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이 필요한 이유 - aegugsim-i pil-yohan iyu

애국심은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 문필가 새뮤얼 존슨(1709~1784)은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악담을 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이 말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 이 말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앞뒤 맥락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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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즉 존슨이 이 말을 했다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의 전기를 쓴 동시대인 제임스 보스웰이었다. 보스웰은 존슨이 비난한 건 전반적 애국심이 아니라 가짜 애국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편 사전 편찬자이기도 했던 존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만든 영어사전에 ‘애국자’에 대해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애국자를 자처하면서 당파적 분란만 일으키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존슨이 뭘 말하려 했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된다.

애국심에 관해서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아버지의 서거 소식을 듣고도 제일 먼저 한 말이 “전방은요”였다고 한다. 투철한 국가관·안보관이 몸에 배어 있음이다. 2006년쯤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게 어떤 기자가 “왜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정치인 가운데 박근혜만큼 애국심이 깊은 사람은 없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재미있다. “MB는 한참 뒤떨어진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산 사람 아닌가.”

김 의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은 정말 나라 생각만 하고 사는 것 같다. 지난달 말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3년 전 연평도 사태 때 “휴가를 포기하고 복귀한 장병들의 애국심”을 치하했다. 안보를 지키는 데 무기보다 훨씬 중요한 건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이 뜨거운 애국심으로 단결을 호소하는데 나라는 왜 이리 분열로 치닫는 것인가. 답은 애국심 자체가 아니라 어떤 애국심이냐에서 찾을 수 있다. 존슨이 설파했듯 만약 가짜 애국심이라면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애국심의 독선성이다. 국정 운영이 독선·불통인데 나라사랑마저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애국심은 결코 특정인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애국의 길, 방법론은 여러 가지인 것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이것만이 애국”이라 외치는 독선적 애국심, 이를테면 ‘애국독점주의’는 때로 아주 위험하다. 남이 하는 애국은 애국이 아니고, 내 것만 진짜 애국이라는 독선은 자칫 독재와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가운데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란 게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1910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전 남긴 것이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애태운다”라는 글엔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를 염려하는 애국정신이 절절히 흐른다. 나는 이 휘호를 천주교 순교성지인 서소문 공원에서 처음 접했다(원본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있다). 경찰이 설치한 입간판 안보 포스터에 사용됐는데, ‘함께하는 안보의식 행복한 대한민국’이란 표어와 함께였다. 안 의사의 휘호가 천주교 성지에서, 하필 범죄·간첩신고 독려 표어에 쓰였다는 게 심한 부조화로 여겨지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안보 포스터로 적절하다는 게 경찰의 판단인 것을.

민주주의는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 사람이 추구하는 애국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정해 주는 거다. 애국심이라고 해서 무슨 금단의 성역이 아닌 것이다.

박정희는 1940년 23세 때 교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해 충직한 일본제국의 군인이 된다. 장준하는 1944년 26세 때 일본 학병을 탈출해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나선다. 지금 새삼 두 사람의 인물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둘의 운명은 결국 독재자와 민주투사로 갈렸지만 다카키 마사오 생도를 움직인 것도 긴 안목으로 본 애국의 길이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금 급속히 공안시대로 가는 것을 두고 여러 갈래 분석이 가능하지만 이 애국적 가치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공안시대 종북몰이를 정당화하는 데 애국심이 동원되는 것이다. 9·11 테러 후 미국이 제정한 패트리엇법(애국자법)은 무제한적 개인정보 접근을 허용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란 비판을 받았다. 긴 법이름의 두문자를 딴 이 법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결집하자는 의도였지만, 오도된 애국의 전형적 사례로 비판받았다.

실로 애국자들이 넘쳐나는 공안시대다. 대통령의 애국심이 전염성이 강한 탓에 소나 개나 애국을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럴수록 찬찬히 살펴보고 진짜와 가짜 애국심을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예리한 감식안이 필요한 이유다.

외국 여행을 많이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역사 굴곡이 심한 나라일수록 애국자들이 많다’고. 필리핀에서 그 말을 실감했다. 유럽의 선진국들은 정복자나 철학자, 시인들의 유적이 많지만 필리핀은 수도 마닐라부터 시골 동네까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애국자들이 공원과 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었다. 19세기 말 스페인에 저항해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항거한 투사 등 시대는 다르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비장한 사연은 한결같았다. 그런 필리핀이 여전히 힘들고 가난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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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가 많은데 나라는 왜 어렵고 사람들 삶은 힘든 것일까. 이 질문은 우문이다. 애국자가 많은데도 나라가 어려운 게 아니라, 나라가 어려운 탓에 애국자가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필리핀 사람들이 굳이 자신을 희생하며 저항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애국자 수가 필리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 학도병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책 대신 총을 들었고,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렸다. 이런 분들 덕분에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고, 독재정권은 물러나게 됐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도 일궈냈다. 독일에 간 광부와 간호사, 월남 파병 병사들이 벌어온 돈을 산업시설에 투자해 1953년 13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을 2013년 1조3043억달러로 1000배 이상 불렸다.

나라가 평안하고 잘살게 되면 애국심과 국가관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이나 월드컵·올림픽 같은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가 없다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는 일이 많지 않다. 국산 담배를 애용하지 않고 외제를 피운다고 손가락질하던 게 10~20년 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도 제품의 질과 서비스로 승부할 뿐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을 펼치지 않는다.

하지만 애국심의 퇴조를 애석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전한 시민의식으로 메우면 된다. 따지고 보면 애국심은 선(善)이라고 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무엇보다 애국심은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국가와 조직이 개인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논리는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리다.

애국심은 또 주변 나라들을 불편하게 한다.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고 평화 헌법을 무력화하려는 일본 우익의 애국심은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는 폭탄 테러도 극단적 애국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 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애국심이 최고조에 이른다는 사실은 애국심의 본질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국심이 정권이나 정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 나치 독일이나 북한이 대표적인 예다.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정부와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고, 최고 지도자에 대한 숭배로 연결된다. 남한에서는 반공·반북이 애국으로 포장됐다. 기성세대들이 자다가도 외우는 국민교육헌장에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고 언급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애국을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연말 청와대에서 주재한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애국가에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으냐”며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장면을 언급하며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퍼지니까 경례를 하더라”라고도 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충(忠)이 무엇인가. 중심(中心)이다.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면서 국가와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이 다소 이해되지 않는다. 애국과 충성이 나라 발전의 밑거름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2015년 대한민국에서 애국심과 자기 희생이 필요한 사람은 정작 따로 있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그리고 세금을 깎아주거나 규제를 풀지 않으면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겠다고 하는 재벌·대기업 총수들이다.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면 일반 국민은 나라 걱정할 일이 크게 없을 것이다. 새해 아침, 애국자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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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님의 의견 - 5년 전

앞의 글들의 보면 애국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북한과 같은, 그리고 제국주의식 애국심이라는 관점에서 이해가 되고 서술이 되고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과 같은 형태의 강압적인 애국심교육은 물론 지양되어야 합니다.

먼저, 교육에 대해서부터 제 생각을 서술하려 합니다.

교육이라함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수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으실 겁니다.

이에 반해 학습은 능동적인 개념이 더욱 더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바와 같이 삶의 행복, 그리고 지식의 신장을 위해서는 ‘교육’보다 능동적인 개념의 ‘학습’이 더욱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고 이는 많은 분들께서도 공감을 하실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교육’은 필요없는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는 앞에서 제가 정의한 ‘학습’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무릇 가정이나 사회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학습’을 하게 됩니다.

애국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심은 기존의 파시스트적인 애국심만이 애국심이 아닙니다.

사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가라는 울타리의 역할이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고 해외사례를 보면 서비스적인 개념의 역할만 하는 것이 현대국가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많은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들어서 세계화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개개인들이 각자의 이익에 의하여  집산하게 되는 사회가 세계화와 동시에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익의 다양화는 많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현재 우리가 소요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애국심은 이러한 다양한 이익사회에서의 개개인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애국심의 국방 차원에서의 기능입니다. 만일 ‘안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사회가 온다면, 전 세계가 서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어울러져 살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로 애국심교육 필요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그렇지 않습니다. 애국심 교육은 ‘안보’의 개념이 아직까지는 우리의 생명과 재산의 유지에 필요하다고 어느정도 인정된다면 그때까지는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