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일본 경제 - 1950nyeondae ilbon gyeong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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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등장한 특수는 1950년대를 통하여 일본경제를 규정하는 요인의 하나였다. 특수는 한국전쟁기간 중 연 8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획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본경제의 성장을 촉진했다.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한국전쟁의 휴전 후에도 한국전쟁특수를 대신할 수 있는 신특수의 확보가 모색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대외원조의 역외조달을 활용함으로써, 일본은 1950년대 후반에도 연 4, 5억 달러에 달하는 특수 수입이 가능해졌다. 특수는 외화획득이란 면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의 군수산업 부활의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동남아시아 경제진출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특수로 인한 일본의 경제적 이득은 일본이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냉전구조 속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과정에서 얻어졌다. 한국전쟁 시 일본은 말 그대로 전쟁의 후방공급기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거액의 특수 수입을 획득했다. 한국전쟁 종료 후의 신특수확보를 위해 일본 정부와 재계는 미국의 군수조달을 위한 일본 공업생산력의 동원이라는 미국 정부의 구상에 적극 호응하였으며, 강화조약 발효 후에 미국의 대외원조 전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특수라는 경제적 이득을 확보했다. 미국은 특수라는 경제적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냉전구조하 후방기지로서의 일본의 경제력을 육성했다. 특수는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지점에 있었다. 반면 특수는 한국과 일본 및 미국의 이해관계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했다. 한국전쟁특수 자체가 한국의 천문학적인 물적·인적 손실을 대가로 하여 발생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부흥특수(미국의 대한원조물자의 일본조달)는 한국 측에서 볼 때 또 다른 형태의 일본경제로의 종속을 의미했다

The special procurement that emerged in the wake of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was one of the factors defining the Japanese economy through the 1950s. The special procurement facilitated the growth of the Japanese economy by enabling the acquisition of large amounts of foreign currency worth $800 million a year during the Korean War. To ensure continued economic growth, the Japanese government sought to secure a new special procurement to replace the Korean War special procurement after the Korean War armistice. As a result, by utilizing the offshore procurement of U.S. foreign aid, Japan was able to acquire special procurement amounting to $400 million or $500 million a year in the late 1950s. In addition to acquiring foreign currency, the special procurement also served as an opportunity to revive Japan’s military industry and spearhead Japan’s economic advancement in Southeast Asia. Japan’s economic gains from the special procurement were derived from Japan’s deep involvement in the Cold War structure in East Asia, l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Korean War, Japan earned a large amount of special income by faithfully implementing the role of the war’s rear supply base. In order to secure new special procurement after the end of the Korean War,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business community responded actively to the U.S. government’s initiative to mobilize Japan’s industrial productivity for the procurement of U.S. military forces, and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U.S. foreign aid strategy after the enforcement of the Treaty of San Francisco. Japan has secured special economic benefits by actively committing to the U.S. strategy for East Asia. The United States fostered Japan’s economic power as a rear base under the Cold War structure by providing the economic benefits of special procurement. The special procurement was at a point where the interests of Japan and the United States coincided. On the other hand, the special procurement was located at a point where the interests of Korea and Japan diverged. Not only was the Korean-War-special-procurement itself attributable to Korea’s astronomical material and human losses of the Korean War, but also Japan’s special procurement for Korean reconstruction meant Korean economy’s another subordination to the Japanese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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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d War, special procurement, the economic cooperation between Japan and U.S., MSA,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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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경제성장(일본어: 高度経済成長 (こうどけいざいせいちょう) 고도케이자이세이초[*])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빠른 속도로 경제 규모가 계속하여 성장한 것을 말한다. 일본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시기는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이르는 18년 간이다.

패전 이후의 부활[편집]

제2차 세계 대전에 있어서 패배에 의해 일본 국토가 황폐가 되고 혼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1955년경에는 일본 경제는 고도 성장이 시작되었다. 에너지는 석탄에서 석유로 변하고 태평양 연안에는 콤비나트가 줄지어 섰다. 재벌계 기업이 다시 일어선 것도 이 때쯤이라고 말해진다. 이 경제성장의 요인은 노동력이 싼 농업 노동력의 활용, 높은 저축율, 민간투자 수출에 있어서 유리한 엔하락 시세 (고정제), 안정된 투자 자금, 케인즈 경제 정책. 소득 배증 계획, 정부의 설비투자 촉진책에 의한 공업용지등의 조성, 전시중의 군수생산을 위해서 발달한 기술력을 들 수 있다.

GNP 2위[편집]

1960년대에는 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 개최, 베트남 전쟁, 1970년에 개최된 오사카 엑스포 등에 의한 특수 수요가 있어 1968년에는 국민 총생산(GNP)이 자본주의 국가중에서 2위에 달했다. 이 경제성장은 세계적으로 봐도 드문 예이며 종전 직후의 부흥으로부터 계속되는 일련의 경제 성장은 「동양의 기적」이라고 말해졌다. 이 경이적인 경제성장에의 동경이나 경의로 일본을 본을받는 나라까지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말레이시아의 룩 이스트 정책(ms:Dasar Pandang ke Timur 또는 ja:ルックイースト政策을 각각 참조)이 있다. 현재에서는 「전후 쇼와」의 대명사로서 1960년대의 영상자료가 사용되는 것이 많다.

이 시대에는 텔레비전·세탁기·냉장고의 3종류의 가전제품은 삼종신기라고 불려 급속히 가정에 보급되어 갔다. 가전제품의 보급은 생활 시간의 배분에도 큰 영향을 주고 여성의 사회진출을 조금씩 촉진시키게 되었다. 이 당시의 풍조로서는 「큰 것은 좋은 일이다」가 유행어가 되고 「거인(요미우리 자이언츠)·다이호(다이호 고키)·달걀부침(다마고야키)」이 상징으로 여겨졌다. 「동양의 기적」라고 말하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는 일본인 독특의 「근면」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한다 (=화의 문화)」등이 요인으로서 들 수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증권불황[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증권불황입니다.

순조로운 경제성장은 동시에 증권시장의 성장도 재촉하고 잔고는 1961년에는 4년 전의 약 10배가 되는 1조엔을 돌파했다. 이 기세는 당시 「은행이야 안녕 증권이야 어서와」라고 하는 문구가 유행할 만큼이었다. 그러나 1964년경부터 경제는 급속히 축소해 사태는 바뀌게 되었다. 1964년에 선 웨이브와 같은 회사가 도산했다. 증권 회사들이 일제히 적자에 빠졌다. 이러한 사태를 받고 불황확대를 막기 위해서 정부는 1965년 5월에 야마이치 증권에의 특별융자를, 7월에는 전후 처음으로 적자 국채의 발행을 정했다. 이 결과 쇼와공황의 재래를 미연에 방지해서 고도 경제 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폐해[편집]

이러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사회 공공투자나 복지지출은 저수준에 머무르고 또 환경 파괴가 일어나서 「미나마타병」이나 「이타이이타이병」「욧카이치 천식(ja:四日市ぜんそく)」「니가타병」(ja:新潟病)」이라고 한 공해병의 발생하고, 쓰레기 문제 등의 공해 문제가 고도 경제성장기 후반이 되면서 심각해졌다.

이것은 국민이 환경보다도 경제성장을 우선한 결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도시에의 인구 집중에 의한 과밀문제의 발생과 지방에서의 인구 감소에 의한 도시-농촌 인구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후, 공해대책기본법의 제정이나 『일본 열도개조론』의 제창을 하기도 한다.

안정 성장[편집]

1971년 닉슨 쇼크에 의한 실질적인 엔의 절상은 국제 수지가 과도한 흑자를 발생하여 경제의 안정에 기여했다. 1973년의 4차 중동 전쟁을 계기로 원유가격이 상승하고 오일쇼크에 빠진 것으로, 전후 처음으로 실질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해서 경제 성장 시대는 끝나고, 그 후는 안정성장기(ja:安定成長期)로 넘어갔다.

제2차 베이비 붐도 끝나고 1980년 이후의 일본은 출생률 감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실질경제성장은 계속되고 있고 아예 경제 성장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한편 드물게 거품 경제 붕괴까지를 전후의 좋은 시대로서 「고도 경제 성장」이라고 묶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다. 덧붙여 이 일련의 흐름을 영어로는 Japanese miracle라고 부른다.

종결[편집]

공식적인 일본 경제 호황의 끝은 1980년대 말기에서 시작되어 1990년대 후반까지 절정에 달하였던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시기로 꼽힌다. 이후 일본은 마이너스 성장세나 0% 혹은 1~2% 대의 아주 저조한 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같이 보기[편집]

  • 이자나기 경기
  • 경제 기적 (en:Economic miracle) (여러 나라의 경제 성장)
  • 한강의 기적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 동아시아의 기적 (동아시아의 경제 성장)
  • 라인강의 기적
  • 룩 이스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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