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맺음말 : 동아시아 3국의 인구증가와 도시화 비교 앞서 살폈던 17~19세기 동아시아 세 나라의 인구변동추세를 하나의 표로 나타내면 다음의 〈표 8〉과 같다. 표 8 17~19세기 동아시아의 인구변동 (단위 : 만명)표 8 17~19세기 동아시아의 인구변동 (단위 : 만명):3
〈표 8〉에서 보듯이 중국과 조선은 동일하게 16세기 인구급증과 17세기 인구감소, 18세기 급증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일본은 17세기 폭발적 인구 증가와 18세기 인구정체현상을 보인다. 17세기 인구감소와 18세기 인구의 급증은 중국과 조선에만 국한된 인구현상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인도의 인구도 거의 같은 추세였고, 러시아의 인구도 18세기에 두 배나 증가했다. 17세기 인구감소와 18세기 인구급증현상은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전지구적 현상인 소빙기(little ice age) 기후에서 찾기도 한다. [주675] 오늘날 중국과 일본, 조선의 인구규모는 일본이 중국인구의 9.5%,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의 인구는 중국인구의 5.4% 규모이다. 시대별로 이러한 인구규모가 어떻게 변동하는가를 살펴보면, 조선의 인구는 18세기 이전까지 중국인구의 10%의 규모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인구 규모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져, 1790년에는 6%내외로 줄었고, 1850년에는 4%로 줄었다. 일본의 인구는 1600년에 중국의 8%수준이었다가 1700년에는 20%로 급증하였고, 1790년에는 9%,
1850년경에는 8%로 점차 감소하였다. 표 9 조선과 일본의 인구밀도이헌창(1999), 「조선후기 사회와 일본근세사회의 상품유통의 비교연구-전근대 재정과 시장형성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재정정책논집』 1, 한국재정정책학회.표 9 조선과 일본의 인구밀도이헌창(1999), 「조선후기 사회와 일본근세사회의 상품유통의 비교연구-전근대 재정과 시장형성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재정정책논집』 1, 한국재정정책학회.:13
〈표 9〉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166년경 조선의 인구밀도는 일본에 비해 1.6배로 높았지만, 1700년에는 역전되어 조선은 일본의 81%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태역전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구통계의 오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물경제의 격차이다. 인구통계의 오류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인구규모를 한일간의 정상적인 인구규모라고 본다면, 1600년의 인구추계는 일본이 과소추계되었거나 조선이 과대추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국토면적이 일본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1600년경 일본의 인구가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은 일본의 인구통계가 과소추계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600년 일본 인구의 과소추계로 인해 전지구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17세기에 일본만이 예외적으로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기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18세기 조선의 인구증가율이 과소추계되었을 가능성이다. 조선의 경우 중국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인구추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인구증가율은 중국에 비해 훨씬 낮게 평가되고 있다. 그 결과 인구규모도 18세기 이전 10%에서 18세기 말 6%로 대폭 감소한 것이다. 또한 1700년의 한일간 인구규모가 현재 수준보다 훨씬 낮은 46%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추측컨대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조선, 조선·일본 간의 인구규모는 조선의 인구규모를 과소 추계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17, 18세기 한, 중, 일 도시화율은 1% 내외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일본의 도시화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중국과 한국을 압도했다. 중국과 일본의 도시화율은 2.5배, 조선과 일본의 도시화율은 3배정도 차이가 발생했다. 중국과 조선이 농촌과 도시부의 뚜렷한 분리가 행해지지 않은 반면, 일본은 막번체제하에서 강제로 도시와 농촌을
분리하여 도시 중심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반면 일본은 병농분리, 농과 상공의 분리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도시와 농촌이 뚜렷하게 분리되었다. 성하정은 영국(領國)지배의 거점으로써의 정치적 기능과 영국내 상공업의 중심지로써의 경제적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성하정이 영내 인구의 10~20%를 흡수하면서, 도시와 농촌은 기능과 인구면에서 완전히 다른 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성하정은 오늘날 일본열도내 각 지역의 중심도시로 계승되었다. 도쿄를 필두로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가네자와, 히로시마, 가고시마 등 전국 현청 소재지의 70%가 일본 근세의 성하정에서 비롯된 도시들이다. 근세 일본열도 내에서 전개되어 현대로까지 계승된 도시들을 핵으로 하는 사회의 기본구조는 일본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주679] 조선은 도시시장을 위해 농촌정기시를 해체하거나 농촌의 상공업자를 도시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시장기능이 농촌에도 분산되었기 때문에, 농촌장시가 조밀하게 편성되었던 반면,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일본, 중국에 비해 미약했고, 상설점포도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주680] 조선후기 교통과 상업중심지인 강경, 마산, 원산 등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그 추세는 전통적인 행정중심도시를 압도하기에는 미약했다. 집권적 관료국가체제로 운영된 조선왕조사회에서 도시는 군현제라는 지방행정위계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수도인 한양만이 군사, 행정중심도시에서 18세기 이후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조선의 경제, 사회, 문화의 변동을 추동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