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과 보는 곳 - bing-gwa boneun 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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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작성일 2021-01-13 15:18 댓글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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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ㅜ.. 꽤 오래된 애니라는 건 알지만..

빙과.. 정말정말 보고싶은데요..

어떻게.. 볼수있는곳이 없을까요.?

((라프텔도 안되서...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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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 철공소 거리에 견학 온 어린이들. 사단법인 대전공공미술연구원 제공

채소값 싸기로 유명한 대전역 앞 ‘역전시장’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시장 끄트머리에서 낯선 풍경을 만나게 된다. 세상의 온갖 기계와 부품들이 다 있을 것 같은, 작은 공장과 기계상들이 모여 있는 ‘원동 철공소 거리’다. 도로명 주소는 ‘창조길’. 골목 초입에 설치된 거리 지도는 크고 작은 기계부품들을 용접해 만들어졌는데, 기용주물, 만석기계, 진성정밀, 태성금속 등 동네 철공소 31곳의 이름과 위치가 꼼꼼하게 표시돼 있다.한자로 ‘으뜸 원’을 쓰는 원동은, 1905년 경부선 개통 뒤 대전역 주변에 형성된 대전의 ‘첫 동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 관사촌과 일본 사찰, 미곡검사소 등이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대전 최초의 동사무소인 ‘원동사무소’ 건물이 남아 있다.이곳에 철공소들이 하나둘씩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50년 대전 최초의 공업사이자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작기계를 제작한 남선기공이 들어서면서다. 남선기공을 중심으로 기계·부품상들이 몰렸고, 남선기공에서 일을 배운 기술자들이 독립해 주변에 다른 공장을 차리기도 했다. 남선기공이 1975년 대덕구 대화동의 대전1산업단지로 이전한 뒤, 그 터엔 한국특수주강·원동공업사 등이 들어왔다. ‘미니공단’으로 불리며 호황을 누리던 1970년대 후반에는 철공소 기술자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술집, 여관도 덩달아 성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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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원동 철공소 거리 초입에 있는 ‘창조길 예술지도’.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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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공소 거리의 사람들철공소 거리 유일의 주물 기술자인 기용주물 사장 송기룡(74)씨는 17살에 남선기공에 입사하며 원동과 인연을 맺었다. “주물이 뭔가요?”라고 묻자, 나무 거푸집에 짙은 흑색의 주물모래를 넣어 틀을 만드는 시범을 보이며 “녹인 쇳물을 이 틀에 부어 굳으면 원하는 모양의 금속 제품이 된다. 이게 주물”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군에 입대하며 그만뒀던 주물 일을 다시 시작한 건 27살 때다. 동구 산내동의 주물공장에서 기술을 더 익히고 1984년 원동에 ‘내 공장’을 차렸다. 송씨는 “저기도 남선기공 자리”라며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공장 담벼락을 가리켰다.남선기공도 한국특수주강도 ‘큰 공단’으로 이사 가고 나서, 원래 있던 공장은 칸칸이 구획해 철공소들에 세를 줬다고 했다. 지금은 역전시장 공공주차장이 된 곳도 세를 든 철공소로 빽빽했다고 한다. 1979년 대덕구에 대전2산업단지가 생기면서 그쪽으로 이전하는 가게도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철공소 거리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는 것이 이곳의 장인과 상인들 말이다.덕재기공의 오덕세(76)씨는 국민학생 때 원동에서 빙과 장사를 했다. 더 자라서는 원동 옆 인동시장에서 채소 배달을 했고, 그러다 “기술을 배워두면 좋다”는 얘기에 동방기계를 거쳐 1964년 남선기공에 입사했다.“주강(전기로 녹인 쇳물로 기계나 부품을 만드는 것) 기술을 배웠어. 한 20년 일을 배우고 1985년 남선기공 자리 한쪽에서 내 공장을 시작했지. 그때는 이 주변에 식당도 엄청 많았어. 철공소마다 장부 달아놓고 먹었지. 그때가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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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 철공소 거리에 그려진 벽화. 최예린 기자

철도 맞은편 길가에서 식품기계를 파는 오복기계 사장 김종덕(70)씨는 1970년 초부터 원동에서 기계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 들어와서 일 배우며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집도 샀어. 내 청춘을 원동에서 다 보냈지”라며 원동에서 낳아 지금은 대를 이어 함께 일하는 아들 건호(30)씨를 흐뭇하게 바라봤다.“서울 명동 거리처럼 사람이 흘러 다녔다”는 원동 거리에서 사람도 철공소도 사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이다. 대전 번화가가 역 주변 원도심에서 서구 둔산동 신도심으로 옮겨가자, 철공소들도 공단 근처인 대덕구 오정동으로 대거 옮겨갔다. 무엇보다 주인이 생을 마감하면 철공소도 함께 사라졌다. 공장 일을 물려받을 2세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처럼 자녀가 대를 잇는 경우는 철공소 거리에 거의 없다.보자기에 싼 커피통과 사기잔을 들고 오복기계를 찾아온 대웅다방 사장 오미숙씨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 골목에 사람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한잔에 1천원인 커피를 하루에 수백잔씩 팔았는데, 이 주변에만 다방이 3곳 더 있었다고 한다. 커피값은 지금도 1천원이다. “그땐 아침 6시30분이면 출근해서 커피 배달을 갔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있던 사람들 죽고 이사 나가고….” 철공소집 숟가락 개수까지도 다 안다는 오씨는 매일같이 보던 기술자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가슴 한편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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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동을 지키려는 예술가와 청년들쇠락한 원동 철공소 거리에 변화가 시작된 건 5년 전이다.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2017년부터 원동에서 정동 일대까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이름의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예술가들은 손때 묻은 기계와 부품들 속에서 살아가는 철공 기술자들의 장인정신에서 영감을 받았고, 철공소 거리로 들어가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골목에 오랫동안 방치된 트럭 몇대 분량의 쓰레기들도 치웠다. 마을미술프로젝트를 이끈 사단법인 대전공공미술연구원은 사무실을 아예 창조길에 있는 옛 원동사무소 건물로 옮겨, ‘무궁화 갤러리 ’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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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원동사무소 건물에 들어선 무궁화갤러리 모습. 최예린 기자

철공소 장인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하나둘씩 마을미술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남은 기계부품을 모으고 자르고 붙여 조형물을 만들었다. 철공소 간판도 ‘예술적으로’ 다시 만들어 달았다. 예술가들과 협업해 대형 조형물도 만들고, 철공소 문에 그림도 그려 넣었다. 철공소 장인들이 기계부품, 쥐덫, 벽시계 등 각종 잡동사니를 가져다 붙여놓은 옛 원동사무소 정문 벽은 골목의 명물이 되었다. 철거 위기에 놓인 남선기공 건물을 복합문화공간(문화공감 철31)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이 공간에서는 종종 전시회와 공연이 열린다. 연말이면 철공소 앞과 문화공감에서 ‘철판시장’을 열어 각종 철판요리도 선보인다. 철판시장은 철공소·여인숙 가리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동네잔치가 됐다. 한명씩 돌아가며 강사가 되는 주민모임도 매주 한차례씩 하고 있다. ‘철공소에서의 삶’, ‘여행이야기’, ‘노년에 받을 수 있는 복지기금’ 등 무엇이든 강연의 소재가 된다. 대웅다방 오미숙씨는 “처음엔 쑥스러워 강사 같은 거 안 한다고 했는데, 막상 해보니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욕심이 생기더라”며 수줍게 웃었다.마을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한 청년 예술가를 중심으로 ‘공작단’도 꾸려졌다. 공작단은 시와 구의 지원을 받아 올해부터 3년 동안 철공소 거리에서 청년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한다. 철공소 거리를 다른 곳의 청년들도 찾아오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오복기계 김건호씨를 비롯한 2세대 장인들도 공작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건호씨는 “원동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힙한 곳이 되면 좋겠다. 원동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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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원동 철공소 거리에서 청년마을 조성 프로젝트를 하는 ‘공작단’의 청년들. 최예린 기자

황혜진 대전공공미술연구원 대표는 “원동은 대전의 첫 마을이자 공단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큰 원도심 중의 원도심이다. 이곳마저 사라지면 우리 아이들은 박물관에서나 대전의 역사와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주민들과 함께 예술가와 청년들이 이 골목을 지키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최예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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