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울 지 한자 - jihyeloul ji hanja

서울 광화문 부근에 종침교(琮琛橋)가 있습니다. 지금은 표석만이 남아 있는데 이 종침교는 조선조 성종 임금 시절 영상을 지낸 허종(許琮)과 관련된 다리입니다. 허종(許琮)은 젊어서부터 기개가 활달하여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당시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 폐비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했습니다. 더욱이 성종의 진노로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라는 어명이 있은 때였습니다. 무거운 걸음으로 폐비 사사를 결의하는 어전 회의에 가려던 허종은 사직동을 지나다가 부근에 살던 누나를 찾았습니다. 누나되는 허씨 부인도 사려깊은 분이었습니다. 어려운 고비마다 아우들에게 도움을 주는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찾아온 아우 허종에게 “남의 종이 주인의 어미를 살해하는 모의에 참석했다가 뒷날 주인의 자녀가 장성하면 어찌 화를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오다가 허종은 돌다리 위에서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론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뒷날 연산주가 등극하여 이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이 피화를 당할 때 허종은 누나의 지혜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이 다리를 종침교라 했습니다. 누나의 지혜로운 충고가 허종을 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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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거기 같죠^^
어릴 적 국어시간 비슷한 말 찾기, 유의어 찾기 할 때는
지식 = 지혜 인줄 알았답니다.
지식 < 지혜 ㅋㅋ
다 알고 계시죠^^

알고 있는 것은 지식이고, 깨달은 것은 지혜입니다.
알고 있는 지식을 적기(適期)에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지혜지요.
지식을 산처럼 쌓아놓아도 적기에 사용할 능력이 없다면 쓸데없는 자만의 산물이 될 뿐이지요.
지혜의 ‘智’의 날일(日)을 ‘해’로 보아 밝게, 훤히 다 안다는 뜻도 될 것이며,
하루하루, 한날 한날을 살아가며 몸과 마음이 체득한 경험들이 지식과 하나되어
내것이 된다는 뜻도 되지 싶습니다.
더 나아가 ‘지(智)’가 신의 말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로 세상에 창조되어 쓰인다면
‘지혜는 현자에게서 나온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우리^^
지식만 있는 사람 말고 지혜도 있는 사람이 되시게요.^^
지식은 나를 살게 하는데 그친다면
지혜는 남도 살게 하는, 사람답게 살게하는 능력을 가졌으니
나도 살게 하고 남도 살게 하는 지혜있는 사람이 되시게요.

화살(矢)이 과녁을 꿰뚫듯이 마음 한복판을 꿰뚫어서 깨달은 것을 입(口)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안다(知)는 것이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모르던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바탕으로 작용하여 생각하여 분간하거나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깨달은 것이 바탕이 되어 상호 관계나 관여 된 바를 짐작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란 경험적(經驗的)으로 겪는 학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 가는 일련의 과정이 스며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설령 직접 경험하니 않았더라도 경험에 앞서 선험적(先驗的)으로 대상과 무관한 대상을 인식하는 선천적인 가능성을 밝히려는 초월적 능력이 솟아나는 샘과도 같은 것이다. 병(疒)이 든 정신은 알지(知) 못하거나 의심하는 어리석은(痴) 것이니 백치(白痴)나 천치(天痴․天癡)와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고 하겠다.

하지만 전에 백치(白痴)나 천치(天痴․天癡)였다고 할지라도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처럼 정신이 깨어서 알(知)게 된 후 그 구멍으로 해(日)가 비추듯 밝아지면 ‘슬기와 지혜(智)’를 얻는다 하겠다. 큐피드(Cupid)의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처럼 정신이 깨어서 알(知)게 된 것은 사랑이나 그 구멍으로 해(日)가 비추지 못하면 슬기와 지혜를 얻지 못하니 이성(異性) 간의 성적 사랑인 에로스(eros)이지 무엇이겠는가.

만물을 조화․통일하는 이성(理性)인 로고스(logos, 오성(悟性))가 되려면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처럼 정신이 깨어서 알(知)게 된 ‘맛(甘)을 보고 스스로(自) 밝게(白) 깨우쳐 해(日)’의 광명과 같은 마음이 생기는 오성(悟性)의 단계가 되어야 한다. 이를 칸트는 인식능력에 있어서의 작용으로 감성(感性)과 오성(悟性)으로 대비시켰으니, 오성(悟性)은 사물에 대해 논리적 이해 및 판단 능력이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제 2위인 성자(聖子)를 이르기도 하는 로고스인 것이다. 또한 중국인들이 문묘(文廟)에 함께 모신다는 공자(孔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의 오성(五聖)을 보면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듯 밝음을 알(知)게 된 슬기와 지혜(智)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아는 지식(知識)이라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 해준다.

사전적인 지(智)의 의미는 사물의 도리(道理)․시비(是非)․정사(正邪)․선악(善惡)을 분별하고 처리하는 마음의 작용인 지혜(智慧)로 번뇌를 뿌리째 없애는 정신작용을 뜻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지(知)로도 쓰일 따름이다. 그리고 지(智)를 정신작용이라는 관점에서 행동작용인 행(行)과 상대된다.

이와 같은 슬기와 지혜(智)의 의미를 잘 전달해주는 말로 지자요수(智者樂水․知者樂水)이니, 지자는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하여 물처럼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로 흐르는 지라 물을 좋아함을 이른다.

그럼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슬기와 지혜(智慧)의 의미가 어떻게 스며있는지 보자. 지혜는 정도에 따라 굳이 구분해보면 보통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난 정도에 따라 상지(上智)․중지(中智)․하지(下智)로 구분된다. 또한 지혜의 깊고 얕음에 따라 심지(深智)와 천지(淺智)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지혜의 쓰임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니 지혜가 주인을 잘못 만나면 교활한 교지(狡智)․활지(猾智), 간사하고 약삭빠른 간지(奸智)․사지(邪智)․교지(巧智)로 쓰여 인류를 힘들게 할 우려도 있다.

반면에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듯 밝음을 알(知)게 된 슬기와 지혜(智)가 주인을 잘 만나 밝은 지혜인 명지(明智), 지혜와 능력인 지능(知能), 지혜의 힘인 지력(智力), 안다는 의식 작용인 지식(知識), 슬기로운 계략을 꾸민 지모(智謀)․지술(智術)로 슬기롭게 다스리는 지략(智略), 천재만큼 기발한 지혜의 기지(奇智), 그때그때 틀에 맞춘 듯 즉각적으로 재빠르게 나오는 기지(機智)․즉지(卽智)․돈지(頓智)․민지(敏智) 따위는 인류를 밝히는 빛이 될 것이다.

더욱이 지혜를 바탕으로 부가적으로 겸비된 원만하고 완전한 원지(圓智), 용기 있는 용지(勇智), 총명한 총지(聰智)․혜지(慧智), 어진 현지(賢智)․인지(仁智), 담력 있는 담지(膽智), 복덕 있는 복지(福智),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하는 이지(理智), 날카로운 예지(銳智), 분별할 수 있는 지변(智辨), 임금처럼 밝은 예지(叡智), 신령처럼 영묘한 영지(靈智)․신지(神智), 열매를 아직 맺지 않은 꽃부리이지만 지혜로운 영지(英智), 덕행까지 갖춘 지덕(智德), 식견까지 갖춘 지견(智見) 따위가 지낭(智囊)의 슬기주머니에 함께 담긴 사람들은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듯 밝음을 알(知)게 된 슬기와 지혜(智)로 이 세상을 밝혀나갈 주역들이다.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어 밝음을 아는(知)듯한 슬기와 지혜(智)는 본디 타고난 성지(性智)는 아닐지라도 꾸준히 모아서 갈고 닦으면 성인의 성지(聖智)에 이르지 않겠는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 여러 사람의 지혜인 중지(衆智)를 모아 성지(聖智)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중지(衆智)가 참 지혜의 진지(眞智)처럼 개오(開悟)한 지혜가 아닐지라도, 또 진공(眞空)을 몸으로 통달한 체지(體智)는 아닐지라도 짧은 단지(短智)의 지혜를 모아 다지(多智)로 엮는다면 각각이 까치의 지혜인 조작지지(鳥鵲之智)처럼 하찮은 지혜였을지라도 많이 모은 중지(衆智)는 한 사람의 성지(聖智)보다 못하다 할 수는 없다. 특히 늙은 말의 지혜인 노마지지(老馬之智)처럼 연륜이 깊어지면 나름대로 터득한 저마다의 슬기가 있을지니 노인들의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백성들의 민지(民智) 정도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더욱 밝은 빛으로 나라를 끌어가는 힘이 될 것이다.

이런데도 신학문을 배웠다고 또는 살아있는 최신 정보를 많이 안다고 한 개인의 작은 사지(私智)를 내세워 老馬之智(노마지지)를 뭉개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비록 공개토론자에서 언쟁에서나 승리하는 지혜일뿐이니 자칫 사에 흘러 공정하지 못한 사사로운 지혜로 결과 지어질 가능성이 있다. 종래의 지혜까지도 함께 엮는 탄탄한 지혜를 모으려거든 지식이나 정보가 지혜보다 강하다는 착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지혜가 귀한 것은 지귀면화(智貴免禍)라는 말처럼 화를 면하는 데 있다. 지략이 만인보다 뛰어난 지과만인(智過萬人)이라면 보통 사람보다 매우 뛰어난 자신의 지략에 하나 더 얹는다면 그만큼 더 뛰어나지지 않겠는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저절로 생겨난다는 자연지(自然智)의 지혜는 어쩌면 일상의 삶을 스승으로 여기는 지혜로운 자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성인(聖人)의 네 덕(德) 중에 듣지 못한 것이 없고(聰), 보지 못한 것이 없으며(明),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睿),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智)는 총명예지(聰明睿智)에서도 바탕이 되는 것은 지(智)로 총지(聰智)․명지(明智)․예지(叡智)의 수준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일상의 삶 속에서 잘 듣고, 잘 보아서 세미한 것까지 통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자신이 그 분야에서 왕처럼 자신의 지혜라며 상대방을 눌러대지만 글쎄 그럴지….

성인(聖人)과 왕(王)의 차이를 예로 들면 춘추시대 말기의 공자(孔子)가 난세를 수습하고 어진 정치를 펼칠 군주를 찾아 14년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교사인 자(子)자를 붙였단다. 전지전능하다던 군주들의 귀와 눈은 바로 그런 수준이다. 기원전 479년 공자 사후 350여 년이 지난 기원전 136년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처음으로 국교로 되기까지 지나간 시간을 보라.

더 재미난 것은 그리도 선왕들의 역사 속에서 배우기를 즐기던 왕들 일진데, 그것도 한 무제가 「사기(史記)」저술을 위해 태어났을 정도로 2천년이나 지난 오늘날까지도 극찬을 받는 저자 사마천(司馬遷)을 환관(宦官)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사마천은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외었던 명장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을 면제받을 수 있는 두 방법 중 막대한 벌금을 내지 못하니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을 받고서라도 풀려나가야 했으니, 애꿎은 태사령(太史令)을 환관(宦官)으로 만드는 그런 정도이다. 극단적인 비교이기는 하지만 성인과 왕의 차이라면 지우(智愚)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이랄까. 왕이 아무리 지덕체(智德體)가 백성들보다 월등할지라도 지산(智山)처럼 높은 성인의 슬기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무지(無智)하다할 것이다. 성인이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1915미터의 지리산(智異山) 천왕봉을 바라본다면 왕은 342미터의 북악산(北岳山) 같은 언덕이나 바라본다고나 할까. 유치(幼齒)가 나는 아이 때보다 지혜로운 사춘기에 나는지라 지치(智齒, wisdom tooth)라 하는데 아직 어른이 덜 된 것이라. 바로 군주와 성인의 차이라면 지치(智齒)가 나는 청소년기와 장년의 차이라고나 할까. 군주들의 모습이란 식지(飾智)로 재지(才智)가 있는 것처럼 꾸미려드는 사춘기의 모습이기 십상이다. 그나마 군주들이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친 자각성지(自覺聖智)의 성스러운 지혜가 부족한 터라 성인에 버금가는 스승을 모시거나 지혜로운 지신(智臣)의 신하를 가까이 함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모든 군주가 성인에 비해 한참 하지(下智)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처럼 수차에 걸쳐 환생한 최고지도자 같은 분들도 있으시다.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도 일반에 통하는 지인용(智仁勇)의 삼달덕(三達德)내지, 정직(正直)․강(剛)․유(柔)니 믿음․소망․사랑 등의 삼덕(三德)은 최소한 깆추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성인에는 못 미치더라도 슬기는 원만하고 행실은 방정한 지원행방(智圓行方)의 지도자 또는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 및 믿음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두루 갖춘 지도자들도 많으시다.

지도자들이 모든 슬기의 근본이 되는 근본지(根本智)로 바로 진리에 들어맞는 절대의 참 슬기를 깨우치신 후에 이를 바탕으로 후득지(後得智)라는 속사를 이해하는 얕은 지혜로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도록 하려면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어 밝음을 아는(知)듯한 슬기와 지혜(智)의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럼 지혜 가운데 지혜를 뜻하는 지지(智智)란 무엇일까. 바로 가자 우수한 부처의 지혜(智慧)를 이른다. 부처가 갖추는 오지(五智)의 다섯 지혜는 ①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 ②대원경지(大圓鏡智), ③평등성지(平等性智), ④묘관찰지(妙觀察智), ⑤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일컫는다.

첫째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는 만유 제법의 체성이 되는 지혜를 이르고, 둘째 대원경지(大圓鏡智)는 둥그런 거울에 만물의 그림자가 비치듯이 이 세계 모든 법을 비치는 지혜를 이는데, 이 지혜는 마치 금강이 모든 물건을 깨뜨리듯 가장 밝고 날카로우며 썩 견고한 지혜인지라 번뇌와 습기(習氣)를 능히 깨뜨리는 금강지(金剛智)로 비유될 수 있다. 셋째 평등성지(平等性智)는 피차(彼此)의 사물은 본래 피차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깨닫는 지혜를 이르고, 넷째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모든 사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남을 교화하여 의혹을 끊게 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도를 닦아서 얻는 지혜를 이른다.

여기서 불교가 말하는 지혜(智慧)란 미혹(迷惑)을 없애고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하는 힘을 이르니, 풀어보면 마음이 흐려서 홀린 듯 갈팡질팡하지 않도록 세속적인 번뇌를 끊고 얻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광명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니 번뇌를 끊는 것을 지혜검(智慧劍)․지검(智劍)이라 하고, 어둠을 비추는 광명을 지혜광(智慧光)이라 한다. 또한 지혜일(智慧日)은 부처의 지혜를 해에 비유하여 널리 중생에게 비추는 해를 이른다.

불교에서 세 가지로 분류하는 삼지(三智)의 지혜란 「관음경(觀音經)」에서는 도종지(道種智)․일체지(一切智)․일체종지(一切種智)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는 외지(外智)․내지(內智)․진지(眞智)를 이른다.

먼저 「관음경」에서 도종지(道種智)․일체지(一切智)․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각각 살펴보자. ①도종지(道種智)는 보살이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 도(道)의 종별(種別)을 다 알아내는 지혜, ②일체지(一切智)는 성문 연각(聲聞緣覺)의 지혜, ③일체종지(一切種智)는 일체 만상(萬相)의 진리를 낱낱이 구체적으로 아는 부처의 지혜를 이른다.

다음으로 「묘법연화경」에서는 외지(外智)․내지(內智)․진지(眞智)를 살펴보자. ①진지(眞智)는 진여(眞如)의 본체(本體)를 깨달아 열반(涅槃) 적정(寂靜)의 경지(境地)에 이르러 나타나는 지혜, ②내지(內智)는 정신적으로 번뇌(煩惱)를 대상(對象)으로 하여 이를 끊고 해탈경(解脫境)에 도달(到達)하는 지혜, ③외지(外智)는 고금(古今)에 통하고 세상(世上)일에 밝은 곧 물질적 현상계(現象界)를 대상(對象)으로 하여 관찰(觀察)하는 지혜를 이른다.

이상의 불교에서 이르는 지혜(智慧)는 속세의 정에 기인한 유루지(有漏智)처럼 ‘옳고 그른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지(智)의 바른 근본이다’라는 시비지심지지단야(是非之心智之端也)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속세의 지(智)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분별지(分別智)인데 반해 불교에서 이르는 지(智)는 분별없는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올바르게 진여(眞如)를 체득(體得)하여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해야 모든 번뇌를 떠난 청정한 무루지(無漏智)의 지혜로 모양이 없는 참 지혜에 이른다고 이르고 있다.

속세의 모든 유혹(誘惑)은 깨달음의 슬기를 가로막는 지장(智障)이 마치 공사가 교통을 가로막는 지장(支障)처럼 되니,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분명하고 바른 부동지(不動智)를 깨달으니 이가 곧 우주의 본지(本智)임을 이른다. 그리고 무분별지(無分別智)․무루지(無漏智)․부동지(不動智)로 진리를 완전히 깨달은 부처의 불지(佛智)의 지혜를 얻기 위해 중생을 구제(救濟)하는 자비(慈悲)와 불과(佛果)를 깨닫고자 하는 지혜(智慧)의 비지(悲智)를 갖추어야 하니 불보살(佛菩薩)은 이 한 쌍의 덕을 소중하게 여긴다. 여기서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최적의 방편을 찾느라 저울질하는 권지(權智)의 지혜는 결국 중생과 더불어 하나가 될 때 가능하지 않겠는가.

비록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듯 밝음을 알게된(知) 슬기와 지혜(智)가 속세와 불교 간에 경계의 있고 없음의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속세에서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지극한 오상(五常)․오극(五極)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 스며있으면서 지(智)는 맹자의 사단(四端) 중에 시비(是非)의 마음씨를 우러나게 하는 것으로 나면서부터 본성(本性)으로 자리하고 있다.

시비(是非)의 마음씨가 우러나게 하는 역대 사건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지혜(智慧)의 증거를 증명할 멋있는 시호(諡號)와 함께 하는 지증왕(智證王)이 계신다. 지증왕(智證王)이란 시호(諡號)는 우리나라 시법의 시초로 사후에 받은 것인데 지증왕(智證王)은 신라 22대 임금으로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지도로(智度路)지철로(智哲老)라는 대단한 이름인 듯하다. 그는 503년에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예전의 마립간(麻立干) 대신 왕(王)이란 칭호를 처음 사용하셨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지증왕(智證王) 13년인 512년 강릉의 군주인 이사부가 지금의 울릉도(鬱陵島)인 우산국을 점령하여 독도 문제를 매듭지은 것으로 아는데 해(日)가 화살(矢)이 꿰뚫은 구멍(口)으로 비추듯 밝음을 알(知)게 된 슬기와 지혜(智)에 대해 하늘의 해가 자기나라의 이름인 일본(日本)으로 착각하는지 또 한 번 우세 살 기회를 자청하지는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