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변신 해석 - kapeuka byeonsin haeseog

프란츠 카프카, 『변신』: "존재를 잃어버린 존재"

혜윰2020. 7. 18. 5:40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세상에 던져집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죠. 하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인간은 자기 삶의 목적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으로부터 벌레 취급을 면키 어려우니 말이죠. 이유 없이 던져진 세상에서 이유를 찾지 못하면 버림받고 마는 이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오늘의 책,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지금의 체코 프라하 지방에서 유대-독일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프라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에 속했다는 점인데요. 이로 인해 그는 언어적으로는 독일인, 혈통적으로는 유대인, 국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속하지만 정작 어느 하나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의 소설 속에서 소외에 대한 고찰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죠. 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소설에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도 간접적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카프카에게 바랐던 법조인으로서의 삶과 카프카 본인이 바랐던 작가로서의 삶이 충돌했기 때문인데요. 불행히도 그는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여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야 말로 자기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던 그는 법률 고문으로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글을 썼고, 따라서 그의 글 속에서는 언제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우회적으로 드러나곤 했던 거죠. 오늘날 카프카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그의 삶의 굴곡이 적잖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맥락에서 인간의 소외와 존재의 고독을 사유하게 된 것이고요, 또한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랐던 성공적인 시민의 삶에 대한 강요 속에서 그는 ‘시민이 아닌 인간은 인간일 수 없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졌던 거죠. 이번 포스팅을 통해서 카프카에게 실존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또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와 그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레고르는 유능한 영업사원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같이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영업 생활에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아무리 일이 힘들더라도 관둘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생계가 오직 그레고르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레고르는 가장이었고, 그의 두 부모와 여동생은 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별안간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있었습니다. 등은 철갑처럼 단단했고, 배는 둥그런 갈색 모양으로 칸칸이 나뉘어 있었으며, 그 밑으로는 형편없이 가는 다리들이 수없이 버둥거리고 있었죠. 그레고르는 너무 놀랐지만 그보다도 걱정이 앞섰습니다. 자신이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당장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침 집으로 누군가 찾아옵니다. 바로 그레고르가 다니는 회사의 매니저였습니다. 그는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그레고르가 나타나지 않자 확인 차 방문했던 겁니다. 잠시 후 매니저는 그레고르의 방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몸을 힘들게 이끌고 방문을 빼꼼히 열며 모습을 드러냅니다. 놀란 매니저는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고 덩달아 놀란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이로써 소설 속의 공간은 그레고르의 방 안과 방 밖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완성하게 되죠.

아무튼 그레고르와 그의 가족들은 그 놀라운 사태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레고르는 직립보행을 버리고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고, 또한 그의 가족들은 그레고르에게 의지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일자리를 찾아야 했죠. 다행히도 머지않아 그들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여동생은 어머니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그레고르가 좁은 방 안에서 편히 기어 다닐 수 있도록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을 치워주자는 거였죠. 물론 어머니는 동의하였고 그 즉시 두 모녀는 방 안 가구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이를 목격한 그레고르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이유는 방 안 가구들을 밖으로 옮기면 물론 기어 다니기엔 편하겠지만 그것은 곧 벌레로서의 자기 자신을 완벽히 인정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며, 의식으로 나마 남아 있던 인간 그레고르가 완벽히 사망하는 순간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레고르는 두 모녀가 잠시 쉬고 있을 때 벽면에 걸려있던 ‘숙녀가 그려진 액자’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습니다. 단지 액자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죠. 그런데 이때 휴식을 마친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찰나 그레고르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만 기절해버리고 맙니다. 이로 인해 화가 난 가족들은 더욱 철저하게 그레고르를 방 안에 가두게 되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가족들은 생활비에 보태고자 빈 방에 하숙생을 들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거실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날이었습니다. 하숙생들은 잠시 관심을 보이는 듯 했지만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죠. 하지만 그 순간 방 안에 갇혀 있던 그레고르는 동생의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고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동생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목격한 하숙생들은 그 징그러운 모습에 화들짝 놀라 환불을 요구하며 집을 떠나죠. 이로써 그레고르 때문에 하숙 사업까지 실패로 끝나자 단단히 화가 난 가족들은 최후의 결단을 하고 맙니다. 그레고르를 방 안에 가두고 죽을 때까지 방치하기로 한 것입니다. 얼마 뒤 그레고르는 마침내 삐쩍 마른 모습으로 죽어 있었고, 가족들은 드디어 안심하며 모처럼 소풍을 나서는 모습으로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사실 카프카의 『변신』을 둘러싼 해석은 그 관점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가령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들은 필요에 의해 맺어진 가족의 비극성을 주제로 감상하기도 하고요, 또 프롤레타리아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들은 노동 능력을 상실한 존재가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잔혹성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작품이 발표된 시대적 상황에 주목하며 당시 유대인을 마치 벌레처럼 여기던 독일 사회에 대한 카프카의 풍자를 감상하기도 하죠. 본 포스팅에서는 이들과는 달리 실존적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려 합니다. 물론 가능한 해석들은 수없이 많으므로 참고하는 정도로만 가볍게 읽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가 짚고 넘어갈 점은 소설의 제목이 『변신』이라는 점입니다. 변신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필요하죠. 즉 변신이라는 단어는 변신을 겪는 그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분들은 당연히 그레고르를 떠올릴 겁니다. 그 이유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작품에서 변신한 건 그레고르 뿐이 아닙니다. 다름아닌 그의 가족도 변신의 주체라 할 수 있죠. 따라서 이들 각각의 변신과 그 의미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레고르가 겪은 변신입니다. 유능한 세일즈맨이었던 그는 하루 아침에 벌레로 변신하고 맙니다. 이는 그레고르 입장에서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열심히 산 죄 밖에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벌레가 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열심히 살기만 했다는 사실 말이죠. 즉 그레고르는 삶의 의미를, 존재의 이유를 고민하지 않고 그저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자기의 실존을 방치했으며, 그 결과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겁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말하는 자기기만이란 쉽게 말해, 실존적 고민을 회피하고 마치 목적이 정해진 도구처럼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사물적 삶을 뜻합니다.

그레고르는 사물적 삶을 살았고 그 결과 정말 말 그대로 사물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희망은 있었습니다. 비록 신체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아직 그에겐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즉 그레고르는 두 갈래 기로에 들어선 것입니다. 벌레가 되느냐, 의식을 수호하느냐, 다시 말해 사물이 되느냐, 실존하느냐 하는 거죠. 여기서 카프카가 말하는 실존이란 존재 양식에 매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그레고르의 존재 방식은 벌레 같은 몸으로 제한되었을 지라도 그레고르는 그 안에서 다시금 삶의 의미를 창조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레고르는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두 모녀가 그레고르의 방 안 가구들을 치우려고 할 때 이에 저항한 사건이 그렇습니다. 가구들을 치우면 그레고르는 편히 기어다닐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곧 벌레라는 존재 양식에 매몰되고 마는 거죠. 그레고르는 이를 깨닫고는 숙녀가 그려진 액자 위에 올라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이는 벌레가 되지 않으려는 그레고르의 실존적 의지와, 나아가 액자 속 여인으로 상징된 ‘사랑’이라는 인간적 가치를 지켜내려는 낭만적 감성을 드러냅니다. 바꿔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인간은 곧 낭만적 감성을 상실한 자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죠. 하숙생들이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무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시민이라는 존재 양식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낭만적 감성을 상실한 자들이고 따라서 여동생의 연주에 감동받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어서 가족의 변신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기 전후로 가장 극명하게 바뀐 가족의 속성은 바로 기식 관계입니다. 그레고르가 세일즈맨으로 일할 때는 가족이 그레고르에게 기생했다면,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후에는 반대로 그레고르가 가족에게 기생하게 되죠. 바꿔 말하면 가족 구성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등 사회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레고르가 방 안에 갇힘으로써 가족이 방을 나서게 되는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던거죠. 여기에 조금 더 상징적인 의미를 더한다면 실존에 대한 고민이 방 안 깊숙이 처박혀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가령 오늘날 회사에서 열심히 직장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을 고찰하는 데 정신을 빼앗긴다면 회사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물론 회사에서 자아 실현을 누리는 몇몇 축복받은 사람들도 간혹 발견되긴 하지만 그들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 갖고 싶은 직업, 꿈꿔 왔던 삶을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다만 이 세상과 타협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나서는 거죠. 다시 말해 실존에 대한 고민을 마음 속 깊은 방 한 구석에 가둬 둘 때서야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그레고르가 방 안에 갇힘으로써 비로소 집을 나선 가족들처럼 말이죠.

카프카의 『변신』은 다소 비극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야 안도하는 가족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됨으로써 독자라면 누구든 가족의 잔혹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죠. 하지만 이러한 가족의 모습은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방 안에 갇혀 천천히 죽어갔죠. 이때 그레고르의 실존적인 고민, 이를테면 벌레로 변한 몸뚱이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그레고르의 노력은 방 밖에서는 하등 쓸모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먹고 살 궁리 뿐이었으며 그레고르의 실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죠. 이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회사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공부가 밀렸다는 핑계로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사회적 기능에 매몰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거죠. 물론 여기에는 도무지 사색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구조의 탓도 있을 테지만 어쨌거나 실존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따라서 저마다 스스로 지켜내야만 하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아무쪼록 니체의 말처럼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허무주의를 극복하여, 방 밖에서 우리를 잠식하려 드는 사회적 자아에 대항하는 실존적 존재가 되길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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