들이 상공 미전을 통해 수상을 계속하고 심사위원이 되고 교수가 되고 올림픽이나 국책 사업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양식이 1990년대까지도 존재하며 또 재생산되었습니다. ‘민족주의’ 양식과 ‘모더니즘’ 양식, 이 두 가지는 모두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정: 1970년대 이후 디자인을 되돌아보면, 서구 지향적인 이상주의가 아직도 디자인 쪽에 있어서 조금 전에 얘기한 국풍식의 디자인에 있어서도 나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우리의 특징으로 얘기할 수 있는 작업이 성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디: 오늘의 논의를 요약하면서 미래 지향적으로 우리 디자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디자인이 아직 성취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씩 해 주십시오.

정: 한글의 가로쓰기 정착 문제 같은 제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는 한국 디자인사를 논의할 수 없다고 봐요. 그리고 나아가 역사 속에서 한국 디자인계가 우리 문화 속에서 변혁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한글 전용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가로쓰기 정착 문제와 함께 한글 전용 문제의 첨병은 사실은 디자이너들이에요. 왜냐하면 한자가 어렵고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스럽게 한글 전용이 된 거거든요. 이런 부분은 국어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도 놓치고 있는 문제였고 이제는 독자적으로 논의가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김: 오늘 토론에서는 역사와 디자인의 연관 관계를 찾아보았던 것 같은데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근대성은 발현되지 않았고 또 근대성이 디자인과 연관되지도 않았다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저는 또 한국의 근대가 일제와 관련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 한국의 근대성을 알려면 미군정 시대와 박정희 시대를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이제 한국 디자인의 역사가 이만큼 되어서 우리 디자인을 되돌아볼 전환기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거든요. 지금까지의 유년기를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시점, 이때에 짚어봐야 할 것이 바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즉 성취와 결여를 모두 봐야 한다는 거지요. 한국 디자인의 제2연령기에서는 우리가 결여된 것을 보충하면서 더 많은 성취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고, 한국 디자인에서 가장 결여된 것은 역시 가치, 이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이라인 : 정영호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0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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