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의 현재 나라 이름 - as-suleuui hyeonjae nala ileum

함의 후손인 니므롯(Nimrod)은 '용감한 사냥꾼'으로,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바벨론)과 에렉(Erech), 악갓(아카드), 갈레(Calneh)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아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리호보딜(Rehobothir), 갈라(Calah, 오늘날의 님루드), 레센(Resen)을 건설했습니다.

앗수르바니팔 2세(기원전 883~기원전 859)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창시자로 생각되며, 갈라를 요새·궁전·사원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이스라엘의 예후왕이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새겨진 '검은 방첨탑'(Black Obelisk)이 바로 갈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시리아 4대 도시는 아슈르, 니느웨, 갈라(Calah), 두르-샤루킨입니다. 자신들의 최고신 이름을 본 딴 아슈르는 그 땅과 민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기원전 704~기원전 681)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리아 왕입니다.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산헤립은 페니키아와 블레셋도 정복했습니다. 산헤립의 강력한 군대가 페니키아에 도착하자 그들은 항복하고 맙니다.

"나의 주 아슈르의 무기에 대한 두려움이 요새화된 그의 강력한 성읍들로서 그의 요새들을 위하여 식량과 물의 공급을 가능케 하던 큰 시돈 성읍과 작은 시돈 성읍, 벧-자이트 성읍, 차리프투(사렙다) 성읍, 마칼리아 성읍, 우수 성읍, 악십 성읍, 악고 성읍 등을 압도하였다. 그들은 나의 발 앞에 굴복하였다." (아시리아의 라쌈 실린더)

산헤립은 또한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던 블레셋을 정복하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아스글론의 왕 치드카는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집의 신들과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뜰들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집의 자손을 추방하였으며, 그를 앗수르로 보냈다. 나는 이전의 왕이었던 로킵티의 아들 샤루-루-다리에게 아스글론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에게 나의 통치권에 복종함을 나타내는 조공물과 예물들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나의 멍에를 메었다." (라쌈 실린더)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유다 왕국을 벼랑으로 몰고 간 왕이기도 합니다(왕하 18~20; 대하 29~32). 산헤립은 히스기야왕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두었으나, 하나님 도움으로 아시리아 군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위세를 떨치던 산헤립은 자기 아들들의 반란에 살해되고 맙니다. 생전에 에살핫돈에게 왕위를 넘겨 주기로 했으나, 이를 시기하던 아들들 중 일부에게 살해당합니다. 작은아들 에살핫돈은 그 공모자를 쫓아내고 왕권을 잡습니다.

에살핫돈은 기원전 627년 순조로운 왕권 이양을 위해 아들 아슈르바니팔(스 4:10에서 "존귀한 오스납발")을 아시리아 왕으로, 다른 아들 샤마쉬-슘-우킨은 바벨론 왕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에살핫돈이 죽자 샤마쉬-슘-우킨은 형의 왕위까지 넘보고 전쟁을 일으켰고 4년의 내전 끝에 샤마쉬-슘-우킨은 패배하고 맙니다.

아슈르바니팔이 죽고 그의 아들 아슈르-에틸-일라니가 잠깐 다스리고 그의 형제 신-샤르-이쉬쿤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신-바벨론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아시리아는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아시리아 마지막 수도였던 니느웨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랜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산헤립과 그의 후계자들 통치 때에만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기원전 616년에 시작된 공격으로 기원전 612년 3월 니느웨가 함락되면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최근 연구들에서는 바벨론의 군사 공격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뭄과 제국으로의 강제 정착 때문에 인구 폭발을 겪으면서 아시리아가 멸망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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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와 나훔

아밋대의 아들 요나(1:1)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통치 기간(기원전 783~기원전 743년, 왕하 14:25) 중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실제 저자와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나훔이 철저한 니느웨 멸망을 예언한 것과 달리,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여호와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1장과 3장, 2장과 4장 사이의 병행하는 내용을 통해 일련의 반어법적 대조 형식이 독특한 요나서는 문학·신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아시리아는 비록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지만, 창조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선하심은 요나가 느끼는 니느웨를 향한 분노와 불평을 초월합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분노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니느웨를 향한 여호와의 자비는 전체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4:1-11).

아시리아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는 나훔입니다. 그의 고향은 엘고스(나 1:1)로,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모릅니다. 나훔서는 질투하며 보복하는 여호와(나 1:2)가 아시리아 수도인 니느웨를 멸망시키는 것을 다룬 책입니다. 기원전 663년 이집트 수도 테베(나 3:8 노아몬)의 함락과 기원전 612년 니느웨의 멸망 사이 기간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주변 국가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세력을 과시했지만, 여호와는 남유다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나 1:12)."

나일강이 테베를 아시리아 손에서 보호하지 못하고 무너졌듯이, 티그리스강도 니느웨를 지켜 주지 못할 것이며 위세를 떨쳤던 아시리아 군대와 신들도 니느웨를 지켜 줄 수 없을 것입니다(3:11-15).

이라크 모술에서 북동쪽으로 48km 떨어진 니느웨 평원에 알코시(al-Qosh)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곳이 나훔의 고향이라고 믿고 있으며, 여기에는 나훔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서기 1173년에 만들어져서 실제 나훔의 무덤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과 무슬림에게도 중요한 순례지입니다.

바벨론의 발흥

바벨론을 시날(Shinar)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창 10:10, 11:2, 14:1,사 11:11, 슥 5:11, 단1:2).

바벨론은 구 바벨론(Old Babylonian)-중기 바벨론(Middle Babylonian)-초기 신 바벨론(Early Neo Babylonian)-신 바벨론(New Babylonian)으로 나뉩니다. 창세기는 구 바벨론과 연결되며, 열왕기서·다니엘서·에스겔서 등은 신 바벨론과 연결됩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바벨론은 아시리아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바벨론은 기원전 689년 산헤립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에살핫돈이 재건하여 사람들이 다시 살게 했습니다. 기원전 652년 앗수르바니팔은 심각한 폭동에 직면하여 2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기원전 648년 바벨론을 점령합니다. 기원전 640년에는 수사(또는 수산, Shushan)를 정복해 이 엘람족 국가를 멸망시켰으며 팔레스타인에서도 자신의 권세를 재천명했습니다.

끊임없는 전쟁 중에 바벨론은 기원전 648년 다시 파괴됩니다. 하지만 아시리아 앗수르바니팔의 바벨론 공격은 이미 힘에 부쳤으며 도리어 아시리아 제국의 취약성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바벨론은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고 아시리아의 기세에 눌려 있던 여러 민족의 저항운동이 결집하는 촉매제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바벨론은 1000년 전 함무라비왕의 영광을 되찾을 준비를 합니다.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뒤, 바벨론과 고대 근동의 미래는 사실 기원전 626년 바벨론 왕이라 자칭한 나보폴라살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나보폴라살이 기원전 626년 11월에 자기를 복속시키기 위하여 파견된 아시리아군을 격퇴한 뒤 바벨론 성과 남부 지역 전체를 장악합니다. 나보폴라살은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 수도 니느웨를 공격하는데, 니느웨가 함락될 때 신-샤르-이쉬쿤은 불길 속에서 죽었고, 패잔병들은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10년째 되던 해: 나보폴라살은 아야르 월에 아카드 땅의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서 행군하였다. 수쿠 땅과 킨다누 땅은 그에게 맞서 싸우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그의 앞에 조공을 바쳤다. 아브 월에 앗수르 땅의 군대는 가블리니 성읍에 모였다. 나보폴라살은 그들을 향하여 올라갔다. 아브 월 12일에 그는 앗수르 땅의 군대와 교전하였다. 앗수르 땅의 군대는 그의 앞에서 퇴각하였다. 그는 앗수르 땅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바벨론 연대기)

"짐은 신과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잘 대접했으나 질병과 고통 그리고 불행이 짐에게 닥친 이유는 무엇인가? 짐의 나라의 분란과 짐의 가족의 불화를 참을 수 없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창피한 사건들 때문에 늘 괴롭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짐을 짓누르노라, 짐은 고뇌에 울부짖으며 삶을 마감하노라, 죽음이 짐을 덮쳐 쓰러뜨리노라, 짐은 비탄과 한탄에 젖어 밤낮으로 울부짖노라. 신이시여,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다루시겠습니까? 부디 저를 구원해 주소서."

2.5. 멸망[편집]

아슈르바니팔 사후에는 후계자 지위를 놓고 아슈르바니팔의 아들들인 신 샤리 이슈쿤과 아슈르 에텔 일라니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수석 내관인 신 슈무 리시르의 후원을 받은 아슈르 에텔 일라니가 왕위에 올랐으나 다소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12] 내시인 신 슈무 리시르가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렸던 신 샤리 이슈쿤에게 제거된다. 아슈르바니팔 왕 후반기부터 시작된 제국의 쇠퇴는 내란을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고 계속해서 아시리아의 뒷목을 잡고 있던 바빌로니아 지방은 이 기회를 틈타 아시리아 세력을 완전히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한다. 이 시기 아시리아는 본토를 지키는 것도 불가능해질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집트, 리디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결국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스키타이, 킴메르, 유다, 엘람, 킬리키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멸망할 때 마지막 왕 신 샤리 이슈쿤은 온 성에 불을 질렀고, 연합군 역시 아시리아에게 당한 그대로 보복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13] 니네베 함락 이후에도 신 샤리 이슈쿤의 형제가 하란 지역에서 자립하여 아슈르 우발리트 3세라 칭하며 저항을 이어갔으나 기원전 609년 하란마저 메디아-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함락되어 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때 아수르 등의 도시는 재건되어 회복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왕조를 거치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아시리아의 이름을 딴 아시리스탄 주가 설치되어 아시리아인들의 문화를 이어갔다. 14세기 이래로는 티무르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되는 등의 혼란기도 있었지만 현대까지도 아시리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3. 정치[편집]

수사, 훌륭하고 성스러운 도시, (중략) 나는 정복하였다, (중략) 나는 수사의 지구라트를 부숴버렸다. (중략) 나는 엘람의 사원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들의 신들과 여신들을 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들의 조상과 옛 왕의 무덤을 짓밟았고, (무덤에) 햇빛이 들게 하였으며, 그들의 뼈를 꺼내 아슈르의 영토로 옮겨 갔다.


-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이 엘람 왕국을 정복한 것을 문자판에 새긴 내용.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 이사야 36:1

아시리아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하다 보니 피지배민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강압적이고 잔혹했다. 구약성경에도 당시 이러한 정책이 공포와 증오가 담겨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시리아인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점토판에 기록하고 있듯이[14] 저항한 지역은 주민들의 씨를 말려 해골 탑을 쌓고, 항복한 지역도 군주와 귀족들은 짐승처럼 코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엮어 끌고 가 처형하고, 평민들도 먼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고, 이 과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은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였다. 또한 아시리아의 유적에서 출토된 사르곤 2세의 부조를 보면 당시 사르곤 왕이 포로에게 행한 잔혹한 행위가 조각되어 있는데, 포로의 턱에 줄을 연결시켜 사르곤 왕이 그 줄을 당기면 포로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게 하여 왕이 들고 있던 창으로 포로의 눈을 꿰뚫어버리는 장면이다.

그렇게 빈 땅에 또 다른 곳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식이었다. 피지배민들에 대한 착취도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시리아에 대한 다른 민족들의 증오가 굉장해서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점령한 이집트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시도하는 등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음에도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시리아인의 인구가 많지 않다 보니 타국을 점령하고도 제대로 된 통치가 힘든 판국이라 영토 유지가 더욱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시리아 멸망 후에 분열된 오리엔트 지역을 재통일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피지배 민족에 대한 관용 정책을 실시해서 큰 영토를 가진 상황에서도 아시리아보다 오래 갈 수 있었다.

다만 국가 존속 기간 자체로 보면 페르시아도 오래가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불과 220년 만에 멸망했는데 이는 신아시리아의 존속 기간인 300년 가량보다도 짧다. 물론 아시리아와 달리 페르시아는 국가 초창기부터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무리한 원정(특히 그리스 원정, 살라미스 해전이나 마라톤 전투)을 지속하다가 경기 침체를 맞고 몰락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시리아만큼 피지배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15]

4. 군사[편집]

아시리아의 군대가 오리엔트를 석권할 정도로 강력해진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히타이트나 이집트 등의 주변의 거대 문명들과 아람 등의 지역 경쟁자들이 모두 멸망하거나 쇠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아시리아 역시 엄청난 타격을 받고 극도로 위축되었던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다른 이유로는 전차를 혁신하고 최초로 기병을 체계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강력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아시리아에서 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직접 타는 기마술을 고안하기 전에는 기병을 운용하기 어려웠다는 것. 단 아시리아가 정말로 기마술을 직접 고안한 것인지 아니면 유목민족이 고안한 기술을 도입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적어도 아시리아가 싸운 적들 중에 스키타이를 제외하면 아시리아 정도로 기병을 운용한 나라가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아시리아 이전에는 말의 허리 부분이 아닌 엉덩이 부분에 타야 했기 때문에 말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미술품 중에도 기병은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말에 탄 마부 한 명이 자신의 말과 기병의 말 두 마리의 고삐를 동시에 쥐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어 기마술이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앗수르의 현재 나라 이름 - as-suleuui hyeonjae nala ileum

또한 역사에 기록된 군대 중 병참 부대 개념을 가장 먼저 실천한 군대로, 전투 부대만이 아닌 지원 부대의 개념을 먼저 깨치고 실행에 옮긴 것 또한 아시리아를 군사 강국으로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아시리아가 그만큼 뛰어난 관료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16]

그리고 활발한 철기 보급으로 인한 장비의 발전도 있었고, 신아시리아 시대에 들어서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등 군사 발전에 많은 투자를 하였기에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5.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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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시리아 부조(왼쪽)와 라마수 석상(오른쪽). 부조의 인물은 길가메시로 추정된다.

  • 군사 강국이란 이미지와 잔혹한 지배 정책 때문에 '아시리아인=피에 굶주린 전투종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생활상이나 문화 자체는 다른 오리엔트 지역의 주민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문화적으로는 앞서 잔인한 발언과 부조로 유명한 아슈르바니팔도 최초로 체계적인 도서관을 만들어서 그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 전문은 수메르보다도 아시리아 도서관 유적에서 먼저 발견되었고 아시리아의 유적 중 하나인 카네쉬 유적에서 발굴된 편지들을 보면 거래의 독촉에 대한 불만감, 남편에 대한 바가지, 혼인을 해야 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 등 평범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지극히 상인스러운 성향을 정복 시기에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기사 시민들이 주고 받는 편지에 폭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리가 만무하다.

  • 아시리아는 여러 번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아시리아의 수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건국 시의 첫 수도는 나라 이름과 같이 아수르였으나, 기원전 18세기에 슈바트-엔릴로 수도를 한 차례 옮겼다가 다시 아수르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기원전 13세기에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카르-투쿨티-니누르타로 천도한 뒤 다시 아수르, 칼후(님루드), 두르-샤루킨(코르사바드)를 거쳐 신아시리아 시기인 센나케립 때 니네베로 수도를 옮겨 멸망할 때까지 니네베가 수도였다. 멸망 후 아시리아 잔여 세력이 하란을 수도로 삼고 저항하기도 했다.

  • 스파르타처럼 국민 구성원 거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무정신이 강해서 왕조차 전쟁이 없을 때는 직접 전차에 탄 상태에서 활과 화살로 사자를 잡는 사냥에 나서는 것이 관례였다.

  • 님루드에서 발견된 부조에 달렉을 닮은 공성 병기가 등장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국가 중에서도 아시리아의 유적이 가장 먼저 발굴된데다가 구약성경이 기록된 시대상이 겹쳐서 교차검증하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아시리아에서 쓰이던 아카드어와 쐐기 문자도 수메르의 것보다 먼저 발견했기 때문에 수메르, 바빌로니아 등을 비롯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고고학, 역사, 언어,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메소포타미아학이나 이라크학이 아닌 아시리아학(Assyriology)이라고 부른다. 아시리아가 존속 기간이 매우 길었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도서관을 건설하는 등 자료 보관에 힘을 쓴 덕분에 자료가 많이 발굴될 수 있었다.


듄의 신황제에서 레토가 고대 지구에 대해 설명할 때 아슈르나시르팔 2세에 대한 언급이 잠시 등장한다.

6. 현대의 아시리아인[편집]

앗수르의 현재 나라 이름 - as-suleuui hyeonjae nala ileum
  자세한 내용은 아시리아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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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제국은 오래 전에 멸망 했지만 아시리아인들의 혈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7. 창작물에서[편집]

  • 문명 5 Brave New World - 아시리아

  • 악튜러스 - 아시리아 제국

  • 도미네이션즈 - 용병 중 아시리아 기마 돌격대

  자세한 내용은 아시리아 기마 돌격대(도미네이션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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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전 911~기원전 609[2] 신아시리아 시대 정복지[3] 사르곤 2세의 치세 때 잠시 두르샤루킨으로 수도를 옮겼으나 수도를 옮긴 지 1년 만에 그가 전장에서 죽으면서 센나케립 때 니네베로 수도를 옮겼다.[4] 원래 아시리아는 아카드어의 북부 방언인 아시리아어를 썼으나 신아시리아 시대에 서부 셈어족에 속하는 아람어로 공용어가 교체되고 아카드어는 중세 유럽의 라틴어처럼 문어(文語)가 된다.[5] 수메르로부터 유래된 신들뿐만 아니라 아시리아 고유의 신인 아슈르도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6] 둘 다 앗슈르의 땅이란 뜻이다. 시리아의 어원이기도 하다.[7] 단순히 국력만 강했을 뿐 아니라 학문, 건축, 문학 등의 문화도 발전하여 남긴 유물도 가장 많은 시대이다.[8] 성경에서 나온 이름으로 메로다크-발라단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반란 실패 이후 엘람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9] 이 도서관은 설립자인 아슈르바니팔의 이름을 따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으로 불린다. 길가메시 서사시 아카드어 판본과 에누마 엘리시, 수메르어-아카드어 어학 사전 등의 중요한 유물이 이 도서관 유적에서 발굴되었다.[10] 사자 사냥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권의 왕실에서 인기 있던 스포츠였다. 사자를 풀어두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과 죽어가는 사자들이 부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당시에는 아시아사자도 이라크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식했었다.[11] 샤마쉬슈무킨이 죽고 바빌론이 함락될 때 도시에 큰 불이 퍼졌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패배한 샤마쉬슈무킨이 분신 자살을 한 것이라고도 여겨져 왔지만 그의 정확한 사인은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었든 잔인한 죽음을 맞았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12] 시해와 찬탈 가능성이 높다.[13] 신 샤리 이슈쿤의 이름이 그리스에는 사르다나팔루스로 와전되었는데 멸망할 때 온 성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는 것이 유럽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는지 그 후 유럽 문화권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최후를 다룬 미술이나 음악 작품이 상당히 나왔다. 약 1500년 후 중국 후당의 폐제 이종가 역시 최후의 순간에 낙양성에 불을 질러 자살하려 했으나 대신의 만류로 전각 하나만을 불사르는 데 그쳤다. 여러모로 비교되는 부분.[14] 다만 지구라트를 비롯한 신전 파괴는 고대에 종교가 한 나라의 정체성이기도 했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관용 정책으로 유명한 키루스 2세도 메디아 정복 후 메디아의 신전을 파괴했고, 신바빌로니아 정복 후에도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파괴했다.[15]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는 아시리아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다양한 민족들을 통치하고 있었다.거기다 의외이지만 아케네메스 왕조는 망하던 시기조차도 망할만한 나라는 아니었는데 다리우스 3세는 생각과는 달리 찌질한 왕이기는 커녕 그 동안 국정을 농단해온 세력들을 숙청하고 왕권을 다시 세웠으며 왕족 시절에는 일기토를 떠서 이겼을 정도로 장수로서도 대단한 재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불운하게도 그의 마지막 상대는 희대의 천재 정복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으며 하필이면 단 한번의 실수로 나라가 붕괴되는 계기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당시 아케네메스 왕조가 국력이 약해졌다지만 단기간에 망해버릴 정도로 허약한건 아니었다. 심지어 아시리아는 그래도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등 여러 신흥국들의 다굴을 맞기라도 했지 아케메네스 왕조는 오로지 마케도니아만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