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독립되어 예배 대상으로 조성된 예가 드물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가좌 특유의 복잡한 신체 구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자세의 과장과 단순화, 동일한 단위의 옷주름이 반복되는 도식성을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합니다.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숭고미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반가사유상, 삼국 7세기 전반, 높이 93.5 cm, 국보 83호
사유하는 모습의 반가사유상은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와 같이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단정 지어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많이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칭하는 것이 보다 무난합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정교하고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더해 얼굴의 잔잔한 미소는 종교의 예배 대상이 주는 숭고미를 더해줍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표현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의 보관은 인도나 중국의 보살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 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신비감마저 주고 있습니다.

나형(裸形)의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기라도 하는 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있어 특히 어려운 점은 오른팔의 처리입니다. 오른 팔은 무릎에서 꺾여서 뺨에 다시 닿아야 하므로 길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국보 83호 상은 오른쪽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쳐주고 그 팔 또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매우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이어집니다.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한데, 지금까지 국보 83호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국보 83호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Gilt-bronze Pensive Maitreya Bodhisattva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대한민국의 국보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종목국보 제83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1구
시대삼국시대
주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일제 때 밀반출되어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그 제작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삼국 시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서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의 태자 시절에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형(太子思惟形)에서 유래한 것이나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간 세상에 나타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겠다는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6~7세기 동양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이 있으며 일본 교토시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해 한일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 큰 주목을 받아 왔다.[2]

작품 설명[편집]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3 개의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이라고도 한다. 이 불상은 두 줄로 융기된 목걸이 외에는 몸에 전혀 장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전반적으로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이나 좀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옷 주름 표현, 움직이는 듯이 조각된 두 손과 두 발의 모습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생동감이 잘 나타나 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사유하는 모습이며 양 눈썹과 콧등의 선은 길게 연결되면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종교적인 평온함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날씬하면서 둥근 맛이 강한 신체에는 천의(天衣)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옷주름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데 비해 군의(裙衣)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볼륨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특히 양감이 강조된 두 다리의 형태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 표현 등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하반신 부분만 남아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석조반가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으로 받침대 위에 둥근 방석이 놓여 있는 특이한 등나무 의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제작 시기[편집]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보이는 균형잡힌 신체 비례나 생동감있고 안정감 있는 불신(佛身)의 모습 등은 중국 동위에서 북제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체로 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 전체에 나타나는 둥근 맛이나 단순한 조형감 등은 백제적인 요소로 백제 무왕대(武王代; 602년-641년)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에서 모두 조성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서 다수 제작되고 예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연관되어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미륵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많이 조성되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도 양식상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나 침울한 얼굴 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秦何勝)이 신라계의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한국, 특히 경상도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통해서 볼 때 한반도, 특히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상으로나 양식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 반가사유상의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해외 전시[편집]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해외 전시 횟수는 1960년 이후 총 7차례에 달한다.[3] 가장 최근에는 2013년 미국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의 나라, 신라' 전에 출품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변영섭 문화재청장 측이 '해외로 반출되는 문화재가 너무 많다'며 전시 불가 심의를 내렸으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의 요청과 문화관광부의 개입으로 출품될 수 있었다.[3]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여 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사의 반가사유상의 상호 교환 전시를 추진한 바 있었다.[3] 그러나 고류사 측 주지가 '목조반가사유상의 해외전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83호 반가사유상의 일본 전시 역시 무산되었고, 대신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국보 23호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의 교환 전시로 변경되었다.[3]

사진[편집]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얼굴 정면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오른 쪽 얼굴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왼 쪽 얼굴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반가부좌 정면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뒷모습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왼발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왼발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오른 쪽 무릎

  •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오른발

같이 보기[편집]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 일본 교토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상

각주[편집]

  1. 문화재청고시제2010-59호,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관보 제17286호, 277-288면, 2010-06-28
  2. 노병철, 國博,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으로 교체 전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붓다뉴스
  3. ↑ 가 나 다 라 이기환 (2020년 3월 24일). “'모나리자처럼'…우리에게도 죽어도 빌려줄 수 없는 국보 보물이 있다”. 경향신문. 2020년 3월 24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위키미디어 공용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반가사유상 83호 - bangasayusang 83ho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