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어린이날 만든 이유 - bangjeonghwan eolin-inal mandeun iyu

[진단] 365일이 특별한 요즘 아이들, 웬 어린이날?

“5월만 되면 머리가 아파요. 올해는 무슨 선물을 해주고 어디서 놀아줘야 하나? 아이들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텐데….” (서울 노원구 학부모 김영환씨)

“어린이날이요? 학교에서 작은 체육대회 하고, 여유가 있는 학교는 공책이라도 나눠주고 끝나죠. 아이들은 어린이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서울시내 초등교사 박아무개씨)

“사람들이 화이트데이, 발렌타인데이라고 정해놓고 몰리는 것이나 어린이날이 다른 것이 뭐가 있나요. 선물 보따리 안겨 주고, 놀이동산 가서 하루종일 시달리고… 이런 식이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겠어요.”(전남 목포 학부모 양애경씨)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린이날 ‘몸살’은 이렇게 어른들의 고민으로 시작된다. 서울 근교의 놀이공원이 북적거리고, 극장가, 쇼핑가, 공연장은 어린이날 ‘대목장사’다.

아이들이 어린이날 가장 받고 싶은 선물 목록은 어김없이 신문과 방송의 화제 기사에 올랐다. 올해 한 생명보험회사가 서울시내 초등학교 어린이회장(6학년)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어린이날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휴대전화(32.2%)였다. 애완동물(13.6%), MP3 플레이어(9.6%), 옷(8.8%), 쇼핑(7.5%), 컴퓨터(6.0%), 상품권(5.6%), 게임기(3.5%) 등이 뒤를 이었다.

어느덧 어린이날은 많은 가정에서 선물의 날이 되고, 놀이동산 가는 날이 되었다.

어린이날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선물과 놀이동산이 얼마나 어린이의 인격과 행복에 기여를 하는가? 우리 사회도 그런 문제를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80여년전인 1923년 이 땅에 ‘어린이날’을 처음 만들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오늘의 어린이날 풍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체, 노동을 없애고 배우고 즐기게 하라”
1923년 소파 방정환이 식민지 조선에 어린이날을 만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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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1일 오후3시. 서울 종로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어린이와 어른 1000여명이 모여 식민지 조선에서 첫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은 광화문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는데, 그들이 든 깃발에는 ‘어린이 해방’이라는 붉은 구호가 선명했다.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제사회가 어린이 권리에 본격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보다 앞선 것이었다. 1924년 국제연맹회의에서 아동권리선언이 나왔고 미국은 1930년에야 어린이헌장을 발표했다.

소파 방정환, 김기전 등 어린이운동의 선구자들은 당시 ‘어린이 선언’에서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으로 예우하고, 14세 이하의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을 없애고,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겁게 놀기에 마땅한 여러 가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정환은 장유유서의 봉건이데올로기가 강한 식민지 조선사회라는 이중의 굴레에서 힘겨운 가사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아이들을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하늘’처럼 떠받들고, 배우고 즐겁게 놀 권리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어린이날’을 제정해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고자 했다.

방정환은 어린이날 제정과 함께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전국 곳곳을 돌며 번안한 외국의 동화를 읽어주고 문학작품 활동을 하면서 어린이들의 권익 보호에 짧은 생을 받쳤다. 그가 쓴 1924년 ‘어린이 찬미’에는 “어린이를 하늘처럼 섬기라”는 그의 사상이 잘 묻어난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삶,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이땅에 처음 만들었던 것은 이처럼 봉적적 윤리의 압박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어린이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뚜렷하게 담고 있었다.

“지금은 날마다 어린이날…이젠 어린이날을 없애자”
“내 아이 최고로” 부모의 욕망이 고독한 존재로 내몰아

▲ 피곤에 지친 아빠와 아이가 놀이공원 벤치에 앉아 졸고 있다. 이승경 기자.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80여년이 지난 1999년 한 재야 철학자는 ‘어린이날을 없애야 한다’는 도발적 화두를 던졌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당시 서울대 강사)는 <한겨레>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서구의 어떤 나라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보호, 많은 교육, 많은 사랑을 어린이들에게 퍼붓고 있다. 이제 우리의 어린이는 이 세계의 제왕이 되었다. 정말 매일매일이 어린이날이 아니냐. 그렇다면 어린이날이 따로 있을 이유 또한 충분히 사라진 게 아닐까?”

고도로 물질화되고 핵가족화가 급진전된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어린이는 봉건적 압박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아이를 세상 최고로”만들기 위해 온갖 방법이 총동원되는 세상에 아직도 어린이날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진 것이다.

이 교수는 사회적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 ‘부모들의 욕망’이 아이들을 고독한 존재로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부모들의) 기획과 예정된 일정에 따라, 학교·학원 같은 예정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삭막하고 깨끗한 거리 사이에 떠 있는 몇몇 섬들뿐이다. 거기에서 형제마저 찾아보기 힘든 지금, 그들은 ‘제왕의 고독’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수의 주장은 6년 전 일이다. 그 이후 어린이날 풍경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 어린이날을 앞둔 지난해 5월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강당에서 2004세브란스 어린이 대잔치가 열려 입원중인 어린이들이 공연을 보며 잠시 병마를 잊고 즐거워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어린이날을 다시 생각하는 어른들
“사회의 아이들에게 의미를 넓혀야 진짜 어린이날”

4학년과 2학년 초등학생의 학부모인 양애경(37·목포시 산정동)씨가 어린이날을 보내는 방법은 여느 부모와 사뭇 다르다. 양씨 가족의 어린이날에는 선물도 놀이동산도 없다. 양씨 가족은 평소 휴일과 다름 없이 뒷산을 가볍게 산책하고, 시내에서 온 가족이 영화 한편 보는 것으로 어린이날을 보낸다.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인 ‘동화읽는어른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양씨는 어린이날이면 고아원이나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챙기는 일에 오히려 열심이다. 벌써 몇해째 이렇게 단촐한 어린이날을 보내고 있다.

양씨는 “고향이 없는 어른들이 명절에 더욱 힘들어 하듯 부모가 없는 시설의 아이들은 어린이날이 오히려 힘들다”며 “잘 먹고, 잘 입고 사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 여전히 못 먹고 헐벗은 우리 사회의 아이들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이 이 시대 어린이날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날을 다시 생각하자는 학교 현장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서울 미성초등학교 서진영 교사는 3년전부터 4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어린이날 공동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이날 공동수업은 아이들이 어린이날에 바라는 것, 어린이날의 유래, 아이들의 인권 등을 놓고 토론수업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 교사는 “요즘 어린이들은 과도한 학습노동과 가정에서 소외 등으로 조선시대보다 더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며 “어린이들이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어린이도서연구회 김옥선 사무총장은 “어린이날을 1회성 이벤트로 끝내면 순간적인 위로와 해방감을 줄 수 있겠지만 삶에서 이를 녹여낼 수 없다”며 “하루의 순간적인 해방감이 1년 내내 억압되어 있는 아이들의 교육에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사무총장은 “성적지상주의의 학교교육에서 벗어나 책읽기와 자연과 함께 놀기 등 아이들의 문화를 건강하게 되돌려 놓기 위해 어른들과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공론화하는 장이 어린이날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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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작가 정보

출생 1899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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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한성부 서부 적선방 야주현계
사망 1931년 7월 23일(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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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성부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병원
국적 대한제국
언어 한국어
직업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학력 일본 도요 대학교 철학과 중퇴
경력 조선소년소녀연합회 회장
종교 천도교
필명 아호(雅號)는 소파(小波)
활동기간 1921년~1931년
장르 아동문학, 시학
부모 방경수(부)
배우자 손용화(손병희의 3녀)
자녀 방운용(장남), 방하용(차남)
친지 방한용(할아버지)
손병희(장인)
손병흠(처숙부)
손천민(4촌 처남)
웹사이트 한국방정환재단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목요일)~1931년 7월 23일(목요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다.

개요[편집]

대한제국 한성부 서부 적선방 아주현계 출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이다. 일본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나, 수운 최제우의 저서인 《동경대전》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라는 절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이 땅 위에 지상천국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천도교 사상을 담은 것으로 천도교 신자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1]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목요일), 오랜 질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일생[편집]

성장기[편집]

방정환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이며, 순조 때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방우정(方禹鼎) 장군의 동생인 방우준(方禹準)의 5대손이다.[2] 1899년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方漢龍)의 아들인 방경주(아명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친할아버지 방한용에게 한문을 배웠다. 야주개의 큰 상인 집안에서 아들로 태어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에게 자랐고, 집안이 망한 후 일찍 출가한 누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일곱 살 때인 1905년 3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金重煥)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친할아버지 방한용은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문학 등단[편집]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올 때에 데려온 인쇄 자모(필름인쇄 이전에는 자음과 모음 글자판으로써 인쇄했고, 지금도 쓰이고 있다.)와 인쇄 노동자 2명과 함께 서울에서 운영한 출판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잡지인 《소년》, 《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힘으로써 등단하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에서 3학년 2학기 국어국문학과 교과서로서 펴낸 《한국근현대문학사》에서도 1917년을 소파 방정환 선생이 문학동네에 등단한 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모처(향리 인근 도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이재승 교수와 초등학교 교사인 김대조 교사가 같이 쓴 교과서 위인전기 방정환(시공주니어)에 의하면, 훗날 소파가 "선린상업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기억할 정도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이다. 지금에 비유하면,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이 직업교육이 위주인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한국은행 고졸 사무직 입사추천을 약속한 교사의 만류에도 그만두고, 문학공부에 몰두했다는 뜻이다.

천도교와의 만남[편집]

1915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일급으로 임금을 셈하여, 한달에 한 번 임금을 수령함),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던지라 곧 사직하고 마는데,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 뜻이 맞아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한다.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그 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천도교에서 인수한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덕여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후원하여 민족교육에 많은 열심을 보였다.[3]),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 무렵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일본식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문예지 신청년(1919~1920)을 편집 발행하는 데에 관여했으며(당시 조선 문학계에서 존경을 받던 만해 한용운 시인이 신청년에 글을 실어서 연대를 함), 청년운동가이자 선린상업학교 학생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문학가로서 열성을 보였다.

권병덕 선생과의 만남[편집]

소파 방정환이 천도교에서 소년운동 활동가로 일할 때에 권병덕 선생은 성실함과 똑똑함을 눈여겨보고, 손병희 선생이 셋째 따님인 손용화 여사의 사위를 고를 때에 손병희 선생에게 방정환 청년을 권했다고 한다. 손용화 여사에 따르면, 중매가 들어오자 천도교 신자와 결혼을 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 손병희 선생에게 권병덕 선생이 추천한 인물이 곧 소개한 인물이 소파 방정환 선생이었다. 손병희 선생은 소파의 마른 체형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똑똑하나 어릴 적에 너무 굶주려서 마른 것이니 잘 먹으면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설득하고, 부지런함,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지도력 등의 장점들을 말하여 손병희 선생이 소파를 사위로 들였다고 한다.

권병덕 선생을 천도교 활동가로 영입할 정도로 깊이 신임한 손병희 선생인터라 권병덕 선생의 말씀을 듣고 사위로 소파를 정한 것이었다. 당시 방정환은 19세, 손용화 여사는 17세였고, 1917년 음력 4월 초파일(의암 선생의 생신)이었다.

소파 방정환을 의암의 사위로 추천한 일은 소파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일이다. 몰락한 상인의 집안이라 빈곤에 허덕이던 소파가 장인장모의 배려를 받아 유광렬이 "나와 토지조사국에 다닐 때에는 바싹 말랐더니, 몸에 살이 찌고 비대해졌으며"라고 기억할 정도로 건강해졌고, 보성전문학교 곧 고려대학교에서 공부를 해나갔기 때문이다. 처가의 배려로 삶이 안정되자, 소파는 청춘 잡지에 단편소설과 수필(소파 방정환 수필 선집(지식을 만드는 지식 펴냄)을 참고하라.)을 투고하는 등 작가로 활동했으므로, 소파가 아동문학가로 자라는 흙을 권병덕 선생이 만들어주신 셈이다.[4][5]

[6]

독립신문 발행[편집]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천도교 보성사에서 인쇄한 조선독립신문을 내다 체포되자 직접 등사기로 찍은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린 덕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 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

일본 유학[편집]

1920년 9월 중순, 개벽사 도쿄부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고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 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방정환이 쓴 수필 「미행당하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 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는데, 상술한, 이대승 교수가 쓴 소파 방정환 전기(시공주니어)에 의하면, 일본 경찰 형사들도 지시를 받고 일하는 처지인터라 이들에게 존중하여 대해서 형사들도 소파를 존중했다고 한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에서 문화사업을 위해 펴내고, 사회주의자들인 김기진, 박영희가 발행한 잡지인 《개벽》에 수필, 번역동화, 민족적·계급적 색채가 강한 풍자기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며(중세국어시기에는 훈민정음 혜례본에서 어린 백성이라는 말이 나옴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리다는 어리석다를 뜻했지만, 근대국어시기부터 젊다는 저므다, 나이가 어리다는 어리다라고 했다. 소파 방정환은 근대국어 이후에 어린 사람을 뜻하는(어린+-이) 어린이를 어린이들을 고유의 개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중국 유학 기간인 1921년에 외국 동화를 번역하여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7]

# <사랑의 선물> 수록작

  1. 난파선(이탈리아 동화)
  2. 산드룡의 유리구두(프랑스)
  3. 왕자와 제비(영국 동화, 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를 번안, 각색함)
  4. 요술왕 아아(시리아 동화)
  5. 한네레의 죽음(독일동화)
  6. 어린 음악가(프랑스 동화)
  7. 잠자는 왕녀(프랑스 동화)
  8. 천당 가는 길(독일 동화)
  9. 마음의 꽃(중국동화)
  10. 꽃속의 작은 이(덴마크 동화)

방정환이 《사랑의 선물》을 만든 이유는 당시 조선의 어린이들이 누릴 만한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메이지 유신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법 어린이 문학이 발전하여 어린이책들이 서점에 깔렸는데, 아직도 조선의 어린이들은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등 외국의 동화들을 번안하되 일부 내용은 각색하여 조선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한 동화집을 펴내었다. 편집부, 소파 방정환 동화집, 에세이 출판사(2014년)에서는 사랑의 선물에 수록된 10편의 동화와 전래동화를 각색한 창작동화를 1922년 펴낸 처음 책의 문체를 존중하되, 현대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복간하였다.

어린이 운동[편집]

어린이들을 위해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하였다. 소파가 노동절인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색동회 회원들과 개최한 이유는 당시 어린이들이 억압받고, 이기영 선생이 쓴 농민소설 고향(1935년)에서 농민이 마을 제사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둔 이유가 청소년들이 노동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의 오랜 악습인 아동노동을 하고 있어 이들을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하고자 함이다. 실제 당시 어린이 인권선언을 보면 어린이에게 낮춤말을 쓰지 말고 높임말을 쓸 것, 목욕 등의 위생을 위할 것, 어린이가 잘못을 했더라도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 할 것, 잡지를 읽도록 해서 건강한 정서를 갖도록 할 것, 원족을 자주 하도록 할 것(소풍으로써 어린이들이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지도록 함. 실제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소설 빨간머리 앤을 보더라도 에이번리 장로교회 주일학교 학동들이 소풍을 하거나, 조세핀 고모할머니가 조카손녀인 다이애나, 친구인 앤과 함께 박람회, 음악공연 등을 함께 다니면서 소풍하는 이야기가 나옴.)을 말하고 있고, 실제 방정환 선생이 조직하여 활동한 소년구락부 활동도 1주일에 한 번은 문화재를 보기, 연극 방곡령 공연(1918년) 및 관람, 밤을 줍기 행사, 서로 높임말을 쓰기 등의 활동과 규칙이 있었다.) 어린이 문학역사를 공부하거나 하려는 이들이라면 어린이 문학의 고갱이가 어린이 인권, 어린이들이 건강한 정서를 가지고 살도록 하려는 인권운동이므로 참고할만한 중요한 역사이다.

어린이 잡지 창간[편집]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장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고, 민족의 미래,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어린이 잡지(어린이 이전에도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를 최남선이 펴냈기 때문에 최초의 순수어린이잡지는 아님)인 월간 어린이 (1923년 3월 20일 창간- 1934년 3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1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어린이의 내용에 학부모님들과 독자인 어린이들이 공감을 하도록, 동화, 독자응모 등을 실었고, 그의 창발성은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공감을 받아 널리 읽혔다.[3] 실제 윤동주 시인도 어린 시절에 《어린이》를 읽었다고 한다. 《어린이》는 색동회의 동인이었던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 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시인,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면서 이후 아동 문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실제 윤석중 시인은 글자수가 일정한 박자를 이루도록 하는 자수율로써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동시를 지었고, 정순철 작곡가가 곡을 붙여 동요 새나라의 어린이는, 졸업식 노래, 짝자궁 등을 지었다.

색동회[편집]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동화·모험 탐정소설인《칠칠단의 비밀》[8] 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1928년에는 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인간 관계[편집]

잡지와 신문 등에 기고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시인 이상화(李相和), 소설가 심훈(沈熏), 문학평론가 백기만(白基萬)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김성수(金性洙), 허경호(許鏡湖), 이범석(李範奭) 등의 민족주의자(이중 김성수는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함)뿐 아니라 박헌영(朴憲永), 정지용(鄭芝溶)시인, 삼천리 잡지를 창간하기도 한 김동환(金東煥), 김영랑(金永郞)시인, 강영석(姜永錫), 전영택(田榮澤) 감리교 목사,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소설가, 주요한(朱耀翰)소설가, 홍사용(洪思容)극작가와 박태원(朴泰遠)소설가 등 당시의 사회주의자나 부르주아 관련 계급주의 문인들, 특정 제도권 계파 문인들, 문단과 언론계, 교육계의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며 다양한 인맥을 쌓았다. 민윤식이 쓴 《어린이 인권운동가 방정환》(스타북스,2021년 개정출판)에 의하면,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 독자투고, 동화구연 등으로써 아동문학가들을 찾아서 편집부원으로서 활동하도록 했다. 소파는 사회주의 계열 희곡작가인 송영, 아동문학가인 이원수 등을 발굴하였고, 훗날 친일파로 변절, 우파로 전향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 문인인 팔봉 김기진이 《개벽》에서 편집자로 일하도록 하기도 했다.

요절[편집]

1931년 7월 23일(목요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문제 강연회 및 집필 중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로 갈라진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악화된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現.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의사하고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 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9]

기타[편집]

사후[편집]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195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 되었으며 이후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또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10]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1998년에는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었고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방정환 정신의 구현을 위해 올바른 어린이 문화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방정환의 정신과 가치를 연구하고(방정환연구총서),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사료편찬사업(정본 방정환전집), 그리고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조사연구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책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문고, 미디어 격차해소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미디어꿈나무, 작은물결 장학금, 작은물결책나눔터, 작은물결 어린이 인문도서출판사업 등)를 통해 창의적인 어린이 청소년 공익활동 전개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 하라"고 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이다.

평가[편집]

《신동아》 1967년 5월호에 실린 윤극영의 글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 와사부로(ミワワサブロ)는 방정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11]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방정환의 작품들[편집]

  • 어린이날
  • 형제별
    • 개똥벌레(동요)
  • 어린이 찬미(수필)
  • 칠칠단의 비밀(어린이탐정소설), 동생을 찾아서(어린이 탐정소설). 사계절에서 사계절 아동문고로 펴냄.
  • 그 외 만년셔츠 등 어린이에 연재한 창작동화. 민담 즉, 민중들이 창작하여 입으로 입으로 전한 전래동화를 각색하거나 소파 선생이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창작한 동화들이다. 도서출판 에세이에서 펴냄.

방정환문학상[편집]

같이 보기[편집]

  • 미야자와 겐지
  • 윤석중
  • 어린이
  • 어린이날

외부 링크[편집]

  • 「방정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5-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김영식 《신동아》2008년 5월 26일
  • [어린이날 특집] 소파 방정환 선생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벗이세요, 《소년 한국》, 2004.4.28
  •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의 또 다른 면모, 생각비행
  • 어린이의 영원한 벗, 방정환- 조성운,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Daum 백과)
  • 어린이 사랑, 나라사랑의 길 소파 방정환 선생, 국가보훈처, 훈훈-터(온라인기자단)/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2016. 6. 23

각주[편집]

  1. =이상금, 《사랑의 선물-소파 방정환의 생애》, 한림출판사, 2005년 12월)
  2. 1860년 온양 방씨 대동보
  3. ↑ 가 나 민윤식 (2021). 《어린이 인권운동가 소파 방정환》. 스타북스.
  4. 이재승, 김대조 씀; 이슬기 그림 (2019년). 〈제5장 인생의 길 위에서 뜻을 세우다,〉. 《방정환》 초판. 시공주니어. 71-72,73쪽.
  5. 민윤식 (2021). 〈제2부:청년독립〉. 《어린이 인권운동가 소파 방정환》 초판. 스타북스. 103-104,106-109쪽.
  6. 이재승, 김대조 씀; 이슬기 그림 (2019년). 〈제5장 인생의 길 위에서 뜻을 세우다,〉. 《방정환》 초판. 시공주니어. 71-72,73쪽.
  7. 方定煥 編 「사랑의 선물」, 《경향신문》, 1973.5.5.
  8. 사계절출판사에서 펴냄.
  9. “조선의 어린이를 어떡하나…”가 마지막 말이었다고도 한다. 「빙수를 좋아하던 小波」, 《경향신문》, 1962년 5월 3일 참고.
  10. 方定煥선생銅像 제막, 《경향신문》, 1971.7.23, 1987년에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졌다.
  11. “동화처럼 떠나 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신동아.

2022년 어린이날 제정 몇년?

2022년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1922 5월 1일 어린이날을 처음 제정하였다. 어린이날제정한 핵심은 어린이가 어른의 종속물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몫'을 찾아주자는 운동에서였다.

어린이날 제정 몇년?

1945년 광복 이후에는 5월 5일로 정하여 행사를 하여왔으며, 1961년에 제정, 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하였고,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하였다가 1975년부터는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왜 어린이날은 5월5일?

변경된 어린이날은 1937년까지 유지되다가 일제의 소년단체 해산 명령으로 중단되었다. '어린이날' 행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1946년이다. 이 해 5월 첫째 일요일이 5월 5일이었는데 이때부터 날짜가 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5월 5일을 기념일로 하였다.

몇번째 어린이날?

어린이날
다른이름
국제아동절 (International Children's Day)
장소
전 세계
형태
공휴일 / 비휴일
날짜
5월 5일(대한민국, 일본) 6월 1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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