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 adamgwa hawaneun seololeul wihae mandeul-eojyeossdaneun sasil-eul eotteohge

3:1

무죄 가운데서 받은 시험(창세기 3:1-5)

여기에는 사탄이 우리의 시조들을 죄 가운데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들을 유혹한 시험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이 시험을 그들에게 커다란 치명상을 가져다 주었다.

Ⅰ. 유혹자 즉 사탄의 뱀의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1. 하와를 속인 자는 확실히 마귀였다. 마귀와 사탄은 옛 뱀이다(계 12:9). 그리고 이는 악의에 찬 영인데 창조 때에 빛의 천사로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에서 수종들었으나 죄로 인하여 당초의 지위로부터 쫓겨나서 하나님의 명예와 권위에 반항하게 된 자이다. 이 때 수많은 천사들이 타락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시조들을 공격한 자는 확실히 마귀들의 왕자요 반역자들의 향도였다. 그는 죄를 짓자 곧 사탄이 되었고, 반역자가 되자 곧 유혹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대해 분노하고 인간과 그들의 행복을 시기하였다. 사탄은 인간을 멸망시킬 수는 없어도 타락시킬 수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는 없었으나 시험할 수는 있었다(계 2:14). 그러므로 사탄이 꾸민 간계는 우리의 시조들의 죄짓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그들과 하나님과 사이를 갈라놓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탄은 원래부터 살인자요 이간자였다. 사탄은 온 인류의 목덜미를 웅켜 잡고 이를 한 손에 내려쳤다. 인류의 원수는 이처럼 극악한 자이다.

2. 마귀가 뱀 모양으로 나타났다. 마귀가 단지 뱀의 모양으로 나타났었는지(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출애굽기 7:12 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인지) 혹은 사탄의 손아귀에 붙잡혀서 조종당한 진짜 살아 있는 뱀이었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그 어느 쪽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여간 마귀는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면 마귀가 왜 뱀을 택했을까?

(1) 뱀은 그 피부에 반점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를 쳐들고 다니는 그럴 듯한 모양을 한 짐승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것은 일조의 날아 다니는 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스랍들 중의 하나와 같이 저 윗 세상으로부터 오는 사자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날으는 불뱀이란 말이 있기 때문이다(사 14:29). 많은 위험한 유혹들은 단지 가죽 한꺼풀이긴 하지마는 화려한 색깔로 꾸민 채 우리를 찾아오며, 위로부터 오는 것처럼 나타내 보여 준다. 왜냐하면 사탄은 광명의 천사처럼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리고 뱀은 간교한 짐승이기 때문이었다. 이 점을 여겨서 살펴보아야 하겠다. 뱀이 남을 해하거나 또는 자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행한 많은 간교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그런데 마귀의 조종을 받은 이 뱀은 틀림없이 다른 어느 뱀들보다도 더욱 간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비록 신성함을 상실하기는 했어도 천사들의 영리함을 여전히 가지고 능히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뱀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성결되지 않은 영리함은 마귀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이용하기 좋을 것임을 알라. 하와는 자기에게 말하는 이 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지는 우리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와 자신도 어떻게 생각하여야 했을지 몰랐을 것이다. 아마 우선은 그것이 광명의 천사일 것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에는 어딘가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교의 우상 숭배자들은 대체로 뱀 모양의 마귀를 예배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통해 그들은 배교자의 영에 매어달려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그리고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Ⅱ. 시험받은 사람은 남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혼자 있었으며 그리고 금단의 나무 가까이에 있던 여자였다.

1. 연약한 그릇과 같은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 마귀의 간계였다. 하와가 비록 여자들 중에서는 온전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지식이나 힘, 그리고 침착성에 있어서 아담보다 훨씬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명을 받지 않고 그녀의 남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처럼 쉽사리 그 계명에 불순종하도록 설복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마귀는 그녀가 혼자 있을 때 이야기를 걸기 시작하는 술책을 세웠다. 그녀가 만일 남편 곁에만 있었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있기 때문에 심하게 유혹 당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힘을 주고 안전하게 유혹을 피할 수 있게 하여 준다.

3. 마귀는 그녀가 금단의 나무 가까이 있는 틈을 탔다. 그리고 아마 그녀가 호기심에 이끌려서 그 나무 위에 있는 열매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금단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는 자는 금단의 나무 가까이 오는 것도 안 되었던 것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라" (잠 4:15).

4. 사탄은 하와를 통해 아담을 유혹하기 위하여 먼저 하와를 유혹하였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그의 아내를 통해 욥을 유혹하였으며,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유혹하였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며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유혹하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다.

Ⅲ. 유혹 그 자체와 그 유혹의 수단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우리를 엄습해 오는 사탄의 유혹, 즉 그 "궤계" (고후 2:11). 그의 "깊은 것" (계 2:24). 그리고 그의 간계(엡 6:11)에 대해서 말해 준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이 곳과 또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두 사람의 아담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마귀가 성공하였지만 자중의 경우에는 마귀가 실패하였다. 외부에서부터 말하는 것을 가지고는 사람들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탄은 우리 자신들의 속이는 마음과 그들의 육체적인 이론들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부터 말한다. 이것은 매우 분간하기 곤란한 공격이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공격이다.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금단의 열매를 따먹도록 설복하고자 시도하였다. 이 방법을 마귀는 계속 오늘날까지도 사용한다. 마귀는 죄가 되느냐, 혹은 아니냐고 물었다(1절). 마귀는 거기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하였다(4절). 그는 오히려 많은 이득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5절). 이런 것들이 흔히 마귀가 사용하는 화술이다.

1. 마귀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죄가 되느냐 혹은 아니냐고 물었으며, 정말 그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되느냐고 물었다.

(1) "마귀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그 첫 마디의 말은 그 전에 이 말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 하와가 혼자 말을 했을 것이고, 사탄이 그 말을 받아서 거기에 자기의 질문을 덧붙였을 것이다. 생각의 꼬리는 이상스럽게도 꼬리를 이어 다른 생각을 가져다 주는데 아마 마지막에는 나쁜 생각을 가져다 줄 것이다

[1] 그는 처음에는 자기의 계획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단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이 던진다. "내가 어떤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하나님이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했는가?" 마귀는 이처럼 처음에는 슬쩍 이야기를 붙이고 나서는 곧장 그녀를 담판으로 끌어들였다. 유혹으로부터 안전하고자 하는 자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유혹자와 말하기조차 삼가야 한다.

[2]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이 그 나무 하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들에 관한 금령인 것처럼 허위를 인용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너희가 먹되 단 하나의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 고 하셨던 것이다. 마귀는 하나의 예외를 확대시킴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특권을 무효화 시키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의 명령은 처음부터 잘못 전해 주지 않고는 그것을 비난할 길이 없다.

[3] 사탄은 그 여자가 그 나무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비꼬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서 네가 그 말씀대로 참 조심스럽게 잘하는구나." 마귀는 거짓말쟁이처럼 처음부터 비꼬는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세의 비꼬는 자들은 곧 마귀의 자녀들이다.

[4] 사탄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그녀에게서 명령에 대해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거 시키자고 하는 것이었다. 너는 정말 오해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너를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일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사탄의 계교란 하나님의 법을 불확실하고 불확실한 것처럼 손상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확고히 믿고 그것을 굳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너희는 거짓말하지 말며 하나님의 이름을 명령되어 일컫지 말며 술취하지도 말라." 고 말씀하시지 않았던 가? "그렇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합당한 말씀이다. 유혹자가 아무리 이와 반대되는 것들을 제안하여 온다고 하여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명령을 지켜 나갈 것이다."

(2)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 여자는 그들이 받은 율법의 내용을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2,3절)

[1] 뱀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는 것이 그녀의 약점이었다. 그녀는 뱀의 질문을 듣고 그에게는 아무런 선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즉시 깨닫고, 이렇게 대답해 주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즉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대답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기심과 경이감에 가득찼던 그녀는 뱀이 말하는 것을 듣자. 그의 이야기에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당장 멸시와 증오심을 가지고 거절해 버려야 하는 유혹을 상대하는 것부터가 위험스러운 일이다. 적과 협상을 제기하는 수비대는 머지 않아 항복할 것이다. 해를 입지 않고자 하는 자는 해로운 길에서 멀리 떠나야 한다(잠 14:7; 19:27 참조)

[2]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산에 보낸 것은 단지 그들에게 보기에 먹음직스럽지만 먹지는 못하게 금하고 있는 과실을 눈여겨보게 함으로 그들을 애태우게 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암시하였다. 이에 대해 하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임을 깨닫는 지혜가 있었다. "우리는 많은 나무들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분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만도 대단히 많고 또 그 종류도 여러가지다" 라고 그녀는 대답했었다. 종교의 속박 하에서도 거북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종교가 가진 자유와 위로에 대해 때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3] 하와가 하나님 명령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충실하게 반복하였다는 것은 그녀의 결심이 어떠했던 것인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너희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라고 하와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만지지도 말라" 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이것은(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명령을 은연중에 "만지지 말라, 맛보지 말라, 손대지 말라" 는 식으로 지나치게 엄격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명령에다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는 먹어서 안 된다. 그러므로 만지지도 않겠다.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것이다."

[4] 하와는 그 위협에 대해서는 약간 흔들렸던 것 같다. 그녀는 그 명령을 되뇌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나" 라고 말을 전했다. 흔들리는 신앙과 흔들리는 결심은 유혹자에게 좋은 기회를 준다.

2. 마귀는 거기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명령을 어기는 것이기도 해도 형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4절). 글자 그대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가 되도록 "너희가 정녕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다.

(1) 어떤 사람은 이 말이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너를 그렇게 믿도록 하였지만 그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사탄은 자기가 넘어뜨릴 수 없는 자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의심나게 함으로 그 힘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언제든지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도 거짓이나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되면 그 때 불충에의 문이 활짝 열려지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처음에 의심하게 하고, 다음에는 거부하게 만든다. 사탄은 우선 회의론자로 만들고, 다음 단계에는 무신론자로 만든다.

(2) 또 어떤 이들은 그 말이 "네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 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위협적으로 사용한 말씀과 똑 같은 말을 반대도 사용함으로써 자기의 말이 확실한 듯이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사탄은 그 명령에 대해 묻는 것으로 말을 시작하였다(1절). 그러나 그녀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러한 공격을 중지하고, 두 번째의 공격으로서 위협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이 말에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가장 약한 쪽의 벽을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 이것은 거짓말이다. 순전한 거짓말이다.

[1]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서 2장 21, 22절을 보라.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까지도 거짓말을 하리 만큼 심한 거짓말이다.

[2] 그것은 사탄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도 위배되는 거짓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여도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 자신의 비참한 경험을 통해 그 말이 거짓된 말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창조의 법을 어겼을 때 그 대가로 그 안에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 그들이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자기와 같은 처지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 자신이 당한 비참한 꼴을 숨겼다. 이처럼 그는 오늘날까지도 죄인들을 속여서 자멸하게 하고 있다. 사탄은 죄를 지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죄의 값은 사망이다"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도 자기의 말을 더 믿게 한다. 죄를 지어도 벌받지 않는다는 생각은 모든 부정과 완고함을 크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나는 평안하리라라고 말하리라" (신 29:19).

3. 마귀는 명령을 어김으로 얻게 되는 이점이 있다고 약속했다(5절). 여기서 사탄은 하나의 강타를 먹이는데, 그것은 가지된 우리가 붙어 있는 나무의 뿌리까지 흔드는 강타였다. 그는 그들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자지 자신을 내어 준다고 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조금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이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하지만 스스로 파서된 자가 말하는 안전을 믿을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아무도 그 약속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그들을 위한 커다란 출세의 길이 약속되었다고 말해 주지 않고는 그들을 자멸의 길에 끌어들이도록 설복할 수가 없었다.

(1) 마귀는 그들에게 이 열매를 먹기만 하면 커다란 이득이 있다고 은근히 권했다. 그리고 그들은 유혹하는 데 있어서 육체적인 환락이나 만족이 아니라 지적인 기쁨이나 만족과 같은 순수한 상태에 어울리게 그 유혹을 이끌고 갔다. 사탄은 그의 낚시 바늘을 감추기 위해 다음과 같은 미끼들을 사용하였다.

[1]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 너희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직관력과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너의 지적인 관점이 훨씬 넓어질 것이며, 지금보다도 훨씬 장래의 일을 얻게 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들의 지금의 상태는 너무나도 희미하게 보며 너무나도 앞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2] "너희는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 너희는 엘로힘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아지며, 전지자(全知者)가 될 뿐 아니라 전능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자신과 같아질 것이며, 그와 같아지고, 그의 상대가 될 것이다. 너희는 또 다스리는 자가 되고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며 누구에게 예속된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터무니 없는 제안이다. 이는 마치 어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영원 전부터 그들의 창조주와 같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3] "너희는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유혹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탄은 이 나무에게 주어진 이름까지도 악용하였다. 이 나무는 사실 선과 악에 관한 지식, 다시 말하면 책임과 불충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세워진 나무였다. 그리하여 그 나무는 선과 악, 다시말하면 행복과 불행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나무의 이름은 그들에게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그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잡아 사용하였으며,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 의미를 왜곡하였다. 그리하여 이 나무가 그들에게 선과 악의 본질, 종류, 그리고 그 근원에 관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을 주는 것인 양 말했다.

[4] 이 모든 것은 이런 말로 집약될 수 있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갑자기 좋은 상태로 돌변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사탄은 이런 모든 속삭임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게 하고자 기도하였던 것이다. 첫째, 그들이 앞으로 될 수 있고 또 하여야 하는 상태보다 현재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현재의 상태에 대한 불만을 품게 하고자 하였다.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만족감을 가지지 못할 때 어떤 상태라도 그 상태 자체가 만족감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안한 마음을 가진 아담은 낙원 안에 있으면서도 낙원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천사들 중에도 그들의 자리를 떠난 자들도 있다(유 6).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들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하는 야망을 품게 하고자 기도하였다. 사탄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놓은 자와 필적하리라고 하다가 스스로 멸망하였다(사 14:4). 따라서 사탄은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도 같은 욕심을 품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망하게 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2) 하나님에게 나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이 열매를 먹지 못하게 금한 것이라고 은근히 속삭이면서 사탄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얼마나 잘될 것인가를 하나님이 알기 때문에, 너희에게 대해 시기하는 마음과 악의를 가지고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그들 자신의 역량을 알고 그런 저급한 상태에 계속 머물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 필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인 양 말했으며, 또 그들이 먹는 날에 그들이 가지게 될 명예와 행복이 싫어서 그렇게 한 것인 양 말했다.

[1]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모욕이며, 그에게 돌릴 수 있는 최고의 학대이며, 그의 능력에 대한 비난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그가 지은 그의 피조물들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행한 선한 업적을 비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마치 그 자신의 손으로 행한 모든 것을 증오하며, 그가 지은 인간들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잘못 말하고 악하게 말하는 것을 인간은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인간들 앞에서 하나님을 역시 비난한다. 이처럼 사탄은 불화의 씨를 뿌리며, 모든 불화한 자의 괴수이다.

[2] 이것은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 가장 위험한 올가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도록 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귀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대해 잘못된 생각을 품게 함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이끌고 있으며, 죄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 바가 많다는 헛된 소망을 통해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여 하나님을 가장 선하신 분이라고 올바르게 생각하며, 죄악이란 곧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마귀에게 대항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도망간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없음.

3:6

시험과 범죄(창세기 3:6-8)

우리는 여기서 유혹자와의 회담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볼 수 있다. 사탄은 드디어 거점을 확보하고 간계를 써서 그의 근거지를 마련한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우리의 처음 조상들의 순종을 시험하였다. 그리고 사탄도 이 문제에 동참하는데 결국 그들을 범죄 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지혜롭고도 거룩한 결과를 얻기 위해 그로 하여금 어떻게 일시적으로 이기게 하였는가 볼 수 있다.

Ⅰ.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을 범죄케 한 꾀임을 볼 수 있다. 유혹자의 능란한 술책에 속은 여자는 범죄의 향도 노릇을 하였다(딤전 2:14). 그녀가 잘못을 먼저 저질렀는데 이는 그녀의 생각이 깊었던 결과에서 왔다기보다는 생각이 모자랐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1. 하와는 이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더 해롭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덴 동산에 있는 말이 있었다(2:9). 그런데 하와가 보기에는 이 나무도 다른 모든 나무들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먹기에 좋아 보였다. 그리고 열매의 색깔을 볼 때도 죽음이나 위험을 주는 듯한 위협을 찾아보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보기에 좋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해가 된단 말인가? 다른 모든 나무 열매들을 못 먹게 했으면 했지, 왜 이 나무에 열매를 못 먹게 금한단 말인가?" 다른 나무 열매들에 비해 이 금단의 열매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될 때 죄악은 바로 문 앞에 도사리게 되었고, 사탄이 곧 이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보기에 다른 어느 나무 열매보다도 이 나무의 열매가 더 먹기에 좋아 보였을 것이며, 맛도 좋아 보였을 것이고, 몸에도 좋아 보였겠고, 눈에 보기에도 좋아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육감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무의식 중에 올가미에 빠지는 수가 있다. 또 비록 다른 것에 비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그것 자체 안에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지 금지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욱 그것을 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와가 사실 그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반대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괴상한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요,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다). Nitmur in uetitum-금한 것일수록 더 하고 싶다.

2. 하와는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점을 가진 나무라고 상상하였다. 말하자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데 필요한" 나무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나무들보다 훨씬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았다" 말하자면 하와는 마귀가 그녀에게 일러준 대로 그렇게 이해하게 되고,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곧 하와는 뱀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이며, 또 그것을 먹었기 때문에 뱀은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재능과 이성(理性)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하와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능력이 그 나무에 있다고 추론하게 되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나무가 그처럼 지각없는 짐승을 이처럼 이성적인 짐승으로 만들었다면, 왜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을 신(神)처럼 만들지 못하겠는가?" 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쓸데없는 지식을 갈망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들을 멸망시키는가를 보라.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우리의 처음 시조들은-그들이 안 만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나무이시다(골 2:3; 고전 1:30). 우리는 구원을 얻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자. 하늘의 낙원에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금단의 나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것들을 모두 알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가도록 사모하자. 그리고 그 동안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너무 높거나 깊은 것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며, 성서에 씌어진 것 이상 더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욕심을 내지 말자.

Ⅱ. 여기서 우리는 범죄의 단계를 볼 수 있다. 그 단계는 위로 이끄는 단계가 아니라, 밑으로 함정으로 이끄는 단계이며,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단계이다.

1. 하와가 "보았다" 하와는 허망한 것을 보지 말고 눈길을 돌렸어야만 했다. 그런데 금단의 열매는 즐거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유혹에 끌려 들어갔다. 많은 죄가 눈을 통해서 들어온다. 이 눈이란 창문을 통해 사탄은 맹렬한 창을 던져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병들게 한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도 하고 죄짓게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욥과 같이 위험한 음욕을 품게 하거나 모든 것을 보지 않도록 우리의 눈을 두고 언약을 세워야 한다(잠 23:31; 마 5:28). 그리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언제나 우리의 눈을 가리우게 하자(20:16).

2. 하와가 "땄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행동이요 행위였다. 마귀가 그것을 따서 그녀의 입에 넣어 준 것이 아니었다. 하와 자신이 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와 자신이 그것을 땄다. 사탄은 유혹할 수 있어도 위를 넘어뜨리지는 못한(마 4:6). 하와가 딴 것을 훔친 것이다.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을 취한 것같이 그녀가 취할 권리가 없는 것을 취한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선악과를 땄다.

3. 하와가 "먹었다" 아마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는 따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땄을 때는 먹으려고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선악과를 먹었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인간이 마음대로 멈추게 할 수 없다. 죄의 시작은 물길을 터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만 나오고 이제 그만 나오라" 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는 처음 짓고 싶은 충동이 있을 때 이를 꽉 눌러 놓아야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리고 참견을 시작하기 전에 쫓아버려야 한다. Obsta principiis-잘못은 봉오리 때에 따버려라.

4. 하와는 그것을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었다." 아마 하와가 유혹 당할 때 아담이 함께 있지 않았던 것 같다(분명히, 만약 아담이 함께 있었다면 죄를 짖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와가 그것을 먹은 다음에 왔으며, 하와와 같이 그것을 먹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왜냐하면 선을 배워 주기보다는 악한 것을 배우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와는 그것을 남편에게 주면서, 뱀이 자기를 꾀던 말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거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그 것을 먹어도 죽기는커녕 매우 기분이 좋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아담에게 권면하였다. 훔쳐서 마시는 물이 더 달다. 하와는 다정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녀는 그렇게 맛있는 것을 혼자 먹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 혼자 먹었다면 그처럼 큰 불친절이 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랬을는지 모른다. 한편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 해가 된다고 하였더라도 하와는 그것을 남편에게 주었을는지 모른다. 남편은 그녀가 당한 비참한 운명에 동참해 주기를 바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불친절한 행동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금단의 열매를 먹은 자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쉽사리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이처럼 나쁜 짓을 제가 먼저 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짓을 하도록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마귀도 그랬고 하와도 그랬다. 그들은 죄인이 되자마자 곧 유혹자가 되었다.

5. "아담도 먹었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극성스러운 요구에 못이겨 그것을 먹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묻고 싶을 것이다. "다만 하와 혼자만이 죄를 지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런데 그런 질문을 물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어려운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하여 주셨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엾게도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담도 그것을 먹었다. "그가 그것을 먹었다고 해서 어떤 커다란 해가 일어났단 말인가?" 터무니 없는 심사를 가진 인간이 타락하고도 육욕에 찬 이론으로 반문한다. 어떤 해가 있었던가! 어찌하여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되며, 자기의 현재의 불만을 품고, 자기 자신의 공적을 뽐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영광을 탐내며,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시기하고, 육체를 탐닉하는 마귀를 신뢰하는 것이 되는가! 아담은 먹으라고 허락된 생명의 나무는 무시하고,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주신 은혜를 명백히 멸시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금지하신 것에 더욱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자가 되고자 하였으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였으며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고자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죄는 "불순종" 이었다(롬 5:19). 명백하고도 용이하며, 또 명시된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었다. 아담은 아마 그것이 그를 시험하고자 하는 명령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사랑, 많은 자비, 빛과 사랑에 거슬리는 죄를 범했는데 그가 거슬려서 죄를 범한 빛과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며 가장 크신 사랑이었다. 아담은 그의 속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으리 만큼 그처럼 타락된 본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노예 의지가 아니라 자유 의지가 있었으며, 연약하거나 쇠잔하지 않은 충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쉽사리 옆으로 빗나갔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창조 받은 바로 그 날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날의 일을 마치고 나서 "심히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럴 수는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날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하여간 그는 그의 완전함을 얼마 오래 지니지 못하였고, 그의 영에도 오래 간직하지 못하였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담이 그 범죄로 인하여 그의 모든 후손들을 죄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게 한 것은 더욱 더 큰 죄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백성이 온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아담은 그 자신이 하나의 공인(公人)이라는 사실과 또 그가 불순종하면 그의 모든 후손도 불순종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었다. 그렇다면 그의 범죄는 지금까지 있었던 범죄 가운데 가장 큰 불신 행위였으며 가장 비참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완전히 깃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범죄에 있어서는 사권상실(私權喪失)이 성립되면서 불명예의 오점과 죄와 멸망의 전염병이 불가불 후손들에 전달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담의 죄가 해를 끼치기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Ⅲ. 그 범죄가 어떤 결과를 즉시 초래하였는가를 볼 수 있다. 수치와 공포가 범죄의 당연한 결과로서 -ipso facto - 범죄자에게 엄습해왔다. 수치와 공포는 죄와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오늘날에는 죄와 동반되어 따라오는 것이다.

1. 즉각적으로 수치심이 엄습했다(7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자.

(1) 저들의 가슴 속에는 강한 뉘우침이 들어왔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이는 육신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타나 있듯이 육신의 눈을 전부터 열려 있었고, 죄가 그 육신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요나단의 눈은 금지된 것을 먹음으로써, 그 눈이 밝아졌던 것이 아니며(삼상 14:27) 그것은 그 때문에 그가 원기를 회복하고 소생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또한 "이들의 눈" 은 어느 모로나 참된 지식에 이르는 진전을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양심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이 저지른 일이 옳지 못하다는 마음의 찔림을 받은 것이다. 일을 저질러 놓고서야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이 미련의 소행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또한 행복에서 멀리 떨어져 비참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버린 것도 알게 되었다. 이는 사랑의 하나님을 노엽게 했으며, 그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다른 피조물을 지배할 권한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하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하였던 바 그들은 영의 부조화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체 속에 다른 한 법이 있어, 마음의 법과 싸우고 마음을 죄와 진노로 몰고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람의 "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어 선 것을 보았던 것과 같이(민 22:31) 아마 그들은 자기들을 욕보이고 더럽힌 병을 보았을 것이다. 본문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라고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그들이 낙원에서 지녔던 모든 영광과 기쁨을 박탈당하고 빼앗겼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응당 내려 주실 온갖 불행에 던져진 것이다. 그들은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 그들을 보호해 주던 모든 것이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2] 그들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영예를 장식해 주던 온갖 장신구들이 사라졌다. 그들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졌다. 최고의 치욕에 떨어졌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들 자신의 양심까지도 그들을 비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배우자. 첫째, 죄는 그 얼마나 부끄럽고 기회만 있으면 불안을 주는 것인가! 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을 해치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들과 항거하게 하며, 그들의 행복을 깨치고 모든 안위를 파괴하고 만다. 조만간에 죄라는 것은 부끄러움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이는 참다운 회개로써 영광 가운데 끝맺는 부끄러움이냐,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 날에 재앙을 당하는 영속적인 치욕을 수반하는 것이냐 하는 것뿐이다. 죄라는 것은 만인에게 이같이 치욕적인 것이다. 둘째로, 사탄이 그 얼마나 악한 사기꾼인가! 이와 같은 사탄은 우리의 시조를 꾀일 때에 눈이 밝아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로움과 이득에로가 아니라, 오히려 수치와 슬픔에로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가장 사악하고 해독을 끼치는 거짓말쟁이 는 흔히 이처럼 모호한 말만 하여 속임수를 쓰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2) 이러한 죄책감을 없애 보려고 그들이 애달픈 수단을 써서 자신들을 방비해 보려고 했다. 즉 "그들은 무화과나무를 엮어서" 자기들 내외간이나마 수치를 최소한이라도 가리워 보려고 "앞치마를 입었다" 여기서 죄인들의 일반적인 어리석음을 알게 된다.

[1]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으려는 일보다는 사람 앞에서 신용을 얻어 보려고 애쓰는 일이다. 그들의 죄를 자복하는 것과 반대로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일이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하오나 보살피소서!

[2] 죄를 숨기고 가볍게 해 보려고 변명하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 앞치마와 같이 그들은 문제를 조금이라도 낮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다. 숨겨 있는 수치심은 더욱 큰 부끄러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아담"처럼 자기 죄악을 숨겨두기 쉬운 것이다(욥 31:33).

2. 그 금단의 열매를 먹자, 곧 두려움에 사로잡혔다(8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과 동기는 무엇인가? 그들은 "날이 서늘한 때에 동산에 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이 놀라게 된 것은 심판주가 다가 오시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죄책을 느끼는 양심에게만 두려움을 주는 방식으로 오시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는 인간의 형태를 입으시고 오시었으며, 그 때에 세상을 심판하신 이가 최후의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바로 그분이시며, 그는 하나님께서(성직에) 임명한 자에게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낙원에 있을 때 본 그러한 모습대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게 되고 겸손해지게 하기 위함이었지, 그들을 놀라게 하고 공포심을 주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후에 시내산에서(자욱한 연기로 거처를 삼거나 불타는 화염을 그 수레로 삼고) 인간의 눈에 보였듯이, 하늘로부터 직접 강림하시듯이 동산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과 친숙하고자 하시는 분처럼 찾아오신 것이다. 그저 걸어오신 것이지 뛰거나 바람 날개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며, 노하시기를 더디하는 자같이 오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노할 때 흥분하거나 조급히 굴지 말고 심사숙고하며 신중히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는 날이 서늘한 때에 오셨다. 공포를 가일층 더 하는 한밤중에 오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한낮 더위가 가장 심한 때 오신 것도 아니다. 즉 그의 노여움이 가장 극심한 때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노여움이 없으시다" (사 27:4). 또한 돌연히 오신 것도 아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의 음성을 들었으니, 그가 오시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며, 아마도 그 음성은 엘리야를 불러 묻던 때와 같이 고요하고도 작은 음성이었을 것이다. 흑자도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혼자서 아담의 죄를 생각하시고 그를 심판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이 들은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지시고 말씀하신 때와 같이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 11:8, 9)고 말씀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2) 그들의 공포의 결과와 증거는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다." 이 얼마나 슬픈 변화인가! 만일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더라면, 뛰어나가서 그를 맞이했을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꺼이 은혜로운 그의 심방을 영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정반대이고 보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도 서로에게 공포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혼란되고 말았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고발하여, 그들의 죄를 그들 앞에 여실히 폭로했다. 무화과 나뭇잎도 그들에게는 헛되어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로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온갖 피조물이 그들과 싸우게 되었다. 게다가 아직 그들과 진노하신 하나님 사이를 중보할 어떠한 이도 그들은 알지 못하였으니, 결국 두려움 가운데서 심판을 바라볼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그들은 숲속에 숨어 버렸다. 결국 죄를 지은 그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상을 알았기 때문에 감히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없어 행방을 감추려고 도망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음 사실을 알아 보자.

[1] 유혹자의 허위성과 그 유혹 자체의 기만성 및 오류 그의 허위성은 그들이 안전하리라고 허울 좋게 약속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먹어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지만, 이제 그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도망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그들이 진보하리라고 약속하였으나 조금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그들이 지금처럼 자기들이 비천했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또한 지혜롭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놓아 어디에 숨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같이 위대하고도 담대하고 용맹스럽게 된다고 약속했었지만, 그들은 죄인으로 발각되어 떨며 초라해지는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도망갈 궁리만 찾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예속된 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어제 그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되었다.

[2]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죄인들의 어리석음이다. 빛되신 성부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는가?(시 139:7; 이하 렘 23:24) 생명의 근원이시며, 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분을 우리가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욘 2:8)

[3] 죄에 따라 다니는 두려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깜짝 놀라는 온갖 공포, 양심의 정죄, 어려움의 접근, 하등 동물들의 침해 그리고 죽음의 엄습 등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는 공통적인 것인데, 그것은 사실상 죄의 결과이다. 죄에 짝이 되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에 수반되는 수치와 두려움에도 함께 했다. 손에 손을 맞잡긴 하였으나(그 손은 후에 결혼으로 결합됐다) 서로를 겨려해 주거나 강하게 해 줄 수는 없었다.

3:7 없음.

3:8 없음.

3:9

숨어버린 아담(창세기 3:9-10)

하늘과 땅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도망자들의 범죄에 대한 사실이 심리되는 사건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형식에 얽매이지는 아니하지만, 가능한 한 공정하게 판결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로움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하나님이 아담을 뒤따라가 그를 체포하시고는 그를 놀라게 하는 질문을 하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이리 나오라!" 고 하여 소송을 시작하려면 것이었다. 흑자는 이 말씀을, "오, 가련한 아담아!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 라는 슬퍼하는 질문으로 생각한다. (흑자는 또 이것을 해석하여) "오, 너 참으로 가엾은 자여! 너 아침의 계명성(鷄鳴聲)이여, 어찌하여 네가 전략했느냐! 나의 벗이었고, 내가 총애하였던 너였으며, 내가 이전보다 더욱 총애하고자 했던 너이건만, 이제 네가 나를 저버리고 자멸했단 말인가? 이것이 웬일인가?" 라고 한다. 그가 죄를 깨닫고 겸손해지게 하기 위한 "네가 어디 있느냐?" 는 책망의 질문은 오히려 "장소" 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어떠한 "상태" 에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것이 네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얻은 전부이냐? 나와 우열을 경쟁하던 네가 이제 나로부터 도망하려 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명심할 것이 있다.

1.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에 빠진 자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형편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모든 선에서 떠나 그들의 원수들의 와중에 있으며, 사탄의 노예가 되고, 멸망의 고속 도로에 들어선 것이다.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그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그를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한 은혜로운 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되찾으려고 부르시지 아니하셨더라면, 타락한 천사의 처지와 같이 그의 처지도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찾지 않으셨다면, 잃어버린 양과 같이 방향도 없이 끊임없이 유리하는 방랑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을 다시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있어야 할 곳과 있어서는 안 될 곳, 그리고 불행하고 불안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곳을 그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2. 또한 죄인들은 자기의 위치를 한 번쯤 숙고해 보게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는 평안히 쉴 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의 떨리는 대답.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0절). 그는 자기 허물을 솔직하게 자복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의 수치와 두려움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죄를 고백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그 잘못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그 사실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해졌음을 알게 될 때 흔히 범하는 공통된 과오와 어리석음인 것이다. 아담은 벌거벗었기 때문에 두려워 했다. 맨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논쟁하기가 두려웠을 뿐 아니라, 옷을 벗었으므로 그 앞에 나타날 수 없을 만큼 매우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의로 가리지 아니하고는, 두려워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이것만이 증거의 갑옷이 되며, 우리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덮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그 앞에 나아가도록 하자.

3:10 없음.

3:11

하나님의 심문(창세기 3:11-13)

범인들이 자신들의 고백으로 자기들의 죄책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죄과를 가볍게 하려고 애써 변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을 자백하고 변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어떻게 그들의 자백을 받아냈는가? 하나님은 남자에게 "누가 너의 벗은 것을 말하더냐?" (11절)고 물으셨다. "어떻게 하여 네 벌거벗음이 부끄러움이 된다고 느끼게 되었느냐?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시지만, 우리들에게서 직접 알아 내시며 그 죄들을 교묘하게 고백케 하기도 하심을 알자. 이는 그가 몰라서가 아니라, 간사하고도 교묘한 우리들을 겸손케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심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너를 창조하신 너의 주인이며 너의 은인이 되는 내가 너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했었다. 네가 저지른 바와는 정반대로 명했던 것이다" 라고 하시어 전에 그에게 주셨던 명령을 상기케 하시는 것이다. 죄는 계명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보면, 가장 분명하고도 가장 죄악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거울을 아담 앞에 제시하신 것이다. 우리들도 그 거울을 통하여 우리들의 얼굴을 살펴 보아야 한다. 여자에게 하신 질문은,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13절)라는 것이었다. "너도 네 허물을 인정하고 고백하겠는가? 악한 일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금지된 실과를 먹은자들, 특히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처럼 먹도록 유인한 자들에게 하는 질문이며 그들이 저지른 바를 신중히 숙고해 보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하자. 금지된 실과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곧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그 공의로운 법을 어기는 일이며, 신성하고도 가장 엄숙한 계약을 위반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 그의 진노하심과 저주를 받게 되어 우리들의 고귀한 영혼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먹도록 유혹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귀의 일을 해 주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죄에 공모한 죄인이 되며, 그들의 멸망에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 고 자문자답하여 보자.

Ⅱ. 그들은 죄를 고백하는 중에 어떻게 그 죄를 변명하였는가? 무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그들의 죄를 증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기들 스스로가 고소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모든 것을 압도하시기 때문에 아담은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는 "내가 그리하였나이다" 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대답은 참회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죄를 괴로워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대신 죄를 변명하고, 그 수치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아담은 그 모든 책임을 자기 아내에게 돌린다. "그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면서 먹으라고 조르기에, 단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먹었을 뿐이나이다." 이 얼마나 경박하고 어리석은 변명인가! 아담은 아내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교육했어야 할 일이었다. 아내와 하나님의 말 중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정도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죄에 결코 빠지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자. 또 시험에 들게 하는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이 세상의 가장 좋은 친구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양심에 어긋나거나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행동을 하자는 집요한 요구에 넘어지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해야 함을 알아 두자. 그러나 이것이 아담이 행한 가장 나쁜 행동은 아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만 아니라, 무언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비난하기 위한 어조를 쓴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의 반려자, 나의 안내자, 그리고 나의 벗으로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녀가 나에게 그 나무 실과를 주었으니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나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하나님이 자기 죄에 대한 공범자이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악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있는 구실이나 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셨으니 우리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상한 기질이 있음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귀, 영화, 그리고 연고자들을 주시어서 우리가 그것들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기화로 그에게 죄를 짓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된 데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는 대신에 우리들에게 주신 이들 크신 은사를 악용한 우리 자신들을 원망해야 마땅한 일이다.

2. 하와는 모든 책임을 뱀에 전가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 죄는 누구도 원치 아니하는 더러운 것이요, 치욕의 표시이다. 죄의 쾌락과 아들을 즐겨 맛보려는 자는 죄의 책임과 수치도 즐겨 당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와는, "당신이 지으셔서 우리들이 있는 낙원에 들어오게 하신 그 간사한 피조물이 나를 꾀었나이다" 라고 했다. 또는 나로 하여금 실수하게 했나이다 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조는 우리들의 과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음 사실을 배우자.

(1) 사탄의 유혹은 모두가 사기술이요, 그의 이론은 그 모두가 허위이며, 그의 꾀임은 모두가 협잡이다. 사탄이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죄는 우리들을 속이고 또 속여서 우리의 권리를 빼앗아간다. 우리들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죄의 속임수" 로 말미암은 것이다(롬 7:11; 히 3:13 참조).

(2) 사탄의 간교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하여 우리들 자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는 유혹자이지만, 우리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들을 곁길로 유인하고 꾀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욕인 것이다(약 1:14). 그러므로 우리가 속아서 죄를 지었다고 하여 우리의 슬픔과 굴욕을 경감시키려 하지 말자. 오히려 철천지 원수인자에게 속아야만 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울분을 더하게 하자. 그런데 왜 법에 따라 언도를 내리고 집행을 하지 아니하는가 하는 것이 피고석에 있는 모든 죄수들이 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무의미한 말이나 다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

3:12 없음.

3:13 없음.

3:14

뱀에게 내려진 선고(창세기 3:14-15)

그들의 고백을 통하여 죄수들이 죄상이 드러났고, 게다가 그 재판장은 그들을 직접 알고 있으며 그의 지식은 무오하며 판결을 저지할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즉석에서 인도를 내리신다. 또한 위의 본문에서 하나님은(죄의 시작이 되었던) 뱀에게 언도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뱀을 심문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했는지, 왜 하였는지를 묻지도 아니하시고 즉결 언도를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1. 뱀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고, 그의 악의적이고도 악질적인 죄상이 악명 높았었고, 소돔의 사람들처럼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놓고 공표하였기 때문이다.

2. 또한 용서받을 희망조차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개의 여지조차 뱀은 없었기 때문에 뱀에게 뉘우치고 겸손해지도록 하는 따위의 말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상처는 찾아낼 필요가 없었던 것인데, 그것은 치유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흑자는 생각하기를 타락한 천사들의 처지는 그들이 사람을 꾀어 거역하도록 유혹하기까지는 그렇게 절망적이라는 선고를 받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Ⅰ. 사탄이 이용하는 유혹자에게 내려진 선고는 뱀에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뱀은 야수적 동물이다. 뱀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지음을 받을 것이었는데 이제는 도리어 사람에게 해를 끼치도록 악용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분노와 아담과 하와의 상처받은 명예에 대한 질투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저주와 치욕을 뱀에게 내려 신음하고 번민케 하시는 것이다(롬 8:20 참조). 마귀의 도구는 마귀의 형벌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하여 악한 자의 육체는 단지 불의의 도구에 불과하였더라도, 그 수석 지배인인 영혼과 영원한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된다. 사람을 죽인 소까지도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했다(출 21:28, 2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죄를 미워하며, 더욱이 남을 꾀어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자를 그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이스라엘을 죄짓게 했다" 는 것은 여로보암의 이름에 찍힌 영원한 낙인이었다.

1. 이제 여기서 뱀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즉 "네가 모든 육축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으리라" 고 했다. 땅에 기는 생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는 그들에게 복을 내렸던 것이다(창 1:22). 그러나 죄가 복을 저주로 바뀌게 하고 만 것이다.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1절)고 하였다. 여기서는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으리라" 고 하셨다. 부정(不淨)한 간교는 흔히 사람들에게 큰 저주가 된다. 또 사람이 악한 짓을 행하려고 계략을 쓰면 쓸수록 더 큰 피해를 끼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도 더 큰 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간교한 유혹자들은 태양 아래 있는 피조물들 중에 가장 저주받은 피조물들이다.

2. 또 뱀은 사람의 비난과 적개심을 사게 되었다.

(1) 그는 간악하고 비열한 짐승으로서 영원히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즉 "너는 배로 다니리라. 더 이상 발로 다니는 것도 아니며 반쯤 일어서서 다니는 것도 아니라, 배가 땅에 붙어 있게 되리라. 흙을 너의 먹이와 함께 먹지 않을 수 없으리라" 고 하셨다. 이는 매우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뱀의 범죄는 먹지 말아야 했던 하와를 꾀어서 먹게 한 죄이다. 그의 형벌은 그가 먹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불가불 먹어야 하는 것이다. "흙을 네가 먹으리라." 이것은 천하고도 비열한 처지를 의미할 뿐 아니라, 초라해지고 불쌍해진 영까지도 의미한다. 용맹스러움이 사라져서 "뱀처럼 티끌을 핥는 자들" 이라는 말이 있다(미 7:17). 뱀의 저주는 세상의 속물들이 택하는 것이며, 그들의 성품은 "티끌까지도 탐낸다" 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암 2:7) 그들의 망상이 이것을 택하였으니, 저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되리라.

(2) 그는 독이 가득한 짐승이요,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라는 낙인이 영원히 찍히게 되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위하여 지음 받은 하등 피조물이 사람에게 대적하게 되고 사람이 그들을 적대하게 되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저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뱀이 받은 저주의 한 부분이다. 뱀은 사람을 해치며, 흔히 그 발꿈치를 물어뜯는다. 이것은 뱀이 그 이상 더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말발굽을 물어 뜯는다는 말에서 더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49:17). 그러나 사람은 뱀을 이기며, 그 머리를 상하게 하여 죽여 버리며, 독사의 온 족속을 송두리째 멸족시키려는 목표를 세운다. 비록 뱀이 교활하고도 위험천만한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류를 멸망시킬 만큼 우려되게 하지는 아니하셨다(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더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은 뱀에게 내려진 바로 그 저주의 결과라고 하겠다. 뱀에게 내려진 이 선고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즉 "내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리라" (시 91:13)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즉 "뱀을 잡으리라" (막 16:18)는 것과 바울이 그 손을 뱀에게 물렸어도 상하지 않았다는 증거 등으로 더욱 뒷받침이 되는 것이다. 뱀과 여자는 서로 금지된 실과에 대하여 말을 나누고 그들 사이에 놀라운 합의가 있게 된 바로 조금 전까지는 서로 매우 친밀하고 다정하였었는데, 이제 순식간에 다시는 화해할 수 없는 원수가 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죄악된 우정이란 것은 이같이 반드시 철천지 원수로 끝맺게 마련임을 명심하자. 악으로 단합된 자들의 연합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Ⅱ. 이 선고는 마귀를 겨눈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귀는 이 장면에서 뱀을 자기의 도구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수석 지배인 노릇까지 했다. 뱀의 입을 빌어서 말한 마귀는 이 뱀의 편에 서서 얻어맞게 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마찬가지로 이 선고의 중심적인 의도는 마귀에게는 캄캄한 면을, 그리고 우리 시조와 그 후손들에게는 광명의 면을 두시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 함축되어 있다.

1.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대원수인 마귀에게 영구적인 화가 내려진다. 뱀의 배후에서 마귀는 다음과 같은 선고를 받는다.

(1) 마귀의 지위가 하락 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천사를 마귀로 바꾼 죄는 교만이었다. 여기서는 뱀은 그 배로 기어 다니며 티끌을 핥아야만 하는 비천한 처지로 표현된 여러 가지의 고행으로 그 교만이 정당하게 벌을 받게 된다. "오, 계명성이여 어찌하여 그리 떨어졌는고!" 하나님보다 높게 되고자 하여 그를 반역하는 데 괴수 노릇을 하는 자는,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멸을 당하고 짓밟히는 것이 정당하다. 인간의 교만은 그 인간을 비천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며, 스스로 겸손하려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법이다.

(2) 모든 인류의 증오와 혐오를 받게 된다. 사탄의 세력에 유혹 당한 자들까지도 그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자기 스스로를 지키어 이 사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요일 5:18). 그러므로 마귀는 전쟁 상태와 또 화해될 수 없는 적대 상태에 있도록 저주받는 것이다.

(3) 결국에는 위대하신 구속자에게 멸망을 받는다. 이것은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는 것으로 상징되어 있다. 그의 간교한 술책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요, 그가 찬탈한 힘은 완전히 말살될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세력을 침해한 자라는 낙인을 영원히 면치 못하리라. 이러한 선고를 받음으로써 그는 멸망의 때가 오기 전에 이미 고통을 받은 것이다.

2.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마귀의 나라 사이의 영원한 싸움이 인간 세계에 시작되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싸움이 선포된 것이다. 하늘에서는 이미 미가엘 천사와 용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계 12:7).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적대심의 결과인 것이다.

(1)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 속에는 은혜와 타락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다. 마귀는 그들의 타락을 이용하여 성도들을 공격하고, 싸우고, 키질하며 삼키려 한다. 그 반면에 성도들은 그들의 은혜의 작용으로 그들과 대적하고, 격투하며, 그 불길 같은 공격을 소멸시키고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두움은 결코 화해될 수 없다. 사탄과 성별된 영혼도 결코 화해될 수 없다. 이것들은 서로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2)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악한 자와 경건한 자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한다(시 139:21, 22). 하나님의 백성과 박해하는 자들의 분노와 악의는 바로 이 적대심의 열매인 것인데, 이러한 싸움은 성도가 하늘 나라의 편에 있고 악한 자가 지옥의 편에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를 미워할 때도 놀랄 것은 없다(요일 3:13).

3. 여기에는 타락한 인간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여 내실 그리스도에 관한 은혜로운 약속이 나타나 있다. 위에서 내린 선고는 뱀에게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시조들도 틀림없이 듣고 있었고, 그들에게 은혜를 암시한 것이며,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소망의 문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내려진 그 다음의 선고는 저들을 위촉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새 아침이 밝아온 것이다. 즉 상처를 입자마자 곧 치료 책을 마련하여 주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는 기록된 바와 같이(히 10:7) "경(經)의 서두에" (우리말 성경- "두루마리 책에") 곧 성경의 처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을 행할"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시조와 홍수 이전의 조상들은 이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약속의 특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에게 주신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다.

(1) 그의 성육신. 그리스도는 "여인의 후손", 곧 그 여인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족보(눅 3장)는 아담의 자손임을 보이기 위하여 그에게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가 그리스도를 자기의 후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이는 마귀가 꾀인 것도 바로 그 여자요, 아담이 그 책임을 전가한 것도 바로 그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셨다. 비록 그 여자가 최초의 범법자이기는 했어도 그녀는 해산(解産)을 함으로써(흑자는 이렇게 읽는다), 곧 그녀에게서 계승될 약속된 후손을 낳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딤전 2:15).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여자만의 곧 동정녀의 씨가 되어야 했는데 그것은 타락한 우리들의 본성에 물들지 않게 하려 하심이었던 것이다. 그가 보내심을 받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었으니" 이는 약속을 이루려 하심이었던 것이다(갈 4:4). 그러므로 우리 구주께서 "그 여자의 씨가 되시고 우리의 뼈 중의 뼈가 되신다" 고 하는 사실은 죄인들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히 2:11, 14).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있는 부정한 존재이니, "여인의 죄" 때문이다(욥 25:4). 그러므로 "그의 날은 괴로움이 가득한 것이다" (욥 14:1). 그러나 그 여자의 씨가 우리를 위하여 죄와 저주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에서 구원받는다.

(2) 그이 고난과 죽음. 그것은 사탄이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 는 것 곧 그의 인성(人性)을 상하게 하리라는 것 속에 나타나 있다. 사탄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죄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려고 유인했다. 흑자는 그리스도께서 고민 중에 계실 때에 위협을 가하여 낙심케 하려 한 것은 사탄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룟 유다의 심증에서 그리스도를 배반케 하고,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게 되고, 대제사장들이 그를 고소케 되고, 거짓 증인들이 그에게 죄를 씌우게 되고, 빌라도가 그를 정죄케 되는 등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 구원주를 멸하여 훼방하려는 것은 바로 마귀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는 오히려 죽으심을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망시켰던 것이다(히 2:14). 그리스도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그의 발꿈치는 상하였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마귀는 그들을 시험하고, 옥에 던져 핍박하고, 죽이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고난에서 함께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땅 위에서 발꿈치를 상한 때에도 그의 머리는 하늘에 있어 안전하니 감사한 일이다.

(3) 이로써 그리스도가 사탄의 이기심. 사탄이 일시 그 여자를 짓밟고 모욕했지만, 그 여자의 후손이 때가 차서 일어나 그녀의 원수를 갚고 그를 짓밟아 그를 쳐부수고 그를 사로잡아 "승리를 거두리라" 는 것이다(골 2:15). "그가 그이 머리를 상히리라" 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술책과 권세를 파괴하고 그 나라와 세력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시험을 좌절시켰고, 그 손아귀로부터 영혼을 구원해 내시었으며, 사람의 몸에서 그를 몰아내었으며, 무장한 강자를 몰아내었고, 그의 전리품을 분리시켰다.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마귀의 왕국에 결정카를 때리셨다. 곧 이 짐승의 머리에 다시는 치료될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이다. 그의 복음이 기반을 잡음에 따라 "사탄은 떨어지고" (눅 10:18) 결박을 당하는 것이다(계 20:2). 그의 은혜로써 그는 사탄을 주의 백성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고(롬 16:20). 조만간 불 속으로 던져 버리리라(계 20:10). 그리하여 마귀의 영원한 멸망은 택함 받은 남은 자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될 것이다.

3:15 없음.

3:16

하와가 받은 선고(창세기 3:16)

여기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와에게 내려진 선고를 보게 된다. 그 여자는 두 가지를 선고 받는다. 즉 고통과 종속의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쾌락과 교만을 충족시키려 했던 자기 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이다.

Ⅰ. 그녀는 이제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고통은 특별한 것으로서 어린애를 낳는 고통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성이 가장 당하기 쉬운 슬픔과 공포의 온갖 행적과 그들이 당해야 하는 공통된 재난이 포함되어 있다. 죄가 이 세상에 고통을 몰고 왔고,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만들었고, 인간의 머리에 근심의 소나기를 부으며 심령에는 슬픔의 샘을 열게 하여 이 세상을 대홍수로 범람케 한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 우리가 죄라는 것을 몰랐었던들 슬픔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격언, 곧 성서의 격언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해산의 고통은 죄의 결과이다. 해산의 수고를 하는 여자의 모든 신음과 진통은 죄의 숙명적 결과를 큰 소리로 말해주는 소리이다. 그 모두가 금단의 실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살펴보자.

1. 고통이 "크게 더하겠다" 고 선고되어 있다. 현세의 모든 고통이 다 그와 같은 것이다. 때로는 비가 온 후 구름은 다시 몰려오듯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고통도 더하게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죄와 고통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악이다. 해산의 고통은 증가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해산 전 임신 기간 중의 불편(임신 당시의 고통), 해산 후 키우는 수고와 고통이 포함되기 때문이며, 또한 어린애들을 낳은 후 그들이 혹시 악하고 미련해지면 그들을 낳은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 세상은 한 가지 슬픔이 지나가면 또 다른 슬픔이 뒤따르는 법이다.

2. 우리들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렇게 하리라."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서 그같이 하신다. 모든 고통속에서 우리들을 침묵케 하기 위함이다.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화시키기 위하여 행하시는 것이며, 죄로 인하여 겸손해지게 하고, 모든 고통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과 인연을 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고통속에서도 위로를 받으며 고통을 인하여 받는 우리의 유익은 매우 풍성하기 때문에 능히 그 고통과 평형이 된다.

Ⅱ. 그녀는 종속 상태에 놓인다. 당초 창조 때에는 남자와 동등했던 여자가 "죄", 즉 금한 것을 먹음으로 인하여 낮아진 것이며 "권위를 박탈 당한" 것이다(딤전 2:11, 12). 특히 아내된 자는 그 남편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 같은 법에 관한 실증을 민수기 30장 6-8절에서 볼 수가 있다. 거기에서는 아내가 한 서원(誓願)을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취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선고는 단지 "아내된 자여, 네 남편에게 순종하라" 는 명령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써 그 같은 의무는 형벌로 바뀐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언제나 지혜와 사랑으로 다스릴 수가 있었을 것이고, 여자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순종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배라고 하는 것이 불평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금한 실과를 먹지 않고, 또한 그 남편으로 하여금 그것을 먹도록 꾀지 않았더라면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을 불평했을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혹하다 하더라도 결코 불평해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불평을 하려면 그렇게 만든 죄를 원망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자기 남편을 경멸하고 불순종할 뿐 아니라 그를 다스리려는 아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고까지도 불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Ⅲ. 여기서는 이 선고의 진노 속에 긍휼이 어떻게 섞여 있는가를 보게 된다. 여자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아이들을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니라" (요 16:21). 여자가 예속되었으나 이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지 낯선자나 적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 선고도 그녀를 멸망케 하는 저주가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뱀과 여인 사이처럼 적의가 있는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3:17

아담이 받은 선고(창세기 3:17-19)

여기에는 아담에게 내려진 선고가 있다. 이것은 범죄 사실의 설명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한즉" (17절)이라고 되어 있다. "그 여자가 그것을 내게 주었나이다" 라고 말하여 아담은 아내에게 그 책임을 돌림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아니하신다. 하와가 그를 유혹할 수는 있었어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담으로 하여금 그것을 먹도록 졸라댄 것은 하와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은 그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리석은 변명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기각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되고 내릴 선고의 근거가 되고 말 것이다. "너희 자신의 입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심판하리라." 그럼 다음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이 선고로써 그의 주거지가 저주를 받는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 또한 그 저주의 결과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주거지가 변경될 것이 암시되었다. 그는 더 이상 훌륭하고 복된 낙원에서 거하지 못하게 되고 쫓겨나서 보통 땅, 게다가 저주 받은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창조시에는 온 땅이 복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어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땅의 어떤 부분은 폐허가 되어 인간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가 죄를 짓지만 않았더라면, 위로와 축복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땅을 주시어 그들이 거처하기에 편안하도록 삼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죄가 땅의 소유권을 변모시키고 만 것이다. 사람의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 받았다. 즉 땅은 인간의 불명예스런 거처가 되었다. 인간의 비천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의 기초는 티끌 속에 있다. 땅은 메마르고 불모한 거처이다. 땅의 자연적 소산은 잡초 뿐이요, 가시덤불이며 구역질나거나 독기 있는 것들이다. 땅에서 난 모든 좋은 열매는 사람이 그 기술과 노력으로 탈취한 것들 뿐이다. 풍성하게 열매 맺는 것이 땅의 축복이었으며 사람에게는 유익한 것이었는데(1:11, 19), 이제 결실을 맺지 못함은 땅의 저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의 형벌로 말미암은 것이다. 애당초 땅이 창조함을 받았던 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죄가 비옥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으며, 사람은 "들 나귀처럼 되어서 들 나귀의 땅을 차지하니, 들로 그 집을 삼고 메마른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욥 39:6; 시 68:6).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의 얼마간은 탕감해 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땅은 영영토록 황무지가 되어 가시덤불과 엉겅퀴 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땅은 저주를 받았다. 즉 마지막때 곧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게 되고, 그네들의 죄악의 분량이 다 차게 될 때에는(벧후 3:7, 10) 파멸될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선고 속에는 긍휼도 포함되어 있음을 고찰해 보자.

(1) 아담 자신을 뱀과 같이 저주를 받지 않았다(14절). 땅만이 그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과 거룩한 씨까지도 주었다. "그것은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사 65: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복을 마련하여 주셨으므로 직접적으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저주를 받는다. 말하자면 2차적인 저주를 받은 셈이다.

(2) 그는 여전히 땅 위에 있다. 땅이 입을 열어 그를 삼키지 않았다. 단지 땅은 과거의 상태와 다르게 되었다. 그가 당초의 순수성과 정직함에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하듯이, 땅도 애당초 창조시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에서 타락하였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의 거처가 되는 것이다.

(3) 이 땅에 내려진 저주는 이 세상의 사물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행복을 끊어 버리고, 윗 세상에 있는 것에만 축복과 만족을 바라보도록 그를 지도하고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2. 그의 직업과 향락은 오히려 그에게 고통을 가중케 한다.

(1) 그가 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19절). 죄를 짓기 전에는 그의 일이 언제나 그에게는 즐거움이었으며, 아무런 힘든 노동을 하지 아니하고도 가꾸어 나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노동이 아주 힘들고 고된 것이 되고, 몸은 쇠약해진다. 그가 돌보는 일은 괴로움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땅을 황무지로 화하게 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한, 땅에 내려진 저주는 그의 직업을 훨씬 더 어렵고 고생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땀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기로 하자.

[1] 노동은 우리의 의무이니 신실하게 이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일은 우리들에게 내려진 선고 일부분이니 감히 소홀히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2] 노동에서 오는 불편과 고됨은 우리가 받아야 할 당연한 형벌이며, 참고 순종해야 할 일이다. 우리들의 죄질보다 가벼운 형벌이므로 조금도 불평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무나도 지나친 염려와 수고로 우리들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삼지도 말자.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멀지 않아 휴식이 있을 것을 기대함으로써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며, 땀을 씻어 버리는 것을 배워야겠다.

(2) 그 음식이 이제부터는 (전과 비교해 볼 때) 그에게 불쾌한 것이 된다.

[1] 음식 재료가 바뀐다. 그는 들에게 나는 채소를 먹어야하며, 더 이상 에덴 동산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짐승과 같이 짐승의 동료로 변모하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소처럼 풀을 먹게 된 것이다.

[2] 음식을 먹는 방식이 바뀐다. "수고하고(17절), 얼굴에 땀을 흘려야(19절)" 먹게 되었다. 아담은 자기가 먹은 금단의 열매와 그 때문에 당한 죄와 욕됨을 기억하면서, 평생토록 고통을 맛보면서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첫째로, 인생은 많은 불행과 재난을 당하는 것인데, 이 비극들은 얼마 안 되는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에 비하면 훨씬 더 괴로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이나 서글픔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먹지를 못하며(욥 21:25), 모든 인간, 곧 가장 선한 자들이라고 해도 죄로 말미암아 수고하여 먹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자들 곧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자들까지도 그들의 기쁨 가운데는 슬픔이 있는 것이다. 많은 질병과 재앙과 죽임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죄와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오늘날까지도 휩쓸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죄로 인한 온갖 비참한 결과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 있는 자가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 그러나 역시 이 선고에도 긍휼이 내포되어 있다. 즉 땀을 흘리기는 하겠지만, 잠자리에 들 듯이 인간이 땅에 돌아갈 때 그 수고는 그의 안식을 더욱 즐겁게 해 줄 것이다. 고통을 겪으나 굶어 죽지는 아니할 것이다. 고통이 있겠으나, 그 고통으로 빵을 먹게 되며 그 고통 속에서 그 마음이 강건케 되리라. 그는 뱀과 같이 흙을 먹으라고 선고 받은 것이 아니다. 들에 있는 채소를 먹으라고 한 것뿐이다.

3. 그의 수명 역시 짧아진다. 그가 사는 날이 많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날수가 적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죽음이란 것은 두려운 것이다(비록 삶이 불유쾌한 것일지라도). 그 죽음은 선고의 결말이기 때문이다.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게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흙에서 취해 내어서 만든 부분, 네 육체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는 네가 흙이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애초의 육체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흙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따라서 불멸하는 것을 허락해 주심을 취소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주어졌던 능력을 거두어가기만 하면 물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흙이라" 고 했으니 그것은 현재 인간의 마음의 부패와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너의 귀중한 영혼은 이제 잃어버리고, 몸의 흙 속에 파묻히어 육욕에 빠지고 말았다. 영혼은 영적으로 또 거룩하게 지음을 받은 것인데, 이제 육욕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것이 되고 말았도다." 따라서 그에게 내린 심판은 "네가 흙으로 돌아가리라. 너의 육신은 너의 영혼의 버림을 받고 흙덩이가 되리라. 그리하면 몸은 자기 본향인 무덤에서 살게 될 것이며, 땅의 흙과 섞이고 말 것이라." 우리는 흙이다(시 104:29). 땅은 땅으로 흙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인간은 비천하고 허약한 피조물이다. 티끌처럼 미미하다. 또 저울 위의 티끌 몇 개처럼 가볍다. 무상하다기보다는 하찮은 존재이다. 티끌처럼 나약하니 견실성이 도무지 없다. 우리들의 힘은 돌의 힘과 같지 아니하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이것을 아시니,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4). 인간은 참으로 세상 진토중의 으뜸이지만(잠 8:26), 역시 티끌에 불과하다.

(2) 사람은 무덤을 향하여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피조물이다. 먼지는 들리어서 잠시 동안 작은 구름 속에 머물러 있어, 먼지를 들어올린 바람으로 받혀져 있는 동안은 높은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끝내 그 힘이 다하면 다시 떨어져 떠났던 땅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인생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크나큰 먼지덩이에 지나지 않으며, 끝내는 자기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3) 죄가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롬 5:12).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영원불멸의 불꽃을 맡기셨으니 끊임없이 인내하여 선행을 계속했더라면 영원한 불꽃으로 나랑 올라갔을 터인데, 어리석게도 고의적인 죄로 불꽃을 꺼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죄값은 사망이요, 죄는 사망의 쏘는 가시이다."

Ⅱ. 우리는 두 가지를 더 생각해 보지 않고는 우리들의 시조에게 내려진 이 선고를 넘어갈 수 없다. 이 선고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깊이 관계되어 있고 오늘날까지도 절실히 느끼는 바가 많다.

1. 아담의 영혼과 그의 죄악된 자손이 당하는 죄의 슬픈 결과가 이 선고에 의하여 얼마나 알맞게 묘사되고 상징되어 있는가 함이다. 거기에는 아마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뜻이 있으리라. 물론 육체에 미친 재난만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것은 영적 비극의 한전형, 곧 영혼 속에 깃든 저주였다.

(1) 여자가 해산할 때 받는 진통은 죄지은 양심이 당하는 공포와 고통을 뜻하며 죄의식을 깨우치는 것이다. 욕정을 잉태함으로 이러한 고통은 심히 더하여지며, 해산때의 여자의 진통같이 조만간에 죄인에게 임하는 것이다.

(2)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하게 끔 격하된 조의 결과로 영적인 자유와 의지의 자유가 상실됨을 뜻하는 것이다. 죄가 영혼을 주관함은 남편이 그 아내를 주관하는 것과 비할 수 있다(롬 7:1-5). 죄인의 소망은 죄에 있으니, 그는 자기가 종되는 것을 좋아함이다. 그리하여 죄가 그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3) 땅이 저주를 받아 불모가 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것은 타락하고 죄악된 영혼이 선에는 불모지가 되고 악에는 결실을 많이 맺음을 나타내는 적합한 상징이다. 엉겅퀴가 너무나도 무성하게 자라나서 쐐기풀이 그 얼굴을 덮으니, 이는 "저주에 가까운" 것이다(히 6:8)

(4) 수고와 땀은 육신이 허약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 사업에 힘씀에 있어서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말해 준다. 마찬가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할지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5) 그의 음식이 그에게 쓰게 되었다는 것은 생명이며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은총의 위안이 그것을 갈급하는 영혼에게 결핍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6) 그런 영혼은 육신처럼 이 세상의 흙으로 돌아간다. 이는 그러한 영혼의 취향이 그 같은 방향이며, 영혼은 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요 3:31).

2.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 시조에게 내려진 선고에 감탄할 만큼 만족한 보응을 하셨다.

(1) 해산하는 고통은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영혼의 고통" 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사 53:11). 또 그가 사망의 고통 곧 wvdi/nai-"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행 2:24)이라는 고통을 받았음도 볼 수 있다.

(2) 종속이라는 것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3) 저주가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갈 3:13).

(4) 가시덤불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5) 땀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핏방울 같은 땀을 흘러 주셨다.

(6) 고통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는 고통의 사람이었고, 그의 영혼도 심히 번민하였고 고통 당하셨다.

(7) 죽음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러므로 고약은 상처만큼 넓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3:18 없음.

3:19 없음.

3:20

하와라는 이름(창세기 3:20)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이름하여 아담이라 불렀으니, 이는 "붉은 흙" 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그의 지배권의 징표로서 여자에게 이름을 주어 하와라고 불렀다. 이는 "생명" 이란 뜻이다. 아담은 죽은 몸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하와는 살아 있는 영혼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이름이 주어진 이유가 있는데(흑자는 기록자 모세에 의해서라고 하고, 흑자는 아담 자신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였기(즉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전에는 아담이 그녀를 아내로서 "여자" 라고 불렀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어머니로서 하와(생명)라고 부른다.

1. 이것은 만일 하나님의 지시로 된 것이라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새로운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이요, 계약의 표이며,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하나님의 노하심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는 축복을 번복하시지 아니하셨다는 확증이다. 마찬가지로 이는 바로 전에 한 약속의 여인 곧 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확증인 것이기도 한다.

2. 이것이 아담이 홀로 한 일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의 신앙의 확증이었다. 물론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흑자가 의심했듯이 하나님의 저주를 멸시했다든가 무시해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에 대한 겸손한 확신과 의지심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1)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들을 모든 산 자의 부모가 되도록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샘은 오염되어 독이 가득찬 물 밖에는 내보낼 수 없는데도 그 모든 인생과 그 인간성의 근원을 즉각적으로 폐쇄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는 집행 유예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찬미하자.

(2) 구속주 즉 약속된 씨의 축복이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 즉 "생명" 이라고 부름은 이 축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약속된 씨가 모든 선한 자의 생명이 되며, 그를 통하여 이 땅 위에 모든 가족들이 축복 받게 될 것이며, 그러한 희망 가운데 그가 이기기 때문이다.

3:21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창세기 3:21)

인간의 시조들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신다는 기사를 계속 보게 된다. 비록 하나님은 불순종의 자녀들을 바로잡으시고 그의 진노의 표적 하에 두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과 의절하시지는 아니하시고,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들의 채소를 그들의 식물로 주시고 "가죽 옷" 을 그들의 옷으로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자(눅 15:22-23) 그와 같이 해 주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를 기뻐하셨더라면 이런 일을 하시지는 아니하셨을 것이다.

1. 옷은 죄와 더불어 들어 온 것이다. 만일 죄가 벌거벗게 하고 벗은 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게 하지 않았다면 옷을 입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빈곤과 악행만을 상징하는 옷을 자랑으로 여길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 시조들에게 옷을 마련하여 입히셨을 때에는 따듯하고 튼튼한 것이었지만, 매우 소박한 것이었다. 자색 예복이 아니라 다듬지 않은 가죽으로 지은 것이었다. 후에 시온의 딸들이 창안해 내어지어 입고 자랑하던, 곱게 다듬고 수놓은 사치스러운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천하게 옷을 입은 가난한 자들도 불평하지 말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게 여길 것을 배우자.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옷을 잘 입은 부자들은 옷을 화려하게 꾸며서 자랑하지 말 것을 배워야 하겠다(벧전 3:3).

3. 우리들에게 음식 뿐만 아니라 입을 옷까지도 마련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함을 드려야 한다(28:20). 양털과 섬유는 "곡식과 포도주" 처럼 모두가 그의 것이다(호 2:9).

4. 이 가죽 옷에는 의미심장한 것이 있었다. 짐승의 가죽이라 했으니, 그 짐승들이 그들의 목전에서 죽여져야 했다. 그리하여 죽음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고(전 3:18 참조), 그들 자신도 죽어야 할 짐승들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짐승들은 먹기 위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세에 주님이 오셔서 단 한번의 위대한 희생의 제물을 드린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초로 죽은 것은 희생의 제물 곧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세상의 시초때부터 죽여진 어린양" 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 제물들은 하나님과 사람이 나누어 가졌으니 화해의 표였다. 즉 고기는 하나님에게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고 그 가죽은 사람에게 옷으로 주셨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향내 나는 제물로 드린 바 되고 그 때에 우리는 옷과 같이 그의 의(義)를 옷입어 우리들의 벌거벗은 수치가 가리워진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된 앞치마를 해 입었으나 너무나 좁아서 "몸도 감쌀 수가 없는" 것이었다(사 28:20). 그러한 것이 더러운 누더기 같은 우리들 자신의 전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풍족하고도 질기며 오래갈 수 있는 알맞은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그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야 한다.

3:22

에덴에서의 추방(창세기 3:22-24)

하나님은 범죄자들에게 선고를 내리신 후 그 일부분은 즉시 집행하심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그들은 치욕적인 나무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니 그것이 얼마나 당연한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도다! 그가 그럴 듯한 신이 되었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 금단의 과실을 먹어서 그가 어떤 이득을 얻었는지 두고 보라." 이 말은 그들을 일깨워 겸손해지도록 하고,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깨달아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자기들은 마귀의 말에 처참하게 속아넘어갔다는 것을 알므로써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바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추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치가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그의 이름을 찾게 하신다" (시 83: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심케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당혹 속에 그들을 놓아 두신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자기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이니 "죄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열매를 얻었느냐?(롬 6:21) 죄의 길에서 나 스스로에게 어리석게 약속했던 것을 내가 과연 얻었느냐? 아니라, 결코 아니라. 내가 바라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다.

Ⅱ. 그들이 버림받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처사인가! 이것은 "네가 들에서 나는 채소를 먹으리라" 고 하신 말씀 가운데 암시되어 있는 선고의 한 내용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낙원에서부터 쫓아낸 이유. 그것은 그가 손을 내밀어 지식의 나무의 열매까지 따먹고(이전에 율법으로 지식의 나무를 금하신 것같이 그 열매는 이제 선고로써 금지되었다), 신성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선고를 무시하며, 영원히 살리라고 스스로 속아 자만에 빠지는 따위의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의 것을 주목하자.

(1) 그리스도인의 특권의 표적과 그림자를 붙잡기 위하여 그 실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 자들의 어리석은 버릇이 있다. 계약의 조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계약의 표시만을 좋아하는 것이다.

(2) 그러한 자들에게 그것이 거부된 것은 정의일 뿐 아니라 자비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을 찬탈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들의 죄를 보다 더 흉악하게 만들게 되고, 그릇된 기초 위에 그들의 희망을 세움으로써 개심을 더 어렵게 만들고 그들의 대망을 보다 비참하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2.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절연장을 주어 희락의 동산에서 쫓아내는 방법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그를 쫓아버리시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1) 동산에서 보통 땅으로 쫓아내었다. 이 말씀은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어 보내셨다" (23절).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내셨다" (24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으며, 동산은 그에게 합당한 곳이 아니니 더 이상 동산에서 머물러 즐길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 곳을 매우 좋아하며, 떠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쫓아 내셨으며" 내 보내신 것이다. 이것은 그와 그의 죄 지은 족속들이 낙원의 복이며 영광이었던 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아담이 무죄 상태에 있을 때 누렸던, 사람의 아들들을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기쁨의 징표가 이제 단절된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친교가 허락되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즉 하나님의 성령이 떠났을 때의 삼손처럼, 아담은 약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아담의 교분은 줄어들어 잃어버려진 자가 되었고, 사람과 조물주 사이에 있었던 고통은 막히고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런 영광을 받을 가치가 없고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불합당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과 모든 인류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친교를 박탈 당하고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아내어서 어디로 보냈는가? 하나님은 능히 그를 세계 밖으로 쫓아내실 수도 있었고(욥 18:18), 죄지은 천사들은 하늘의 낙원에서 쫓아냈을 때에 지옥으로 보냈듯이(벧후 2:4) 그를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산에서 쫓아냈을 뿐이다. 사람은 그가 지음 받은 그 땅으로 보내졌을 뿐이다. 그는 고통을 당할 곳이 아니라, 수고할 곳으로 보내졌을 뿐이다. 그는 고통을 당할 곳이 아니라, 수고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는 무덤이 아니라 경작할 땅으로, 토굴이나 감옥이 아니라 노역소(勞役所)로 보내졌다. 그는 쇠사슬을 끌어야 할 곳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땅을 경작하면 그 대가로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게 된다. 그라 취함 받은 흙과의 교제는 선한 목적에 이용할 수 있으며, 그를 겸손케 해 주고, 그에게 다가올 종말을 생각나게 해 주는데 유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기서 우리 시조가 그 무죄 상태라는 특권을 빼앗겼으나 절망할 만큼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어서 그들에게 새로운 조건으로 둘째 시험단계를 두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2) 그를 밖으로 내쫓아 못 들어오게 하여, 다시 들어올 희망을 전혀 못 가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동편에" 무섭고도 당해낼 수 없는 힘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군사 "그룹들과 어느 방향으로나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곳은 아담이 보냄 받은 곳과 인접해 있는 곳이며, 그리하여 그가 생명나무로 갈 수 없게 한 것이다. 누가 감히 보초 중에 있는 천사를 대적하고 그곳을 통과할 수가 있으며, 그 큰 힘으로 지키고 있는 곳을 자나갈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암시한 것이다.

[1] 하나님은 아담에게 분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에게 긍휼을 마련하셨지만, 지금은 노하셨으며, 그의 원수가 되시어서 그와 싸우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고 있기 때문이다(민 22:23). 그리고 화염검을 두어 그를 지키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는 소멸하는 불이 되신 것이다.

[2] 천사들도 아담과 교전하고 있었다. 하늘의 군사들에게도 평화가 없다. 이것은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생명나무로부터 영원히 차단시키기 위하여 그룹을 세워 두셨다는 말이 아니다(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우리를 앞에 낙원을 마련하여 주시고, 그 가운데 생명나무를 두시었으니, 우리가 그 소망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룹들은 전에는 그들이 다녔던 생명나무의 길을 지금까지 지키기 위해서 서 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그와 그 후손들이 첫 계약을 힘입어 의와 생명과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을 허사가 되었다. 그 첫 계약은 결코 회복될 수 없도록 파괴되었고, 조금도 변화될 수 없으며, 아무런 혜택도 거기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계약의 계명이 파괴되었으니, 그에 따른 저주도 전면적이다. 거기에는 회개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 그 계약의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는 모두 완전히 타락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담에게 나타내 보이셨으니, 그를 절망 속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루도는 화염검을 제거할 약속된 씨를 통하여 생명과 행복을 찾도록 은혜를 주시고 고무해 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우리들과 화해하게 되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우리들 앞에 거룩히 열려 있는 것이다.

3:23 없음.

3: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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