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이 높다하되 한자 - taesan-i nopdahadoe hanja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동생 사준(士俊)·사기(士奇)와 더불어 문명을 날려 당대인이 3형제를 중국의 소순·소식·소철에 비유했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叟詩話〉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