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어디 성당에 낙서하고 서양 장군귀신 붙어와서 - dong-yuleob eodi seongdang-e nagseohago seoyang jang-gungwisin but-eowaseo

내용은 『보서(보서)』, 용연(룡연)의 행적,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 중도의 지리, 서쪽으로 망명간 행적, 『적도비명(적도비명)』, 중국측 관원과 교섭한 과정, 『학규서구(학규서구)』.

용연산방일록. 

야사일기 제2권.1

[내용없음] 

●일기야사 권2

융희 3년 기유(1909)

3월 16일 - 11월 14일●1

용연산방 일록(룡연산방일록)

지금 붓을 잡음에 갑자기 이 날로부터 기록한 것은 다른 편이 있기 때문이니 보는 이들은 마땅히 상고해야 할 것이다. 1

기유년(순종3, 1909) 3월 16일 을축

진성(진성)이 들어감. 반은 맑고 반은 흐림. 이날 강서(강서) 유전동(유전동)에 사는 황학구(황학구)가 나에게 찾아와 서체(서체)를 부탁했다. 사양해도 자꾸 부탁하기에 몇 자를 써서 주어 보냈다.

3월 17일 병인

비. 이 어지러운 시기를 당해 내가 가승(가승)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하규(하규)와 각파의 파보를 수집하여 보첩(보첩)을 손질하고 밝혔다. 이번 일에 모두 2개월이 들었는데, 작업이 끝나 드디어 발문을 쓴다. 발문은 다음과 같다.

예부터 백성은 아비와 자식이 있고, 아비와 자식이 낳고 낳아 백년, 천년, 만년을 계승하니 모두 

…(원문누락)… 하다. 지난 임오년(고종19, 1882)에 휘 종진(종진), 병윤(병윤)께서 우리 종조부 휘 기홍(기홍)과 함께 모여 의논하여 사방 고을에 통문을 돌려 보첩을 손질하고 밝혔다. 그 후로 28년 사이에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세대가 바뀔수록 전해짐이 더욱 많아졌으니, 만약 제때에 개수(개수)하지 않으면 이 어지러운 정국에 장차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욱 그 전승을 잃고 말 것이다. 이에 개연히 하규와 각파의 파보를 수집하여 한 책을 온전히 완성하였으니, 이 어찌 집안 대대로 전할 소중한 물건이자 조상을 추모하던 평소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일문(일문) 가운데 각 고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은 길이 막히고 일이 번잡하여 선뜻 함께 하지 못하고, 오직 이 우리 고을 안에서만 채집하여 기록한다. 비록 모두 같이 하는 통보(통보)보다는 못하지만 그러나 선조를 추념하고 후손에게 끼쳐 주려는 뜻은 흐리거나 피할 수 없다. 아. 우리 선조대왕(선조대왕)의 신령스럽고 밝은 덕과 어질고 거룩한 공은 이미 전서(전서)에 실려 있고, 또한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찬연히 갖추어져 있으니, 나와 같은 보잘것 없는 학문으로 어찌 감히 한 글자 한 구절을 다시 찬미하겠는가. 지금 자손들이 번성한 것을 보면 선왕께서 덕을 쌓고 인을 쌓은 효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징험하여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름답고 성대함의 만분의 일이니, 완산군(완산군)의 후손된 이는 의당 이 책을 보아서 위로는 선조께서 덕을 쌓으신 공을 추모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이 계술(계술)할 방도를 생각하여 오직 충성과 효도로써 그 행실을 착하게 하고 오직 공경과 검약으로써 그 집안을 일으켜 태만하지도 말고 황폐하게 하지도 말아서 능히 생각하고 능히 염려한다면1) 우리 선조께서 세상을 경륜하고 덕을 쌓은 보답이 장차 후손들에게 있을 것이고 승의공(승의공)께서 북쪽으로 들어오시어 후손에게 끼친 도가 양쪽으로 모두 서운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을 가지고 말을 피하지 말라는 격언이 가능하겠는가. 지금 상고의 선왕들의 역대 사실에 대해 우리나라 역사를 가지고 고찰해 본다면 섞여 어지러워지고 잃어버린 바가 매우 많다. 그러나 각 고을에 퍼져있던 옛 족보가 십백 여 권이니, 때문에 감히 함부로 바로 잡을 수가 없다.  옛 족보에 근거하여 새 족보를 손질하여 휘는 모(모)요 비(비)는 모(모)라는 것과, 재위 기간 등을 간략하게 써서 주석을 달아 보충하여 뒷날의 참고와 정정을 기다린다.

숭정 기원후 도유작악(도유작악, 기유년) 삼월 병인일 승의공 16세 지손 김정규(정규)는 삼가 발문을 쓰다.

오늘은 입하이자 사월절이다.

3월 18일 정묘

계속 비가 오다.

3월 19일 무진

맑으려 하다가 다시 흐려져 가랑비가 조금 내림. 이날 한 담계(한담계) 한형기가 와서 묵었는데, 세의(세의)에 관한 이야기와 시에 대한 담화가 끊이지 않고 점점 맑아졌다.-담계의 이름은 형기(형기)이고 자는 영서(영서)이다. 글을 좋아하여 널리 배우고 지조가 단아하여 당시 사람들이 대유(대유)라고 일컬었다.-

3월 20일 기사

흐림. 일찍 일어나 담계 한형기와 자리를 마련하여 회포를 열고 열띤 담론을 나누다가 밤이 되어서야 그쳤다.

3월 21일 경오

흐림. 아침 식사 후 담계 한형기와 동행하여 하양(하양)에 이르러 헤어졌다. 나는 혼자 거닐어 신향(신향 새마을)에 가서 마경택(마경택)의 모친상에 조문을 하고, 이어서 성기(성기) 등지에 이르러 친구들을 방문하여 만나고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왔다.

3월 22일 신미

낮에는 맑다가 밤에 흐림.

3월 23일 임신

구름이 흩어지고 해가 나옴. 오늘 오시에 이종경(리종경)이 남은(남은)에서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이종경의 호는 어은(어은)이다. 일찍이 수경(수경)의 문하에서 배웠다.-

3월 24일 계유

맑음. 오늘 오시에 정태해(정태해)가 동강(동강)에서 몰래 중평(중평) 등지에 와서 사람을 보냈기에 관리(관리)2)가 병력을 움직이는 등의 기미를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만나서 이야기하기를 간곡하게 청했으나 내가 향원(향원)3)이라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편지를 보내어 답했다.

3월 25일 갑술

우레가 쳐서 처음 소리를 내었다. 비가 오다가 맑음. 남은에서 나왔으니 염량의 세정이다. 이른 아침에 천천히 거닐어 남은에 이르러 이종경을 만나 고금의 성패와 치란, 강약과 성쇠에 대해서 세세하게 이야기하다가 저녁이 될 무렵 돌아왔다.

3월 26일 을해

맑음. 서리가 새벽에 내렸다. 날이 맑고 해가 길기에 용연(룡연)에 노닐었는데, 저녁 구름이 아득하였다.

서리는 만물을 죽이는 것이다. 마땅히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는 것과 마땅히 사물을 죽여야 하는데 죽이지 않는 것은 정히 해이해서 태만한 것이고, 내리지 않아야 할 때 내리는 것과 사물을 죽이지 않아야 할 때 죽이는 것은 다그쳐서 죽이는 것이다. 까닭에 서울에 있어서는 경계가 임금과 재상에게 있고 지방에 있어서는 경계가 수령관에게 있다. 이는 모두 정령이 잘못되고 형벌이 법대로 시행되지 않은 소치이다. 이런 까닭에 「관규(관규)」에 “신하가 공변됨에 근거해 사사로움을 결탁하거나 죄 없는 이를 주살하면 서리가 봄과 여름에 내린다.” 하였고, 경방(경방)4)이 점을 쳐 “군주가 죄 없는 이를 죽이면 때가 아닌데 서리가 내린다.” 하였다. 궁금하구나, 오늘 내린 서리는 허물이 어디 있는가. 실로 경외할 만하다.

이날 몇몇 제자들과 함께 용연에서 노닐었다. 때때로 낚시를 하기도 하고 글씨를 쓰기도 하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 해가 이미 저물었다.

3월 27일 병자

하늘은 맑고 기온은 따스하여 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한낮에 하규와 후지동(후지동)을 노닐었다. 가진 거라곤 지팡이와 낚싯대 밖에 없었고 즐길 거라곤 산과 물 뿐이었다. 용연에 임해 물고기를 보고 숲을 헤치며 새소리를 들으니 이때의 정취가 과연 어떠한가.  6, 7리를 노닐매 하늘색이 저물려 하는데 즐거운 흥이 끝나지 않아 천천히 돌아왔다.

3월 28일 정축

맑음. 이 날 외신의 보도를 정확히 보니, 일본의 대장성(대장성)에서 나라의 빚을 조사했는데, 내채(내채)는 10억 7520만 8578원이고 외채는 11억 6571만 1220원이었다. 내가 보고나서 웃으며 말하기를 “교만한 저 왜놈들이 밖으로는 제아무리 부강한 척 하지만 안으로 이미 부실하니 어찌 오래 가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이른바 ‘오랫동안 노숙한 군사는 국가를 위해 쓰기에 부족하다.’라는 것이다. 저들이 과연 능히 용병의 이해를 모두 안다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지혜로운 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찌 뒤를 훌륭히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서 미루어 보건대 성패를 알 수 있겠다.

3월 29일 무인

날씨가 어둑어둑 하고 몇 방울 비가 내렸다.

4월 1일 기묘

큰 달이다. 벽성(벽성). 낮에는 흐리고 밤엔 비. 한가하게 은거하여 일이 없으매 때때로 붓 가는 대로 써서 다음 싯구를 얻었다.

마을 깊고 땅 외져 다니는 이 적으니

초옥은 쓸쓸하여 은자의 집과 같구나

황매가 익는 시절 먼 산에 비 내리고

푸른 풀 연못 속엔 종일 개구리 우네

한가한 이래 도옹의 국화5) 많이 심었고

취한 뒤 소씨의 오이6) 쉬엄쉬엄 김매지

헌함에 기대어 시 읊자니 해가 저물어

문득 초사를 가져다 좋은 시절 적노라

4월 2일 경진

비가 오다 그친 뒤 개일듯 하였으나 개지 않았다. 위급한 중에 한가로이 앉았노라니 대하는 사물마다 흥이 일어나 거닐며 또 입으로 읊조렸다.

창해의 동쪽 머리 비 오려다 개이니

걷히는 구름 흐르는 물 모두가 한가로운 정일세

홍진 세상 곳곳마다 꽃들은 떨어지고

푸른 나무 깊은 마을엔 새 울음소리

문득 새 시 읊으며 한가한 흥 즐기고

스스로 향기로운 술 기울이며 평생을 위로하네

함께 이야기하며 맹약을 같이할 이 없으니

오솔길과 작은 개울을 읊조리며 혼자 걷네

4월 3일 신사

오랫동안 흐리다가 처음 맑음. 사람들이 농장에 가득 있었는데, 큰 우레가 북쪽에서 치더니 갑자기 비를 뿌렸다.

4월 4일 임오

낮에는 맑고 밤에는 안개. 한가한 날 일이 없어 용연(룡연)에 다시 노닐다가 한 구를 읊었다.

내게 평생 산수를 좋아하는 벽이 있어

날마다 완상하며 노닐어 답청을 왔구나

시와 술을 진탕 즐기며 구름탑에 누웠다가

흔연히 낚싯대 잡고서 낚시터에 올랐지

이날 소만이었다. 사월중이다.

4월 5일 계미

새벽비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낮의 해를 보고 사립문 여네7)

저녁구름 깊어 우레가 울고

밤안개 짙어 캄캄하구나

4월 6일 갑신

아득하게 구름은 산봉에 자욱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 하늘에 닿았네

마을의 노인 때때로 찾아와

일상의 자리처럼 농사 얘기 하네

4월 7일 을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흐림. 이날 흰 구름이 가운데가 갈라져 마치 큰 길이 생긴 듯하였다. 또 하늘 남쪽과 북쪽에 나누어져 있으면서 한참동안이나 붙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았다. 이는 필시 비상한 징조이기에 「천문지(천문지)」를 자세히 보며 분석해 보았다.

4월 8일 병술

들판 가운데 가랑비 내리고

사방의 산엔 운무가 깊구나

마땅히 바람으로 쓸어버리고

기쁘게 해가 빛나는 걸 보리

4월 9일 정해

날씨가 음산하고 우레와 번개가 비를 보내왔다. 밤이 되어서는 하늘이 맑아 달이 밝고 별이 초롱초롱하였다.

4월 10일 무자

대체로 흐리다가 조금 맑음.  이따금씩 일이 없어 「통서(통서)」와 「천문지(천문지)」의 사례를 가득히 수집하여 서로 참고해 살펴보며 조심스레 나의 뜻을 붙여 싯구를 지어 노래로 불렀다. 비록 주제 넘는다고 하는 허물을 면치 못하겠지만 이미 징험이 있은 터라 오래되어도 부지런히 노래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천지의 묘한 작용 가만히 서로 부합하니

바람과 비는 다만 징험 가운데 있구나

자와 오와 묘와 유는 각각 사중이니

이때가 태을8)이 처음 궁을 옮기는 때일세

한 번 보게나 아침나절과 한 밤중을

구름은 자욱하고 비는 주룩주룩

-아침나절은 오시, 한밤중은 자시이다. 사중(사중)에 해당하는 해와 달과 날과 때는 구름이 자욱하다. 별이 뜨거나 해가 나는 날은 며칠에 지나지 않고, 비가 또 주룩주룩 온다.-

위로 임자(임자)에서 정사(정사)까지

엿새의 천기가 각각 사흘씩을 관장하고

-임자에서 정사까지 6일은 매번의 날들이 그에 속한 3일 동안의 맑고 흐림을 관장한다. 목일(목일)에 맑으면 관장한 날에 양이 많고 비가 오면 관장한 날에 음이 많다. 임자일(임자일)은 무오일(무오일)·기미일(기미일)·경신일(경신일)을 관장하고, 계축일(계축일)은 신유일(신유일)·임술일(임술일)·계해일(계해일)을 관장하며, 갑인일(갑인일)은 갑자일(갑자일)·을축일(을축일)·병인일(병인일)을 관장하고, 을묘일(을묘일)은 정묘일(정묘일)·무진일(무진일)·기사일(기사일)을 관장하고, 병진일(병진일)은 경오일(경오일)·신미일(신미일)·임신일(임신일)을 관장하며, 정사일(정사일)은 계유일(계유일)·갑술일(갑술일)·을해일(을해일)을 관장한다.-

병자(병자) 정축(정축)에서 신사(신사)까지

엿새가 각각 닷새씩을 관장하네

-병자에서 신사까지 6일은 매번의 날들이 또한 각각 5일 동안의 맑고 흐림을 관장한다. 공식은 앞과 같다. 병자일(병자일)은 임오일(임오일)·계미일(계미일)·갑신일(갑신일)·을유일(을유일)·병술일(병술일)을 주관하고, 정축일(정축일)은 정해일(정해일)·무자일(무자일)·기축일(기축일)·경인일(경인일)·신묘일(신묘일)을 주관한다. 나머지는 차례대로 헤아려 나가면 된다.-

5묘일9)과 6갑일10)은 각각 10일씩을 주관하니

한 달 내의 흐림 맑음은 서로 참고해 보네

-흐림과 맑음을 주관하는 날이 이리저리 섞여서 나오니 한 가지만 보고서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되고, 참고해서 보아 깨달은 뒤에야 근접할 수 있다.-

사시는 내가 만든 십정11)이 이날이니

분명히 당일에 풍우가 날릴 것일세

사토는 경신일12)에 또한 응함이 있으리니

날이 만약 응하지 않으면 방향에 응하리

-십정(십정)은 봄 3개월 동안 드는 병일(병일)과 정일(정일), 여름 3개월 동안 드는 무일(무일)과 기일(기일), 가을 3개월 동안 드는 임일(임일)과 계일(계일), 겨울 3개월 동안 드는 갑일(갑일)과 을일(을일), 토왕월(토왕월) 뒤에 드는 경일(경일)과 신일(신일)이다. 계절로 주를 삼았기에 내가 만들어 놓은 날에 반드시 풍우가 응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리니, 방향에 응할 것이다.-

흑우의 날 밤중에 진괘의 하늘13) 보니

용과 같은 검은 기운 진일의 기약일세

-흑우(흑우)는 계축일(계축일)이다. 밤에 용 모양의 검은 구름이 벼락 위에 있는 것을 본 것은 진일(진일)에 비가 온다는 기약이다.-

갑진일 이괘의 하늘14) 구름이 범 같으니

임오일 사이에 시내에 물결 더 하겠구나

오방 미방 구름 끼면 무일 기일 습하고

곤방 갑방 구름 끼면 임일 계일 비 내리네

-아침저녁 구름 기운을 살펴보니 이 방향에 구름이 끼면 그날 반드시 비가 내렸다.-

초하루와 그믐, 상하현일과 보름엔 그득하게 모두 비가 오는데

오직 동풍이 불면 당일 밤에 주룩주룩 비 내리네

-「관규(관규)」에 ‘이상 4일은 구름 기운이 사방으로 막혀 그득하게 모두 비가 온다.’ 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만약 이날 동풍이 불어오면 그날 밤에 비가 온다.15)-

이른 아침 날마다 북쪽에서 오는 구름 보나니

남으로 오는 황흑색 구름은 임일 계일 비 내리네

-이른 아침에 북방에서 황흑색의 구름 기운이 남쪽을 향해 오면 임일과 계일에 비가 온다.-

저기가 북에서 동을 향해 오면 이레를 기약하고

창연히 서북을 지나면 팔수에 응하네

-북쪽에서 저기(저기)가 동쪽이나 서쪽을 향한 온 것은 7일 이내에 비가 온다. 창연히 서북쪽을 향해 온 것은 응당 8일 안에 비가 있다.-

아침에 진괘의 하늘을 보아 비올 날을 점치나니

청은 갑일 을일 기다리고 적은 병일 정일 기다리네

-진(진)은 동방이다. 아침에 동방의 구름 색을 바라보아 며칠에 비가 내릴지 점을 친다. 푸른 구름과 붉은 구름이 갑일과 을일, 병일과 정일을 기다려 응하는 것은 청(청)이 동방(동방) 목(목)이 되고, 적(적)이 남방(남방) 화(화)가 되기에 그러한 것이다.-

황과 백과 흑도 모두 이런 방식이니

다시 갑신일에 구름 기운 멎음을 보네

-이런 방식이라는 것은 누런 구름은 무일과 기일, 흰 구름은 경일과 신일, 검은 구름은 임일과 계일을 기다려 비가 내린다는 것을 위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본다고 한 것은 먼저 윗 문장을 결론짓고 다시 아래 문장을 일으킨 것이다.-

동쪽에 만약 머무르면 갑일 을일에 응하고

북쪽에 만약 머무르면 임일 계일에 응하며

남방의 기운은 병일 정일에 응하고

중앙의 기운은 무일 기일에 응하네

-이상 2구는 갑신일에 여러 방향에 구름 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어느 날 비가 내릴지 점을 치는 것이다.-

큰 비가 오려 할 때엔 청룡에 불고

뜨거운 해 쬐려할 땐 주작에 일어나네

백호에 바람 일면 비와 안개 자욱하고

현무에 바람 세차면 비를 불러 오도다

-인시와 묘시가 청룡이 되고 사시와 오시가 주작이 되며, 신시와 유시가 백호가 되고 해시와 자시가 현무가 된다. 방향과 때에 따른 바람이 흐리고 맑은 것과 같은 날씨의 기약에 응한다.-

매달 초에는 해와 달의 색을 보아야 하나니

촉촉한 푸른색이면 비가 많고 붉은 색이면 반대일세

-매달 초는 매달의 초하루이다. 초하루 무렵 구름 기운이 청흑색을 띠면서 맑고 촉촉하면 비오는 날이 많고, 붉으면서 건조하면 가문 날이 많다. 매월 초하루는 상순을 주관하고, 초이틀은 중순을 주관하고, 초사흘은 하순을 주관하니, 심상하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늘 위 북두성은 또 무얼 다스리시나

바람 구름 우레 번개 암암리에 주관하네

세 개의 별은 표요 네 개의 별은 괴니

구름 자욱하고 색 가물거림을 차례로 알아야 하리

-구름이 자욱하다는 것은 구름 기운이 자욱하면서도 촉촉한 것이다. 색이 가물거린다는 것은 별빛이 동요한다는 것이다. 북두칠성은 앞 네 개의 별은 이름이 괴(괴-머리)이고 뒤 세 개의 별은 이름이 표(표-자루)이다. 일곱 번째 별은 이름이 천강(천강)이다. 차례로 보아 안 뒤에야 어떤 별이 동요하는 지 살필 수가 있다.-

표의 꼬리별은 바로 천강이니

천강 앞에 황색 기운이면 내일 비가 오리

-천강 앞에 황색 기운이 돌면서 촉촉하고 밝으면 내일 아미 비가 올 것이다.-

표가 붉으며 채색이 감돌면 갑일에 우레 소리 듣겠고

괴가 검으면서 구름을 머금으면 비가 내림을 보겠네 

-표가 붉은 색에 채색이 감돌면 우레가 치면서 비가 오고, 괴가 검은 구름을 머금고 있으면 비가 흠뻑 내림을 볼 것이다.-

색이 표에 감돌면 벽력이 울리고

누런 구름이 괴를 꿰면 큰 비가 오네

북두의 표에 누런 구름이 문창성을 꿰면 

큰 우레 운 다음날 모든 문이 열리리

-문창성의 여섯 별은 괴성의 머리와 삼태성의 위에 위치한다.-

흰 구름이 북두성에서 나오면 비가 신시에 응할 테니

만약 고요한 흰 빛이 나온다면 어느 시에 응할 텐가

-흰 구름이 북두성 자루 가운데서 나오면 다음날 신시에 또 우레가 치고 비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고요한 흰 빛이 나온다면 다음날 응하지 않을 것이니, 살피는 자는 상세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월초의 계절이 바뀌는 때에 구름이 넓고 빽빽하다면

그달 안에 흐리고 비올 것을 이로부터 점칠 수 있네

-초하루 계절이 바뀌는 저녁 구름 기운이 북두성에 넓고 빽빽하게 끼여 있다면 그달 안에 흐린 날이 제법 많다.-

붉은 노을의 기운 있으면 바람과 비가 순조로우니

망녕되이 화염의 기운 있음 보았노라 말하지 마라

-이는 초하루 절서의 증험이다. 붉은 노을의 기운은 붉은 색 구름과 비슷하니 살피는 자는 상세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나 내일 큰 우레와 비가 있을 줄을

흰 구름이 이미 두세 개의 별을 감싸고 있네

-흰 구름이 북두칠성 가운데 두세 개의 별을 싸고 있으면 또 큰 우레와 비가 있다.-

파도와 같고 솜과 같은 것이 바람 이는 것을 주관하고

물고기 같고 거북 같은 것이 비 후두둑 듣는 것을 주관하네

-구름 기운이 희기가 물결 파도와 같고 어지럽기가 날리는 솜과 같은 것은 큰 바람이 일 징조이고, 검은 기운이 물고기와 같고 거북과 같은 것은 또 큰 비가 후두둑 후두둑 내릴 징조이다.-

북두성 아래나 입구에 보랏빛과 검은 빛 띠면

나흘 혹은 닷새 안에 틀림없이 우레가 치리

-북두성 아래나 북두성 아래에 보랏빛이나 검은 기운이 있으면 4, 5일 이내에 우레와 비가 있다.-

흑색 구름은 당일 밤에 응하고 적색 구름은 사흘 뒤에 응하며

오색구름이 섞여 있으면 하늘의 재앙이 내린다.

-흑색 기운의 구름은 당일 밤에 비가 내리고 적색 기운의 구름은 사흘 안에 비가 내린다. 또 오색이 섞여있는 구름은 하늘이 위엄을 부리고 노하여 우레와 번개와 바람과 우박을 내리니 이것이 하늘의 재앙이다.-

상일에는 사물을 내고 휴일에는 만물을 펴네

다시 구름 색을 보고 비가 올 기일 점을 치네

청색 적색 백색 흑색은 본디 색깔 있고

목 화 금 수는 일시가 정해져 있지

-청색은 목일(목일)에 응하고 적색은 화일(화일)에 응하며, 백색은 금일(금일)에 응하고 흑색은 수일(수일)에 응하는 류이다. 목일은 갑일과 을일이고 화일은 병일과 정일이다. 이것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비오는 날을 정할 수가 있다. 무릇 하늘이 비를 내릴 때에 왕상(왕상)의 날에는 만물을 내고 휴수(휴수)의 날에는 만물을 펴니, 상서로움을 내리고 재앙을 내린다고 할 수 있다.-

닥쳐올 해의 풍흉을 알려고 할진댄

이날 비가 많은지 적은지 볼지어다

-이는 다시 아래 문장의 여러 요긴한 날을 일으켜 허두에 응한다.-

봄날 임자일에 비가 내리면 굶주린 사람을 보고

겨울날 임자일에 비가 내리면 시름겨운 새소리 듣는다

여름날 임자일에 비가 내리면 소가 양식이 없고

가을날 임자일에 비가 내리면 물고기 양식이 없네

-이 몇 구는 네 계절의 임자일에 비가 내린 재해를 극언한 것이니, 사람이 소와 새와 물고기와 함께 모두 양식이 없다.-

병인일 정묘일에 비 내리면 쌀값이 배가 되고

-이날 비가 오면 쌀값이 비싸진다.-

갑인일 을유일에 비 내리면 주린 기색이 많네

-이날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

봄에 갑자일에 비 내리면 60일 동안 가뭄이 들고

-육순(륙순)은 60일이다. 조(조)는 가뭄이다.-

여름 갑자일에 비 내리면 곡식이 줄고 가뭄 닥치네

-갑자일에 여름에 비가 오면 곡식이 줄고 또 큰 가뭄이 든다.-

가을 갑자일에 비 내리면 홍수가 지고 쌀값이 치솟고

-갑자일에 가을에 비가 오면 반드시 홍수가 지고 오는 겨울에 쌀값이 또한 비싸진다.-

겨울에 오랫동안 눈이 오면 여름 전답을 거두지 못 하네

-겨울에 갑자일에 비가 오면 차가운 눈이 오랫동안 내리고, 또 오는 여름 전답을 거두지 못한다.-

네 절서의 마지막 달의 갑자는 또 그렇지 아니 하니

봄 가을 겨울은 물이지고 여름은 무덥네

-네 절서의 마지막 달은 갑자일에 비가 오는 것이 좋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봄 갑자일에 비가 오면 배를 타고 저자로 들어오고, 여름 갑자에 비가 오면 가뭄에 타 들어간 땅이 천리나 되며, 가을 갑자일에 비가 오면 나락 이삭에 싹이 터 버리고, 겨울 갑자일에 비가 오면 날리는 눈이 천리나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저 갑자일에 비가 왔을 때의 해로움만 알고 다른 날 비가 왔을 때의 좋은 점을 모른다면 어찌 함께 천시를 논할 수 있겠는가.-

봄 여름 갑신일에 비 내리면 벼와 기장이 잘 되고

가을 겨울 갑신일에 비 내리면 역병이 많다네

여기서는 네 계절의 갑신일에 비가 왔을 때의 재앙과 상스러움에 대해서 말했다.-

봄날 을묘일 여름날 정묘일에 비가 내리고

가을날 신묘일에 비 내리면 곡가가 얼마나 비싼가

겨울날 계묘일에 비 내리면 봄 곡가가 비싸니

큰 가뭄에 바야흐로 병란이 휩쓸고 가리

여기서는 네 계절의 을묘, 정묘, 신묘, 계묘일에 비가 왔을 때의 징험을 말했으니, 자세히 살펴보고 분석해야 한다.-

이날 또 백성들의 편안함의 여부를 점치니

흐리고 비가 내려 역병에 걸릴까 염려되네

-이날이라고 한 것은 위에서 말한 네 계절의 을묘, 정묘, 신묘, 계묘일이니, 이 네 묘일에 비가 오면 반드시의 역병이 많다.-

네 계절의 인일 묘일에 비 내리면 모두 곡식이 귀한데

큰 비 내리면 큰 흉년이요 작은 비 내리면 작은 흉년들지

-이것은 여러 인일과 묘일에 비가 왔을 때를 두루 말한 것이다.-

임술 계해일에 비 내림은 병갑의 때를 탐이니

천한 사람이 귀한 이를 벰이 이미 조짐 있구나

-임술 계해일에 오는 비는 병갑의 때를 타야 그치니,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베는 변괴가 있다.-

정월 오월 구월엔 살이 축일에 있고

이월 유월 시월엔 살이 술일에 있네

삼월 칠월 십일월엔 미일에 병화가 있고

사월 팔월 십이월엔 진일에 계책이 있네

만약 빗소리 있으면 적이 와서 범하리니

몇 개월 안에 반드시 상란이 있으리라

-이것은 달마다 살일에 비가 왔을 때의 해로움으로 적이 와서 범하는 것이 그 기간이 몇 개월 안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갑신일에서 기축일까지 비 내리면 보리가 귀하고

갑일 을일 병일 정일에 비 내리면 여름 갈이 좋을시고

-갑신일로부터 기축일까지 비가 오면 보리가 귀해지고, 여름에 갑일·을일·병일·정일에 비가 오면 농사짓기에 좋고 비가 오지 않으면 이와 반대가 된다.-

경진일 신사일 미일에 비 내리면 벌레들 죽고

여름 병진일에 비 내리면 벌레들이 생겨난다

-경진일과 신사일 및 미일(미일)에 비가 오면 벌레들이 죽고, 여름 석 달 동안 병진일에 비가 오면 온갖 벌레들이 생겨난다.

여러 책에서 노래 모아 나의 뜻 붙이니

구름이 모두 부앙 가운데로 돌아 가네

천시와 인사가 모두 딱 들어맞으니

만약 알게 되면 신묘함 가이없으리

기유년 여름 4월 무자일에 관규루(관규루) 주인이 용연산방에서 짓다

4월 11일 기축

반은 맑고 반은 흐림. 하늘 기운이 무덥고 찌는 듯하다.

4월 12일 경인

맑음. 

4월 13일 신묘

맑음. 이날 동제(동제)들과 함께 용연에서 노닐며 입으로 몇 수를 읊조렸다. 그리고 반석(반석)에 제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덕하동 귀암 가에서 학을 날려 보내니

-귀암(구암)은 홍가동(홍가동) 위 장항(장항 노루목)의 앞에 있다. 옛날에 절과 암자가 있었다.-

가운데 신령스런 명소 있어 용연이라네

평평한 반석이 오륙 리에 펼쳐졌는데

몇몇 기이한 흔적 절로 천연이로구나

선인들이 놀던 자리 말발굽이 찍혔고

도승이 다녀간 뒤 석장이 새겨졌네

서암의 좌우에는 모두가 작약꽃이니

따순 바람 긴 해에 객이 소요하누나

몇 길 돌탑은 그 누가 쌓았나

지는 꽃 적적한데 새만 지저귀누나

유유한 구름 천년 동안 용루를 노닐었를 터

-용연 옆 50보 쯤에 있는 후(후)가 용루(룡루)이다. 글씨는 이동악(리동악)이 새겼다.-

오경의 밤은 밝아 만월대로구나

-만월대(만월대)는 석탑의 서쪽 우단(우단) 가에 있다.-

아지랑이 호탕하고 녹음은 짙은데

더구나 청명한 사월의 날씨임에랴

기관병 앞에는 물고기와 새가 많고

-기관병(기관병)은 찬상적(천상적) 아래 종각봉(종각봉) 앞에 있다. 글씨는 이명환(리명환)이 새긴 것이다.-

우산봉 머리는 구름 안개 거두네

-우산봉(우산봉)은 기관병 북쪽에 있다.-

물결마다 따사로우니 물고기를 한껏 즐겁고

수풀마다 꽃이 지니 새가 잘도 지저귀네

골짝 깊으니 혹 낚시꾼이나 나무꾼 있으려나

땅이 외져 본디 인마의 소란함이곤 없네

차운 시내 하얀 조약돌 정갈하디 정갈하고

아름답고 기이한 화초는 사시에 좋구나

이 또한 인간 세상의 별천지이니

굳이 진짜 봉래도를 찾을 것 무어있나

오늘 무우에서 노래 읊조리며 돌아오는 사람

당년에 석실에서 독서하던 몸일세

한가한 날 맑은 유람 비록 산수이지만

때때로 일념이 풍진세상 벗어났네

날 저물어 문득 하산하는 길 찾는

어둑한 비탈길에 여덟 아홉 사람이여

4월 14일 임진

대체로 맑고 조금 흐림. 이날 관인(관인)이 각 고을을 순찰하면서 탁지부(도지부)의 훈령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주세(주세)와 담배세(연초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올해부터 2원씩을 내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셋돈을 내지 않는 백성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담배를 심거나 술을 빚을 수 없게 하였다. 이는 모두 협잡에서 나온 따위였는데 당시에 단발을 한 친일개화파 이 탐관오리들이 왜놈들에게 빌붙어 주식회사(주식회사)를 차려 민간의 이익을 긁어모으려 만든 것이다. 훈령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

술 1석을 빚으려는 자는 셋돈 100전(전)을 내고, 50석을 빚으려는 자는 50여 민(민)을 내야 한다. 또 담배를 심을 경우 900주 이하로 심는 자는 셋돈 50전을 내고, 900주 이상 심는 자는 셋돈 200전을 내야 한다. 또 증표를 내어주는 출표금(출표금) 50전을 내야한다. 만약 개인적으로 술을 빚거나 개인적으로 담배를 심는 자는 중형으로 다스린 뒤 범한 물품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벌금액의 많고 적음을 심의하여 100민에서 800금까지 적용하여 매긴다. 예컨대 술을 팔거나 담배를 파는 경우에도 모두 셋돈을 낸 전표의 증거가 있은 뒤에야 방매하는 것을 법령으로 삼는다.

내가 채 다 보기도 전에 일변 말을 하고 일변 탄식하며 “모르겠다. 전대에 법령을 집행하던 자 가운데 과연 민간의 자본을 긁어먹으려고 거짓으로 주금(주금)을 만든 자가 있었던가. 금하려거든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금하게 해야 옳고, 셋돈을 거두려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모두 셋돈을 내게 하는 것이 이른바 법이다. 어찌하여 셋돈만 내면 금법이 없어지고 셋돈을 내지 않으면 금법이 있단 말인가. 이는 지금 말할 나위 없이 쇠퇴한 세상인 것이니 군자가 붓을 대기도 부끄러운 곳이다. 예부터 술을 권하는 책이 많다. 「주관(주관)-주례(주례)의 별칭」에 평씨(평씨)가 술을 관장한다고 하니 까닭에 삼가 ……”16)

4월 20일 무술

낮에는 맑다가 밤에 흐림.

4월 21일 기해

동천에 해가 따스하고 서풍이 불다가 저물녘에 흐려졌다.

4월 22일 경자

맑음. 

4월 23일 신축

해는 따스하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었다. 낮의 여름이 적적했다.

월산 산인(월산산인) 교거 일록(교거일록)1

4월 4월 24일 임인

뜬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고 비가 몇 방울 내렸음. 오늘날 세태가 날로 변하여 문운(문운)이 크게 막혀 함께 토론할 이가 거의 드물고, 양아(양아)의 소식도 또한 깜깜하게 들리지 않으니, 마음이 몹시도 울적하다. 내당에 들어가 노모께 인사를 드리고 이어서 강좌(강좌)로 떠날 차비를 했다. 오후에 출발하여 가다가가다가 주촌(주촌) 장터에 이르러 객점에 들어 유숙하였다.

4월 25일 계묘

흐림. 아침 식사 후 걷다가 뛰다가 하여 해질 무렵에 나남(라남)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고 기쁘게도 부주(부주)께서 기체후가 편안하고 건강하셨다.

4월 26일 갑진

맑음. 이른 새벽에 아버지의 숙소에 들어가 아뢰기를, “지금은 세도가 날로 변하고 북쪽의 기약도 또한 없습니다. 까닭에 소자의 마음과 정신이 안타깝고 울적하니, 강서(강서)로 길을 떠나 일변 창의(창의)에 관한 소식을 탐문하고 일변 청나라의 동정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아버지께옵서는 깊이 생각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부주(부주)께서 혀를 차고 탄식을 하며 날더러 말씀하시기를, “지금 듣자니 왜적이 우리 한국을 마치 식민지처럼 여긴다더구나. 그래서 연방국의 조약을 체결하여 열 사람의 대신을 파직하고서는 일본 총무대신(총무대신)으로 각 도를 마음대로 다스리게 하여 관찰사와 군수도 그놈이 모두 임명한다더구나. 각사(각사)와 각향(각향)엔 이미 인명과 가축, 아궁이, 화장실에 대한 셋돈을 정했고, 기타 각종 곡식, 수레, 술 등 각양의 물품에 대해서도 모두 셋돈을 거두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지. 아, 오늘날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적들은 월남을 침략한 프랑스인과 같다. 차마 가만히 앉아서 그 모욕을 받을 수 없고, 차마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볼 수가 없구나. 네 마음이 떠나고 싶다는데 내가 어찌 저지하겠느냐. 다만 네가 길을 나선 뒤로 늘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을 삼가 네 몸을 잘 지켜서 모쪼록 화를 자초하지 않는다면 늙은 이 아비의 마음이 또한 위로될 터이다. 너는 부디 염두에 두거라.” 하셨다. 나는 명을 받잡고 물러 나왔다.

4월 27일 을사

낮에는 맑다가 밤에 흐림. 이날 낮에 이정남(리정남), 차옥균(차옥균)이 함께 찾아와 극도로 담론을 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흩어져 돌아갔다.

4월 28일 병오

뜬 구름이 해를 가렸으며, 우레가 치고 비가 왔다.

4월 29일 정미

대체로 흐리고 조금 맑음. 이른 아침에 부주께서 나에게 명하시어 말씀하기를, “지금 단오가 점점 가까워 오니 며칠 뒤에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너는 여기에 머물러 천천히 행장을 꾸리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너도 또한 서쪽으로 떠나거라.” 하였다. 나는 명을 받잡고 물러 나왔다.

4월 30일 무신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맑음.

5월 1일 기유

대체로 맑고 조금 흐림. 일식이 있었다.

5월 2일 경술

우레가 치고 비가 왔는데, 아침에 퍼붓다가 저녁에 구름이 걷혔다. 신시 무렵 한 통의 서함을 써서 서상욱(서상욱) 씨에게 보내어 중국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5월 3일 신해

날씨가 흐리다가 또 비가 왔다. 이날 낮에 부주(부주)께서 길을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가셨다.

5월 4일 임자

우레와 비가 성을 지나감. 구름이 옅어지고 해가 빛났다.

5월 5일 계축

한차례 비가 내리고 또 맑음.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었다. 이날은 하지이자 단오이다. 이 명절을 만나 나그네의 회포를 가누기가 어려워 여러 지기들과 술을 사 마시고 실컷 취하였다.

5월 6일 갑인

하늘은 맑고 구름은 엷음. 비가 지나간 뒤 햇무리가 졌다. 식사 후 지기들과 저자에 나가니 무늬 놓은 비단이며 그림이 그려진 그릇이며 유리며 금철이며 각종 섬세하고 진귀한 물건들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고, 한국와 일본 양국의 백성들이 약 만여 명이나 되었다. 군용 기지 안에 있는 일본 사람들의 관시(관시)에는 일본인들이 수천이나 많이 있었고, 한국 사람들이 파는 음식점도 또한 8백 군데가 넘었다. 다만 청인들 가운데 와서 일하는 이는 30분의 1 정도였다.

5월 7일 을묘

또 비가 옴.

5월 8일 병진

아침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왔으며 구름 빛이 해에 비쳤다. 

5월 9일 정사

비가 올 듯 비가 올 듯 하더니 날씨가 흐려지고 또 비가 왔다.

5월 10일 무오

흐리다가 비가 오다가 함. 이날 저녁 남사(남사)에서 온 사람이 이야기를 들으니 곡식 벌레가 크게 들끓어 들판에 푸른색이라곤 없다고 한다.

5월 11일 기미

가랑비가 내림. 해가 질무렵 부주(부주)께서 본댁으로부터 돌아오셨다. 어머니께서 강녕하심과 집안 내의 대소 사람들이 모두 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5월 12일 경신

조금 비가 내림.

5월 13일 신유

반은 맑고 반은 흐림. 이날 남쪽과 북쪽의 일본 군병들이 나남(라남)에 크게 모여 무예를 연마하고 재주를 뽐내었는데 약 6백여 군(군)이었다.

5월 14일 임술

조금 맑다가 대체로 흐림.

5월 15일 계해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림. 나그네의 마음이 처연하였다.

5월 16일 갑자

날씨가 맑았다가 흐렸다가 하고 구름과 안개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함. 이날 청나라 사람과 한국 사람으로서 나남에 들어와 일하는 이들이 말을 다투어 으르렁 거리다가 이어서 서로 돌을 던져 싸웠는데, 부상을 입어 거의 죽게 된 이가 10여 인이나 되었다.

5월 17일 을축

맑음. 이때에 왕왕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내가 듣고 몹시 기뻐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다렸다.

5월 18일 병인

하늘은 맑고 기운은 청명하였다.

5월 19일 정묘

낮에는 맑다가 밤에 비가 옴. 오전이 이수림(리수림) 씨가 찾아왔다. 담소를 나누었다. 조금 있다가 돌아갔다.

5월 20일 무진

흐리다가 비가 오다가 함.

5월 21일 기사

소서. 유월절. 하늘은 맑고 구름은 걷혔다. 바람이 맑고 볕이 따뜻했다.

5월 22일 경오

낮에 흐리다가 저녁에 비가 옴. 이달 내에 비록 큰 비는 없었지만 그러나 비가 오지 않은 날도 거의 없었으니, 흐르는 물에 농가에서 수해를 입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5월 23일 신해

대체로 흐리고 조금 맑음. 이날 밤에 동강(동강) 사람이 와서 묵었다. 또 말하기를, “러시아 사람으로 하여금 한국 사람들 가운데 서양에 들어간 자들을 몰아내어 송왕(송왕), 영해(령해) 등지로 축출하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였다. 내가 듣고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 몰아내어 축출할 리가 있겠는가. 이는 관리(관리)가 대중을 모으는 계책이 아니니, 러시아 사람들의 세력을 빌리려 그렇게 했던 까닭인가.” 하였다.

5월 24일 임신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비. 이달에 궂은비가 연 열흘 동안 내려 그치지 않으니 도로가 진흙 구덩이가 되었다. 까닭에 20여 일이나 발이 묶여 출발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하고 있다.

5월 25일 계유

밤에 비가 오다가 아침에 개더니, 저녁에 다시 흐려졌다.

5월 26일 갑술

구름이 끼고 비가 부슬부슬 내림.

5월 27일 을해

묵은 비가 아침에 그치고 날씨가 반쯤 맑아짐. 아침 식사 후에 부주(부주)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강서(강서)를 향해 출발했다. 마침 신향(신향)에 사는 김태영(금태영) 씨가 들어가는 것을 만나 동행하여 수성(수성)을 지나 청암(청암)에 도착했다. 청암은 부령부(부녕부)의 관할지인데, 산악이 험준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를 짓는 집은 드문드문 있고 다만 보이는 건 돌산이 이르러 오는 곳에 수목이 울창한 것뿐이었다. 부지런히 길을 가서 장항(장항)을 지나고 허통동(허통동)에 이르러 장씨(장씨)의 객점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이곳은 나남과의 거리가 75리이다.

5월 28일 병자

아침에 비가 한차례 지나가고 음산한 구름이 산에 가득하였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출발했다. 상념에 잠긴 채 15리를 가서 부령읍(부녕읍)에 도착하니 관사는 청빈하고 읍리는 쓸쓸하였으며 안팎의 인가라곤 백 몇 가호에 지나지 않았다. 앉아 쉬다가 잠시 후에 길을 떠나 무릉대(무릉대)에 이르러 객점에 들러 밥을 먹었다. 걷다가 달리다가 하여 무산령(무산령)을 넘고 고풍산(고풍산)을 지나 하교(하교)에 이르렀다. 이곳은 부령읍과의 거리가 80리이다. 길가에 있는 객점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5월 29일 정축

아침 하늘은 해가 따뜻했고, 해질 무렵엔 비가 내리고 석양이 비꼈다. 아침식사 전에 출발하여 영산(령산)을 지나 회령(회녕) 비석거리(비석거리)에 이르러 객점에 들어가 아침을 먹고, 길을 재촉하여 회령읍에 이르렀다. 관사의 좌우가 모두 일본의 깃발들인데, 저자가 번화하여 무역하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왕래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앉았다가 곧장 일어나 북문으로 나아가 두만강(두만강)을 건너 송언(송언)을 지나 유전곡(류전곡)에 이르러 객점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남쪽으로 하교(하교)와의 거리가 90여 리이다.

6월 1일 무인

위성(위성). 맑음. 이른 아침에 일어나 출발하였다. 노령(로령)을 넘어 신흥평(신흥평)에 이르렀으니, 옛날의 허망창동(허망창동)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부터 북쪽은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이 풍부하여 우리 동국의 유이민들이 대부분 여기에 거주한다. 계속하여 길을 가서 금곡(금곡)을 지나 주왜도양(주왜도양)을 나가서 허문리(허문리)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오후가 되었는데, 걸어온 거리가 60리였다. 높은 곳에 올라 산수의 기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이나 탄미하다가, 산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와 석마장동(석마장동)에 이르러 차호균(차호균) 씨를 찾아갔다. 차호균 씨는 본디 경성(경성) 사람이니 또한 강개한 선비이다. 동포들이 산지사방 도망한 뒤로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서 정착하였으며, 아동들을 데리고 학문을 권장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서로 만나 안부를 나눈 뒤 내가 찾아온 뜻을 자세하게 말했다. 이어서 그에게 물었다.

“근래 창의의 소식은 어떠하오이까?”

“달포 전에 간혹 의병을 움직인다는 말이 들리더니만 근자에 들어서는 깜깜하게 통 아무 소리도 없소.”

“관리가 병사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청나라 사람들과 교섭하였소?”

“나도 잘 모르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물었다.

“청나라의 요즈음 정세는 어떠하오이까?”

“지금 청나라는 육군 부도통함독판(륙군부도통함독판) 오록정(오록정)이 와서 길림(길림)과 연길(연길), 훈춘(휘춘), 영고(녕고), 탑림강(탑림강) 등지를 진안하고 있는데, 관리가 엄정하여 부임한 날 저녁에 지난날의 탐관오리들을 모두 주살하고, 청백리로 교체하여 다스리게 하고 있소.  또 아홉 개의 영문(영문)을 설치하여 날마다 무예를 익히고 병사를 조련하고 있소. 그리고 한국 인민들을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며 궁핍한 사람들을 거두니, 예컨대 우리 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일본 병사의 징집을 잘못 받은 자라면 즉시 본대에서 찾아서 빼내어 돌려보낸다오. 만약 청나라 사람과 한국 사람이 모두 죄가 있을 경우 청나라 사람에게는 벌을 무겁게 내리고 한국 사람은 잘 타이르니, 까닭에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로서 간도(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이 편안히 아무 일도 없이 지내고 있소. 그리고 남영(남영)과 북영(북영)에 오는 상인들이 일본 사람들인 경우에는 경찰들을 시켜 빙 둘러 지켜 서서 청나라 사람과 한국 사람이 드나들며 사고 팔 수 없도록 하니, 그 때문에 달포 내에 용정(룡정)으로 돌아간다오. 용정은 본일 사람들이 관문을 설치하고 병막을 세운 곳인데, 3, 4년 전에 통감부(통감부)를 설치하여 수비대를 주둔시켜 한국 인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핑계 삼아 관할지를 조금씩 잠식하려 계획하였오. 지금 오록정 독판(오독판)이 변방에 와서 진안함에 관문을 여는 자에 대해서는 관시(관시)를 몰아내어 그들이 터를 잡지 못하고 나무를 베는 자들에 대해서는 벌목을 금지하여 그들이 도끼질을 하지 못하니, 그래서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의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어 상해를 입기도 하고 살해를 당하기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오. 그런데 근자에 듣건대 일본 병사가 암암리에 두만강을 건너오고 청나라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강에 임해 지키고 있다고 하니,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을 벌일 날이 멀지 않아 있을 듯하오. 관리(관리)가 어찌 이런 기미를 모를 것이며, 안다면 움직임이 없을 수 없을 테지요.”

내가 가만히 한참동안이나 한숨을 내 쉬었다. 이어서 한국과 청나라가 교섭할 경우의 이해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 잠자리에 나아가서야 대화를 파했다.

6월 2일 기묘

하늘은 맑고 해가 따뜻했으며, 성근 비가 잠깐 내림. 이날 낮에 차호균 씨와 시 한 수를 읊었다.

서강을 건너오매 취한 눈 넓어졌는데

하늘에는 별자리 몇 번이나 돌아왔나

멀리 찾아와 지기와 만나매

기쁘게도 토론 자리 열림을 보네

검의 기운엔 강물 소리 들어오고

거문고 마음엔 산의 빛 다가오네

한가로운 가운데 일이 있나니

이따금 기재를 묻노라

위는 당률(당률)의 운(운)이다.

6월 3일 경진

초복.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흐림. 이날 산에 올라 맘껏 읊조리고 돌아왔다.

6월 4일 신사

성근 비 사이로 석양이 비낌. 날씨가 무덥고 찌는 듯하다.

6월 5일 임오

몇 방울의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며 날이 무더웠음. 아침에 조용하게 차호균씨 에게 말했다.

“지금 보니 간도(원주-간도는 바로 강서(강서)이다.) 한 지방은 십승지(십승지)18)라 할 수 있소. 더구나 수십 년 동안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풍성하니 만약 의거를 도모할 경우 이 지역이 아니면 할 수가 없소. 일찍이 듣자니 한국 백성들이 서강(강서)에 이주해온 자가 수만 여 가호라고 합디다. 한 집에서 한 사람의 식량을 제공하면 수만의 의사가 거병할 수 있소. 그러나 먼저 청나라 사람들과 교섭을 하여 편안한 웅거지를 얻은 뒤에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병졸들을 조련하여 청나라가 전쟁을 시작하기를 기다려 중간에 기회를 빼앗아 일어난다면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오만, 관리(관리)가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하오. 만약 청나라 사람과 교섭하지 않거나 또 서강의 군량 보급로를 뚫지도 않고 육진(륙진) 지역의 적을 제거하지도 않고서 먼저 경성을 향해 진격한다면 손해만 있고 이득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의병을 일으켜 비록 움직인다고 해도 나는 장차 동조하지 않을 것이오.”

차호균 씨가 수긍하였다. 이윽고 대화를 파하였다.

6월 6일 계미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고 중천에 햇무리가 끼었다.

6월 7일 갑신

대서. 유월중. 우레와 비가 잠깐 지나가고 해는 따뜻하고 바람은 살랑거렸다.

6월 8일 을유

크게 우레가 치고 큰 비가 내려 홍수가 졌다. 이날 낮에 이여규(리여규) 씨가 나를 찾아왔다. 비를 무릅쓰고 와서 함께 가기를 청했으나 비가 와서 갈 수가 없었다.

6월 9일 병술

궂은비가 잠시 내리다가 밤이 되어 맑아짐. 아침 식사 후에 이여규 씨가 매우 간곡하게 가기를 청했다. 내가 출발에 임해 차호균 씨에게 말하기를, “별다른 사고가 없으면 5, 6일 뒤에 와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차호균 씨가 그러마고 허락했다. 내가 이어서 작별을 고하고 부지런히 길을 가서 동성용(동성용)에 이르렀다. 밤에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났으나 배가 없어 건너지 못했다.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모의산(모의산) 앞에 이르러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에 올라 물살을 타고 내려왔다. 하서전(하서전)의 이여규 씨 댁에 이르니 날이 이미 해질 무렵이 다 되었다.

6월 10일 정해

아침에 맑다가 저녁 무렵에 흐림.

6월 11일 무자

맑음. 

6월 12일 기축

바람은 맑고 해는 따스하며 안개가 먼 산에 자욱하게 서림. 며칠 이래 이여규 씨 댁에 머무르며 대규(대규)라고 이름을 바꾸고 의원으로 가장했다. 소문이 퍼져 병자가 있는 집안에서 찾아와 진찰을 청하는 일이 잦았는데, 혹 가기도 하고 혹 가지 않기도 했다. 이날 저녁 차호균 씨가 나를 찾아와 만났다.

6월 13일 경인

중복. 맑음. 아침에 차호균 씨더러 말하였다. “지금 듣건대 오록정 독판(오독판)이 사람을 아끼고 선비에게 겸손하여 영웅의 기국이 있다고 하니 내 한 번 가서 만나보고 대화를 한 마디 나누고 싶고. 동행할 의향이 있소?” 차호균 씨가 말하였다. “좋소.” 나는 즉시 몸을 일어나 쉬지 않고 길을 가서 쌍포동(쌍포동)을 지나 김씨의 재숙(재숙)에 들어갔는데, 마침 복날이라 개를 삶고 술을 걸러 크게 모여 즐겁게 먹고 마시고들 있었다. 내가 차호균 씨와 좌중에 나아가 목마르던 차에 몇 잔을 거푸 마셨다. 내가 노래를 또 오래도록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이미 기울었다. 바쁘게 재장(재장)과 이별을 하고 몇 집을 건너 차기학(차기학) 씨 댁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차기학 씨 또한 경성 사람으로 20년 전에 서강을 건너 이 지방으로 왔다. 집안에는 4명의 아들이 이었다. 이름이 병률(병률), 병규(병규), 병원(병원), 병철(병철)이고 나이는 모두 스물 안팎이었다. 병률과 병원은 모두 문자를 조금 아는데다 사람됨이 반듯하고 명확하며 말수가 적어 유자(유자)의 기색이 있었다.

6월 14일 신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맑음. 식사 후에 호균씨와 동행하여 지국자(지국자)에 도착하여 남영에 이르렀다. 이날 오록정 독판이 영문에 행차하였는데, 문지기 병사가 한사코 거절하여 들어가 만날 수가 없었다.  반나절을 방황하다가 발길을 돌려 용암촌(룡암촌) 차 모(차모) 씨 댁에 가서 유숙하였다.

6월 15일 임신

날씨가 덥고 찌는 듯하여 벌건 화로 속에 있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내가 이미 박도헌(박도헌)이 중국어를 잘 한다는 사실을 들었기에 마음속으로 부탁을 하려 했다. 그러나 북영(북영)에 이르러 두루 물어 서로 만나보매 사람됨이 몹시 교활하여 대사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논의하기에 마땅하지 않으므로 나는 떠돌이 의원이라고 핑계대어 말해 놓고 유숙하며 밥을 붙여 먹었다.

6월 16일 계사

맑음. 이날 저녁 동강(동강)에 사는 윤낙서(윤락서) 씨가 와서 함께 묵었다. 그 사람의 미목(미목)이 청수하고 골격이 웅위한 것을 보매 심상한 술꾼이나 노름꾼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주장을 자세하게 말하자 윤낙서 씨가 크게 기뻐하며, “나도 또한 이러한 마음이 있었오.” 하기에, 내가 그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

6월 17일 갑오

날씨가 흐리고 가랑비가 왔다. 이날 통역인(통역인)을 데리고 들어가 왕 아무개를 만났다. 왕 아무개는 오록정 독판(오독판)의 부관이다. 인사가 끝나고 자리를 정한 뒤에 왕 아무개가 통역인을 통해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로 오셨소?”

내가 즉시 종이와 붓을 부탁하여 대담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동국에서 태어나 늘 망국(망국)의 탄식을 품고 있소. 지난 5월 무렵 청나라가 일본과 전쟁을 할 것이라는 새로운 소문을 접하고 애통한 심정을 호소하려고 멀리서 강호(강호)를 건너 왔소.”

“어떠한 주장이 있소.”

“동국은 중국의 울타리요. 의리상으로는 군신의 관계가 되고 친밀하기로는 부모 자식과 같소. 까닭에 위급하면 도와주어 보호해 주고 편안하면 보태주어 교화하여 자득하게 한 것이 4천여 년의 역사라오. 근년 이래로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하여 우리 강토를 침략하고 우리 수도를 점거하였으며 충직하고 선량한 신민을 살해하고 윤리를 멸절시켰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동국의 국토를 모두 삼키고는 점점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잠식하고 있으니, 이는 비단 우리 동국 사람의 아픔일 뿐 아니라 또한 중국의 큰 우환거리요.  만약 대인께서 우리 동국을 미천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겨 버리지 않으시고 기꺼이 서로 수용하신다면, 천천히 동지 수천 명을 모아 대인께서 한번 내려치는 힘을 도와 함께 강포한 적을 쳐부수고 장차 옛 강토를 회복하여 지난 조정의 우호를 다시 닦아서 오늘날의 큰 은혜에 보답하겠소. 궁금하오이다. 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독판께서는 한국사람 가운데 나이가 한창이고 힘이 센 자들을 선발하여 월급을 지급하며 그들로 하여금 열심히 무예를 강마하고 기예를 익히게 하여 3개월 뒤에 경찰관의 보조원으로 쓸 계획을 하고 있오. 공께서도 또한 상호 보호함에 교섭하시겠소?”

“고맙게도 서로 교섭하여 참여할 방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사양하겠소.”

“그렇다면 공께서 과연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어 입을 수 있으시겠오.”

나는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나와 글로 대답했다.

“맹자(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으로 타인을 감복시키는 자에 대해서는 남들이 속마음에서 기뻐하여 참으로 복종하고, 힘으로 타인을 굴복시키는 자에 대해서는 남들이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니 힘이 모자라서이다.’ 라고 하였소.19) 추읍(추읍)의 성인(맹자)께서 어찌 후세 사람들을 속이시겠소. 그런데 지금 대인께서는 인의(인의)의 선비들을 이끌고 강포한 왜적을 공격하려 하면서 이제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어 입을 수 있느냐는 것으로 질문을 하시오.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어 입는 문제가 과연 오늘날의 급선무란 말이오? 듣고 있자니 몹시도 두렵고 당황스럽소. 저 일본놈들이 덕으로 사람들을 감복시키지 않고서 무력으로 윽박질러 우리나라 수천 년 이래의 전통을 바꾸고자 하니, 까닭에 의병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적들에게 죽기를 기꺼이 원하고 있는 것이오.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시오.”

왕 아무개가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다가 말했다.

“일이 실로 중대한 것이니 내 한 사람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니오. 오록정 판독께 아뢰어 서로 모여 의논한 다음에 바야흐로 장차 그대를 부를 것이오.”

그리고는 즉시 수레를 재촉하여 남영(남영)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그를 보내고서 자리를 파했다.

6월 18일 을미

아침에 비가 오다가 저녁에 맑음.

6월 19일 병신

맑음. 이날 저녁 왕 아무개가 와서 말을 전하였다.

“오록정 독판께서 귀공이 오신 뜻을 들으시고는 만만(만만) 치하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군무(군무)가 워낙 바빠 접견할 수가 없기에 나를 시켜 와서 전달하게 하여  귀공으로 하여금 공의 주장을 상세히 진달할 수 있게 하시고, 수용할 수 있는 계책과 실행할 수 있는 계책을 함께 써서 보여주시면 장차 조약을 체결하시겠다고 하였소.”

내가 듣고 사례하였다.

6월 19일 병신

맑음. 이날 의견서를 작성하여 오록정 독판에게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은 중국의 속국입니다. 까닭에 대청(대청) 고황제(고황제)께서 등극하시고 맹서하여 뒤로 3조(조) 8약(약)의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백 년 이래 조회(조회)와 빙문(빙문)의 예가 면면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갑오년(고종 31, 1894) 왜적이 능멸하여 우리 강토를 침략하고 우리 수도를 점거하여 세계 각국에 선포하기를,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보호해 주려는 것일 뿐이다.” 라고 하며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고 국호를 ‘대한제국(대한제국)’이라 하였습니다만, 이는 실로 중국이 원조해 줄까 근심하고 다른 외국이 참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충직하고 선량한 지식인들을 살해하여 입을 봉쇄하고, 우리의 성지(성지)를 침탈하여 저놈들의 병력을 많이 증강시켰으며, 우리의 세금을 거두어 자기들의 지출로 삼고, 백성들을 못살게 침학하는 한편 성현을 배척하였으니, 한 점 춘추대의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과연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연방국의 조약을 맺는다는 말까지 있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지경인데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지경인데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군자(군자)가 피눈물을 흘릴 때요 지사(지사)가 와신상담할 때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에 당도한 지 달포가 넘도록 고소할 관청이 없어 오 독판께서 계신 곳을 전전하다가 그저께 다행히도 왕 부관을 만나 애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토로했는데, 지금 대인이 돌보아 주시어 저의 주장과 어리석은 계획을 모두 말하라고 명하심을 받자와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대인께서는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말을 버리지 말아주소서.

지금 함경북도(함경북도)에 들어온 왜적들이 경성(경성)을 소굴로 삼아 남쪽으로는 성진(성진)과 교통하고 북쪽으로는 회령(회녕)을 점거하여 머리와 꼬리의 형세로 삼은 것이 의연히 바로 상산(상산)20)의 담진(담진)이니, 비록 공격하려 해도 어찌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병사들을 조련하고 군비를 정예화 하는 것이 중국의 장기이고, 적의 형세를 살피고 지형을 관찰하여 우리 동국의 대관(대관)이니, 어리석은 저의 계획으로는 청나라와 한국 두 나라가 합세하여 하나의 군대를 만들어 힘을 합쳐 공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수도는 일본 사람들의 무력에 눌려 있으니 오늘의 대사를 더불어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관리(관리) 이범윤(리범윤)은 오랫동안 동강(동강)에 웅거하고 있어 거느린 병사의 무리들이 엄청 많으니 그들과 합류해야 하고 결탁해야 합니다. 만약 대인께서 전쟁을 시작하는 날에 관리 이범윤의 군대가 또한 경성의 남쪽에서 출병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머리와 꼬리를 움직이지 못하여 힘이 절로 분산될 것입니다. 힘이 분산되면 우리들이 대적해야 할 왜적이 적을 테고 대인께서 대적해야 할 왜적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절대로 패하지 않을 만전책(만전책)이온데, 궁금합니다만 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 또한 창의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지난 가을 분연히 일어났으나 세력에 강약이 있기 때문에 비록 다시 거병하려해도 세력이 점점 궁해져서 몸을 용납할 곳마저 없게 되었습니다. 까닭에 사람들을 아끼시고 선비에게 겸손한 대인의 기풍을 듣고서 천리를 멀다않고 왔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인께서 딱하게 여기시고 아껴 주시어 저에게 일방(일방)의 영채(영채)를 빌려 주시고 일시(일시)의 군비를 도와주신다면 제가 비록 재주가 없지만 무리를 규합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무예를 강마하고 기예를 익혀 차분하게 대인께서 출동하실 날을 기다려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우리 강토를 수복하고 영원히 오랜 우호를 맺음으로써 오늘날 죽음에서 구원하여 다시 살려주신 큰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대인께서는 전조(전조)의 우의를 생각하시어 특별히 학부(학부)21)의 은택을 더해주소서.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6월 20일 정유

맑음. 소인배나 간인(간인)의 이목이 담장 밖에 붙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래서 며칠 이래 청나라의 영관(영관)에 깊숙이 틀어박혀 한 두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6월 21일 무술

맑음. 여명에 오록정 판독이 왕 부관에게 기별하여 말을 전했다.

“내가 문서를 보니 존경스럽고 치하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영채를 빌려주고 군비를 도와준다는 것이 실로 사소한 일이 아니고 무리를 모아 무예를 익힌다는 것도 또한 아이들 장난에 비할 바가 아니니, 만약 오늘 시행한다면 내일 소문이 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저 만국(만국)의 공법(공법)인 국제법이 있으니 어찌 뒷날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보아가며 처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생각건대 외부인들이 말을 할 때에 반드시 말하기를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시작할 날이 분명히 머지않았다.’ 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가서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때에 임해 통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운운

내가 인사를 하고 나오며 차호균 씨더러 말하기를, “오록정 독판이 운운한 것이 여차저차 하니 어찌 울울하게 오랫동안 여기서 기거할 수 있겠오. 더구나 왜놈들이 탐지하여 이목이 빽빽하니 외촌(외촌)에 나가서 가만히 시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오.” 하였다. 이어서 윤낙서(윤락서)를 만나 한참동안 이야기 하고 처연하게 작별하였다. 부지런히 길을 가서 쌍포동(쌍포동)에 이르러 차병률(차병률)의 집에 들어가 쉬었다. 병률이 나를 머무르게 하여 학업을 배우기를 원했으나 내가 그만한 재주가 못된다고 사양하였다. 곧 일어나 길을 나서서 하서전(하서전)에 이르러 차호균 씨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송별하고, 나는 또 이여규(리여규) 씨 댁에 이르러 숙식하였다.

6월 22일 기해

낮에는 맑다가 밤에 우레가 침. 이날 낮에 단율(단률)22)을 지어 벗 지용담(지룡담)에게 부쳤다.

삼강 너머에서 먼 여정 읊으니

삼강은 두만강(두만강), 동관용강(동관용강), 지국우강(지국자강)이다.-

천리 타향에서 유독 그대 보고싶네

내 지산(지산) 아래에서 왔나니

구름 돌아가매 우는 새소리 시름겹네

6월 23일 경자

입추이자 말복이다. 바람은 자고 해는 따뜻하며 구름이 피어오르고 우레가 침. 밤빛이 캄캄한데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6월 24일 신축

흐리고 비가 왔다. 오전에 차기학(차기학) 씨가 나를 찾아와 나에게 자들을 가르쳐 주십사 청하여 말했으나, 물러나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6월 25일 임인

날씨가 흐리고 가랑비가 옴.

6월 26일 계묘

흐림. 저녁 무렵 용담(룡담)이 용포동(룡포동)에서 와서 나를 보았다. 한가지로 똑같은 정회(정회)에 비감과 기쁨이 뒤엉켜 또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후의 사정에 대해 자세하게 파악하여 한 번 이야기를 다 해주자 어느새 동방이 이미 터오고 있었다.

6월 27일 갑진

흐림. 오전에 용담이 돌아가는 것을 송별하며, 다만 내일 다시 만나자고만 말하였다.

6월 28일 을사

하늘은 맑고 해는 길디 길었다. 오후에 길을 나서서 용포동에 이르러 용담을 찾아가 만났다. 그때 용담이 여러 친한 벗들과 「시경(시경)」과 「서경(서경)」에 대해 강론하고 있었는데 즐거워함이 자약하여 편안히 삼대시대의 사람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이 어찌 본심이겠는가. 이날 밤에 「아어록(아어록)」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봄여름 동안 우거하며 시를 읊어 스스로 마음을 술회한 말이었다. 차차로 열람해 보매 모두 양기(양기)를 보존하고 의리(의리)를 부양한다는 관점의 주장이었으니 강개하게 맑은 의사가 아님이 없었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한밤중이 되어 처연히 자리에 나아가 함께 잤다.

6월 29일 병오

술을 마시고 노래하다 보니 이윽고 석양이 서천에 걸려 있었다. 이날은 맑았다.

6월 30일 정미

짙은 안개가 아침에 흩어지자 흰 해가 중천에 나왔으며, 저녁에는 무지개가 쌍으로 뜨고 성근비가 정원을 지나갔음. 아침에 용담과 「손자병법(손자병법)」을 소리 내어 읽다가 한참이나 혀를 차며 탄식하였다. 오후가 되자 마용기(마룡기) 씨가 걸음을 날려 내달려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하여 말했다. “네 명의 괴한이 재실 가운데로 불쑥 들어왔는데, 동작이 볼썽사납고 기세가 양양했습니다. 그들의 용모를 보니 까까중머리에다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곰같은 덩지에 돼지같은 다리통을 한 놈들이었는데, 들어보매 그들의 말씨는 피는 한국 사람인데 뱃속은 왜놈이고 말은 우리말인데 심보는 오랑캐 놈의 심보인 놈들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한결같이 모두가 중화를 바꾸어 오랑캐로 만들고 전통을 훼손하여 왜문물을 옳다고 하는 놈들의 부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담성과 들은 이래로, 나도 모르게 눈은 화등잔 만해지고 머리터럭은 곤두서서 일어서려 하다가 다시 앉고 앉으려 하다가 일어서서 안절부절 하여 진정하려 하였으나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마용기 씨에게 말하기를, “옛날부터 말이 있지 않습디까.  오랑캐는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린다고. 저놈들의 말이 아무리 칭찬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찌 기뻐하겠으며, 저놈들의 말이 아무리 헐뜯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찌 서운해 하겠습니까. 저놈들도 또한 애초에는 우리나라 사람이다가 지금에 이렇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호랑이 앞의 창귀(창귀)23)이고 망량(망량)24) 앞의 이매(리매)25)이며 기선(기선)26) 뒤를 따라 다니는 야차(야차)27)인 자들입니다. 청컨대 존형들께서 들어도 못들은 척 보아도 못 본척 하시면 자신의 마음에 오랑캐 놈들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마용기 씨가 알았다고 대답하며 물러갔다. 잠시 뒤에 그들이 돌아갔다는 보고가 왔다. 내가 담성과 말없이 서로 마주보다가 획연(획연)히 휘파람을 불었다. 당시에 재실 뒤 김 씨의 집에 있었다.

7월 1일 무신

맑음. 일찍 일어나 상읍례(상읍례)에 참례하고 당에 올라 의리를 강론하였다. 어떤 객이 사립문을 두드리는데 보니 바로 고향 사람이었다. 안부 인사를 나누고 이윽고 마치자, 객이 한참을 둘러보다가 말하기를, “공 등이 정도를 버리고 신문물로 들어서려는 이때에 이렇게 양기를 부양하고 음기를 누르려는 거조를 하고 있으니, 비록 제가 못났지만 공경스럽고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과연 도무지 앞뒤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어서 물었다.

“우리 고향에서 오셨겠지요.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객이 말하였다.

“내가 작년에 상경하여 올해 4월에야 돌아갔다가 곧장 이리로 들어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고향 소식은 모르고 서울 소식은 조금 견문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두 말씀해 주십시오.”

“전라·충청·강원 삼도(삼도)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피살된 왜놈들이 몹시 많습니다. 까닭에 머리를 깎은 무리들이 풀이 꺾이고 낙담하여 지방의 고을에서는 발호하지 못하고 신학문에 대한 주장이 경기지방 외에는 성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황상 전하(황상전하 순종)께서 신학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년 중에 내부대신 송병준(송병준)이란 작자가 신학문을 강행하는 일로 조정에 주의(주의)하자 황상 전하께서 ‘신법(신법)을 강행한다면 나라의 위급과 패망을 족히 까치발을 하고서 기다릴 만하니 천천히 시행하는 것만 못하다. 지금 백성들이 흔들리는 것은 신학문이 마음에 푹 배어든 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경은 다시는 말을 말라.’ 하였소. 그런데도 송병준이 목소리를 돋우어 우러러 황성을 범하여 말이 나감에 조심함이라곤 없었소.  법판(법판) 어담(어담)이 곁에서 보다가 비분과 노여움을 가누지 못하여 성난 목소리로 질타하여, ‘대신에게 죄가 있어도 황상께서 가벼이 벌하지 않는 법이거늘, 더구나 신하된 자로서 황상께 집언(집언)하면서 이렇게 감히 범한단 말이냐. 바로 이것이 역신(역신)이니 역신이 어찌 살아날 수 있겠느냐.’ 하며 칼을 빼어들고 내려치자 송병준이 목을 움츠리고 몸을 돌려 피하다가 자빠져 칼이 조금 빗나갔소. 왼쪽 손이 잘려 나가고 모가지의 가죽에 피가 맺히기에 이르러 이등 박문(이등박문)이 송병준을 감싸 안고 달아나며 제 놈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어담을 잡아 수갑을 채우니, 10부 대신 이하의 백관들이 일제히 송병준의 고기를 뜯어먹고자 하였고 일제히 송병준의 살가죽을 깔고 앉고자 하였소. 이에 이등 박문이 어담이 이끌던 육군 7백 명을 해산하고 송병준을 데리고 그놈들의 나라로 돌아갔소. 송병준은 더욱이 불측한 마음을 품고 왜왕에게 호소하여 ‘청하옵건대 한국을 연방국으로 삼아주소서. 그리고 10부의 대신들을 파직시키고 일본의 총무대신으로 전임하여 다스려 주소서. 이것이 국민들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왜왕이 말하기를, ‘네가 한 마디 말을 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들어보았는데, 세계의 국제법이 있는데 어찌 하겠는가?’ 하였소. 송병준이 세 번이나 호소하자 왜왕이 말하기를, ‘네가 진실로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스스로 원한다는 말로 전 세계의 신문에 공표하면 좋겠구나.’ 하였소. 그러자 송병준이 과연 왜왕의 말대로 하여 왜왕이 마침내 우리나라에 사문(사문)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빈말이라고 대답하였소. 그러자 왜왕이 다시 고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말이 이다지도 어긋난단 말이냐? 한국사람 가운데 수구당(수구당) 50인과 통역 1인을 선발하여 동경(동경)에 오라고 하여 회의를 한 뒤에 가부를 결정할 수 있겠구나.’ 하여, 서울에서 왜왕의 말대로 사람을 선발하여 보내려 했소. 그 가운데는 판서 이 아무개도 또한 들어 있었는데, 재판장(재판장)에서 49인이 모두 연방 조약을 맺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으나 이 아무개만이 결연히 불가하다고 말하였오. 그래서 다시 49인만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관광단(관광단)이라는 것이오.”

나는 용담과 서글프게 말을 잃었다. 다시 물었다.

“태상황(태상황 고종)께서는 평안하신지요?”

“작년에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 종실 가운데 준수한 이들과 민씨 가문의 영재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아침 저녁으로 늘 하시는 말씀이 오직 성경현전(성경현전)일 뿐이오. 그리고 거처를 옮기신 처음에 백학 한 쌍이 바람을 타고 구름을 뚫고 훨훨 날아와서 춤을 추고 정전의 모서리에 둥지를 틀었는데, 지금은 자약하게 새끼를 기르고 있으니, 신민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소. 이것이 과연 무슨 조짐이란 말이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리를 파했다.

7월 2일 기유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비가 옴. 오후에 지사(지사) 이성도(리성도) 씨가 와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나누다가 이별하고 자리를 파하였다.-성도(성도)의 이름은 흥기(흥기)이니, 무신년(순조2, 1908) 의거했을 때 사무원이었다. 집은 본읍의 어랑사(어랑사)에 있다.-

7월 3일 경술

비. 이때에 이삭을 갉아먹는 해충이 크게 들끓어 싹을 갉아먹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했다.

7월 4일 신해.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아침에 개어 구름이 흩어지고 해가 나왔다. 식사 후에 용담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별다른 일이 없으니 어찌 능히 여기에서 오랫동안 기거하겠소. 우리 동족 형섭(형섭) 씨의 집이 상서(상서)에 있으니 나는 장차 거기로 가서 묵겠소.” 하고는 즉시 일어나 가려고 하니, 다시 만류하지 않고 나를 보내주며 또 말하였다.

“오늘날 몸을 편안히 하는 계책은 경계함을 가지고 이름을 삼는 것 보다 좋은 것이 없소. 바라건대 우리 존형께서는 오직 삼가고 삼가서 오직 형해(형해)를 방랑하게 하지 마시고 땅을 가려 은거하시어 영재를 얻어 교육을 하시며 이 세월이 넘기신다면, 몸을 보중하는 방도가 좋게 될 것이며 세사에 처하는 요체가 제대로 될 것입니다. 존형께서도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한 방울의 피눈물이 가슴에 맺혀 흐르는 것이야 경연(경연)에 있은들 어찌하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차마 서로 헤어지지 못하여 한편 가면서 한편 말하여 계속해서 10여 리 쯤을 가서 서전덕(서전덕)에 이르러 손을 놓고 서로 바라보니, 하나같은 심정을 다시 무엇에다 비겨 말하겠는가. 한 걸음을 떼고 돌아보고 두 걸음을 떼고 서서 오랫동안 바라보매, 다만 보이는 건 적적한 산과 흐릿한 해 뿐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와 형섭 씨 댁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서로 인사하였다. 밥을 먹고 유숙하였다.

7월 5일 임자

반은 맑고 반은 흐림. 해질 무렵에 차호균 씨가 찾아와 같이 유숙하였다.

7월 6일 계축

하늘은 맑고 해는 따스한데, 우레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식사 후 삼차로(삼차로) 어귀까지 나가 차호균 씨가 돌아가는 것을 송별하였다. 내가 서북쪽 길을 따라 5, 6리 쯤을 가서 산전동(산전동)에 이르러 참봉 김 아무개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7월 7일 갑인

흐림. 아침에 고향 사람을 만나 아버지께 편지를 받들어 올렸다. 한참이나 서글프게 있다가 갑자기 스스로 생각이 나 말하기를, “예전에 듣자니 우리 일문(일문)이 북강(북강)에 흩어져 산다고 하던데 내가 서쪽으로 떠돈 지 몇 개월 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친족 간의 정의를 돈독히 하는 뜻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역이 그다지 서로 멀지 않으니 지금 가 보아야겠다.” 하였다. 곧장 일어나 부지런히 가서 지국자(지국자)에 이르러 영춘당(영춘당)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서쪽 길을 따라 30리 쯤을 가니 한 마을이 있었다. 이름이 천수평(천수평)인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었다. 먼저 세숙(세숙)을 찾아가 인사한 뒤에 알겠느냐고 물으니 한 마을의 대여섯 가호가 모두 같은 씨족이었다. 면면이 나아가 절을 올리고 고향의 일을 자세하게 말하며 며칠을 편안히 지냈다.

7월 8일 을묘

맑음. 

7월 9일 병진

처서. 칠월중이다. 맑음.

7월 10일 정사

날씨가 흐리고 잠깐 비가 옴. 오후에 고향 사람 이태환(리태환) 씨와 강서(강서) 사람 김희남(금희남) 씨가 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7월 11일 무오

날씨가 흐리고 가랑비가 옴.

7월 12일 기미

새벽안개가 끼었는데 아침에 흩어졌고 흰 해가 중천에 떴음. 이날 어떤 사람이 경흥부(경흥부)의 적도기적비명(적도기적비명)을 가지와 보여주었다.

적도기적비명(적도기적비명) 병서(병서)

하늘이 장차 이 사람을 보우하시고 계도하시어 그의 몸에 복록을 내리시고 그의 후손들을 창성하게 하고자 하실 때에 반드시 먼저 그로 하여금 위태로움을 밟은 곳에서 이룸을 어렵게 하시고 험난함을 디딘 곳에서 복행(복행)을 얻게 하시는 것은 대개 경계하고 근신함을 더해주고자 해서일 뿐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덕업을 쌓는 기반을 굉대하게 하고자 하심이요, 또한 음즐(음즐)이 환히 드러나는 자취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 백성을 몰아서 그에게 모아주려는 것이다.

우리 익조 대왕(익조대왕)께서는 오랫동안 경흥부(경흥부)의 간동(간동)에 사시면서 어질다는 소문이 점점 퍼져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귀의하였다. 이때 여진족의 제천호(제천호)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지역에 취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대왕께서 왕래하며 연회를 하며 술을 마시기를 자주 청하였다. 천호의 부하 가운데 대왕을 존모하여 부역하기를 원하는 자가 날로 줄을 이어 찾아오니, 추장이 마음속으로 꺼려 장차 크게 구원병을 빌려 힘을 합쳐 대왕을 치기로 모의하였다. 그리고 대왕께 거짓으로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북쪽으로 궁막(궁막)에 사냥을 나가는데 20일을 약정하여 기한으로 삼아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약속대로 합지요.” 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었으나 또 오지 않자 왕께서 그가 기약을 어긴 것에 대해 괴이하게 여겨 해관성(해관성)을 향하여 떠났다. 중도에 한 늙은 할멈을 만났는데, 머리에는 옹기를 이고 손에는 주발을 들고서 지나갔다. 왕께서 갈증이 심해 불러서 말하기를, “할멈. 나에게 물 한 사발만 주오.” 하니, 할멈이 즉시 주발을 씻어서 물을 따라주어 마시게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공께서는 제천호가 간 곳을 아십니까?” 하였다. 왕이 말했다. “모르오.” 이에 할멈이 그가 구원병을 빌리러 간 정황을 모두 말해 주었는데 아주 상세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공은 어진 분이니, 내 비록 보잘것 없는 사람이지만 감히 애석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에 급히 말을 달려 돌아와 집안 권솔들을 모두 거느리고 배에 태우고서 물결을 따라 적도(적도)에 들여보내고는, 자신은 홀로 손비(손비)와 함께 말을 달려 경흥부 뒤쪽에 있는 고개로 나가서 멀리 간동을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이미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급하게 달려 적도의 맞은편 언덕에 당도해보니 물에는 건너 갈 배가 없는데 앞장서서 몰아쳐오는 3백 여 기병이 거의 후미를 따라잡아 바야흐로 창황하여 벗어날 계책이 없었다. 홀연히 보니 썰물이 질 때가 아닌데도 물이 절로 빠져 마치 끊어진 나루와 같았다. 이에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 겨우 맞은편 강기슭에 오르자마자 물이 다시 크게 밀려오니, 적군이 추격해 왔으나 마침내 건너지 못했고 강물을 따라 들어온 집안 식구들은 먼저 섬에 와 있었다. 이에 넓고 툭트인 언덕을 찾아 도자기처럼 둥그런 구멍을 파고 살고 있노라니,  원근에서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더욱 의지하여 모여드는 것이 마치 시장에 오는 듯하였다.

대개 사람들은 예전부터 범상한 일에는 편안함을 느끼고 기이한 일에는 공경함을 일으키는 법이다. 왕께 여진족의 침략이 없었다면 비록 하늘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 백성들에게 기이함을 보여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어찌 다만 여러 전기에 기록하고 여러 여론에 부쳐 그 이야기를 신이하게 하고 말 것이겠는가. 이제 유신(유신)의 말에 따라 유사(유사)를 명해 그 자리에 비를 세우게 하고 감히 이렇게 전말을 적는다.

적도는 경흥부에서 남쪽으로 50리 거리에 있는데, 사면의 바위들이 모두 붉다. 그래서 적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직까지 도자기처럼 둥그런 구멍을 파고 살았던 옛 터 13곳이 남아 있다. 섬 둘레는 10리인데, 수목이 울창하며 부차가 자생한다. 한번 나무를 베면 풍우가 낮에도 컴컴해지니, 대개 지금까지 기이한 일이 많다고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빈과 태를 침약한 일

주나라의 복이요

호타하가 얼어붙은 것

한나라의 경사일세

풍파도 일지 않고

어룡도 놀라지 않고

푸른 바다 굽이진 곳에

적색의 바위 나란히들 서있네

그 언덕 먼저 올라

가시덤불 헤쳤네

뒤따르던 오랑캐들

입 벌리고 마음 떨었네

하늘이 실로 조짐 보인 것은

백성들에게 의도를 알게함이라

왕업을 이루어 조짐을 실현하니

저들도 오히려 돌아왔네

깊은 토굴들

규모 여태 남았는데

귀신들이 가호하고 있으며

무성한 초목이 덮어주네

조그마한 저 고장이

우리 조정의 만년 기반

어떻게 기록해줄까

이 명이 끝없이 밝혀주리

소자(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지 11년 정미(정조11, 1787) 11월에 세우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원임 규장각제학(겸령경연사감춘추관사원임규장각제학) 신(신) 유언호(유언호)는 하교를 받들어 쓰다. 숭정대부 판돈령부사(숭정대부판돈녕부사) 신 윤동섬(윤동섬)은 하교를 받들어 전(전)하다.

내가 소리 내어 읽기를 두세 차례 하다가 이에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탄식하기를,

“오래 되었도다, 태조의 기업이여. 오늘날엔 과연 누구의 손에 달렸는가? 천리의 국토와 만 백성의 무리는 얻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잠깐이구나. 아, 애통하다. 어느 날에야 어지러운 재앙의 기운을 시원하게 쓸어버려서 옛 강토를 수복하고 매국노를 주벌하여 이 울분을 씻어버릴까?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7월 13일 경신

안개가 걷힌 아침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이 쇠라도 녹일 듯하다가, 우레가 소북 쪽에서 치더니 소낙비가 더위를 씻어 내렸다. 갑자기 서풍이 크게 일어나니 이삭을 갉아먹는 해충이 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 날 오록정 독판(오독판)이 들로 나가 해충의 재앙을 두루 살펴보았다. 눈썹을 찌푸리며 즐거워하지 않다가 해충을 집어 손에 놓고 두 번 절을 하며 하늘에 빌었다. 돌아가 원문(원문 군문)에 이르러서는 곧장 금주령을 발표하고, 경찰들에게 각 방(방)을 돌며 해충이 먹어버린 분량을 조사하여 올해 세금을 감면하라고 말했다.

7월 14일 신유

반은 흐리다가 반은 맑음. 이날 몇 통을 편지를 써 가지고 가서 북영(북영)에 이르러 투서궤(투서궤)에 들어가 오록정 독판(오독판)에게 보이고 크고 작은 형편과 정황을 말하였다.

7월 15일 임술

잠깐 비가 내리다가 잠깐 맑다가 함. 이날 청나라 사람들이 북강(북강) 기슭에 공연 무대를 설치하며 닷새 동안의 연회를 기약하였다. 내가 이로부터 살펴보니 무대 좌우는 모두 장관과 군인들이 올라 임석할 가설 관람석이고 가운데에는 일반 백성들이 놀며 구경하는 장소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술과 고기 등 음식을 파는 막사였다. 청나라와 한국 두 나라의 백성들이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와서 모여 앉은 것이 약 7, 8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열에 한둘 정도였다. 갑자기 북소리가 나는 곳이 있기에 멀리서 무대 위의 사람을 바라보니 삼국시대 명장들의 형상을 가장하고 나와 칼을 쥐고 창을 들고서 이에 서로 전투를 붙는데 한나라와 오나라와 위나라가 혹 이기기도 하고 혹 패하기도 하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물러났다가는 다시 붙고 붙었다가는 다시 물러나며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이 한 판 한 판마다 새로웠지만, 한나라와 위나라가 대진(대진)해 있는 상황을 연출함에 미쳐서는 뉘엿뉘엿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까닭에 내일 결전을 치를 것이라고 말을 전하고 각자 징을 울리고 군대를 철수하니, 구경하던 이들도 조금씩 흩어져 갔고 나도 또한 돌아왔다.

7월 16일 계해

날씨가 청명하다가 홀연히 우레가 치고 비가 왔다. 오후에 북영(북영)에 이르러 왕 부관을 만나려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남영(남영)으로 나갔을 때를 만나 마음먹은 일을 하지 못하였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공연 무대에 이르니 남녀가 와서 모인 자들이 그 숫자가 어제보다 배나 되고, 안장을 채운 말과 수레들이 몇 리나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무대 위를 바라보니 삼국시대 장군들을 가장한 인물들은 전혀 없고 오직 배우와 어릿광대들만이 노래를 부르며 곡예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곧장 돌아왔다.

7월 17일 갑자

맑음. 오전에 차기학(차기학) 씨가 나를 찾아와 그의 집에 가서 머물기를 간곡하게 청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일이 있어 며칠 후에 가겠노라고 말하며 허락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윽고 서로 헤어져 자리를 파하였다.

7월 18일 을축

맑음. 이날 낮에 왕 부관을 만나려고 길을 나서 북영에 갔다가 마침 영향(령향) 사람 김장진(금장진) 씨와 명천(명천) 사람 김명언(금명언) 씨를 만났다. 인사가 끝나고 조금 있다가 여기에 온 뜻을 물으니, 김장진 씨가 문물을 뿌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들 공순(공순)과 이 사람의 아우 치서(치서)가 동강(동강) 사람 김국삼(금국삼), 이여극(리여극)과 함께 연추영(연추영)에 머물러 기거하며 함께 장사를 하여 소를 팔았더랬습니다. 그러다 정미년(1907) 8월 13일에 이르러 네 사람이 각각 이익금을 나누고 함께 길을 떠나 창령(창령) 김시호(금시호)의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14일에 또 함께 길을 떠나 인적이 없는 창령을 가다가 나의 아들놈 공순이와 이 사람의 아우 김치서가 김국삼과 이여극에게 총을 맞아 죽었는데, 지금까지 이 원통함을 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강 등지에 머무르며 지금 여름 이래도 연길청(연길청)에다 누차 고소장을 올리고 누차 호소해 보지만 제대로 된 호소장을 도무지 쓸 수가 없 수가 없었습니다. 전번 호소장은 김 아무개가 쓴 것인데, 식자(식자)의 안목에다 보여 보았더니 말이 잘못된 곳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대가 나를 위에 대신 좀 써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듣고서 그들의 형편을 딱하게 여기고, 또 기선(기선)의 영손 억석(억석)이 나와 동문수학한 정의가 있음을 생각하여 앞서 썼다는 호소장을 고처서 주었다. 호소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연길청(연길청)은 지국자(지국자)의 남영과 북영이다.-

삼가 아룁니다. 지난 정미년(1907) 8월 모일 강남 사람 김치서(금치서)와 김공순(금공순)이 강동 사람 김국삼(금국삼), 이여극(리여극)과 함께 장사를 하여 소를 팔며 양지(양지) 연추영(연추영) 최원홍(최원홍)네 객점에 머물러 기거하였습니다. 동년 동월 13일 이익금을 나누어 함께 길을 떠나 창령(창령) 지방을 지나갔는데, 유독 강남 사람 김치서와 김공서만이 비명에 죽었습니다. 아! 가엽습니다. 이 무슨 변고입니까. 그날 김국삼과 이여극이 촌가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 두 사람이 김치서, 김공순과 함께 길을 가다가 아무 곳을 지나가는데 홀연히 총성이 울리는 곳에서 김치서와 김공순이 강도의 총에 맞아 죽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정확히 그러한 것입니다. 저 도적놈들의 불측한 마음을 어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하여 죄를 벗어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흉계를 스스로 꾸민 것입니다.

다음날 연추영에 사람을 보내어 사망 사건을 고하자 최원홍(최원홍), 김성서(금성서), 김우(금우)가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연추영에서 창령에 이르러 두 사람이 죽고 두 사람만 산 까닭을 묻자 저 도적놈들의 말에 “우리들 두 사람은 진작부터 육혈포(륙혈포)가 있었기에 그래서 다행히 살아날 수 있었다.” 하였고, 또 묻기를 “진작에 육혈포가 있었다면 어찌 구해주지 않았는가?” 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가진 것은 작은 권총이고 강도들이 지니고 있던 것은 큰 장총이다. 그래서 멀어서 구해주지 못했다.” 운운 하는데, 말에 의심 가는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성서와 김우가 남쪽으로 달려가 저 도적놈들을 따라 무덤을 헤치고 김공순의 죽은 시신을 보니 머리 뒤와 머리 앞에 두 곳의 상처가 있는데 명명백백하게 작은 권총 탄환의 상흔이지 큰 장총 탄환의 상흔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이하여 앞서 한 말이 어긋나기가 이렇단 말입니까.  또 김치서가 죽은 곳을 물으니 백보 밖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무덤을 파고서 보니 오직 한 군데의 상처만이 있는데, 양삼(양삼)이 겨우 구멍이 나있고 피부와 살이 거의 범해졌으며 면상에는 돌로 구타한 흔적이 많았습니다. 만약 과연 강도가 한 짓이었다면 총으로 쏘면 될 것을 어찌 돌로 때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큰 장총’이라고 말했다면 저 김치서의 피부와 살이 뚫리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며, 작은 권총이 낸 상처가 있는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두 사람이 죽은 장소가 백보 밖에 떨어져 있고 보면 한 발의 총을 쏘는 사이에 어찌 멀리 달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무슨 이유로 총이 있는 유독 맞지 않고 총이 없는 자만 모두 맞았단 말입니까. 무슨 이유로 강남 사람만 모두 죽고 강북 사람만 유독 살아났단 말입니까.

일찍이 창령의 지형을 보니 그 땅이 화살처럼 곧고 길옆으로는 수풀이 있었습니다. 과연 강도였다면 반드시 길옆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았을 터인데, 어이하여 김공순이 죽을 때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고 옆구리에는 맞지 않았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모두 “뒤에 있는 사람이 총을 쏜 것이다.” 라고들 하니, 원하옵건대 대인께서는 깊이 살펴주시옵소서. 만약 강도를 만나서 이러한 광경이 벌어졌더라면 같은 동포는 고사하고 비록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육혈포를 가진 일행인 자는 반드시 구해주려 했을 터이고, 만약 구해주려고 서로 총질을 해댔더라면 근방의 사람들이 총성을 듣고서 반드시 달려왔을 터이니, 어찌 저 도적놈들이 와서 사실을 알리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마을 사람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형세와 힘이 달린다면 창령이 멀지 않은데, 어찌하여 창령에다 말하지 않고 양군(양군)으로 하여금 추적하여 체포하게 한단 말입니까. 저 도적놈들이 객점을 나설 때 이미 네 알의 탄환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사한 다음날에 미쳐 오직 한 알의 탄환만을 가지고 있었고 보면, 김치서와 김공순의 상처가 세 곳이니 어찌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내리신 비답에 “명확한 증거가 없다.” 하였는데, 박 감찰(박감찰)과 신윤칠(신윤칠)이 모두 전모를 상세하게 알고 있으니 어찌 한 마디라도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쇤네 등은 원통함을 품고 분통함을 쌓아 하늘을 부르짖고 땅에 물어보며 천지의 사이에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대인께서 밝게 펴는 형정을 만나 애통한 심정을 모두 토설해내기를 바라오면서 누차 밝은 법정에 호소하오니, 부디 우매한 백성의 심정을 통찰하시어 김국삼과 이여국의 하늘을 찌르는 큰 죄를 철저하게 조사해 주소서. 감사하게도 죽은 자식과 죽은 아우의 깊은 원통함을 갚아주신다면 살아서는 목숨을 바쳐 보은할 것이고 죽어서는 풀을 묶어 보은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두고 무고한다고 생각지 마시옵고 깊이깊이 살펴 헤아려 주십시오.

이때에 변경에 일이 많아 청나라 관리가 날마다 회의를 하기에 먼 이역의 사람이 납견(납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돌아왔다.

7월 19일 병인

잠깐 비가 오다가 잠깐 그치다가 하며 흐릴 듯 맑을 듯 함. 이날 낮에 여정을 출발하여 쌍포동(쌍포동)을 향했으나, 길이 질척하여 가기가 어려웠다.

7월 20일 정묘

맑음. 오후에 돌아간다고 고하고 연길청(연길청)에 이르러 영춘당(영춘당)에 들어가 43갑(갑)의 책자를 샀다. 돈을 낸 다음 또 길을 가서 쌍포동에 이르렀다. 차기학(차기학) 씨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같은 성씨인 두관(두관)씨 댁에 유숙하였다.

7월 21일 무진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흐림. 여명에 차기학 씨가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후 함께 작은 행랑에 이르러 머무를 것을 기약했다. 이날 석양 무렵 하늘에 큰 별이 서쪽 하늘에서 반짝반짝 하였다. 이것이 무슨 변고인가. 낮인데도 별이 보이다니 궁금하고 두렵다.

7월 22일 기사

대체로 맑고 조금 흐림. 가을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였다. 이날 낮에 한가롭게 시 한 수를 읊었다.

먼 나그네 자주 오니 차 맛이 향기로운데

산을 끼고 시내 굽어보는 맑은 행랑일레라

어느 곳에 가을빛이 많은 지 알 것 없으니

홀로 옛 책을 잡고서 봄볕에 앉았노라

7월 23일 경오

낮에는 맑다가 저녁에 비가 옴. 아침에 서전(서전)에 가서 서탁(서탁)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은 올해 여름 북쪽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책자인데, 이달 들어 출입할 때에 휴대하기 불편하여 그래서 진작에 이여규(리여규) 씨 댁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7월 24일 신미

백로. 팔월절이다. 밤에 비가 오다가 아침에 맑음. 가을바람이 솔솔 불었다.

7월 25일 임신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림. 나그네 마음이 처량하여 지를 지었다.

강기슭 마을에 궂은비 추적추적 오니

온 동산이 가을 풀인데 문을 열지 않네

서안에 기대 앉아 처마의 낙수 세노라니

망망한 천지에 해가 저무네

7월 26일 계유

아침에 궂은비가 내리다가 저녁에 밝은 해가 떴음.

7월 27일 갑술

하늘은 맑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성근비가 잠깐 지나감.

7월 28일 을해

낮에는 맑다가 저녁에 비가 옴. 오후에 길을 나서서 이여규 씨 댁에 이르렀다. 새옷을 가지고 오려 했으나 마침 비를 만나 그곳에서 유숙하였다.

7월 29일 병자

하늘은 맑고 화창함. 아침 식사 후에 돌아와 재사(재사)에 도착했다. 마침 고향 사람이 나를 찾아와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만나 인사가 끝난 뒤에 반갑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부와 건강에 대해 들었다. 즉시 편지를 써서 동생 형규(형규)에게 보냈다. 내용은 대략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마음을 다해 정돈하거라. 의당 모름지기 공손하고 검소하며 삼가고 신중히 하여, 황폐하고 방탕하게 해서 바깥사람들의 쑤군거림을 불러들이지 말아라.” 운운 하는 것이었다.

8월 1일 정축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낮에는 맑고 저녁에는 흐림. 이날 시를 또 읊었다.

차가운 시내 흐르는 쌍 나루 사이에

정갈하고 한가한 작은 재사여

그 속엔 먼 타향의 나그네 있고

사방을 두른 건 모두 청산이라네

날이면 날마다 야사를 적느라

적요하게 문은 늘 닫혀있구나

시가 있으매 내 스스로 읊고

술이 있으매 내 스스로 마시지

심사를 털어놓을 사람 없으니

가만히 앉아서 새소리 듣노라

속된 운치에 맞는 건 하나 없으니

뉘라 기꺼이 찾아나 오랴

문을 나서서 또 길게 탄식하노니

강산이 우리 국토 아니기 때문

가을바람에 농어와 순채28) 생각나고

천지엔 바야흐로 저녁비 내리니

어찌 고향 가고픈 맘 아니 드랴만

온갖 횡액29)의 그물 두려웁구나

벌과 전갈이 또 독을 돋우고

여우와 토끼가 막 아양을 떠니

부질없이 신정의 눈물30) 흘리며

홀로 앉아 강물소리에 마음 달래네

종횡으로 다녀도 계책 이루지 못했지만

강개해라 마음은 맑기만 하네

빈산엔 나무마다 잎이 지는데

지는 해에 앉아서 병서를 읽노라

8월 2일 무인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리다가 밤이 되어서야 맑아짐.

8월 3일 기묘

가을비가 처량하게 내리는 가운데 붉은 해가 두루 비추었는데, 이 즈음의 비감을 실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날은 또 나의 생일이다. 그래서 멀리서 부모님을 그리워하니 마음이 더욱 애절하여 문을 나서서 장가(장가)를 읊조렸다.

애닯다 우리 부모

날 낳으시느라 고생하셨네31)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젖 먹여 주시고 안아 주셨네

훌쩍 여덟 살이 되어서는

향숙(향숙)에 들어가도록 명하시매

시를 외고 글씨 배우노라니

어느 듯 열여섯 지났네

다시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일곱 해를 종유하며 독서했네

아버지께서는 학비를 대주시고

어머니께서는 입성을 대주셨지

아버지 아니면 어찌 공부했겠으며

어머니 아니면 누가 날 길렀을까

그 은덕 갚으려 해보지만

푸른 하늘같아 가이 없구나

내가 태어나 내가 태어나

이런 가시밭길 만났으니

촌심32)으로 은혜 갚지 못하고

남북으로 떠돌기만 할뿐

남들은 모두 곁에서 모시는데

나는 어이하여 그럴 수 없는가

꼼꼼하게 옷을 꿰멘 것은

귀향이 늦어질까 염려한 어머니 마음

분노를 삭이고 말을 삼가라는 건

길 떠나기 앞서 준신 아버지 명령

-내가 서쪽으로 떠나올 때 아버지께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을 삼가라.[징분신언]’는 네 글자의 명으로 나에게 타이르셨다.-

오늘 나의 생일이니

마음이 실로 슬프네

민둥산에 오르고 우거진 산에 올라33)

남쪽으로 흰 구름34)을 바라보네

애닯다 우리 부모

나를 잊지 못하시고

나를 잊지 못하시매

문에 기대 기다리시며35)

“어이하여 돌아오지 않나

곧 돌아오겠지” 하시리

가을 이슬 처량하니

나의 생일이로다

오직 나 소자는

도무지 남들만 못하여

주신 몸으로 방랑하며

풍진을 쏘다니누나

혼정도 신성도 하지 못하고

다님에 일정한 장소도 없는데다

더구나 지금의 세로에서

부질없이 다칠까 근심만 끼치네

내가 태어난 날이여

노래가 또한 길도다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아버지 어머니

이제는 늙으신 걸

용연 가의 산방을 치우고는 책상을 둠이여

천고의 성현들이 남기신 만권 책 쌓아놓자

그 속에 내가 있어 한가로이 앉음이여

찻잎 막 익고 술이 데워지리

물은 맑고 산은 높음이여

소나무와 달을 마주하여 문을 열치리

처자식들에게 잘해주어 단란하게 즐김이여

벗들과 함께 하며 토론도 해야지

무우에 올라 시 읊고 비파를 탐이여

가벼운 정자에 올라 술동이도 기울이자

내 이것들을 가졌음에도 즐기지 못함이여

국토가 누구의 손아귀에 들어갔던가

저 짐승들이 마구 쏘다님이여

어이하여 여우와 토끼가 짓밟는가

두꺼비에게 예를 갖추고36) 보복을 원함이여

한로37)를 얻어다가 쫓으라 하고 싶네

우리 동국의 옛 강토를 수복함이여

그 즐거움을 즐기며 부모를 봉양해야지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신지

8월 4일 경진

맑음. 이날 저녁 이여규 씨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나를 대접하면서 말했다. “일찍이 듣자니 어제가 존형의 생신이라지요. 지금 객지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짐작건대 시름겨운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거듭거듭 생각하고 마시며 말하기를 “이는 과연 예에 벗어나는 대접이 아니라, 필시 정이 깊고 의리가 무거운 소치입니다.” 하였다. 술 마시기가 끝나자 헤어져 자리를 파하였다.

8월 5일 신사

새벽에 안개가 끼고 아침에 맑음. 해는 따스하고 가을 날씨가 고요하였다. 이날 낮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상투와 갓, 망건에 대해 모두 세금을 매기는데, 매 초하루와 매 명절에 4백 여 전(전)의 돈을 모아서 낸다 운운 하였다. 나는 듣고서 몹시 놀랍고 두려워 길게 탄식하며 할 말을 잃었다.

8월 6일 임오

맑음. 

8월 7일 계미

하늘은 청명하며 바람은 고요하고 해는 따스함.

적적하게 서안에 기대어

묻혀 지내는 삶에 벗이 없으매

나의 편벽된 성품에

근심스럽고 울적하네

시로 마음을 읊조려 길게 노래함이여

청산을 마주하고서 고서를 집노라

내 마음 양생함이 아님이여

날로 다시 날로 거듭거듭 빗질을 하네 

아! 세인들이 머리를 자름이여

유독 나는 살면서 머리를 아낀다오

부모께 신체를 받음이여

벌레들에게 물릴까 마저도 두려워하네

내 자식 된 도리 지킴이 좁아터짐이여

신농씨와 우임금도 종사한 바라네

아! 동문에 갓을 걸어 놓음이여

장차 북궐에다 머리를 걸으리라

8월 8일 갑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흐림. 아침에 객이 와서 나더러 말하기를 “근래에 만국의 재판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했다. “듣지 못했습니다.” 객이 말했다. “오늘날 세계의 국제법에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다른 나라에 군사를 들여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일본 사람들이 용정(룡정)을 점거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이미 서강(서강) 지역을 한국 땅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점점 강을 건너 와 조금도 꺼림이 없이 통감부(통감부)를 설치하고 수비대(수비대)를 설립하여, 지금 이 전쟁을 벌일 즈음에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그들의 병사를 더욱 세워 전쟁할 거점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까닭에 국제법에 대해 말을 듣고서 청나라와 한국의 지리지를 열람해보니, 양국의 지리지에 모두 한국의 국경이 두만강(두만강)에서 그친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느 시대에 얻고 잃었는지에 관해 확정해 놓은 책이 없으니 ‘서강 지역은 한국 땅이다.’ 라고 한 것은 근거 자료가 없습니다. 논자들은 ‘서강은 사실 청나라에 소속된 지역이다.’ 라고 하며 일본에 허물을 돌렸습니다. 때문에 요사이 듣자니 용정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고, 지금 남은 자들은 한 사람의 영사(령사)와 경찰(경찰), 통상배(통상배) 십 수 명일뿐인데, 모두 조그마한 병기도 소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만국 재판의 뜻입니다.” 나는 듣고서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 종사(종사)가 짐승같은 놈들에게 침몰되었는데, 신하된 자가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청나라 사람들과 국경이나 다투니 이것이 과연 정부의 뜻인가? 분명 부일배(부일배) 놈들의 소행일 것이다. 얻는다고 무어가 기쁠 것이며 잃는다고 무어가 걱정이란 말인가?” 대화를 그대로 기록했다.

8월 9일 을유

아침에 흙비가 내리다가 저녁 무렵에 청명함. 오후에 어떤 사람이 무신년(순종2, 1908) 가을에 작성한 우리나라 민호(민호)의 조사기록을 보여주었다. 노령(로령) 이북과 왕성(왕성) 이남 사이 백리 내에 도합 19사(사)38)였는데, 그 민호를 계산해보니 8천 2백여 호(호)였다. 내가 보고나서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이 백리 내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자가 이렇게나 많으니, 동강과 서강 사이 수천 리나 되는 지역에 들어와 사는 우리나라 유이민들이 모두 몇 천이나 몇 만 가호이겠는가? 이것이 과연 천심(천심)인가, 인심(인심)인가? 천심과 인심이 만났으니 몹시 두렵다.” 하였다.

8월 10일 병술

운무가 짙디짙었고 저녁 하늘은 처연하고 쌀쌀함. 며칠 이래 이승준(리승준)이란 자가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올 여름에 내가 일찍이 이 재사(재사)에 거처했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지금 와서 유숙하다니 이게 무슨 도리란 말입니까?” 하였다. 내가 물었다. “그대가 다시 와서 머물러 거처하겠다고 진작에 주인과 더불어 약속을 했더랬습니까?” “비록 다시 온다는 약속이 없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날 떠밀어내는 기색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속이 상해서 그 이유를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떠난 뒤 반개월 동안 이 집 주인이 내게 거듭거듭 와달라고 청했고, 그 때문에 내가 지금 와서 머물고 있는데, 안될 게 무어 있습니까?” 이승준이 다시 주인에게 따지자 주인이 단단히 다투었는데 말이 몹시 장황하였다. 내 마음에 불편하여 안절부절 하다가 이어서 몇 줄의 편지를 써서 용담(룡담)에게 부쳤다.

지난 7월 초나흘 모의산(모의산)에서 헤어진 뒤 풍진 속을 헤매고 도로 위를 분주히 다니다가 22일 기사39)에 쌍포동 차병원(차병원) 군의 재사(재사)에 이르러 숙식을 붙여 살고 있는데, 국가가 패망하여 산하가 모습이 바뀌었다는 탄식이 가을과 함께 한창 깊어갑니다. 근래에 찬 서리가 내려 뭇 꽃들이 절로 시드는데, 국화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멀리서 벗을 생각해보매 반드시 늘 복을 받으실 터이니 구태여 빌어드릴 것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반 개월 동안 칩거하여 들어앉은 이래로 한 편의 편지도 드리지 못하고 덧없는 삶을 헛되이 보내면서 반도막 계책도 펴지 못하니, 형께서 장차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적막한 빈 골짝에서 토론할 사람 없이 종일토록 산을 바라보니 산은 얼마나 쓸쓸하고 눈은 얼마나 가물가물 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우리 유도(유도)가 협착하여 몸을 편히 둘 곳이 없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스스로 신세를 돌아보건대 더욱더 절로 애간장이 녹는 눈물이 솟아나옵니다. 바라건대 우리 존형께서 한 번 제가 있는 곳을 방문해 주시어 아침 저녁으로 기쁜 대화를 나눈다면 이 사람의 즐거움일 것입니다. 나머지 마음은 황졸한 붓이 어지러우니 삼가 줄이겠습니다.

이날 저녁 무렵 용담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뒤에 문밖에 홀연 사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는데, 바로 재종숙인 문국(문국) 숙이었다. 기쁘게 맞아 자리로 모신 뒤에 이어서 집안의 안부를 여쭈니, 문국 숙께서 즉시 동생의 서신을 건네주었다. 읽어보니 ‘어머니가 6월 중에 눈병이 덧나서 눈동자가 흐릿하더니,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7월 기망(기망) 이래로 조금씩 시력을 회복하시어 마을을 출입한다.’ 운운 하는 내용이기에 내가 깜짝 놀랐다가 기뻐했다. 여러 가지 사실을 들으면서 한참동안이나 깊이 생각하다 시사(시사)를 가지고 전체적으로 한 번 두루 말씀 드리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8월 11일 정해

맑음. 여명에 용담이 길을 나서면서 나더러 말하였다. “지금 이승준이 운운 하는 것을 들어보니 이다지도 무례하다니요. 그러나 주인이 성심으로 만류하여 떠날 수도 없으니, 자신의 도리를 헤아리지 않고 거취를 표명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고 머무는 것이 이생(리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니, 바로 내 마음이 평안치 않아서 그리하는 것입니다. 어찌 도리라는 두 글자를 말씀하십니까?” 잠깐을 서서 이야기 하다가 서로 헤어져 대화를 마쳤다. 바로 이날이 추분이다. 팔월중이다.

8월 12일 무자

흰 이슬이 서리가 되고 천지는 청량함. 남쪽으로 문을 열고 이 가을볕을 아까워하였다. 오후에 문국 숙이 길을 떠나시며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호천포(호천포)로 가는데, 오는 그믐이나 초하루 무렵에 다시 여기 올 것이네. 조카는 경거망동하지 마시고 부디 몸을 잘 보중하시게.” 하였다. 나는 절을 하고 배웅했다.

8월 13일 기축

아침엔 흐리다가 낮에 맑았으며, 저녁 무렵에 비가 내리다가 밤에 맑아짐.

8월 14일 경인

하늘이 맑고 날이 쌀쌀함. 가을 소리가 동산에 가득하니 일반의 나그네 정회가 서글플 뿐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명절이 내일이니 고향 생각이 백배나 더하여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술병을 가져다 스스로 따라 마시고 얼근하여 취하여 잤다. 오후가 되어 용포동(룡포동)40)에 유숙하는 용담이 사람을 보내어 나더러 오기를 청하기에, 내가 취한 몸을 가누면서 천천히 10리쯤을 가서 용담의 재사(재사)에 도착했다. 마침 고향 사람 이종흘(리종흘) 씨도 또한 와서 모였다.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눈 후 고향 일을 하나하나 묻고 나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취하였다.

8월 15일 신묘

하늘은 맑고 바람은 가벼움. 아침에 여러 벗들과 상읍례(상읍례)를 행하고 당에 올라 크게 마시고 마구 시를 읊조렸다. 한참 뒤에 처연하게 이별을 고하고 살구나무 지팡이 하늘 짚고서 본 재사(재사)에 돌아왔다. 이날의 슬픈 회포를 다시 어디에 비겨 논할 것인가. 취하여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장가가 나옴이여

천중절이로다 

술도 있고 안주도 있음이여

맛도 정갈하네

집집마다 성묘를 함이여

석갈을 손질하네

선조께 제사 지냄이여

즐거운 여러 조카들

모여서 뛰어 놂이여

남녀가 모두 기쁘도다

아! 멀리 떠나온 나그네여

혼자 외로웁구나

어버이를 버리고 선영을 떠나옴이여

풍진 속을 헤매었네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음이여

오늘 같이 좋은 날

오늘 같이 좋은 날이여

어버이 그리움 백배나 간절하도다

높은 곳을 오름이여

한탄스런 젊은 한 사람이로다

마음이 울적함이여

경물 또한 마음에 감응되네

바람이 쓸쓸함이여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도다

밤에 오랫동안 앉아 있음이여

달이 지누나

기러기 남쪽으로 날아감이여

거기다 까마귀까지 우네

술이 호로에 가득함이여

인사불성41)이 되었네

나 이제 돌아가려 함이여

길 헤매지 않으리

노래가 정히 긺이여

새벽닭 우는 소리 들리네

8월 16일 임신

볕이 차고 가을 소리가 시며, 밤에 우레가 치고 비가 오고 번갯불이 번쩍 거렸음.  사위어 가는 등잔의 심지를 돋우고 앉아서 길게 탄식하였다. 이날 낮에 일문(일문) 김문순(금문순) 씨가 산전(산전)에서 찾아와 묵으며 문족(문족)의 정의를 폈다.

8월 17일 계사

천지는 청명하고 바람 소리를 쏴아쏴아 났다. 아침에 김문순 씨가 돌아갔다.

8월 18일 갑오

맑고 쌀쌀함. 이른 새벽 일어나 「사전(사전)」42)을 읽다가 자책(자책)하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스스로 지난 일 되돌아보니

내 지금 나약함 있구나

속마음 뜻을 뉘라 알아주리

문득 성 가운데 천을 잃었노라

드러나고 은미한 곳에

살펴봄이 홀로 아는 자리에서 미혹되네

마음이 불의에 빠진 것 같으니

비록 죽어도 누가 가련해 하랴

8월 19일 을미

맑음. 오후에 문조(문조) 김형섭(금형섭) 씨가 찾아와 나에게 하룻밤을 함께 숙식하기를 청했다. 내가 사양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 따라 가서 묵었다.

8월 20일 병신

아침에 맑다가 저녁 무렵에 비가 옴. 아침 식사 후 돌아간다고 고하고 길을 나서서 하서전(하서전)에 이르러 이여규 씨와 함께 재사(재사)에 돌아왔다. 한참 동안을 토론하고 있다니 용담이 또한 왔다. 그때 이웃집에서 술이 있다기에 가서 실컷 마셨다. 신시(신시) 무렵이나 돼서야 자리를 파하고 각각 헤어져 돌아왔다.

8월 21일 정유

아침에 청명하다가 저녁에 쓸쓸해짐. 붓 가는 대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내가 무슨 일로 이런 생활 하나

본의는 스승 되는 것 좋아한 게 아닌데

산 속 재사는 가을 기운 적적하니

멀리 떠나온 나그네 기러기 남쪽으로 가는 계절 만났구나

8월 22일 무술

날씨가 쓸쓸하고 차며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림. 이날 밤에 즉흥적으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온 하늘 풍우가 정말 쓸쓸한데

한 점 가을 등불 타오르는 밤일세

짧은 이불 높은 베개에 끝내 잠 못 이루니

팔월의 강서에 모든 나무 시드누나

8월 23일 기해

천지는 청랭하고 궂은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였다. 시름겨이 앉아서 괴롭게 시를 읊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리 멀리서 나그네는 북으로 건너오고

팔월이라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가네

때때로 하늘 끝 바라다 보니

어드매가 바로 경성이더뇨

우리 집이 월산43) 아래 있으니

밝은 달이 밤마다 고즈넉하리

알겠노라 변하지 않는 것이

울타리 아래 국화와 창 앞의 소나무인 줄을

훌쩍 한해가 또 저물어 가니

주인 돌아오길 얼마나 기다릴까나

바람 앞에 잎은 절로 푸르를 테고

서리 뒤에 꽃은 모름지기 피었겠지

눈을 들매 산하의 경물 바뀌었나니

쓸쓸한 강가의 단풍이로다

8월 24일 경자

맑고 쌀쌀함. 이날 저녁 무렵에 서전(서전)을 나서서 돌아오는 길에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슬픈 바람 지는 해에 숲을 지나노라니

흰 모시 얇은 적삼 가을 기운 이기지 못해

가죽옷과 털모자 챙기는 지금 시절에

입성이 나 같은 이 과연 그 누구랴

8월 25일 신축

흐림. 시를 또 다음과 같이 읊었다.

쌍 나루 사이에 자리한 한 두 마을

집집마다 연기 피니 또 황혼이구나

세월은 날 버리고 시위는 화살 재촉하는데

세로는 산으로 이어지고 수레는 망가졌네

진나라 거리에서 시대 비판하며 만나서 이야기 하는 자요44)

초나라 강에서 지는 해에 홀로 깨어있는 굴원일세45)

친지 붕우가 만약 나의 행색 묻는다면

부서진 망건 떨어진 갓 변치 않았다 말하리

8월 26일 임인

한로. 구월절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은 차며 음산한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함. 시를 또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해야 할 일 몸을 잡아 돌아가지 못하고

쓸쓸한 변방에서 괴로이 지내누나

인걸 죽고 나라 병드니 하늘은 무슨 뜻인가

비 질척이고 바람 차니 나 홀로 시름겹네

호드기 소리 들리는 삼경 흰 달만 떴는데

천리 고향의 농어 순채 생각나니 또 맑은 가을이로다

날마다 적어매 기쁜 날 없음 매양 탄식 하노니

눈을 들매 때때로 서글픈 초나라 죄수46)로구나

8월 27일 계묘

아침에 날씨가 청명하다가 저녁 무렵 흐려지려 함. 날씨에 대해 사(사)를 지어 읊조렸다. 다음과 같다.

가을 하늘에 오랜 비가 개니

집집마다 텃밭을 돌보네

남쪽 이랑에선 벼와 조를 실어오고

동쪽 고랑에선 기장 찰벼 실어오네

늙은 농부들 모여서 말들하길

우리집 창고는 텅텅 비었는 걸

올해는 근근히 풀칠이나 할텐데

세금은 또 관청에다 바쳐야 겠지

여기에만 유독 충해가 심하니

다른 마을에선 배부름 기약한다지

요즘 듣자니 우리나라의 농사도

산야가 모두 흉년은 면했더군

창문 아래서 책읽기 그만두고

나도 또한 기쁘게 어울리네

말해본들 또한 무엇하랴

때때로 나그네와 만나보게

동쪽 이웃에 혼인 잔치집이 있어

수천 수백 말술이 익었다더군

말마치고 다시 헤어지며

멀어져가는 두 세 소리 수런거림 듣네

문에 들어와 야사를 기록하니

산속의 재사가 절로 한가롭구나

문득 다시 크게 노래 부르니

강가엔 푸른 몇 점의 봉우리

8월 28일 갑진

흐림. 

8월 29일 을사

아침에 맑다가 밤에 비가 옴.

8월 30일 병오

아침에 맑다가 저녁 무렵에 흐림. 오후에 서쪽으로 길을 나서 용포동으로 가서 관춘재(관춘재)에 이르렀다.-관춘재는 용담이 유숙하고 있는 재사이다.-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시 한 수를 읊었다.

그대가 바랐기에 내가 왔나니

서로 마주함에 마음은 잊은 듯

서리와 이슬 하얗게 내린 줄은 모르고

다만 갈대 싹 푸른 것만 보노라

읊조리고 나서 용담과 또 「손자병법(손자병법)」을 읽었다. 한참 동안이나 길게 탄식을 하다가 서로 노래를 주고받으며 밤이 깊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9월 1일 정미

새벽에 눈이 내리다가 낮에 맑음. 아침에 상읍례를 행하고 식사를 한 뒤 본 재사로 돌아왔다. 또 이렇게 시를 지었다.

새벽에 내린 찬 눈이 아침까지 새하얘

둘러보매 청산이 온통 흰빛이었네

이윽고 태양이 떠 녹여버리니

좋은 산 아름다운 기운 속에 나무들 울창하네

9월 2일 무신

맑음. 오후에 재종숙 김문국(금문국) 씨가 의란구(의란구)에서 와서 나를 방문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조카는 그래 돌아가지 않을 터인가?” 하였다. 내가 시사를 가지고 두루 한 번 아뢰었다. 행차를 전별하며 서전(서전)까지 갔는데, 해가 뉘엿뉘엿하여 처연하게 재사로 돌아왔다.

9월 3일 기유

날씨가 맑고 구름이 걷혔으며, 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느긋하게 웃으며 문득 물아를 잊으니

만 리의 바람과 안개 강가에 걷히누나

새로운 시 읊을 제 어드메가 좋을손가

노란 국화 바라보며 맑은 가을 즐기네

9월 4일 경술

아침에 가랑비가 뿌리더니 저녁 무렵 반쯤 맑음. 이날 밤에 물고기 머리에 귀신 얼굴을 한 사람이 찾아와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나는 병을 핑계로 웅크리고 누워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9월 5일 신해

조금 볕이 나다가 대체로 흐림. 아침에 물고기 머리를 한 사람이 돌아간 뒤에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혼자 말하고 또 혼자 탄식하나니

세상 형색 근래에 어떠한가

흑백은 바둑판처럼 변하고

홍수는 파도처럼 뒤집히네

마음속 칼날을 내 벼리노니

의중의 창을 누가 잡을손가

속절없이 분개해 식사만 줄고

정신을 쏟느라 병만 많구나

9월 6일 임자

조금 흐리고 대체로 맑음.

9월 7일 계축

맑음. 며칠 이래로 계속 머리가 시고 아파 식사도 잘하지 못하고 피곤하게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날 저녁에 관춘재(관춘재)에서 재생(재생)이 와서 “용담(룡담) 역시 아파서 드러누웠습니다.” 운운 했다. 내가 놀라 또 탄식하기를 “이것이 과연 지기(지기)인 소치인가. 어떻게 동시에 병이 나고 증상마저 또한 비슷하단 말인가. 병을 참으며 간신히 시로 편지를 썼는데, 대략 이렇다.

시를 읊으면 상심을 풀 수 있고

술을 마시면 마음을 달랠 수 있네

부디 슬픔을 극진히 하지 마시게나

공연히 온갖 병만 침입하게 한다네

짓고 나서 부쳤다.

9월 8일 갑인

대체로 흐리고 조금 맑음. 이날 낮에 앉아서 까무룩히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서 즉흥적으로 시를 지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맑은 가을 병든 몸에 쓸쓸함이 이는데

한 낮 탑자에서 앉아 조니 신선과 같네

시린 창에 지저귀던 새들 돌아가 버리고

작은 화로에 식은 불씨 다연을 일으키네

9월 9일 을묘

흐림. 즉흥적으로 시를 지었다.

홀로 타향에서 병든 몸을 가누나니

이때 이날 마음이 어떠한가

매화 핀 만국에 병사 소리 장하고

버드나무 외로운 성 호드기 소리 많누나

술도 시름 못 달래 취해서 잠이 들고

마음은 울렁거려 또한 크게 노래 부르네

큰 문 뒤 산기슭 간봉(간봉)의 아래

몇 사람이나 성묘하며 떼를 밟을까

또 한 수를 읊었다.

작년 오늘도 집에 있지 않았는데

올해 오늘도 또 하늘 끝에 와있네

내년 오늘에는 편안히 즐길 수 있을까

마음과 나라가 모두 한숨이 나오네

흰 구름 아래 어디가 어버이 계신 곳인가

울긋불긋 단풍든 강가에 지는 해 빗기네

뒷날 귀국하면 응당 나에게 알릴 친구로는

울밑 황국화의 꽃이 있을 줄 알겠네

9월 10일 병진

맑음. 이날 저녁 용담이 부쳐온 편지를 읽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나도 나그네 그대도 나그네이며 나도 아프고 그대도 아프니, 어떻게 되어 신세가 이렇게도 서로 공교로운지요. 한 번 웃을 따름입니다. 귀 재사의 재생이 와서 병이 낫지 않고 있음을 들으매 마음이 서글프고 걱정됩니다. 그러나 까닭 없이 생긴 무망(무망)의 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길하니 또한 무엇 하러 근심하겠습니까. 운운

9월 11일 정사

상강. 구월중이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된서리 곳곳마다 모두 가을 색이니

천하의 어떤 사람인들 때를 모르랴

온화함은 경전을 읽는 것 만한 게 없나니

오직 봄바람이 서안에 불어가네

9월 12일 무오

구름이 강천(강천)보다 차갑더니 비가 얼어 눈이 되었다. 술이 이웃집에서 새로 읽어 취해 노래 부르며 시를 지었다.

남방의 기운 북방의 신세

일없이 취해 노래하니 술을 빚은 이웃 있네

우리 동포 이천만 가운데

충의로운 간담 지닌 이 얼마나 될까

9월 13일 기미

종일토록 분분히 눈이 내림. 깊은 밤에 일어나 앉아 눈을 읊었다.

저녁 무렵 이불에 냉기가 감도니

문 열매 눈이 아직도 날리누나

차가운 산은 이미 푸른빛을 잃었고

얼어붙은 나루엔 물결이 아니 이네

어느 곳에 낙매의 피리47) 불고 있나

뉘 집서 벽옥의 통소를 불고 있나

보지 못했나 산음의 객48)이

양원49)의 밤처럼 앉아 있는 걸

이제부터 소나무만이 홀로 빼어날 테고

지금부터 국화만이 시들지 않을 테지

편지 부쳐오는 동학이 적지만

차가운 겨울밤을 시름겨워 말아라

겨울 지나면 반드시 더운 날 오고

밤이 지나면 다시 아침 오는 것을

해와 달이 어찌 오랫동안 어두우랴

음양은 의당 번갈아 소장하는 법

따스한 봄 날씨 얼마나 남았는가

시에 맞추어 무소50)를 노래하네

9월 14일 경신

눈이 개고 구름이 흩어졌으며, 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고요했다.

9월 15일 신유

맑아지려 하다가 다시 흐림.

9월 16일 임술

맑음. 이날 밤 나그네의 베갯머리가 말똥말똥하여 잠을 자려해도 오지 않기에 고심하여 시를 한 수 지었다.

사람들 모두다 코를 골며 자는데

나만 홀로 말똥말똥 한 때로다

창밖엔 눈에 비친 달이 환한데

성 위엔 다시 야고 소리 더디구나

자려 해도 괴로이 이룰 수 없어

이런저런 생각들 잊을 수 없네

자오51)는 또한 무슨 마음으로

긴 밤 내내 울음소리 슬픈가

9월 17일 계해

맑음. 

9월 18일 갑자

맑음. 오후에 용담이 와서 담소를 나누었다. 한참 뒤에 일어나 가려하기에 내가 다시 만류하지 않고 귀일정(귀일정)에서 보냈다.

9월 19일 을축

맑음. 저녁 무렵에 강호(강호)로 나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대막엔 외로운 연기 곧게 피어오르고

장강엔 지는 해 비껴 있구나52)

해 지매 장강이 하얀데

안개 속으로 외로운 배 가누나

9월 20일 병인

맑음. 

9월 21일 정묘

낮에 흐리다가 저녁에 눈이 내림.

9월 22일 무진

눈이 개고 구름이 흩어짐. 천지가 서글프고 차다.

9월 23일 기사

하늘은 맑고 날은 차가움. 운을 따라 붓 가는 대로 지어보았다.

강산이 이때에 점점 추워지니

눈은 희고 삭풍은 차구나

보라 외로운 소나무 빼어나

의연히 봄빛이 무성한 것을

9월 24일 경오

흐림. 

9월 25일 신미

9월 26일 임신

9월 27일 계유

맑고 추움. 고운을 차용하여 『즉사(즉사)』 시를 지었다.

깊은 거리 해 기우는데 저녁연기 드물고

반쯤 걷은 발 너머 바람 불어 눈꽃이 날리네

한 가지 내려앉을 곳 그 어드메뇨

때때로 성근 숲에 저녁 새 돌아가는 것을 보노라

9월 28일 갑술

하늘은 맑고 날은 참. 이날 낮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일간에 왜적의 우두머리 이등박문(이등박문)이 천진(천진) 재판에 왔을 때 우리나라 사람이 상해까지 쫓아가 총을 가지고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듣고서 몹시 기뻐 나도 모르게 웃으며 말하기를, “통쾌하도다. 저 왜적의 죽음이여! 장하도다. 저 사람의 저격이여! 죄악이 가득찼으니, 하늘이 지금 사람에게 손을 빌려 죽인 것인가.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분연히 그놈의 살을 먹으랴 쫓아간 것인가. 통쾌하도다. 저 왜적의 죽음이여! 이제 지옥으로 들어가 귀졸들(귀졸)의 형륙(형륙)을 몇 번이나 당할 것인가. 장하도다. 저 사람의 저격이여! 또 신체의 마디를 찢어놓아 우리의 분개와 원한을 풀어주려는 것인가. 저 왜적의 죄악을 사람마다 공분하여 성토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주벌할 놈이었는데, 한스럽게도 저 사람을 알아서 위로하지 못하는구나. 이 왜적이 진작에 우두머리가 되어 저 갑오년(고종31, 1894)부터 우리 서울을 침략하고 우리 궁실을 불질렀으며, 우리 토지를 빼앗고 우리 세금을 가로채었다. 우리 수도를 점거하고 제 놈들의 병사를 많이 세웠으며, 충직하고 선량한 신민들을 살해하고 우리 황상 전하를 멋대로 폐위한데다가 백성들에게 잔학하게 굴었으니, 죄가 이보다 클 수가 없다. 옛날부터 기록되고 전해 내려오는 흉악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하늘이 어찌 용납하겠는가. 나는 벌써 스스로 죽을 줄 알고 있었다. 지금 이제 피살되었으니, 통쾌하고 통쾌하도다. 비록 그렇지만 저 왜적이 죽은 뒤에 저 왜적의 무리들이 반드시 화란을 불러일으킬 터이니 이것이 또한 걱정스럽다. 말이 나오는 대로 기록하여 뒷날 이문(이문)에 대비한다.

9월 29일 을해

맑음. 이날 저녁 무렵 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북영(북영)의 좌우에 7개국의 영사관(령사관)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는데, 일본 사람들의 영사관 역시 그 가운데 하나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 일본 사람들이 늘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당도하여 거주하는 지역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거짓으로 인심을 사고 있습니다.  까닭에 장차 그들이 올 때 청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민권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국민을 위한 학교를 먼저 세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윽박질러 그 학교에다 몰아넣어서 학생들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부분 기뻐하지 않아 왕왕 파접(파접)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운운 하는 것이었다. 내가 듣고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청나라 역시 우리 백성의 민권을 빼앗는 것이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질고 의롭지 않고도 민권을 얻은 자는 없었다. 어찌하여 따르지 않는 자들을 무력으로 윽박질러 민권을 다투려 하는가. 비록 혹 복종한다 한들 힘이 달려서 복종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감복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만을 낳을 것이니, 나는 청나라 사람들이 잘못된 계획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9월 30일 병자

맑음. 맑음. 아침에 어떤 사람이 이번 달 7일 자 국보(국보)를 보여주었는데, 대략 이렇게 되어 있었다.

군부(군부)와 법부(법부)는 모두 이미 폐지되었고, 크고 작은 사무와 일반 행정과 법령이 모두 통감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일본 사람들이 보통학교 40여 곳을 널리 설치하고, 농업학교, 경제학교, 상무학교 5, 6곳을 증설하였다. 그 외에도 토목공사에 대한 노역이 더욱 심하였다. 목포(목포)에서 원산(원산), 군산(군산) 등지에 이르기까지 곧장 철로를 닦고, 한성과 부산에 수도(수도)를 크게 놓아 끌어와 절로 물이 나오도록 하였다. 경부(경부)의 경우에는 외국과의 교섭을 엄금하고 정치와 법률에 대해 개혁하였으며, 일후로 황태자를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 학생들과 함께 유숙할 것을 정하였다.

나는 읽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어제는 경부(경부)의 명망과 위신을 실추하더니, 오늘은 군정(군정)과 사법(사법)을 잃는구나. 내일은 농상과 서무를 잃을 것이고, 모레는 태자(태자)와 국사(국사)를 잃겠지. 이른바 신학문을 하고 개명한 자들은 이 국보를 보고 무어라고 생각하는가. 입만 떼면 반드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안락하게 한다고 하더니, 남의 집 재산을 속여 갈취하여 한갓 자기의 입만 채우며 국가의 위망에 대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태평하게 바라보고만 있구나. 나는 신학문을 부끄러워하고 나는 국가를 애석해 한다.

선비를 기른 지 천일이 되면 반드시 하루라도 쓸 날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찌 흉하게 쓰인 자들이 아니겠는가. 남들은 모두 협잡배들이라 말하고, 나는 매국노들라고 할 것이거늘, 그대들은 어찌 스스로 뉘우쳐 사악함을 돌이켜 바른 데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재정상의 연설이 많은 것인가. 천도와 신명이 오직 우리 삼천리 강토를 끝내 왜적의 소유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거늘. 저들이 과연 알 것인가, 모를 것인가.”

이날 저녁 무렵 이웃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 경성(경성) 사람 방시정(방시정)이란 자가 본회원(본회원)의 당으로 왜적에게 붙었다가 일본 군병이 물러난 오늘날을 맞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죄과를 벗으려고 청나라 관부에다 누차 호소를 학도의 모집에 자청하여 청나라 사람의 무력을 빌어 독서할 줄 아는 자들을 윽박질러 몰아서 학교에 채워 넣는다고 한다.

10월 1일 정축

반은 맑고 반은 흐림. 이날 낮에 지난달 15일 신보(신보)를 보니, 국가의 사정과 형편은 눈물이 솟아나 말하기 어려웠다. 다만 말하건대 경성에 주둔한 일본 군병이 「송자대전(송자대전)」의 판본을 모두 태워버렸고, 그 외 용산(룡산), 율곡(률곡) 등지의 일본인들의 가옥을 조성하느라 분묘 9백 여 곳을 훼손하여 관을 파헤치고 뼈를 드러내게 했다. 우리 백성들이 내는 세금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지난해보다 배나 되는데, 제 놈들 나라 사람으로서 주거하는 자는 지세(지세)나 정부(정부) 마저 한 푼도 시행하지 말게 했다. 나는 읽고 나서 스스로 탄식하며 말했다. “왜적들이 우리 동방을 보기를 사람이 없듯이 하는가. 어떻게 이렇게 까지나 잔학하게 굶이 심하단 말인가. 제멋대로 무력을 행사하고 내키는 대로 폭력을 자행하여 막중한 성서(성서)를 태워버리고 죄 없는 백골(백골)을 흩어버리다니, 하늘이 어찌 노하지 않겠으며, 신명이 어찌 증오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비록 죽이지 못하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며 신명이 반드시 도륙할 것이다. 무릇 지금 사람들아 ‘하늘이 내려다보심이 없는가. 귀신은 모른단 말인가.’ 하고 말하지 말지어다. 죄악이 몹시 많으니 어찌 능히 오래 가겠는가. 장차 제 스스로 망할 것이다.”

10월 2일 무인

흐림. 이날 낮에 장난삼아 읊은 오언시의 운을 봉독하였다.

종일토록 자주자주 산을 보면서

봄 오길 기다려도 봄이 뵈지 않네

우연히 성리설을 읽노라니

봄이 바로 인 속에 있구나

10월 3일 기묘

맑음. 부촌(부촌)에 사는 이장룡(리장룡)이 일찍이 용담에게 배웠는데, 오늘 결혼하는 날이라 나도 또한 가서 연회에 참석하고 유숙하였다.

10월 4일 경진

맑음. 아침 식사 후 서전(서전)에서 길을 나서 본재(본재)에 돌아오니, 밤이 이미 초경이나 되었다.

10월 5일 신사

하늘은 차고 바람이 일어남. 이날 저녁 만국신보(만국신보)를 보니, 지난 8월 보름 무렵에 멕시코에 큰 비가 내려 물이 지면에 평평하여 수심이 60여 척이나 되어, 그 나라의 성(성) 18구(구)를 훼손시키고 철도 72정(정)을 터트렸으며, 인민 가운데 익사한 이가 3천여 명이나 되고 재산 피해가 대략 4, 5천만 원이나 된다고 한다.

10월 6일 임오

맑음. 오후 신시 무렵 차종갑(차종갑) 씨와 차호균(차호균) 씨가 재사에 와서 유숙하였는데, 세상의 형색에 대해 통렬하게 논하여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0월 7일 계미

반은 맑고 반은 흐림. 아침 식사 후 차종갑 씨와 차호균 씨가 한 길로 돌아가는 것을 보냈다. 이날 밤에 월보(월보)를 보니 이등 박문을 쫓아가 사살한 이는 평양(평양) 사는 안중근(안중근)이었는데, 지금까지 여순(려순) 지방 법원에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10월 8일 갑신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맑음.

10월 9일 을유

맑음. 

10월 10일 병술

낮에는 맑고 밤에 흐림. 이날 저녁 무렵 명천(명천) 가의 우사(우사)에 사는 최정신(최정신) 씨가 재사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숙하였다.

10월 11일 정해

아침에 비가 오다가 저녁에 눈이 내림. 아침에 최정신 씨가 돌아가는 것을 보낸 뒤 나 또한 남영(남영)으로 걸음을 옮겼다. 찬비가 부슬부슬 내려 행로가 물과 일반이었다. 원문(원문)에 이르러 오록정 독판(오독판)을 뵙기를 청했으나, 그때는 오록정 독판이 이미 막소를 나간 뒤였고 문을 지키는 병사 또한 오록정 독판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내가 이어서 찾아온 뜻을 써서 통역에게 부탁하여 오록정 독판에게 전해달라고 말하였다. 땅거미를 밟고 돌아오는데 큰 눈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니, 얻으면 나라가 반드시 흥성하여 강해지고 잃으면 나라가 반드시 위태로워져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어진 관리와 훌륭한 장수는 백성들을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백성을 중하게 여겨 백성을 얻으려는 자가 장차 무엇으로 조처하겠습니까. 인의(인의)를 베풀어 그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따르는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인으로 조처하고 의로 시행하면 백성들이 모두 은덕을 감사하게 여겨 목숨을 잊을 것입니다. 윗사람이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백성들도 어기지 않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할 것이니, 그렇다면 용병(용병)의 방도 또한 이것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까닭에 지혜로운 장수는 백성에게 나은 것을 구하지 자신에게 나은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비록 백전백승의 능력있는 장수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끝내 지킬 수가 없지만, 저편이 비록 천만 군사의 대군이라 하더라도 인심이 이미 이반되면 가서 공격할 경우 반드시 패배시킬 수 있으니, 우리가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손무(손무)가 오(오)나라 왕에게 병법을 가르칠 때 먼저 오사(오사)로써 바르게 하였고, 구천(구천)이 회계산(회계산)에서 원수를 갚을 때 앞서 10년 동안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지백(지백)이 진양(진양)에 물을 대어도 윤탁(윤탁)의 백성들이 이반하는 뜻이 없었고55), 악의(악의)가 제나라 성을 모두 함락시켜도 사람들이 그 의리에 복종했습니다. 오기(오기)가 북쪽으로 삼진(삼진)을 물리칠 때에 먼저 유세객을 깨트렸고, 전단(전단)이 거(거)의 두 성(성)을 보호할 때에 패잔하고 도망한 적군을 두루 가련하게 여겼으며56), 염파(렴파)가 진(진)나라를 물리쳤으나 상당(상당)의 백성들을 잘 의지했고,  이목(리목)이 대(대)에 주둔했으나 북변의 땅을 미덥게 보았습니다. 정백(정백)이 언(언)에서 단(단)을 물리침에 그 불의함을 미워하여 사람들이 돕지 않았고, 조귀(조귀)가 제나라와 논의해 노나라를 침에 소혜(소혜)가 편들어 주지 않으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병가에 관계된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래로 삼국시대(삼국시대)와 오계시대(오계시대) 이래로 장수가 된 이를 또한 모두 열거하기 어렵습니다만, 성패와 존망은 모두 인심이 복종하느냐 복종하지 않느냐의 여하에 있었습니다.

지금 이 간도 지방은 바로 중국의 땅이요 간도의 백성은 중국의 백성입니다. 한국인 가운데 와서 붙어살며 호적에 들어간 이가 이미 수천 여 가호이고, 나도 또한 여기에 온 지 수개월입니다. 백성들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니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곳곳마다 서로 말하기를, “지금 오록정 독판께서 어진 정치를 널리 베풀고 한국 백성들을 애지중지 하니 우리가 무슨 근심인가. 낙토로구나 낙토. 나도 또한 안락하다.” 합니다. 일간 학교에서 모집하는 사람들은 무력을 빌어 사숙(사숙)을 윽박질러 학도를 충원한다 하는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것이 과연 대인께서 하시는 바입니까. 들으매 무척이나 놀랍고 두렵습니다. 무릇 사람이 품부 받은 기질이 같지 않음은 고금이 모두 같아 혹 재주가 있는 이와 재주가 없는 이가 있고 혹 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이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이가 있는데, 한결같이 아울러 몰아가기만 한다면 한갓 정치의 본체에 흠이 있을 뿐 아니라 장차 백성을 편안히 함에 마땅치 않음이 있을까 저어되니, 어느 겨를에 나라를 위해 보태어 쓰겠습니까. 이미 재주 있는 이와 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이는 그렇다 하거니와, 재주가 없는 이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이는 실로 오늘날의 신학문을 깨우치기도 어렵고 또한 끝내 전날의 구습을 변화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건대 점점 교화시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다림만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무력으로 학교를 세운다면 비록 복종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요 힘이 달려서 복종하는 것이니,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원망하여 서로 이반한다면 장차 어떻게 편안히 해주겠습니까.

듣건대 지금 백성들의 형편이 소란스러워 늙은이나 젊은이나 얼굴을 찡그려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대인께서는 어찌 시세(시세)를 살펴 하늘과 인민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저 왜적이 동토(동토)를 빼앗아 점거하고 군친을 능욕하며, 선량한 신민들을 살해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며, 분묘를 훼손시키고 성현의 서책을 태워버리며, 규모를 어지럽히고 정령을 뒤바꾸어 거주하는 바에 못할 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배반하여 혹 서로 모여 창의를 하는 자도 있고 혹 화를 피하여 강을 건너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대인께 바라는 것이 마치 갓난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능히 이러한 때에 그들이 좋아하는 바로써 그들이 싫어하는 바를 돌이킨다면 민심이 쉽게 따르고 천도가 귀순할 것이온데, 어찌하여 앞 시대의 역사책으로 귀감을 삼지 않으십니까. 옛말에 말하였습니다. “백성을 얻는 이는 흥하고 백성을 잃는 이는 망한다.” 또 「우서(우서)」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늘이 듣고 보심이 우리 백성들의 듣고 봄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밝고 무서움이 우리 백성들의 밝고 무서움으로부터 한다.[천총명 자아민총명 천명외 자아민명위]”57) 참으로 미더운 말입니다. 대인께서는 마땅히 그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하늘과 사람으로써 중함을 삼으시어 나라를 보필함이 주나라의 중산보(중산보)와 같고 군대를 출정함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같다면 싸움에 반드시 승리를 취하여 국가가 절로 흥성하여 강해질 것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천인의 즈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만, 한 마디 말씀을 기탄없이 올리려 하오니,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 별자리가 어지러이 섞여 세성(세성-목성(목성))과 자미성(자미성)이 남두성(남두성)을 범하고 형혹성(형혹성)이 오랫동안 실성(실성)과 벽성(벽성)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어찌하여 천문을 보고 사책(사책)58)을 살펴 깊이 경계하지 않으십니까? 지혜로운 자가 마땅히 백성을 어루만지고 하늘을 공경해야 하는 때이며, 더구나 다시 여름과 가을에 걸쳐 홍수와 곡충이 함께 재해가 들어 인민들이 굶주리는 데, 대인께서는 그 참상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바라옵건대 이러한 형세를 살펴주소서. 아!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사해(사해)가 가마솥처럼 들끓고 육주(륙주)가 거센 바람처럼 요동치니, 과연 지혜롭고 미덥고 어질고 용감하고 엄중한 자가 있어 장수가 되어 나라를 보필한다면 백성들이 서로 따르며 귀의하여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할 터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귀의함을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까닭에 “땅을 나눌지언정 백성을 나누지는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대인께서는 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큰 사업을 삼지 마시고 먼저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중함을 삼으시어 인의(인의)를 베풀고 호오(호악)를 따른다면 가까이 있는 이는 기뻐하고 멀리 있는 이는 따를 것인, 태평성세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삼가 씁니다.

이날은 소설이었다. 시월중이다.

10월 12일 무자

하늘은 맑고 바람은 차가움. 이날 저녁 무렵 좌수 현창운(현창운) 씨가 동강(동강)에서 와서 관리가 연무(연무)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앉아 있다가 이윽고 또 말하기를, “지난겨울 10월에 있었던 변란에 정태해(정태해)가 처를 데리고 해삼(해삼)에 들어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올 가을 우연히 역병에 걸려 불행히 죽었다고 합니다.” 운운 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정 아무개는 평소에 비분강개한 뜻을 가지고 있어 비바람을 피하지 하고 남북으로 바쁘게 다녔거늘, 어찌 적이 평정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었단 말인가. 애달프고 애석하구나. 구천에 갔다 한들 어찌 울분의 기운을 가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흘러 여기까지만 적는다.

10월 13일 기축

맑음. 오전에 현창운 씨가 평강(평강)을 향해 길을 떠났다. 내가 전송하느라 삼거리 어귀까지 이르렀는데, 약하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날렸으며 인적이 거의 드물었다.

10월 14일 경인

흐림. 

10월 15일 신묘

대체로 흐리고 조금 맑았으며 하늘이 참담하고 바람이 차가움. 이날 유시 말에서 술시 초 무렵 달이 묘성(묘성)과 필성(필성) 사이에 걸려 태백성(태백성)과 서로 가려 월식이 되다가 이윽고 어두워졌다.

10월 16일 임진

반은 맑고 반은 흐림.

10월 17일 계사

바람이 불고 눈이 몰아쳐 좁은 집이 꽁꽁 얼어붙었다.

10월 18일 갑오

하늘이 맑고 바람이 살랑거림.

10월 19일 을미

바람이 표표하게 불고 해가 청량함. 며칠 이래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매워 사람들이 원망하고 욕을 했다. 내가 말했다. “바람이 삼라만상을 뒤흔들고 눈이 삼동(삼동)을 뒤덮어 백제(백제)와 손녀(손녀)59)가 천제를 받들고 바람과 눈을 뿌리매 많고 적음이 각각 분수가 있다. 까닭에 공자(공자)께서는 번개가 번쩍 치거나 바람이 세차면 반드시 낯빛을 변하셨고,  정자(정자)께서는 비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일어나셨으니, 성인과 현인께서 하늘을 두려워한 정성이 이와 같다. 지금 사람들은 눈이 많이 내리면 욕을 하고 바람이 차면 원망하니, 천시(천시)가 참혹하게 추움이 혹 국가의 참독(참독)에서 말미암거나 혹 관장의 가혹함에서 말미암거나 혹 백성들이 악행을 저지름에서 말미암아 그러한 줄을 모르는 것인가. 이미 인사에서 잘못하고 천시에 원망을 돌리니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두렵지 않겠는가. 또 겨울에 바람이 치고 눈이 내리는 것은 천도(천도)의 당연함이다. 비록 마땅하지 않은 어그러진 기운이 재앙을 부른다 하더라도 풍백(풍백)에 대해서야 감히 어떠한 죄를 주겠는가.” 하며 말이 나오는 대로 썼다. 이날 저녁 무렵 아버지께서 6일에 내려주신 편지가 도착하여 손을 바삐 놀려 개봉해보니 아버지께서는 여태 나남(라남)에 머무르고 계셨으며 기체후는 건강하셨다. 또 거문(거문)의 여러 분들이 모두다 고루 잘 계신다고 하셨다. 내가 보고난 이래로 나그네 살이하는 나의 마음이 조금 달래어 졌다.

10월 20일 병신

맑고 한랭함.

10월 21일 정유

맑음. 신시 무렵 어떤 이가 와서 말하기를 “일간 청나라 관부에서 신학교에 모집한 자를 꾸짖어 돌려보내고, 즉시 다시 구문(구문)과 사숙(사숙)을 설치하게 하도록 유시(유시)하였다고 합니다.” 운운 하였다. 내가 듣고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모르겠거니와, 오록정 독판이 전날 내가 올린 글을 그르다고 여기지 않고서 들어준 것인가?’ 하며, 말없이 있다가 자리를 파하고 돌려보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아우 형규(형규)가 8일에 부친 편지가 동시에 도착했다. 열어보고서 기쁘게도 온 집안이 편안하다는 몇 글자를 얻고서 시름겹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10월 22일 무술

낮에 밝다가 밤에 흐림.

10월 23일 기해

하늘이 흐려져 성근 눈이 내림. 이날 저녁 무렵에 차종갑(차종갑) 씨, 차병권(차병권) 시, 이종흘(리종흘) 씨가 와서 나에게 청하기를 같이 가서 땅을 사서 장차 뒷날 집을 옮기는 계획을 하자고 하였다. 내가 허락하고서 유숙하였는데,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10월 24일 경자

맑음. 오후에 차종갑 씨를 비롯하여 4, 5인과 함께 동행하여 북강(북강)을 건너 시구(시구)를 지나 마패산(마패산)을 넘고, 의란구(의란구)에 이르러 객점에 들렀다. 조금 쉬었다가 즉시 일어나 동쪽을 향해 고개 하나를 넘어 위전구(위전구)에 이르렀다. 다만 보이는 건 사방으로 둘러 싼 산이 험준하고 높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적요한 것뿐인데, 골짜기 입구 깊은 곳에 강물이 산을 안고 ‘지(지)’ 자처럼 굽어 돌며 흐르고 있었다. 강 너머 산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소팔령(소팔령)이었다. 소팔령 아래 청나라 수비대의 영채(영채) 하나가 있었다. 이리저리 보다보니 해가 이미 저물려 하여 거뭇거뭇한 기운이 나무에 깔리고 있었다. 주씨(주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숙식하였다.-의란구는 일명 의림구(의림구)라고도 한다.-

10월 25일 신축

맑음. 아침 식사 후 길을 출발하여 소팔령을 넘고 벽수미(벽수미)를 지나, 길을 간 지 50리쯤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합수(합수)에 이르렀다. 합수는 석현(석현)에서 내려온 물이 북강으로 흘러들며 합류하는 곳이다. 강을 건너 남쪽 기슭을 올라 두루 살펴보다가, 이윽고 강물을 따라 10리쯤을 내려와 지명이 어우(어우)라고 불리는 곳에 이르렀다. 산기운이 다한 곳에 토지가 평평하고 넓었는데, 가운데 4, 50채의 인가가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이 지역은 두만강과 북강이 합류하는 지역 내에 있어서 고향과도 또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 줄기 긴 강을 끼고 두루 둘러본 다음 곧장 북쪽으로 강을 건너 안산(안산) 땅에 이르렀다. 거리가 불과 3, 4리 정도였는데 겹겹의 산이 뒤를 둘러 있고 구룡(구룡)이 오른 쪽에 자리 잡고 있어 지세가 신령스럽고도 승하며 양기가 온화하면서도 짙으니, 참으로 낙토라고 할 만하였다. 서쪽으로는 한국사람 10여 가호가 따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가운데에는 청나라 사람 5, 60 가호가 있어 날마다 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땅값이 높이 치솟아 끝내 사들이기가 어려워 한참이나 입맛만 다셨다. 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향하여 석현강(석현강) 입구에 도착했다. 바로 합수의 동쪽 길이다. 강의 북쪽에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는데, 이름이 초모정자(초모정자)이다. 산록 아래 토성 하나를 쌓아 놓았는데, 현재 수비하는 청나라 경찰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서쪽으로 연길(연길)과 통하고 남쪽으로 육진(륙진)으로 나가며 동쪽으로 훈춘(휘춘)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 왕성(왕성)을 지나게 되어 있어,  사면이 험난한 산임에도 사방으로 통로가 있으니, 까닭에 청나라 군대 4, 50명이 밤낮으로 방어하며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5리 쯤 가자 봉옥동(봉옥동)이 있었는데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70여 인가가 있었다. 최명록(최명록) 씨 댁을 찾아갔다가 마침 이희일(리희일) 씨를 만나 함께 묵었다.

10월 26일 임인

맑음. 대설이다. 십일월절이다. 식사 후 또 이희일 씨와 더불어 서쪽으로 가서 초모정자의 가장 높은 산정에 오르니, 눈 아래에 여러 봉우리들이 손자들처럼 벌려 섰다. 서쪽으로는 마패산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고향의 산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증산(증산)을 바라보는데, 하늘 끝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있어 눈길이 다하도록 걸림이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윽고 험한 길을 따라 내려와 석현이 이르자, 산악이 험준하고 높은 가운데서도 그나마 지세가 평평했는데, 중간으로 큰 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의 위 60리는 곧 백초구(백초구)이고, 강변에 있는 5, 6마을은 모두 한국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이리저리 보다보니 날이 저물어 주씨(주씨) 집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10월 27일 계묘

하늘은 맑고 바람은 차가움. 아침에 길을 떠나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갔다. 행차가 합수에 이르러 잠깐 쉬고 일어나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강을 거슬러 그저께 왔던 길을 향하여 소팔령을 넘고 위전을 가로질러 의란구에 다다랐다. 방향을 꺾어 동네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니 긴 계곡이 8리, 혹은 9리나 10리쯤 되었는데,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 사는 자가 수백여 가호였다. 이병학(리병학)씨 댁에 들어가 숙식하였다.

10월 28일 갑진

맑고 추움. 식사 후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남쪽을 향하여 맹적령(맹적령)을 넘었다. 이종흘 씨가 먼저 돌아가는 것을 보내고 길을 재촉하여 연집하(연집하)에 이르렀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이 지역은 북영(북영)의 북쪽, 의란구의 첫머리 동쪽에 있었다. 산이 평평하고 땅이 두터웠다. 거주하는 청나라 사람과 한국 사람이 또한 수백여 가호였는데, 우리 한국 사람이 8, 9할이나 되었다. 최창극(최창극) 씨 댁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10월 29일 을사

맑음. 아침 식사 후 유숙한 곳을 떠나 길을 출발하였는데, 유독 이희일 씨가 일이 있어 동행하지 못했다. 남쪽을 향하여 10리쯤을 가서 북영에 이르렀다. 잠시 앉았다가 곧장 일어나 발길을 돌려 용포동(룡포동)에 도착하여 마침 명원(명원)에 사는 최진순(최진순) 씨가 재사에 찾아오는 것을 만났다. 인사를 마친 후 궐리사(궐리사)가 훼철된 일과 성암(성암) 김동도(금동도) 씨의 변에 대해 상세하게 듣고는 한탄해 마지 않았다.

10월 30일 병오

맑음. 오후에 천천해 길을 가서 본 재사에 도착했다. 마침 차호균 씨가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린 지 벌써 오래 되었다.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숙하였다.

1월 1일 정미

맑음. 

1월 2일 무신

맑음. 

1월 3일 기유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차가움. 며칠 이래 아무개 아무개 5, 6사람이 서로 만나 한 자리에 모여 마을의 일을 이야기했다.

1월 4일 경술

맑음. 낡이 저물려고 할 때 부촌에 사는 이관오(리관오) 씨가 또한 재사에 와서 유숙하였다.

1월 5일 신해

맑음. 이날 낮에 차호균 씨가 집으로 돌아갔다.

1월 6일 임자

맑음. 

1월 7일 계축

맑음. 요 며칠 이래 유숙하던 차 아무개 등 두 세 사람이 가까운 곳의 전답과 택지를 비로소 정하여 각자 돌아갔다. 나도 또한 집을 옮기자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아버지께 여쭈려고 한참동안이나 간절하게 생각하였다. 용성(룡성)에 사는 홍종학(홍종학) 씨가 연추영(연추영)에서 찾아와 관리가 이상설(리상설) 씨와 계획이 같지 않은 일 및 기타 러시아 사람들이 병사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하여 두루 한 번 말하였다. 이때 지장회(지장회) 씨와 이희일(리희일) 씨가 또한 와서 모였다.

1월 8일 갑인

맑음. 오후에 지장회 씨가 자신의 재사로 돌아갔다. 홍종학 씨 또한 집을 옮기고자 하는 뜻이 있어 이희일 씨와 함께 북강으로 길을 떠나며 며칠 뒤에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1월 9일 을묘

아침에 성근 눈이 내리다가 저녁 무렵 이래로 하늘이 맑음.

1월 10일 병진

동지다. 십일월절이다. 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일양이 처음 생기는 날이요60)

만물이 처음 기지개 켜는 때라네

소장의 이치를 알고 싶다면

영허의 기약을 한 번 보시게나

이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흐려졌으며 먼 하늘에 구름 기운이 생겨났음.

1월 11일 정사

새벽에 맑다가 저녁에 바람이 불었음. 이날 저녁 꿈속에 우연히 강상에 누웠을 때 담계(담계) 한형기와 만났다. 몸에는 푸른 저고리를 입었고 왼편에는 자동차 한 대를 놓아두고 앉아서 「산수록(산수록)」을 열독하고 있었다. 내가 “오나라 사람 초나라 나그네가 거문고를 안고서 왔네.[오인초객포금래]” 라는 한 구절을 얻고는 홀연 졸음에서 깨어보니 맑은 풍표(풍표)가 완연히 자리에 있는 듯하였다. 이로 인해 시를 지었다.

꿈속에 큰 강변에 누웠더니

밤 깊자 물소리 고요했네

그때 담계 한형기와 만났는데

희미하게 동트려 했네

몸에는 푸른 저고리 입었고

자동차 또한 앞에 있었지

앉아서 산수록 열독했는데

의표가 절로 천연스러웠네

포금의 한 시구를 얻었으니

초산과 오강이 연결 된게지

문득 일어나 꿈에서 깨니

수부에 앉아 있던 신선이런가

앞을 살펴보고 뒤를 둘러보매

맑은 풍모 자리에 있는 듯

1월 12일 무오

반은 흐리고 반은 맑았으며, 하늘이 차고 바람이 불었음. 이날 서양 각국의 음식과 주거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서양의 풍속은 가옥에 귀천의 구별이 없다. 까닭에 부자인 사람의 집은 높이가 혹 7층이나 8층인 것도 있으며, 방은 몇 백, 몇 십 칸인 것도 있다. 그리고 창호는 대부분 유리로 장식하였다. 거대한 상인들은 서너 채의 집을 겸유하여 돈을 받고 가난한 자에게 주거 공간을 빌려주어 공동으로 주거하기도 하니,  마치 처마 밑의 제비나 참새와 일반이다. 농업에 전력하는 이는 적고 오로지 장사를 해서 입에 풀칠을 하는 바탕으로 삼는다. 모두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프랑스에는 포도주, 독일에는 맥주, 러시아에는 소주, 영국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술이 있고, 그밖에 각종 주류를 양조한다. 음식물은 주로 생선, 야채, 및 면포(면포-빵) 등을 수요로 한다. 독일과 러시아 두 나라는 서로 검은 면포와 흰 면포를 식용한다. 영국 사람들은 러시아의 면포와 같아 제작양식이 비슷한데, 그러나 다만 크고 작은 것이 같지 않다. 음식의 제도와 먹는 횟수는 각국이 서로 달라 하루에 1회 먹는 곳도 있고 2회 먹는 곳도 있으며, 3회나 4회 먹는 곳도 있다. 그리고 모두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 의복의 경우에는 반드시 염색을 하고 마름질 방식은 모두 통(통)의 형태이다. 향이 나는 물건을 뿌리기를 좋아하고 머리에는 모피 등의 모자를 쓴다. 발에 구두를 신는 것은 남녀가 모두 똑같다. 어린아이 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머리카락을 거두어 머리를 땋고 있다가, 어른이 되면 남자는 이발을 하고 면도를 하지만, 여자는 유독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용의 대략이다.

프랑스는 수도의 지명이 파리이니, 서양 가운데 가장 흥성한 도회의 관부이다. 우리나라의 1769년은 곧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던 시대이다. 당시 나폴레옹[나파륜]이란 자가 재목과 기국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기운과 도량이 비범하지 않아 유럽을 웅시(웅시)하며 무공을 많이 세워 안으로는 파리에 개선문을 세웠는데, 높이가 50m,-1m는 3척 3촌이다.- 폭은 45m, 두께는 22m이며, 비용은 390여 만환이었다. 윗부분에 역대 전쟁 및 당시의 용사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세계의 일대 장관이다. 이 나라의 풍속은 매년 2월 중순에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시가에 무리지어 모여 신에게 예배를 올린다. 예배가 끝나면 다투어 종잇조각을 잡고 서로 던지며 장난을 치니 이른바 ‘화전(화전)’이다.  또 5월의 어느 날에는 세탁업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주장하여 절세미녀를 선발하고는 여왕이라 부르며 여왕의 수레에 태워 시가지 가운데를 돌아다니며 놀이를 한다. 각자 생각한 대로 괴물 형상을 꾸며 혹 마차를 타고 혹 걸어 다니며 무리를 지어 쫓아다닌다. 또 종잇조각을 잡고 함께 집어던지며 장난을 치니 세계에서 이른바 운동이 이것이다.

런던[륜돈]은 영국의 아름다운 항구이다. 인구는 6백만 여명이고 큰 강[The Thames]이 도시를 가로질러 복판으로 흐른다. 1년 간 출입하는 선박은 총계 1400만 파운드인데,-1파운드는 1706냥 4전 쭝이다.- 철광, 석탄 등 각종 산물이 가장 풍부한 상공업의 중심지이다. 날마다 백대 천대의 마차가 종횡으로 어지러이 달리며 천만여 인구가 줄을 지어 길을 다닌다. 항구의 동쪽은 모두 상공업 단지이고 서쪽은 궁전과 관청 및 클럽 등이 있다. 또 상점이 가장 번성한 곳은 남쪽과 북쪽에 공장이 있다. 상공업 등 지금 천하의 운수와 물산을 오직 이 한 나라가 족히 담당할 만하다고 하겠다.

독일은 곧 덕국(덕국)이다. 유럽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연방하는 가운데에 성립된 나라이다.61) 지난날 나폴레옹 1세 때에는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는데, 마침 프로이센[보로서] 국왕이 연방을 대표하면서 독일황제를 칭하여 정치를 총괄하여 주관하고 군사를 일으켜 프랑스 군대를 몰아낸 세계의 강국이다.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크고 인구는 167만 7천여 명이다. 프로이센의 수도 지명은 베를린[백림] 시인데, 상업과 물산의 번화함은 런던과 파리에 버금간다고 한다. 그 나라의 풍속은 검소함을 중시하여 비록 부호가의 남녀라 할지라도 어릴 때는 견단(견단)을 입으며, 발에 넓은 구두를 신고 머리에 큰 모자를 쓰고 시가지를 출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오직 군인들의 복장은 금으로 장식하여 그 빛이 번쩍번쩍 한다.

포츠담(표담)-번역 음은 폿담이다.-은 베를린 시의 서남쪽 운하가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 그 나라의 국왕이 공원과 개선문을 쌓았고, 또 평화사원(평화사원)을 설립했다. 당시 인구가 60여 만이었는데, 지금까지 손때가 여전히 남아있다.

미국의 뉴욕[뉴육] 또한 세계의 일대 번화한 곳이다. 가옥이 즐비한데, 대부분 30여 층짜리이다. 철도와 고가도로는 멀리 12, 13층으로 연결된 것이고, 기차, 마차, 자동차, 자전거 등 이 복잡하게 내달리고 있는 것이 또한 런던이나 파리보다 적지 않다.

러시아는 곧 아라사(아라사)이다.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걸쳐져 있어, 아시아에 걸쳐진 러시아의 면적은 110만 평방마일이고 유럽에 걸쳐진 러시아의 면적은 35만 평방마일인데, 유럽에 걸쳐진 러시아가 그 본부이니, 이 나라는 정히 유럽의 10분의 6이나 된다. 안개와 비가 항상 많아 혹 몇 십일 동안이나 태양을 볼 수 없다. 추운 날씨가 유난히 많아 가을의 날씨가 겨울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국민들이 모두 모직물을 입고 부인들의 경우에는 큰 포대기 같은 것으로 뺨과 머리를 싸고 있으니, 지세가 험하고 차가운 줄을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23억 루블[류금]을 들여 페테르부르그[피득보] 가운데에 큰 사원을 축조하여 웅장하고 화려함을 지극하게 했는데, 화강암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자색(대자색)을 가져다 기와를 구웠다.-대자색은 바로 적철광이다.- 높이는 150m이고, 그 위에 또 수십 길 높이의 십자가를 세워놓았다. 말을 타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주조한 것이 사원 아래에 있다. 표트르 대제는 전대에 이 도시를 세운 왕이다. 나라 사람들이 희랍교(희랍교)를 열심히 믿어 도시 가운데 각처에 예배당을 많이 세워놓고 꿇어앉아 엎드려 예배를 드린 뒤에 길을 갔다. 이는 상하와 귀천의 통상적인 습속이다. 원래 러시아 또한 세계 가운데 하나의 강대국인데, 지난 광무 갑진년(대한제국8, 1904)에 일본과 전쟁하여 패배하여 치욕을 당했다. 까닭에 주변국 사람들 가운데 비웃는 이들이 많았다.

모스크바[막사과]는 러시아의 옛 도읍으로 인구는 100만이다. 가옥과 궁전은 오히려 중국의 제도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는 바로 달단(달단)62) 사람들이 오랫동안 거처했기 때문이다. 까닭에 아시의 문화가 대략이나마 전해졌다. 그 지역에 산을 건축한 것이 있는데, 옛날에 즉위하고 나서 예를 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모스크바의 서남쪽에 키예프[기매후]는 모스크바 이전의 수도이다. 원 토착민의 얼굴색이 아시아 사람과 비슷하다. 과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두 어깨에 삼태기를 메고 파는 것 또한 아시아의 풍속과 비슷하다. 버선발로 걸어 다니고, 부인들은 머리를 묶어 위를 가리키고 한다. 그 가운데 멀리 벽지에 있는 자들은 혈거 생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스위스[서서]는 나라 이름이다. 북쪽으로 독일과 접해있고, 서쪽으로 프랑스와 이웃해 있으며, 동쪽으로 독일 및 오스트리아[오태리], 헝가리[흉아리]와 잇닿아 있고, 남쪽으로 이탈리아[리태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모두 22개의 주이다. 평지가 극히 적어 3분의 2가 모두 산이다. 산은 대부분 신령하고 빼어나며 물은 절로 맑고 수려하다. 가운데로 저명한 4, 5개의 큰 강 및 2, 3개의 긴 호수가 있다. 그래서 현재 세계에서 ‘제일가는 산수’라고 일컫고 있다. 그 외에 명승 장관도 가장 많으니, 먼 산의 여름눈, 절벽 아래로 날아가는 폭포, 기이한 화초와 진귀한 수목 등이 유람객의 이목을 아울러 돕는다고 한다. 그 나라의 법은 다만 대통령을 추대하여 임금의 지위에 등극시키며, 국민들은 모두 근면하고 공업에 정밀하여 국가의 세력이 강대하다. 현재 수력전기 및 시계, 견직물, 면포 등에 대한 제조 기술은 전세계를 능가한다.

오스트리아[오태리]는 헝가리[흉아리]와 함께 하나의 나라를 개국하였다. 옛날 수도는 비엔나[유야납]인데, 궁전의 공원이 아직까지 있다. 원래 이 나라는 유럽의 열강들 사이에 끼어 비록 나란히 대치하는 형세는 잃었지만,  지금의 왕이 덕을 좋아하고 인(인)을 행하여 생민들을 자애롭게 대하고 구교(구교)를 열심히 믿어 매년 6월 12일에 시가지 중심을 걸어 다니며 국민들에게 질고를 묻는다. 또 12월에 나라 가운데 연로한 자 12명을 선발하여 손수 발을 씻기는데, 이것이 바로 그 종교의 오래된 관례이다. 국민 또한 모두 덕에 감화되어 부모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방인이 섞여 살아 정치와 종교가 행해지기 어렵다고 한다.

헝가리는 오랫동안 터어키[토이기]에게 공격과 핍박을 당했고, 아울러 러시아의 학대도 받아 스스로 떨칠 수가 없었다. 근세 이래 국민의 기운이 분발하고 나랏일이 날로 다스려져 거주하는 인구가 거의 90만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로마[라마]는 이탈리아[의태리]의 일대 수도이다. 의사당, 연극공연장, 및 성문과 수도 등이 비록 그런대로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고대의 과장된 영화는 현재의 세계에서 이미 발명할 수가 없고 근래에 조금씩 강성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날 로마의 법왕(그레고리우스 13세)이 2억 3천 5백 불의 금액을 들여 성당을 쌓았는데,-1불은 2전(전) 8전(전)이다.- 기둥은 모두 대리석이다. 가운데 25m 높이의 탑63)을 세우고, 탑 좌우에는 큰 회랑을 세웠다. 성당 위에는 162체(체)의 신상(신상)64)을 장식해 두었다. 본 성당의 지면(성 베드로 대광장)은 1만 5600평방미터이고, 정면 출입문은 높이가 40m를 넘는 것이 30개, 폭이 120m를 넘는 것이 60개인데, 당시 유럽에서 경앙하던 바의 것으로 각종 기괴한 조각과 신상이 옛날에 있어서도 비길 데가 없다. 그러나 미술은 프랑스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터어키[토이기]는 나라이름이다.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 사이에 걸쳐져 있다. 발칸[파남] 반도는 일찍이 로마의 왕이 점거한 지역이었는데, 뒤에 터어키의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국가의 세력이 점점 약해지고 분열되어 7개의 부분으로 되어있으니, 그리스[희랍]과 오스트리아[오태리] 등지가 이곳이다. 그 가운데 터어키가 가장 크니, 면적이 11,000여 평방마일이고, 인구 역시 600만 여 명이라고 한다.

이스탄불[군사탄정]은 곧 오스만[오도만] 제국의 수도이다.-오도만의 역음은 ‘옷도만’이다.- 해협에 임해 있으며, 아시아의 사우디아라비아[시구다리]와 서로 마주 보며 흑해(흑해)의 입구를 안고 있다.-시구다리의 역음은 ‘스구다리’이다.- 이 도시 북쪽의 금각항(금각항)은 증기군함 및 상선, 어선이 정박하거나 드나드는 지역이다. 근년 이래 이 나라의 정치가 밝지 못하여 국경을 수비하는 군사가 담배나 피고 잠이나 자며, 직공 및 상점인들이 모두 질탕하게 노는 것을 탐하여 생활을 신경 쓰지 않는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나태하기가 이와 같으니 의식과 산업이 대부분 훌륭하지 못하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망한 점이다. 원래 그 나라의 풍속이 남녀의 구별이 몹시 엄격하여 비록 부부사이일지라도 함께 거처하지 않으며, 돈이 있고 권세가 있는 자가 혹 4, 5명의 처를 취해도 각각 방을 따로 쓴다. 의복은 위로 군왕에서부터 아래로 관리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한 복장인데, 윗도리는 소매가 크고 금테로 마감했으며 아랫도리는 짧아서 무릎을 감싸는데 가죽으로 아래 종아리를 싸매며, 모자는 모두 붉은 색을 쓴다. 부인은 짧은 고의와 통옷을 입고, 조금 큰 고깔모자를 쓰는데, 시시때때로 얼굴에 덮어쓰고는 눈만 조금 드러내며 나머지 부분은 전면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간혹 우리나라의 장옷[장의] 같은 것을 입은 자가 출입하는데, 이 또한 우습고 괴상하다.

사박(사박)65)은 유럽과 아시아의 요로에 걸쳐 있으며, 러시아의 출입구를 바짝 틀어쥐고 있으니, 현 세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각색 인종들이 섞여 살아 풍속이 사뭇 다르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인종이 터어키인이고, 그 다음은 그리이스인, 유태인, 인도인, 아라비아[아랄비아]인 등의 인종 순이며, 영국과 독일 및 프랑스인도 그 가운데 있다. 원 토착민의 문자를 보니 말과 언어가 서로 다르다. 까닭에 근래에 외국인들이 이곳에 공장을 세워 권면하는데, 비록 점점 풍속과 정치를 교화시키려 한다 해도 그 사람들이 바뀌기를 좋아하지 않아 말은 제 말을 하고 학문은 제 학문을 배울 뿐이다. 심지는 굳어서 종교를 열심히 믿는데 기운과 풍모가 당당하여 늘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사가 있다. 자주의 무력을 믿고 여러 열강들의 훈련을 배우지 않으니, 까닭에 세계의 웃음거리를 면치 못한다.

흑해(흑해)는 지명이다. 바닷물의 색깔이 검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니, 홍해(홍해)처럼 바닷물이 붉지 않으면서 홍해라는 이름을 얻은 경우가 아니다. 장차 콘스탄티노플[곤시탄지로불]에 가고 싶은 자는 이곳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다.-곤시탄지로불의 역음은 ‘곤스탄디노불’이다.- 지금부터 6년 전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양의 사람들이 러시아의 군사력과 위세를 꺼려 파리조약(파리조약)을 성립시켜 군함이 이곳으로 통과하는 것을 금지하여 다만 조그마한 순라선(순라선) 8척만 있었는데, 배가 모두 철갑이었다. 또 바다 속에 수뢰(수뢰)를 많이 설치하여 놓고 아직까지도 전함이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캐나다[가내타]는 북아메리카 합중국의 북부에 있는 신개척 지역으로 7개 주(주)라 나누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북빙양(북빙양)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미합중국과 연이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굽어보고 서쪽으로는 태평양까지 미쳐 있다. 면적은 56만 평방마일이다. 원래 프랑스인들이 발견한 곳인데 지금은 영국인들의 점령지가 되었으며, 세계 가운데 제일의 농업과 상업 대국이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미치고 밴쿠버[만향파]에 이르기까지 도합 2906리이다. 그 사이에 거대한 록키산[락기산]이 있는데 하루 밤낮을 가는 힘을 다 쏟아야 오를 수 있다. 또 밴쿠버에서 계속해서 가서 다섯 밤낮을 가면 몬트리올[모도일]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에 도착하는데, 지나치는 명산대천의 장관이 또 스위스보다 못하지 않다. 그곳의 토착 원주민은 몸집이 크고 피부색이 적흑색이며, 옷이 모두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껍질이어서 처음 보면 사람 같지 않다. 지금은 풍기가 점점 개화되어 의식과 주거가 전에 비해 점점 훌륭해지고 있다.

수에즈[소사] 운하는 홍해와 지중해를 막고 있다. 예전에 이 운하가 완공되기 전에는 동서가 격리되어 있어 바닷길로 5, 6천 리나 돌아갔고, 혹 희망봉으로 우회해서 갔다. 그래서 파랑에 침몰하는 자도 있고, 혹 아라비아의 적야(적야)를 통과하다가 황사속에서 역병으로 죽는 이도 있었다. 지금부터 51년 전인 기미년(1859)에 프랑스인들이 아라비아 대 사막을 뚫어 열어서 바닷물을 통하게 하니, 길이가 87리요 깊이가 28척 반이요 너비가 넓은 곳은 300척이고 좁은 곳은 174척이다. 3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3억금환(환)의 비용이 들었으며, 착공 10년 만에 준공되어 준공 다음날 항해했다. 이곳은 서양 가운데 가장 요충로로 여기에서부터 동양과 크게 통한다. 우리나라는 유럽으로 출입할 때 두 갈래의 바닷길이 있다. 하나는 이렇다. 부산에서 동남쪽으로 일본 요코하마[횡빈]에 이른다. 동쪽으로 태평양을 지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상항]을 거쳐 밴쿠버[만향파]에 상륙한다. 그리고 캐나다[가내타] 철도를 타고 뉴욕[뉴육]으로 간 다음, 다시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도착한다. 이 여행의 기간은 짐작건대 36일이나 37일 쯤 걸린 것이다. 또 하나는 이렇다.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중국 상해(상해)로 가서 홍콩[향항]과 싱가폴[신가파]을 경유하여 인도양을 건넌다. 홍해와 지중해를 거쳐 유럽에 도착한다. 이 여행의 기간 또한 꼬박 52일이나 53일 즘 걸린다. 지금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선박들이 서로 왕래하며 크게 물산을 교통하는데, 그것을 주도하는 나라는 영국이다. 왕래하는 선박끼리 서로 마찰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5마일이나 6마일마다 사무원을 두어 표지목(표식목)을 세우고 작은 깃발을 달아 길을 양보해 주도록 보여준다. 밤이면 바다를 비추는 탐조등(탐조등)을 달아 통행을 밝힌다. 세계 제일의 운하이고 세계 제일의 이로운 요로인 이곳은 양쪽 해안이 모두 큰 사막이다. 몇 천리나 되는 들판에 흑색인종들이 살고 있는데, 집은 바위에 의지하여 살며 빈랑(빈랑) 나무의 잎사귀를 따서 바람과 비를 가린다.  장사하러 다니기를 좋아하여 흰 베로 머리를 감싸고 낙타를 타고 무리를 이루어 가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물건들이란 말인가. 원래 의복이 없기에, 그런 까닭에 벌거숭이 몸에 맨발로 아무 곳도 출입하지 않는다. 혹 몸에 걸치는 것이라곤 몸을 칭칭 싸맨 기다란 큰베 조각 뿐이다. 여자는 비로소 결혼을 해야 겨우 반신을 가린다. 이것이 통상적인 풍속이다.

요코하마[횡빈]는 일본의 막대한 중요 항구로 폭과 둘레가 약 40리이고 깊이가 약 25리이다. 부두를 크게 쌓아 동경만의 바람과 파도를 막고 잔교(잔교)를 설치하여 배를 정박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상점과 회사 및 각국의 영사관이다. 인구는 총 26만 1300여 명이고, 거주하는 외국인은 짐작건대 5500여 명이다. 항구 내에 다섯 구역이 있으니, 길전(길전), 남산수(남산수), 서태전(서태전), 야모(야모)이다.66) 그 가운데 제일 번화한 곳은 요코하마이고, 다음은 남산수 및 야모이다. 저명한 병풍포(병풍포)와 이세산(이세산)이 있다. 병풍포는 요코하마 가까이에 붙어있고 내외국인이 크게 모이는 경마장이 있다. 이세산은 야모에 인접해 있다. 거기에 태신궁(태신궁)이 있는데 신사(신사)이다. 풍경은 역시 좋다. 암전(암전) 및 서태전에 이르면 구경할 만한 곳이 거의 없다.

상해(상해)는 청나라의 지명이다. 동남쪽으로는 황포(황포)를 점거하고 있으니, 황포는 넓디넓은 장강(장강)이다. 또 서북쪽으로는 대륙과 접하고 있으며, 날씨는 늘 따뜻하다. 그래서 세계의 사람들이 ‘따뜻한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인천에서 증기선을 타고 꼬박 이틀 밤낮을 가면 여기에 이를 수 있다. 지금 동서양을 왕래하는 이들이 모두 상해를 동방 도시의 맹주로 삼으니, 이곳은 실로 각국의 만물이 모여드는 곳으로 또한 중국의 구동축이자 관건으로 가옥이 즐비하고 물산이 구비되어 있다.  까닭에 세계 3대 대도시에 들어가니, 미국의 뉴욕이 첫 번째이고 영국의 런던이 두 번째이고 청나라의 상해가 세 번째라고 한다. 상해에서 다시 서남방을 향해 가면 일대 승지가 있는데, 이곳의 지명은 홍콩[향항]이다. 현재는 영국인의 점유지가 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여 우리나라에 얼음이 얼고 추울 때에도 복사꽃이 난만하게 피고 풀잎이 솟아 푸르다. 이 항구의 인구는 또한 23만 남짓이고, 큰 병영과 큰 여관 및 동물원과 대기업이 모두 극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또 선인장의 키가 1장(장)이나 된다. 홍콩의 서쪽에 또 싱가폴[신가파]이 있는데, 생각건대 온도가 80도라고 하니 기이하다. 그곳에는 세계의 사람들의 상점 및 박물관과 식물원이 많이 있다. 인구는 모두 30만 남짓으로 중국인이 20만 이상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유럽과 미국 및 일본 사람, 그리고 토착 원주민 등이다. 토착 원주민은 말레이시아[마래]의 풍속을 행한다. 다음에는 콜롬보[고륜모] 항인데, 인도의 스리랑카[석란도]의 수도이다. 예전에는 포르투칼[포도아]인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지금은 영국인의 소유가 되었다. 토착 원주민은 흑색이고 풍속이 중국이나 말레이시아인과 같지 않고, 의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런색의 베로 허리 주변을 동여매고, 또 흰 베로 머리카락을 거두어 묶은 것이다. 여자는 나체로 다니는데, 유방 부위 이하로는 베조각으로 가린다. 콧구멍을 뚫어 금속이나 패물 등의 따위를 매달고 목과 귀 및 손 가운데는 모두 보석고리가 있다. 이들이 상등 신분의 여자들이다. 인도양에 이르면 기온이 더욱 높아 초목이 늘 푸르며 산수가 수려하다. 가운데에 석가묘[석가묘]가 있는데, 그곳 주변 상점의 현판을 보면 한문이 없다. 또 좀 더 가서 수에즈 운하를 건너면 하나의 나라가 나오는데, 이름이 이집트[애급]이다. 가옥은 모두 제작 기법이 창에 칠을 하는 것인데 또한 청색이다. 인구는 2만 여 명이다. 지금은 영국의 점령지가 되었다. 일찍이 듣건대 이 나라 여자들의 복장은 흑색이나 적색 등 각종 베조각으로 몸을 감고 머리와 얼굴을 덮는다고 한다.  또 나무로 만든 괴기한 물건을 코에 부착하고 길다란 …(원문 누락)…을 드리우니, 까닭에 두 눈 이외에는 전혀 노출되는 곳이 없다고 한다.

아, 중국은 427만 7천여 평방마이의 면적과 4억여만의 엄청난 인구로도 외국의 압제 하에 있어 토지가 분열되고 대세가 점점 무너지니 기존에 청조에서 봉록을 받아먹던 이들은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아, 비단 중국만 그럴 뿐이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은 또한 더욱 심하다. 3천리 강토와 2천만 민중이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누가 있어 복수해줄 것이며 누가 있어 구제해줄 것인가. 실로 통탄스럽도다. 실로 애석하도다. 옛날 역사 상 서양 각국의 토지의 면적과 인구의 수 및 의식주, 문화와 생활 등을 기록한 것이 없기에, 까닭에 오늘날을 당하여 견문을 채록해서 기록하여 내어놓으니 후인들이 한 번 참고해 보았으면 해서이다.-이상은 만국의 역사를 고찰한 것이다.-

1월 13일 기미

해가 나고 하늘은 차가움.

1월 14일 경신

맑음. 이날 낮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일전에 국보(국보)를 살펴보니 왜적들이 이등방문 피살 이후로 더욱 사나운 마음을 품어 금상황제 폐하를 학대하고 국호(국호)를 삭제했다고 하는데, 그대도 알고 계시오?” 하였다. 나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하는 

「지월회양재방야승(지월회양재방야승)」에 보인다.

무릇 사람이 태어남에 성(성)이 선(선)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그러나 기질의 품부 받음이 다르기 때문에 현명하고 어리석으며 지혜롭고 못난 구별이 있다. 그래서 배우지 않고 가르침이 없으면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라도 물욕이 날로 쌓여 처음의 밝은 선을 회복할 수가 없으며,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날로 혼미하고 우매함이 더하여 끝내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까닭에 상고의 성인께서 이를 염려하셔서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가르치니, 그곳에서 배우는 것은 다만 효제충신(효제충신)으로 일상생활에서 늘 행하는 것에 관한 말이다.

「예기(례기)」 「학기(학기)」에 말하였다. “옥은 쪼지 않으면 기물을 이룰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

여영공(려영공)67)이 말하였다. “안으로 어진 부형(부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사우)가 없음에도 능히 성취함이 있는 이는 드물다.”

옛말에 “자식을 기르며 가르치지 않음은 부모의 잘못이고 훈도를 하며 엄하게 하지 않음은 스승의 게으름이다. 부모의 가르침과 스승의 엄함은 양쪽 다 소홀히 함이 없음에도 글을 배워 성취가 없음은 자식의 죄이다.” 하였다.68)

주문공(주문공)이 말하였다. “집이 만약 가난하더라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며, 집이 만약 부유하더라도 부유하다는 이유로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이가 만약 부지런히 배운다면 입신양명(립신양명)할 수가 있고, 부유한 이가 만약 부지런히 배운다면 이름이 이에 빛날 것이다.”

무릇 학문은 자신을 위함[위기]이니,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수양하는 것[존양], 돌이켜 살피는 것[성찰], 스스로 자신을 닦는 것[자수]이다.

배움에 들어간 첫머리에 고원하고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근심을 삼지 말고, 마땅히 안자께서 말씀하신 “순은 어떠한 분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라는 말로 마음을 삼아야 한다. 성인도 또한 사람이니, 오늘날의 내가 뒷날의 성인이 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음은 이 학문의 큰 방도이니,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책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 까닭에 먼저 독서를 해야 하니, 선현의 자취 및 본받거나 경계할 수 있는 선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

무릇 배우는 이란 반드시 단정하게 공수(공수)하고 바르게 앉아야 하며, 책을 읽을 때에는 성(성)으로써 이치를 궁구하고 일이 있을 때에는 이(리)로써 일에 응하며, 움직일 때는 자신의 몸을 살피고 고요할 때는 이 마음을 보존할 뿐이다.

까닭에 배움은 뜻을 세우는 입지(립지)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입지는 진정으로 자신의 성장을 위하는 위기(위기)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해온 하학상달(하학상달)의 공부이다.

뜻이 이미 서지 않았으면 배움에 성실함이 없어 마음이 혹 밖으로 치달린다. 마음이 만약 밖으로 치달려 까마득히 보존되어 있지 않으면 의리(의리)의 정수를 얻을 수 없으니, 몸에 증험해 봄에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독서하는 이는 반드시 마음과 입이 상응하게 해야 한다. 입으로 외우기만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막혀서 들어오지 않으며 마음으로 생각하기만 하고 입으로 외지 않으면 정신과 뜻이 전일해지지 않으니, 얻는 바가 때때로 있을 수 있지만 시습(시습)의 방도는 아니다.

까닭에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의리는 반드시 강(강)과 구(구)를 중요하게 치니, 강(강)이란 것은 글의 내용을 따지는 것이고 구(구)란 것은 정미한 의미를 캐는 것이다.

무릇 학문을 하는 방도는 반드시 얕은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단계를 뛰어 넘어서는 안 되니, 거꾸로 깊은 곳부터 자리 잡아 단계를 놓쳐 버리면 반드시 막혀 통하지 않는 근심이 있다.

먼저 「소학(소학)」을 읽어 안으로는 「입교(립교)」, 「명륜(명륜)」, 「경신(경신)」 편을 읽고 밖으로는 「계고(계고)」, 「가언(가언)」, 「선행(선행)」 편을 읽어 하나하나 …(원문 누락)… 힘써 행한다.

다음으로 「대학(대학)」을 읽어 명덕(명덕), 신민(신민), 지선(지선)으로 강령을 삼고 격물(격물), 치지(치지), 성의(성의), 정심(정심), 수신(수신), 제가(제가), 치국(치국), 평천하(평천하)로 조목을 삼아 하나하나 참되게 알아서 진실하게 실천한다.

다음으로 「논어(론어)」를 읽어 성문(성문)의 가르침, 답술(답술), 언행(언행), 전도(전도)의 자취를 하나하나 정밀하게 음미하여 깊이 체득한다.

다음은 「맹자(맹자)」를 읽어 ‘천작(덕)을 귀하게 여김[천작]’, ‘양주와 묵적의 사상을 물리침[벽양주]’, ‘왕도정치를 높이고 패도정치를 천시[존왕천패]함’ 등의 주장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서 확충한다.

다음은 「중용(중용)」을 읽어서 ‘도란 잠시라도 삶과 떨어질 수 없다.[도불가수유리]’는 것과 ‘공효의 지극함을 미루어 다한다.[추치공효지극]’ 등의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음미하고 탐색해서 진실로 있게 한다.

다음은 「시경(시경)」을 읽어서 ‘본성과 감정의 삿되고 바른 발현[성정사정지발]’과 ‘절제와 부각 및 상세히 반복하고 부연하는 음영[억양반복지음]’에 대해 하나하나 보고서 감동을 받고 경계한다.

다음은 「예기(례기)」를 읽어 ‘예절과 제도의 상세함[절문도수]’, ‘공경과 사양의 근본[공경사손지본]’에 대해 하나하나 …(원본누락)… 세운다.

다음은 「서경(서경)」을 읽어 이제(이제)와 삼왕(삼왕)69)이 천하를 다스리는 큰 기준과 큰 법에 대해 하나하나 상세히 밝혀 얻는다.

다음은 「역경(역경)」을 읽어 복희씨(복희씨)와 주공(주공)과 공자(공자)께서 하늘의 이치를 연구한 괘사(괘사)와 단사(단사)와 상사(상사)에 대해 하나하나 침잠하여 의미를 캐내고 그 이치를 느껴 이해한다.

다음은 「춘추(춘추)」를 읽어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린 성인의 대의(대의)와 표창하는 말에 대해 하나하나 찾아 생각하여 깊이 깨닫는다.

오직 「효경(효경)」이란 책 한 편은 공자께서 묻고 답하신 말씀을 증자(증자)가 서술한 것이니, 모두 효의 도리를 밝힌 것이다. 배우는 자는 「소학」과 「대학」을 먼저 읽은 뒤에 반드시 이 책을 먼저 읽어서 자식 된 도리를 알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다섯 종의 책과 다섯 종의 경전은 모두 성현께서 후세에 남겨 보여주신 정론(정론)이니 천고에 걸쳐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큰 가르침이니, 진실로 푹 무르익도록 읽어 의리의 정미함을 고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만약 다섯 종의 책과 다섯 종의 경전에 대해 이미 명쾌하게 알았다면 또 범위를 넓혀 여러 역사책을 탐독하여 고금의 역사에 대해 통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역사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믿을 수도 없지만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다만 내 마음에 곰곰이 따져볼 뿐이다. 왜 그러한 것인가? 임금과 신하의 사적에 대해 기록해 놓은 진실한 기록인 본기(본기)와 전기(전기)가 패관소설(패관소설)과 진위가 같지 않을 경우 현명한 사람과 간악한 사람, 태평성대와 혼란기에 대해 실로 상세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모름지기 세심하게 따져 비교한 뒤에야 은미한 말과 심오한 의리를 밝힐 수 있고 이것과 저것의 장점과 단점을 평가할 수 있다.

무릇 경전을 읽는 자는 경전을 읽고도 남는 힘이 있다면 간간히 「심경(심경)」, 「근사록(근사록)」, 「혹문(혹문)」, 「주자어류(주자어류)」 및 정자(정자)와 주자(주자)의 책을 취하여 자세하게 연구하고 마음 깊이 이해하여야 한다. 그 외 이단의 사상에서 나온 좋지 못한 책은 잠시라도 펼쳐 읽어서는 안 된다.

무릇 독서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의 책을 푹 무르익도록 읽어 그 의미와 귀추가 뱃속에 흠뻑 적셔져 조금도 막히거나 의아한 점이 없게 한 뒤에 바야흐로 다시 다른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니, 명분만 헛되이 있고 실질이 없는 곳에 눈과 입을 치달려서는 안 된다.

무릇 성(성)과 경(경) 두 글자는 성학(성학)에서 상하에 관통하고 본말을 두루 갖춘 것이다. 도에 들어가는 제일 긴요한 관문이니, 학문을 하는 자는 심상하게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

대개 군자가 본성을 다하고 천명을 지극히 하는 것은 반드시 인륜과 일상의 떳떳함에 근본을 하며, 학자가 의리를 정밀하게 하여 신령함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청소하고 응대하는 방법에서 기초한다.

사람 노릇하는 방도는 꼭 따로 구할 것이 없으니, 다만 일상 행사의 사이에 있다.

아. 지금 모은 우리 학업을 익히는 이들이 닭이 울면 일어나 방과 집에 물 뿌리고 쓴 다음, 엄숙하게 서책을 마주하여 강습하고 토론하여 마음을 집중하고 힘을 모아 앎을 지극히 할지니, 혹시라도 태만하지 말아야 한다.

독서는 많은 책을 잡다하게 읽지 말고 학문은 잘못된 견해를 경솔하게 듣지 말아라. 말에 따라 깨달아 구절마다 분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요 많이 읽는 것을 탐해서는 안 되니, 많이 읽는 것을 탐하면 이치에 밝지 못하다.

글자를 익힐 때에는 경박하게 휘갈기지 말고 늘 반드시 차분히 해서 마음을 밝히고 힘을 다하여 점과 획이 굳세고 바르며 글자 모양이 분명해야 한다.

강석에 있을 때에는 차례대로 단정하게 앉아 분주하게 소란피우지 말고, 용모를 가다듬어 우스갯소리로 떠들지 않으며, 잡념을 제거하여 산만하게 드나들지 않는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한다.

원(원)·형(형)·이(리)·정(정)은 천도(천도)의 변치 않는 법도이고 인(인)·의(의)·예(례)·지(지)는 인간 본성의 기준이다. 사람마다 모두 있으니 분명하고 분명하게 배워 그 기준을 허물어뜨리지 말아라.

남이 얻는 것 보기를 마치 내가 얻은 것처럼 여기고 남이 잃는 것 보기를 마치 내가 잃은 것처럼 여겨라.

손님이 찾아오면 예의를 갖추어 접대하고, 떠날 때에는 공손하게 배웅한다.

설 때 문 가운데 서지 않으며 다닐 때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물러날 때 서책은 종이, 붓, 벼루, 먹과 함께 항상 일정한 곳에 놓아둔다.

마을을 드나들 때에는 뛰지 말고 싸우지 말라.

낯빛은 온화하게 하고 말은 부드럽게 하며, 집안에 들어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문 밖을 나와서는 어른들을 공경한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상읍례(상읍례)를 행하여 모든 행동거지와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대한 범절을 익힌다.

삼가 이 학규(학규)를 따라서 경계하고 노력하며 싫증내지 말고 게을리 하지 말아서 날마다 진보하여 공이 있어야 한다.

옛날 책을 읽는 이들은 밤에는 자지 않고 낮에는 놀지 않았는데, 오늘날 책을 읽는 이들은 아침이 되어 겨우 일어나는데다 낮에도 혹 잠을 자니, 이것이 과연 학문을 하는 본색인가? 실로 통탄스럽다.

옛날 책을 읽는 이들은 본받아야 할 내용을 발견하면 마치 따라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하여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따졌는데, 오늘날 책을 읽는 이들은 본받아야 할 내용을 발견하면 마치 능히 행하는 것처럼 하여 마음은 떠나고 귀는 밖으로 흘려들으니, 이것이 과연 도를 구하는 본뜻인가? 안타깝구나.

옛날 책을 읽는 이들은 먼저 효도와 공경을 하고 난 뒤에 글을 배웠는데, 오늘날 책을 읽는 이들은 비록 글을 배웠지만 효도와 공경을 모르니, 이것이 과연 자신의 성장을 위한 위기(위기)의 학문인가? 슬프다.

무릇 인륜은 일상생활의 바름이니, 이것이 성현의 학문에서 지극히 절실한 핵심이다. …(원문 누락)… (이 외에)다시 무얼 구하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 자제들은 집안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문 밖을 나서면 공경하며, 삼가고 미더움이 있으며 널리 모든 대중을 사랑하되 특히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낼 지니, 이것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을 배울 것이니라.” 세상의 모든 자식 된 사람이 제가 행해야 할 직분을 닦지 않고 먼저 글을 배우면 그것은 위기(위기)의 학문이 아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사람을 가르치신 큰 얼개는 다만 효도와 공경, 충성과 신의 등 일상생활에서 늘 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 뿐이니, 사람들이 능히 여기에 나아가 실천해 간다면 달아나버린 마음은 돌아올 것이고 흐려진 본성은 절로 밝아질 것이다.” 이는 학문에 들어가는 근원을 깊고도 자세하게 말한 것이다. 대개 본성과 마음이 아무리 백성들이 누구나 가진 떳떳함이라 하지만, 그러나 사물이 유혹하면 마음이 달아나버리고 욕심이 얽어매면 본성이 흐려지는 법이니,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수양하는 것은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기미(기미)에 참여할 수 없다. 무릇 어버이를 모시고 형을 공경함은 가정에서 날마다 행하고 사람마다 모두 실천하는 것이다. 갓난아이 때에 사랑할 줄 알고 조금 성장해서 공경할 줄 아는 것도 또한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어 억지로 노력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성인의 도(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릇 효라는 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이니, 과연 진실로 어버이께 효도를 할 수 있을 경우, 그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충성이 되고 그 마음으로 어른을 섬긴다면 공경이 된다.

자식 된 사람이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고, 또한 어른에게 공경하지 않는다. 이렇다면 아무리 배웠다 하더라도 나는 기어이 배우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일상 거처에는 공경을 지극히 해드리고 봉양할 때에는 즐거움을 지극히 해드리고 간병을 할 때에는 근심을 지극히 하고 상례를 치를 때엔 슬픔을 지극히 한다.70)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세속에서 이른바 불효라는 것이 다섯이다. 제 몸을 게을리 하여 부모를 내팽개치고 봉양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효이고, 바둑을 두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를 내팽개치고 봉양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효이고,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식을 두둔하여 부모를 내팽개치고 봉양하지 않는 것이 세 번째 불효이고, 신체적 욕구를 좇느라 부모를 욕보이는 것이 네 번째 불효이고, 싸우기를 좋아하여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다섯 번째 불효이다.”

맹자께서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면 백성들이 아래에서 친해진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사람마다 어버이를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면 천하가 평안해 진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자고이래로 어지러움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인륜이 밝아지지 않은 결과이다.

인간 사회의 큰 윤리가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모와 자식은 친함이 있고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고 지아비와 지어미는 분별이 있고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고 벗들 사이에는 믿음이 있다는 오륜(오륜)이다. 나라에 큰 기준이 세 가지가 있으니, 임금은 신하의 기준이 되고 부모는 자식의 기준이 되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기준이 된다는 삼강(삼강)이다.

현재 하늘과 땅이 뒤집혀 서양 오랑캐의 학문이 침범하매 오륜이 모두 사라지고 삼강이 이미 멸절되었으니, 사람이 날마다 짐승이 되어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아, 생도들아. 늘 오륜을 밝히고 삼강을 세워야 한다는 의사와 양기를 부양하고 음기를 누르겠다는 주장으로 강력하게 스스로 노력하라.

이 시대에 이른바 유명한 사람들은 일체 모두 고인의 도를 부정하니, 의리를 망가뜨리고 교활함을 부려 어질고 현명한 이들을 음해하고 어버이와 임금을 모욕하며, 바른 것을 가지고 굽었다 하고 굽은 것을 가지고 바르다 하여 성인을 꾸짖고 옛 규범을 어지럽히며, 세력을 타고 남에게 해코지하고 폭력을 휘둘러 재화를 갈취하며, 선조의 영령을 더럽히고 하늘과 신명을 능멸한다. 사람들은 모두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는 몹시 불량스러운 짓이다. 내 비록 …(원문 누락)… 하지만 하늘은 반드시 벌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유교가 끊기고 문운이 막혀 신학문과 공리(공리)에 대한 주장이 …(원문 누락)… 보건대, 어린이를 위한 학문은 …(원문 누락)… 성인의 가르침이거늘 괴상하다고 비웃으며 조롱하여 비난하니, 이는…(원문 누락)…이다. 무릇 성인이란 하늘이니, 어찌 공리의 일을 가지고 높고 밝은 하늘을 업신여길 수 있으며, 짐승의 주장을 가지고 남을 위한 학문의 방법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다시 전쟁이 이어서 일어나 경전이 모조리 없어지니, 누가 그것을 수습하여 오랑캐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서 후학들을 깨우쳐 줄 것인가. 천운이 순환하여 가면 다시 오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때를 두고 이른 말이다.

아. 책이 없으면 가르침이 없고, 가르침이 없으면 인륜이 없고, 인륜이 없으면 사람이 짐승이 된다. 어찌 애통하지 아니한가. 어찌 애통하지 아니한가.

하늘이 화를 내리는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 선을 좋아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면 몸이 가루가 되는 우환을 면하기 어렵다. 마땅히 그 노력을 백배로 더하여 부지런히 부지런히 학업을 지향하고 조금도 쉬지 말고 학업을 닦을 지어다. 날이 쌓이고 달이 누적되어 본성이 발현되어 효도와 공경의 실질을 확충하게 한다면 살아서는 도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죽어서는 경사가 있을 것이다.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효자가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러한 때를 말하는 것이요, 바로 이러한 효도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남의 자식 된 이가 제 머리를 깎고 옷을 바꾸어 입어 부모 형제와 서로 떨어져 마치 서로 원수처럼 본다면 이같은 불효와 불경은 하늘이 실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제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것을 일러 패덕(패덕)이라 하고, 제 형을 공경하지 않고 남을 공경하는 것을 패륜이라고 한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 혹 부모를 배신하고서 세력 있는 자와 결탁하거나, 형제와 친척들에게는 털끝만큼도 따지면서 친구와 외인들에게는 금전과 전토를 뿌리는 듯 세력에 아부하니, 윤리가 도치되고 경중이 마땅함을 잃었다. 이것이 어찌 어버이를 친하게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주역」 에 말하기를 선을 쌓으면 경사가 있고 악을 쌓으면 재앙이 있다고 하였으며, 「서경」에 말하기를 바른 도를 따르면 길하여 복을 받고 패역한 도를 따르면 흉하여 재앙을 받는다 하였다. …(원문 누락)… (「주역」과 「서경」은) 앞 시대의 성인이 세상을 깨우치고 사람들을 인도하는 책이니, 이 책을 본 사람은 마땅히 이 말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체득하여 …(원문 누락)… 마음에 심어두어서 거의 선에 가까워지면, 더욱 마땅히 노력을 더하여 맑고 선량함에 나아가 길한 경사를 구해야 한다. 혹 지각이 없어 선하지 않은 것에 잘못 물든 자는 더욱 마땅히 빨리 고쳐서 허물이 없는 데로 돌아가 재앙을 모면해야 한다. 오늘날 천운과 인간이 만난 상황을 보니 몹시 두렵다.

푸른 하늘이 몹시 아스라하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한 가지 일의 공정함과 사사로움은 천지의 신명이 강림하시는 바이다. 너의 집에서는 속일 수 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한 가지 생각의 사악함과 바름은 귀신이 분명히 보는 바이다. 다만 일상 행하는 인륜의 사이에서 자식 된 이는 마땅히 집안에서 효도와 공경을 극진히 하고, 선비된 자는 의당 경전에 기준하여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오직 하늘의 도는 별달리 친하게 대하는 사람이 없고 늘 길한 사람과 함께 한다. 혹 비할 데 없이 빼어난 충정은 해를 찌를 수도 있고, 혹 지고지순한 효성은 하늘에 닿을 수도 있으며, 혹 정숙한 여인과 열렬한 의사는 서리를 내리거나 별을 떨어뜨리는 기상이변을 일으키기도 하니, 어찌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오직 군자는 바른 기운이 충만하여 사악함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니, 비유하자면 태양이 한 번 솟아오르매 얼음과 눈이 녹아버리는 것과 같이 일체의 모든 바르지 않은 기운이 멀리 달아나 감히 화를 만들지 못한다.

공자께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보답을 하고, 선하지 않은 짓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로써 보답을 한다.” 라고 하였으니, 공자와 같은 성인께서 어찌 후세 사람들을 속이시겠는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길한 사람은 선을 말하고 선을 보며 선을 행하여 날마다 세 가지 선한 일을 하니, 3년이 지속되면 하늘이 반드시 복을 내려 준다. 흉한 사람은 악을 말하고 악을 보며 악을 행하여 날마다 세 가지 악한 일을 하니, 3년이 지속되면 하늘이 반드시 화를 내려준다.” 하였다. 이 말이 참으로 그러하니 어찌 힘써 행하지 않겠는가.

사람이란 큰 성인이 아닐진대 누가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고치면 곧 선해진다.

무른 선이란 하늘이 준 고유한 본성이니, 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처음으로 돌아가 밝힌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밝아진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닦아 행한다면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교훈이 되는 말을 거듭 펴노니, 바라건대 선을 따르고자 하여 마음을 조심하고 삼가고 삼가 한결같이 부지런히 노력하라.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한다.

남의 선함을 보거든 자신의 선함을 찾아보고 남의 악함에 대해 듣거든 자신의 악함을 찾는다.

자신이 부유하다고 해서 가난한 이에게 야박하게 굴지 말고 자신이 귀하다고 해서 천한 이를 멸시하지 말며, 자신이 유능하다고 해서 무능한 이를 비웃지 말고 자신이 세다고 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지 말라.

남의 어려움을 안타까워 해주고 남의 선함을 즐거워하며, 남의 위급함을 도와주고 남의 급박함을 구해주라.

바른 도가 맞으면 나아가고 바른 도가 아니면 물러나며, 사악한 길은 다니지 말고 어두운 곳에서도 속이지 말라.

새로운 문물을 따르지 말고 전통 규범을 잊지 말아라. 선왕이 물려준 복장을 입고 앞 성인이 남겨주신 책을 읽어라.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고 남의 추잡함을 들추지 말며, 남이 좋아하는 것을 침범하지 말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멸시하지 말라.

아, 아아. 위의 내용은 나의 말이 아니라 오직 성인의 가르치심이다. 내 책을 읽는 사람을 위하여 말하지 않고 누구를 위하여 말하겠는가. 책을 읽는 사람을 위해 해주었음에도 이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누가 노력하겠는가. 삼갈지어다. 실천할지어다. 경계할지어다. 노력할지어다.

이해 여름, 내가 강서(강서)에서 객지살이를 했다. 학부형들이 서너 명의…(원문 누락)…학생들과 함께 수업해 달라고 간청하기에 그때 이래로 한 달 남짓 동안 그들이 공부하고 행동하는 것을 살펴보니, 8, 9년이나 독서를 많이 한 학생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내가 지난날 읽은 책에 대해 물어보자 ‘아무 책을 읽고 아무 글을 읽었노라.’ 했는데, 의미에 대해 물어보니 책은 책대로 따로 놀고 저는 저대로 아무것도 몰랐다. 이는 무슨 병폐인가. 일찍이 가만히 한 번 살펴보매 단순히 위기(위기)의 학문을 모르는 정도보다 훨씬 심각하니, 뜻을 세우는 공부에 대해서도 터득한 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성실하지 않은 결과이다. 무릇 책을 읽는 이가 모두 “아무리 성실하게 해도 얻은 게 없다.”라고들 하지만, 이것 또한 성실하지 않은 말이다. 대개 성실이란 것은 ‘참으로 진실하여 삿됨이 없다.’는 말이다. 과연 정말로 ‘참으로 진실하여 삿됨이 없다.’는 것을 실천했다면 뜻이 절로 서서 마음에 자기 자신을 속이는 근심이 없을 것이니, 배움이 어찌 독실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앎이 어찌 분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배움을 향한 정성에 삿됨이 있어 진실함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뜻이 이미 서지 못하고 배움도 또한 태만하다. 이런 때에는 온갖 잡념이 마구 쳐들어와 마음이 풀어지고 정신이 날뛰어 바깥의 사악함이 이런 틈을 타 들어온다. 비록 공부를 한다는 명목은 있지만 얻는 효과는 실제로 없으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것이 병폐의 근원이다.

내가 본디 성(성)과 경(경)에 대한 공부에 힘쓰지 않아 비록 학문을 하는 방도를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가르치는 지위에 있는 때를 당하여 그 병폐를 치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거칠고 비루한 나의 주제를 생각지도 않고 여러 서적의 핵심 구절을 따서 가르침의 자료로 만들었는데, 간간히 혹 나의 뜻을 끼워 넣었으니 또한 내 마음에서 자득한 묘를 모은 것이다. 이것을 편집하여 책을 만들고 「학규(학규)」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가한 날 여러 학생들에게 강독하고 익히게 한다면 비록 고명하신 분께 꾸지람을 들을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공부를 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아마도 조그마한 보탬이 있을 것이다.

기유년(1909) 가을 9월 하순 월산우부(월산우부) 김정규(금정규)는 회양재(회양재)에서 삼가 쓰다.

[인장]용연산방(룡연산방) 

[인장]김정규장(금정규장) 

각주)----------------- 

1) 이 부분의 원문은 ‘극념극려’인데, 의미가 닫지 않으므로 ‘려(려)’를 ‘려(려)’의 오자로 판단하여‘극념극려’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 관리(관리) : 북간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의병대에서 부르던 의병 대장의 직위이다.

3) 향원(향원) : 향원은 향원(향원)으로 쓰기도 하는 바, 겉으로만 삼가고 조심하며 시골에서 덕을 가진 체 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이에 대해 “향원은 덕의 적이다.[향원덕지적야]”라고 질타하였는데, 그 주에 “덕이 있는 것 같으나 참된 덕이 아니어서 도리어 덕을 어지럽힌다.[사덕비덕 반란호덕]”라고 하였다. 「론어 양화」

4) 경방(경방) : 한나라 원제 때의 역학자(역학자). 저서에 점치는 방법과 재변의 징험(징험)을 설명한 「경씨역전(경씨역전)」이 있다.

5) 도옹의 국화 : 도옹은 동진(동진)의 시인 도연명(도연명)을 말한다. 그가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심어놓고 감상하였기에, 뒤에 동쪽 울타리 아래의 국화는 은자의 상징이 되었다.

6) 소씨의 오이 : 소씨는 소평(소평)으로 진(진)나라 동릉(동릉) 사람이다. 「사기(사기)」 『소상국세가(소상국세가)』에 "동릉후(동릉후)는 진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그만두고 장안성 동쪽에 나아가 오이를 심었는데, 그 오이의 맛이 매우 훌륭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동릉과(동릉과)라 불렀다." 하였다.

7) 원문은 ‘권렴’인데, 옆에 ‘사립문을 열었다.[개비]’라고 고쳐 놓은 표시가 있다. 운자로 볼 때 고친 글자로 보아야 옳을 듯하다.

8) 이 부분의 원문은 ‘화을’로 되어 있으나, 이는 ‘태을’을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9) 5묘일 : 정묘일(정묘일), 기묘일(기묘일), 신묘일(신묘일), 계묘일(계묘일), 을묘일(을묘일)을 말한다.

10) 6갑일 : 갑자일(갑자일), 갑술일(갑술일), 갑신일(갑신일), 갑오일(갑오일), 갑진일(갑진일), 갑인일(갑인일)을 말한다.

11) 십정(십정) : 역법의 한 종류.

12) 경신일(경신일) : 경일(경일)과 신일(신일)을 말한다. 즉 토(토)에 해당하는 경오일(경오일), 경진일(경진일), 경인일(경인일), 경자일(경자일), 경술일(경술일), 경신일(경신일)과 신미일(신미일), 신사일(신사일), 신묘일(신묘일), 신축일(신축일), 신해일(신해일), 신유일(신유일)이다.

13) 진괘(진괘)의 하늘 : 동쪽 하늘을 말한다. 진(진) 방향으로는 동쪽, 사람으로는 장남, 사물로는 목(목)과 토(토)에 해당한다.

14) 이괘(리괘)의 하늘 : 남쪽 하늘을 말한다. 이(리)는 이(이)와 같은데 방향으로는 남쪽, 사람으로는 중녀(중녀), 사물로는 화(화), 일(일), 전(전)에 해당한다.

15) 「당개원점경(당개원점경)」에 이 부분과 관련하여 참조해 볼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회삭현망운기사색자, 개우. 동풍칙당일우”라고 하였다.

16) 이하 19일까지의 기사가 결락되었다.

17) ‘이혼일’ 세 글자는 연문으로 판단되어 번역하지 않았다.

18) 십승지(십승지) : 기근이나 병화(병화)의 염려가 없다고 술가(술가)에서 일컬어지는 열 군데의 지역.

19) 「맹자(맹자)」 「공손추 상(공손축상)」 원문에는 본문과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 “힘으로 타인을 굴복시키는 자에 대해서는 남들이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니 힘이 모자라서이고, 덕으로 타인을 감복시키는 자에 대해서는 남들이 속마음에서 기뻐하여 참으로 복종한다.[이력복인자, 비심복야, 력부섬야, 이덕복인자, 중심열이성복야.]”

20) 담진(담진) : 사진(사진)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상산(상산)은 중국 하북성(하북성) 곡양현(곡양현)에 있는 항산(항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산에 솔연사(솔연사)라고 하는 뱀이 서식하는데, 「손자병법(손자병법)」 「구지(구지)」에 “상산에 솔연이라는 뱀이 있는데 머리를 때리면 꼬리가 덤벼들고 꼬리를 때리면 머리가 덤벼들며, 한복판의 허리를 때리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덤벼든다." 라고 하였다. 이후로 이 뱀의 방어와 공격법이 병가(병가)의 진법(진법)에 수용되어 쓰였다.

21) 학부(학부) : 장자의 다음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장주(장주)가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그러자 감하후가 봉읍(봉읍)에서 세금을 받아 3백금을 꾸어 주겠노라고 하였다. 이에 장주가 이렇게 말했다. “내 어제 이리로 올 때 도중에 누가 부르기에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말라가는 물[학] 속에 붕어[부]가 한 마리 있었소. 그래서 ‘붕어야 오너라.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니, ‘저는 동해의 파신(파신)입니다. 그대는 혹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 저를 살려 주실 수 있습니까?’ 하더이다. 그래서 내가 ‘알았다. 내가 이제 남쪽 오(오)나라와 월(월)나라로 가서 서강(서강)의 물을 터서 네게 끌어다 주겠다. 괜찮지?’ 하자, 붕어가 벌컥 안색을 고치며 말하기를, ‘저는 제가 늘 살던 한 물을 잃어 지금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그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진작에 건어물(건어물) 가게로 가셔서 저를 찾는 게 나을 겁니다.’ 하고 하더이다.” 「장자(장자)」 「외물(외물)」 여기서는 다급한 상황에서 주는 아주 절실한 도움을 말한다.

22) 단율(단률) : 한시(한시)의 체(체)의 하나로 절구(절구)를 말한다.

23) 창귀(창귀) : 창귀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영혼인데, 호랑이의 부림을 받아 앞잡이 노릇을 하며 못할 짓을 저지른다고 한다. 「사물이명록(사물이명록)」 「귀신(신귀) 호상귀(호상귀)」 여기서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부일배(부일배)를 지칭하는 말이다.

24) 망량(망량) : 물의 신인 전욱(전욱)의 아들 둘이 죽어서 역귀(역귀)가 되어, 하나는 강수(강수)에 살면서 학귀(학귀)가 되었고, 하나는 약수(야수)에 살면서 망량귀(망량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비유한 말로 쓰였다.

25) 이매(리매) : 이(리)는 짐승 모양을 한 산의 귀신이고, 매(매)는 늙은 정령(정령)이다. 이들은 산 속의 이상한 기운에 의해 생겨나서 사람을 해치는 물건인데, 역시 여기서는 일제 앞잡이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26) 기선(기선) : 길흉(길흉)을 점칠 때 남녀 무당들이 불러서 일을 시키는 신선(신선)의 이름.

27) 야차(야차) : 사람 고기를 먹는 아주 사나운 귀신의 이름.

28) 농어 순채 : 고향이 몹시 그리워짐을 상징하는 말이다. 진(진)나라 문장가 장한(장한)의 자는 계응(계응)이다. 낙양(낙양)에 들어가서 동조연(동조연) 벼슬을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고향에서 먹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바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진서(진서)」 권92.

29) 온갖 횡액 : 「시경(시경)」 「왕풍(왕풍) 토원(토원)」의 “온갖 횡액 만났으니, 차라리 잠이 들어 깨어나지 말았으면.[봉차백이 상매무와]”에서 온 말로, 소인들이 득세함으로써 정직한 사람이 화를 입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본 군경과 앞잡이들의 그물망에 걸려들까 두렵다는 말이다.

30) 신정(신정)의 눈물 : 망국의 경물을 대하고 흘리는 눈물을 뜻한다. 신정은 강소성(강소성) 강녕현(강녕현)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진(진)나라가 오호(오호)의 난을 만나 국가가 쇠약하여 강남(강남)으로 쫓겨 가자, 진의 명사들이 이 정자에 모여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주의(주의)가 탄식하면서 “풍경(풍경)은 예와 다름이 없는데, 산하(산하)는 옛 산하가 아니네.” 하니 모두들 쳐다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왕도(왕도)는 초연(초연)히 낯빛을 변하고 “마땅히 함께 왕실을 위하여 중국을 수복할 것을 힘써야 한다. 어찌 초(초)의 포로처럼 마주 대하여 눈물만 흘리겠는가.” 하였다. 「진서(진서)」 권65 「왕도전(왕도전)」

31) 애닯다 …… 고생하셨네 : 효자(효자)가 부모의 봉양을 뜻대로 하지 못하여 슬퍼하는 정을 노래한 시로 「시경(시경)」 「소아(소아) 육아(료아)」의 첫장에 "저 장대한 놈 푸성귀렸더니, 아 나물 아니라 잡초였었네. 애닯다 우리 부모, 날 낳으시느라 고생하셨네.[료료자아 비아이호 애애부모 생아구로]" 한 데서 온 말이다.

32) 촌심(촌심) : 촌심은 아들의 마음을, 봄철의 따뜻한 볕은 부모의 은혜를 비유한 것이다. 맹교(맹교) 의 「유자음(유자음)」에, “어느 뉘라 촌초(촌초)만한 마음으로 봄볕 같은 은혜를 갚는다 하리[수언촌초심 보득삼춘휘].” 하였다.

33) 민둥산에 …… 올라 : 고향을 떠난 효자가 먼 지방에서 높은 산에 올라 고향의 부모를 그리워 한다는 뜻이다. 호(호)는 민둥산이고 기(기)는 숲이 우거진 산이다. 「시경」 「위풍(위풍) 척호(척호)」에 “저 민둥산에 올라가 아버지를 바라보노라. 저 초목이 있는 산에 올라가 어머님을 바라보노라.[척피호혜 첨망부혜 척피기혜 첨망모혜]” 한 데서 온 말이다.

34) 흰 구름 : 역시 타향에서 고향의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당(당)나라 적인걸(적인걸)이, 그의 부모가 하양(하양)에 살고 있었는데 태항산(태행산)에 올라 흰 구름 한 덩이가 떠가는 것을 보고 옆 사람에게 "우리 부모가 저 흰 구름 아래에 살고 계신다.[오친소거 재차백운하]" 하고 한동안 슬프게 바라보다가 그 구름이 가버린 뒤에 자리를 떠났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신당서(신당서)」 권115 「적인걸전(적인걸전)」

35) 문에 기대 기다리시며 :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을 말한다. 춘추 시대(춘추시대) 위(위)나라 왕손가(왕손가)의 모친의 고사로서, 아들이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돌아올 때면 문에 기대어 기다리고[의문이망]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동구 밖에까지 나가서 기다렸다[의려이망]고 한다. 「전국책(전국책)」 「제책(제책)」

36) 두꺼비에게 예를 갖추고 : 복수를 다짐함을 뜻하는 말이다. 월왕(월왕)이 오(오)나라를 치고자 하여 사람들에게 죽음을 가볍게 여기게 하려고, 노한 두꺼비를 꺼내어 경례[식]를 하고, 그놈의 노기 띤 모습을 용맹스럽다 칭찬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37) 한로(한로) : 전국시대 한(한)나라에서 나던 용맹하고 날쌘 개의 이름.

38) 사(사) : 법으로 규정한 민가의 자치 단체의 단위. 보통 25가호를 한 단위로 하는데, 이 시기는 좀 달랐던 것 같다.

39) 기사(기사) : 본문에는 ‘을사(을사)’라고 되어 있으나, 7월 22일의 일진이 기사일이므로 사실을 반영하여 정정하고 번역하였다.

40) 용포동(용포동) : 6월 26일 조 기사에는 용담(용담)이 거처하는 동네 이름이 ‘용포동(용포동)’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 지 상고할 수 없어 우선 그대로 번역해 둔다.

41) 인사불성 : 이취(니취)를 번역한 말이다. 이충(이충)은 남해 바다에 사는 벌레인데 뼈가 없고, 물속에 있으면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물 밖으로 나오면 진흙처럼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 한다. 따라서 니취(니취)란 술에 몹시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 있는 상태를 말한다.

42) 사전(사전) : 「중용(중용)」을 말한다. 자사(자사)가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도 칭한다.

43) 월산(월산) : 작가의 고향에 있는 산 이름이다. 월산 산인(월산산인)이란 자호도 여기에서 취해 온 것이다.

44) 진나라 …… 자요 : 유생(유생)이란 말이다. 진시황(진시황)이 분서갱유(분서갱유)를 행할 때 당시 재상 이사가 “「시경」과 「서경」을 두고 우어(우어)하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했다는 데서 온 것이다.

45) 초나라 …… 굴원일세 : 나라를 걱정하며 비분강개하는 우국(우국)의 선비를 비유한 말이다. 초(초)나라 굴원(굴원)의 ‘어부사(어부사)’에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가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쫓겨 나왔다.[거세개탁아독청 중인개취아독성 시이견방]”에서 온 말이다.

46) 초나라 죄수 : 종의(종의)가 진(진)나라에 잡혀 감옥에 갇혀서도 자기 나라인 초나라의 갓을 버리지 않고 쓰고 있었다. 진후(진후)가 군영을 순시하던 중에 종의(종의)를 보고 유사(유사)에게 묻기를 “남쪽 초나라의 관을 쓰고 구속된 저자는 누구냐?” 하자, 대답하기를 “정(정) 나라 사람이 바친 초나라 죄수[초수]입니다.” 하였다. 「춘추좌전(춘추좌전)」 성공(성공) 9년 조. 여기서는 단발을 거부하고 국운 회복을 도모하며 북쪽으로 거사를 계획하러 온 자신을 비유한 말이다.

47) 낙매(낙매)의 피리 : 강적(강적)이라 부르는 일종의 호가(호가)로 연주하는 악부곡. 이백(리백)의 취적시(취적시)의 "황학루에서 옥피리 부니 오월 강성(강성)에 매화가 떨어지네[황학루중취옥적 강성오월락매화]" 한 시가 낙매화곡(락매화곡)으로 악부(악부)에 들어있다. 여기서는 나그네의 회포를 일으키는 매개체를 상징한 말인데, 성현(성현)의 시에 “긴 방죽 아이들의 낙매곡 피리소리, 나그네 회포를 제법이나 일으키네[대제아녀가낙매 야기다소행인회]” 라고 하였다.

48) 산음(산음)의 객 : 왕휘지(왕휘지 왕희지(왕희지)의 아들)가 산음에 있을 때 구름이 걷히고 사방이 눈으로 덮여 달빛이 청랑한 밤 혼자 술을 마시며 좌사(좌사)의 초은시(초은시)를 읊던 도중 갑자기 대규(대규)가 생각나 작은 배를 타고 밤새 그 집에 갔다가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도로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이 나서 왔다가 흥이 다해 갈 뿐[승흥이내 흥진이반]”이라고 했다 한다. 「진서(진서)」 권80 「왕휘지전」

49) 양원(양원) : 양원은 설원(설원)을 말한다. 한(한) 나라 양효왕(량효왕 문제(문제)의 아들) 유무(류무)가 엄청나게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양원이다. 여기에서 추양(추양)ㆍ매승(매승)ㆍ사마상여(사마상여) 등과 연회를 열고 부를 읊으며 즐겼다. 「수경주(수경주)」 사혜연(사혜련)의 「설부(설부)」에 의하면, 양효왕이 주연(주연)을 베풀고 추양과 매승 등을 부르도록 했을 때, 사마상여도 끝에 와 빈객의 오른편에 앉았는데 얼마 안 있어 싸라기눈이 떨어지더니 함박눈이 퍼붓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50) 무소(무소) : 순임금의 음악인 소무(소무)를 말한다. 「논어(론어)」 「위영공(위령공)」 편에서 안연(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하(하)나라의 역법을 행하고 은(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나라의 면복을 입고 음악은 소무를 쓸지니라. 정나라 소리를 축출하고 영인을 멀리하라. 정나라 소리는 음란하고 영인은 위태롭다.[자왈 행하지시 승은지로 복주지면 악칙소무 방정성 원녕인 정성음 녕인태]” 하였다.

51) 자오(자오) : 까마귀를 말한다. 까마귀가 처음 나면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자라나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60일 동안 물어다 먹인다 하여 반포조(반포조) 또는 효조(효조)로 일컬어지는바, 효성스러운 자식을 뜻한다. 당(당)나라 백거이(백거이)의 「자오야제(자오야제)」란 시에 까마귀의 효성을 노래하여, “자오가 제 어미 잃고 까악까악 슬픈 울음 토하네. 밤낮으로 날아가지 않고 한 해가 지나도록 고향 숲을 지키네. 밤이면 밤마다 한밤중에 우니 듣는 이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 ……. 자오야, 자오야! 새 가운데 증삼이로다.[자오실기모 아아토애음 주야불비거 경년수고림 야야야반제 문자위첨금……자오복자오 조중지증삼]” 하였다.

52) 이 부분은 왕유의 시 「감찰어사가 되어 변경에 이르다[사지새상]」의 경련 “대막(대막)엔 외로운 연기 곧게 피어오르고 기인 황하엔 떨어지는 해 둥글구나[대막고연직 장하낙일원]”라는 구절을 원용하여 지은 것이다.

53) 큰 열매는 먹지 않는 법인데 : 모든 양효(양효)가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상구(상구) 한 효만이 겨우 남아 있는 박괘(박괘)의 상(상)이, 마치 과일나무 끝에 있는 한 개의 큰 과일을 사람들이 따가지 못하여 겨우 달려 있는 것과 같다는 말로, 군자(군자)의 도(도)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괘 상구의 효사(효사)에 “하나 남은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석과불식]” 하였는데, 그 주석에, ‘큰 과일은 먹혀 버리지 않아, 장차 다시 생겨나게 되는 이치를 볼 수 있다.’ 하였다. 나라와 유학이 다시 회복될 마지막 희망을 비유한 말이다.

54) 추성부(추성부) : 송(송)나라 구양수(구양수)가 가을 기운이 만물을 숙살 조락(숙살조락)시키는 데에 느낌이 있어 지은 부이다. 거기에 “구양자(구양자)가 밤에 글을 읽는데 서남쪽에서 쌀쌀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내가 아이를 불러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나가 보라 하였더니, 아이가 들어와 말하기를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고 은하수는 하늘에 있으며, 사방에 인기척은 없는데 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났습니다.’고 했다.” 하며 시작하는데, 즉 가을이 왔음을 비유한 말이다.

55) 지백(지백)이 …… 없었고 : 진양(진양)은 중국 산서성(산서성)에 있는 지명. 춘추시대 조 간자(조간자)가 윤탁(윤탁)을 진양 원으로 삼아 백성을 잘 다스리게 하였는데, 뒤에 간자의 아들 양자(양자)가 지백(지백)의 공격을 받고 진양으로 피난하였다. 지백이 진양성에 물을 대어 성 안이 모두 물에 잠겼으나 윤탁의 선정(선정)에 감복된 진양 백성들은 배반하지 않고 굳게 뭉쳐 끝내 성을 지켰다. 「국어(국어)」 「진어(진어)」

56) 전단(전단) …… 여겼으며 : 전단은 전국(전국) 시대 제(제)나라의 명장으로 임치(림치)사람이다. 연(연)나라 소왕(소왕)이 악의(악의)로 하여금 제(제)를 공격하여 모든 성이 다 함락되었으나, 오직 전 단이 지키는 거(거)와 즉묵(즉묵)만은 건재하였다. 뒤에 연나라 왕과 악의(악의)의 사이가 벌어져 장군이 기겁(기겁)으로 바뀐 틈을 타서 공격하여 잃었던 70여 성(성)을 되찾았다.

57) 「서경(서경)」 「우서(우서) 고요모(고도모)」에 나오는 말이다. 본문에 「우서(우서)」라고 한 것은 「우서(우서)」의 오류인 듯하다.

58) 사책(사책) : 원문은 ‘●서’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번역하였다.

59) 백제(백제)와 손녀(손녀) : 백제는 눈을 관장하는 신이고 손녀는 바람을 관장하는 선녀이다.

60) 일양이 처음 생기는 날이요 : 동지를 말한다. 음기(음기)가 극에 달한 순음(순음)의 110월을 지나 11월 동지(동지)가 되면 천지에 양(양)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는데, 「주역(주역)」에서는 이것을 양이 다시 회복된다는 의미에서 복괘(복괘)의 형상으로 설명한다. 이때부터 겨울이 가고 봄기운이 생기기 시작하여 만물이 생기(생기)를 회복하게 된다.

61) 종래 300개 이상의 연방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1814∼1815)를 거쳐 39개의 주권국가로 구성된 ‘독일연방’을 결성한다.

62) 달단(달단) : 동몽골고원에서 유목하던 몽골계의 한 부족. 8세기 중엽의 돌궐비문에 ‘삼십성(삼십성)타타르’로 표시된 것이 최초이며, 주로 내몽골의 훌룬부이르지방에 있었으나, 뒤에 음산(음산)지방으로 세력을 뻗치다가, 거란(글란)의 지배 하로 들어갔다.

63) 탑 : 광장 중앙에 세워진 25m 높이의 오벨리스크를 말하는 듯하다. 서기 37년 이집트에서 자져와 네로황제의 경기장에 세워졌었는데, 그곳에 1,50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다가 성 §_베드로_§ 광장으로 옮겨졌다. 당시 이 오벨리스크를 세우는데만 5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64) 신상(신상) : 성 §_베드로_§ 대광장의 열주회랑(열주회랑)에 세워진 140개의 카톨릭 성인들의 석상을 말한다. 조각가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했다고 한다. 열주회랑의 기둥들은 4열씩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 타원의 중심에 서서보면 네 개의 기둥들은 모두 겹쳐져 하나로 보인다.

65) 사박(사박) : 지정학적 위치, 인종구성, 언어상황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사파비 왕조의 후신인 이란을 가리키는 듯하다.

66) 4곳 밖에 소개되어 있지 않은데, 아마 기록할 때 ‘암전(암전)’이 빠진 듯하다.

67) 여영공(여영공) : 북송 때의 학자 여희철(여희철, 1039~1116). 자는 원명(원명), 호는 형양(형양)이며, 하남성(하남성) 개봉(개봉) 사람이다. 처음에는 초천지(초천지)에게 배워 구양수(구양수)의 재전제자(재전제자)가 되었고, 호원(호원)이나 소옹(소옹), 왕안석(왕안석) 등에게도 배웠다. 후에 정호(정호)·정이(정이) 형재와 장재(장재)와 교유하였다.

68) 북송 때의 학자 사마광(사마광, 1019~1086)의 「권학문(권학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마광의 자는 군실(군실), 호는 우수(우수), 시호는 문정(문정)이다.

69) 이제(이제)와 삼왕(삼왕) : 고대에 이상적인 정치를 펼쳤다고 전해지는 왕이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이제(이제)는 요(요)와 순(순) 두 임금을 말하고, 삼왕(삼왕)은 우(우)임금과 탕(탕)임금, 그리고 문왕(문왕)ㆍ무왕(무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