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외교정책 평가 - gwanghaegun oegyojeongchaeg pyeong-ga

한반도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40여 년 간 외침을 네 차례나 겪었다. 임진왜란(1592)·정유재란(1597)·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이다. 왜란이 끝나고 호란이 일어나기까지 국내외 정세가 불안하던 그때 조선 임금이 광해군이다. 그는 대동법을 실시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나라를 안정시키려 애썼으나 인조반정(1623)으로 왕좌에서 쫓겨났다. 당시 상황은 동북아에 긴장이 고조되고 여야가 대립하는 요즘과 흡사하다. 교과서와 신문은 광해군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글=성시윤 기자 ,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광해군 외교정책 평가 - gwanghaegun oegyojeongchaeg pyeong-ga

조선의 15대 임금. 선조가 사망한 1608년 33세 나이로 즉위해 인조반정(1623)까지 15년 간 조선을 이끌었다. 조선의 다른 임금과 달리 조(祖) 또는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廟號·왕이 죽은 뒤 붙이는 이름)를 받지 못했다. 재임 중 쫓겨났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 재건에 힘썼다. 대표적 정책이 대동법 실시다.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걸 쌀 등으로 대신하게 한 게 대동법의 핵심으로, 호별이 아니라 토지 면적에 비례해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농민 부담은 줄고 지주 부담은 늘었다.

광해군이 조선을 이끌던 기간은 여진족이 후금을 세워 명과 대립하던 때다. 조선은 광해군의 실리 외교 덕에 전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집권 세력은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며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불만스러워 했다. 이들은 결국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임금에 올렸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1641년 숨졌다.

선조, 북인, 서인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고 중립 외교를 펼치며 전란 뒤 조선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왕위에서 밀려났다. 왜일까. 답을 얻기 위해선 선조 때 시작된 붕당정치(정치적 견해가 같은 사림 세력이 뭉친 붕당들 간의 상호 견제 속에 이루어진 정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개국 공신인 훈구파를 멀리하고 사림 세력을 기용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기득권층인 훈구파는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대농장을 소유한 반면 사림은 지방의 중소 지주로서 훈구파의 부정·비리를 비판하는 개혁 세력이었다. 하지만 같은 사림 안에서도 정치 현안을 놓고 입장이 갈렸다.

광해군 외교정책 평가 - gwanghaegun oegyojeongchaeg pyeong-ga
『충렬록』에 실린 김후신의 ‘양수투항도’. 광해군 당시 장수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붕당 정치에 대해선 대부분의 교과서가 비중 있게 설명하고 있다. 사림은 외척(왕비 친척)의 정치 개입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강경한 입장의 동인과 온건한 입장의 서인으로 나뉘었다. 선조 때에 동인과 서인은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동인 가운데서도 서인 처리를 놓고 강경한 입장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또 갈렸다.

광해군은 북인 세력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만큼 북인을 중용했다. 권력에서 배제된 서인 중에선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며 선조의 적자인 영창 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후궁 소실인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의 존재는 잠재적 위협이었다. 역모 의혹이 제기되자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가둔다. 특히 영창대군은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죽는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그리고 폐모살제(廢母殺第· 광해군이 대왕대비인 인목대비를 가두고, 그 아들 영창대군을 죽게 한 사건)를 구실로 인조반정(1623)을 일으켜 광해군과 북인을 내쫓는다.

붕당 정치는 초기엔 공론(公論·사회 일반의 여론)의 확대라는 장점이 부각됐으나 숙종 이후론 부작용이 더 컸다. 미래엔 교과서는 “재야 사림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붕당 상호 간에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권을 놓고 벌이는 권력 다툼의 성격도 있었다”고 기술했다. 천재교육도 “선조 이후 현종 때까진 정치 참여의 폭이 확대되고 공론이 중시되었지만, 숙종 이후론 일당 전제화로 변질돼 집권 세력이 나라의 이익보다는 자기 당의 이익을 앞세웠다”고 지적했다.

광해군 외교정책 평가 - gwanghaegun oegyojeongchaeg pyeong-ga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후금(청)을 적대하다 굴욕적 항복을 하고서 청 태종 요구로 서울 송파구에 세운 삼전도비(위). 대동법 시행세칙을 적은 ‘충청도대동사목’.

교과서와 신문이 말하는 대동법, 중립외교

광해군이 비록 묘호도 받지 못한 쫓겨난 왕이지만 남긴 업적은 적지 않다. 특히 즉위 첫해 시행한 대동법이 대표적이다. 각 교과서는 대동법을 상세히 다루면서 당시 공납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입하는 공납은 국가 수입의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그런데 15세기 후반부터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을 대납하고 농민들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는 방납이 성행하였다. 방납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여러 차례 시정 논의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금성)

“방납이 확대될수록 농민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고,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하는 농민도 증가하였다. 이에 이이, 유성룡 등이 공물로 쌀을 거두자는 수미법을 주장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미래엔)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한 것은 임진왜란으로 농경지가 황폐해진 데다 기근과 재난이 겹쳐 국가 재정이 고갈돼 기존 방식으로는 국가 재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엔 교과서는 “7년에 걸친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경작지가 전쟁 전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 정도로 농촌은 황폐화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한다. 그러면서 “지배층은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줌으로써 양반 지배 체재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고 덧붙였다.

대동법 시행으로 농민 부담은 줄었지만 토지주는 완강히 저항을 했다. 이 때문에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엔 100년이 걸렸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역시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고갈된 조선으로선 불가피했던 측면이 크다. 후금 침략을 받자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은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금성출판사는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광해군은 중립 실리외교를 택했다. 병력을 파견하되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전투에 적극 나서지 않도록 하는 등 후금과 충돌을 피한 것이다. 금성출판사·리베르·지학사 등은 중립 외교와 관련된 광해군의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이중 리베르는 후금과 적극 싸우길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광해군이 “의리는 가상하나 먼 앞날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한번 서로 싸우게 되면 적이 반드시 먼저 우리나라로 향할 것이다. 정세를 살펴 잘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적고 있다. 광해군 지시로 전투에 나선 도원수 강홍립은 전투 초기에 후금에 항복하면서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본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느냐. 지금 여기 들어온 것은 부득이한 것임을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느냐”며 휴전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서인은 중립 외교에 비판적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쓰여진 인조실록에선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 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예의의 나라인 삼한이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비상교육).

인조와 서인은 친명배금(親明排金), 즉 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후금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범했고, 조선은 후금과 굴욕적 군신관계를 맺는 수모를 겪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어떻게 평가할까. 대체로 긍정적이다. “조선은 난처한 와중에 그나마 광해군의 현명한 실리외교로 버틴다. 그러나 인조대에 들어 힘도 없는 주제에 후금을 거스르다 정묘호란을 당하고,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참혹한 재앙을 맞는다.” <중앙일보 2011년 7월 22일자 30면 "중국,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

하지만 광해군이 신하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인조반정을 자초했던 점에 대해선 “나름대로 부강한 나라를 세워보고자 동분서주했으나 신하들의 의견수렴에 미흡했던 광해군의 리더십도 독단적인 의사결정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앙일보 2014년 1월 21일 11면 "탐욕·독단 경계해야 존경 받는 리더 된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광해군은 다양한 평가를 받는 임금이다. 천재교육도 광해군에 대해 “일부 북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정치적 분열을 격화시키고, 무리한 궁궐 공사로 백성의 생활을 어렵게 한 점 등도 고려해야 균형잡힌 평가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광해군 외교정책 평가 - gwanghaegun oegyojeongchaeg pyeong-ga
QR코드를 찍으면 광해군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조선 시대 쿠데타로 두 명의 임금이 왕위에서 물러났다. 연산군(재위 1494~1506)과 광해군(재위 1608~1623)이다. 물론 단종과 고종도 강제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하지만 단종은 12세에 즉위해서 제대로 자신의 정치를 해보지도 못했고, 고종은 열강의 각축 속에 일본의 강압에 물러났기에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은 성인으로 즉위해서 각각 12년과 15년을 재위했다. 즉 이들의 정치적 말로에는, 남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자기 몫의 정치적 책임이 있다.

광해군 외교정책 평가 - gwanghaegun oegyojeongchaeg pyeong-ga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반정’으로 물러났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지만, 일반에는 물론이고 조선 시대 전공자들에게도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한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연산군은 일종의 ‘악한’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 그는 임금으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그 행동이 시종 부적절했다. 광해군은 이와 다르다. 그에 대해 긍정적인 연구자들도 있고, 부정적인 연구자들도 있다. 각각에는 상당히 수긍할 만한 근거도 있다. 조선 시대 27인 왕들 중에서 이렇게 주의가 집중되고 또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 임금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상반된 입장이 조만간 하나로 정리될 것 같지도 않다.

광해군에게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쪽에서는 주로 그의 대외정책 즉 명나라와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큰 지지 근거가 될 듯하다. 광해군은 확실히 재위 중에 명나라와 후금 간 갈등에 말려들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7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참혹했던 전쟁을 경험한 광해군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광해군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측에서는 주로 그의 국내 정책의 문제점에 주목한다. 확실히 그의 국내 정치는 우유부단했고, ‘국내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임진왜란 직후였다. 서둘러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가 그런 일들에 집중했던 모습을 보기 어렵다. 흔히 그가 경기도에 최초의 대동법에 해당하는 정책을 실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것은 이원익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집요한 노력으로 이루어졌고, 더 크게는 경기도 백성들의 요구로 유지될 수 있었다.

광해군이 재위 기간에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들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가 무리하게 밀어붙인 많은 정치적 사건들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불안한 왕권은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이 부왕(父王) 선조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마도 선조가 몇 년 더 살았다면 광해군은 세자에서 폐해지고 말았을지 모른다. 이미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자기 스스로 세자로 지명했던 아들 광해군을 정치적 경쟁자로 대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의 권력 강화에 나섰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대단히 현명하지 못했다. 그는 정치적 숙청과 살육을 통한 권력 강화 노력 대신에 민생안정에 힘써야 했다. 함께 임진왜란을 헤쳐온 이원익이나 이항복 같은 인물들이 주장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정치적 오판이 반정으로 이어졌다.

광해군 정권이 정치적 금도를 넘은 일들은 여러 개이지만 그중 하나가 이항복이나 이원익을 처리한 방식이다. 두 사람은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임진왜란을 헤쳐온 사람들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광해군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일탈을 비판하자 두 사람을 조정에서 축출했다. 이항복은 중풍 맞은 몸으로 1월에 귀양을 떠나, 천 리를 걸어 귀양지 북청에 도착해서 사망했다. 그에 앞서 이원익 역시 69세 나이에 강원도 홍천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이들의 행로를 지켜보면서 많은 실력 있고 양심적인 관리와 지식인들은 광해군에게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잃고서도 왕권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