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대왕암 유래 - ulsan daewang-am yulae

울산 대왕암 유래 - ulsan daewang-am yul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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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 키워드 목차

울산시 일산동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는 다른 이름으로는 龍墜岩이라고 하는데, 용이 승천하다가 그 바위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에 있는 신비한 바위가 龍이라는 믿음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龍은 곧 海神이므로 이 神을 다른 말로 ‘大王’이라고 불렀다. 史料및 땅이름에 ‘대왕’이 붙는 것은 바다뿐 아니라 江, 山, 神堂등 여럿 있으므로 ‘대왕’은 일종의 보통명사다. 그럼에도 이를 실제 대왕으로 믿어 역사상의 어느 임금으로 비정한 저명한 예가 경주시 감은사 앞바다의 대왕암이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대왕이 여기에 묻혔다고 한다.
울산 대왕암에 대한 언급은 정유재란 記文에 처음 나타나는데, ‘대왕’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기 때문인지 韓末부터 1970년대까지는 대신 ‘大洋’岩이 유통되었다. 이 表記는 ‘大王’의 變化形ㆍ發展形이라 하겠다. 마치 ‘댕바위’라는 異稱이 있듯이.
1980년대 중반에 들어와 ‘대왕암’의 이름이 復權되자 ‘대왕00’라고 부르는 근거를 모색하여 울산지역에서는 이를 문무대왕의 왕비가 묻힌 곳이라고 설명한다. 경주 대왕암의 亞流다. 이 王妃說의 취약점이 드러나자 火葬을 했다는 신라의 문무왕, 효성왕, 선덕왕 등이 차례로 그 후보에 오르곤 하였다.
울산대왕암=문무왕비 說은 鄕土誌나 지명유래집 등에 실리면서 成文的권위를 갖게 되었고, 관광안내 등에 실리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설명의 궁색함ㆍ모호함에 당연히 의문은 제기될 것이고, 관련 근거나 사료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지만 종국적으로는 神을 대왕이라고도 불렀던 우리말의 용례에 그 단서가 있다. #울산시 #용추왐 #대왕암 #대양암 #해신 #용 #문무왕 #문무왕비 #지명유래 #Daewangam (Great King Rock) #Daeyangam (Great Ocean Rock) #Yongchuam (Fallen Dragon Rock) #Ulsan city #King Munmu #Queen Munmu #cremation

국문요약
1. 서론
2. 경주 대왕암의 문무왕 海中陵說
3. 수많은 대왕 유적
4. 현존하는 대왕신앙
5. 울산의 경우
6.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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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길리 해수욕장 앞 외로운 섬 문무왕릉 

울산 대왕암 유래 - ulsan daewang-am yulae

대왕암 섬  전경

경주 문무 대왕암의 유래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석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문왕(神文王)은 부왕의 뜻을 이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여 불력(佛力)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또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은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

대석 밑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석가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

의 수중릉(水中陵).

울산 대왕암 유래 - ulsan daewang-am yulae

문무대왕릉/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 경북 ...

사적 제158호.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大王巖)이라고 불렀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한편 바위의 안쪽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낸 것은 부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682년(신문왕 2) 양북면 용당리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불력(佛力)에 의해 왜구를 막으려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의 금당 아래를 깎아 동해로 구멍을 내어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울산 대왕암

 울산 대왕암

울산 대왕암

울산 대왕암

울산 대왕암 유래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신라 30대 문무왕은 평시에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나는죽은후에 호국대룡이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수호하려한다" 하였다.

대왕이 재위 21년만에 승하하자 그의 유언에따라 동해구의 대왕석에 장사를 지내니
마침내 용으로 승화하여 동해를 지키게되었다.
이렇게 장사를 지낸
문무왕의 해증릉을 대왕바위라하며 그준말이 댕바위로 경주시 양북면에있다.
대왕이 돌아가신뒤에 그의 왕비도 세상을떠난후에 용이되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호국의대룡이되어 그의 넋은 쉬지않고 바다를 지키거늘
왕비또한 무심할수가없었다.
왕비의 넋도 한마리의 큰 호국룡이되어 하늘을 날아
울산을 향하여 동해의 한 대암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뒤 사람들은  이곳을 지금의 대왕바위라 불렀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말이
줄어 댕바위(대왕암)라 하였으며
또 용이 잠겼다는 바위 밑에는 해초가 자라지 않는다고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