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집안 특징 - yangban jib-an teugjing

15년 해외생활 후에 2008년에 귀국해 몇 번의  설을 맞았다. 불과 한 달 전에도 설을 맞아 처가에 다녀왔다.그동안 제대로 뵙지 못했던 친척 어르신들도 이제는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두루찾아뵈었다. 양쪽 사촌들도 그럭저럭 만나보았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만남을 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불현듯 "양반가문의 설 풍경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다가, 곧 양반과 노비라는 주제로 생각이 옮아갔다.

현재 한국에 있는 족보를 보면, 거의 대개 양반 집안임을 내세운다. 제법 가풍이 있는 중인(中人) 집안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외없이 양반족보를 내민다. 또한 자기는 무슨 무슨 씨 몇 대 손이라는 말을 주위에 자주 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본다. 김해김씨니, 한양조씨니, 안동권씨니... 일일이 부르기에도 귀찮은 수많은 명문가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뿐인가 자기는 전주이씨 왕손이라고 좀 더 어깨를 으쓱하는 경우도 있다. 더 가관인 것은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도 "양반의 후예"임을 자랑으로 받아준다는 거다. 그렇다. 이땅은 양반의 나라였고, 아직도 양반의 나라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에 이르도록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조선 전체 인구의 30% 이상은 노비였다. 최근에 노비를 노예(slave)로 볼 것인가, 아니면 농노(serf)로 볼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남에게 법적으로 소유되어 증여와 양도와 매매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노비가 노예(slave)가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는 학자는 사실 아무도 없다. [참고: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술자리 사석에서는 대개 노예로 인정한다. ㅋㅋ]

아무튼, 18세기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를 대략 1000 만에서 1200 만으로 본다면, 이 땅의 인구 가운데 얼추 300-400만이 노비였다는 얘기다. 더 실감나게 말하자면, 인구 3명 중에 최소한 한 명은 노비였다는 얘기다. 좀 더 극적으로 느껴보자면, 현재 당신 눈에 보이는 아무나 세 명을 찍어 보시라. 그러면 당신을 포함하여 그 세 명 중에서 적어도 한 명은 조상이 노비였다는 얘기다. 길을 걸으며, 운전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며 주위를 그냥 한 번 둘러보시라. 무작위로 눈에 들어오는 아무 세 명이나 그 중 한 명은 노비의 후예라는 얘기다. 그렇다. 이땅은 노비의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말이다. 왜 노비의 땅이 아닐까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이땅에서 자기 조상이 예전에 노비였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참고: 어떤 꽤 유명한 문인 서정주가 자기 아버지가 머슴이었음을 고백한 적은 있다. 그러나 노비와 머슴은 확연히 다르다.]

어쨌든,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과거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고 구속했던 처절히도 아픈 역사를 이제는 깜끔하게 청산했다는 건가 한국은 그래서 현재 노비 문제 관련 과거 청산 문제가 전혀 없다는 건가 한국은 정말 그렇게도 자랑스러운 나라인가아니다. 만만의 콩떡이다.

노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법적인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사회적으로 노비가 정말 없어지기 시작한 건 한일합방(1910) 때부터다. 1910년의 늦은 여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자, 수많은 양반들은 통탄해 했다. 그러나 그 중 상당수는 통탄의 이유가 나라의 멸망이 아니라, 길거리에 나가보니 과거에 노비하던 놈들이 양반에게 야자까며 반말하는 새로운 풍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래서 말세라며 탄식했다. 그런 양반들이 나라의 멸망을 통탄해 하면서 자결할 리 만무다. 과연 평소에 충효를 그렇게 부르짖던 양반지식인 가운데 몇 프로가 자결했을까

어쨌든 근대의 소용돌이를 지나며, 이땅에서 노비는 사라졌다. 정말이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과거 그렇게 오래도록 수많은 노비를 소유했던 명문 양반 문중들 중에서 어느 집안도 노비를 소유했던 (인간을 물건으로 소유했던) 과거에 대해 최소한의 유감을 표명한 곳이 없다. 그런 걸 표명하기는커녕 아직도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를 마음에 꼭 담고 산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저 뒷마을 아무개는 돈 좀 벌었다고 요새 거들먹거리는데, 걔는 예전에 우리 노비였어..."

"저무개 네 집은 서자 집안이니, 그 집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거라..."

"땅 팔고 소 팔아 서울에 유학시켰더니, 그래 하고 많은 여대생 중에 왜 하필 산너머 마을 마름집 딸래미냐내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이 결혼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가혹한 노비제를 비교적 최근까지(1863) 유지했던 미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에 단적으로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미국에는 갖가지 약자보호법이라는 게 줄줄이 사탕처럼 많다. 이른바 Affirmative Action Law 라는 게 바로 그거다. 그 중에는 과거 노비의 후손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도 있다. 한때 그런 특혜가 평등을 강조한 미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반발도 줄기차게 있었지만, 그래서 헌법소원까지 감행한( ) 극우보수들도 적지 않았지만, 비인간적 대우로 학대받은 노예의 후손들에게 지금 사회가 특혜를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이라는 대법원 판사들의 법 해석 때문에 번번이 깨졌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런 게 바로 대법원의 권위라는 거다.

'대한민국'에는 그런 법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누구도 내가 노비의 후손이라고 당당히 말하며 나서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근대화 과정에서 신분 세탁이 '평화적으로' 가장 잘 된 나라가 아마 한국일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면도 무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땅에서는 진정한 역사 청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분 세탁이 잘 된 것처럼만 보일 뿐, 진정한 청산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얘기다. 지방에 한 번이라도 답사를 가 본 이라면, 금방 알 수 있는 이 땅의 엄연한, 그리고 엄혹한 현실이다.

장장 500년 조선왕조가 망했으면, 당연히 누군가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하다못해 프로야구 한 경기를 져도, 경기 후에 패인을 분석하고 책임을 따지는데, 한국문명 자체를 이민족에게 들어먹었음에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참으로 희한한 나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망국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노비가 질까농민이 질까여성이 질까남사당패가 질까어린이들이 질까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 책임은 바로 조선사회를 장장 500년 동안 독점적으로 지배한 골수 유학자 양반이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양반 평가는 어떤가선비 평가는 어떤가유교 평가는 어떤가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고 압제하고 소유하는 노예제도가 나쁜 거라고 지금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는다. 사과도 없다. 책임추궁조차 하는 이가 없으니, 사과할 턱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아무리 인간평등을 외쳐 보아야 무슨 실효가 정녕 있을까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하다.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집단으로 불리는 집단 중 하나가 바로 남침례교단(Southern Baptists)인데, 그 교단은 과거 노예제에 대하여 사과 성명 내기를 끝까지 거부한 교단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그런 극우 종교단체조차도 10년쯤 전에 마침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래서 요즘 미국에서 인종문제는 여전해도, 적어도 과거의 신분제 문제는 거의 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비슷한 얘기조차 전혀 들어본 바 없다.

한국이야말로 그런 성명서 발표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노비의 후예라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무슨 해꼬지 당할 염려도 없고, 무슨 배상 소송에 휘말릴 일도 없고... 그러니 그런 성명 발표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그 뿐인가그런 성명 발표하면 오히려 자기 문중 이름이 언론 뉴스에 나오면서 유명해질 테니, 얼마나 득()이 많겠는가

그러나 어느 문중도 말이 없다. 음울한 침묵만 벌써 근대 100년이다. 김해 김씨도, 안동 권씨도, 경주 최씨도, 문화 유씨도, 청주 한씨도, 전주 이씨도, 인동 장씨도.... 어느 누구도 말이 없다. 그러면서 틈만 나면 자기네가 과거에 엄청난 양반가였음만 자랑한다. 웃긴다.

이런 나라에서는 진정한 발전이 힘들다. 진정한 변화가 굼벵이다. 움직임이 굼벵이니, 이 초고속 21세기 사회에서 미래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번 설에 고향의 양반가를 찾은 양반의 후예들이여...

일 년 후에도 또 찾을 후예들이여...

당신들은 이런 문제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그러기는커녕, 당신은 한때 혹시라도 ".. 차라리 한 200년쯤 전에 태어났으면, 편하게 놀고 먹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무엇이 진정한 가문의 영광일까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진정한 영광 아닐까

무엇이 진정한 수치일까잘못을 끝까지 감추는 게 진정한 부끄러움 아닐까

21세기 벽두의 한국사회에 참으로 절실한 게 바로 이런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 한국사회의 위기다. 여러 면에서 말이다. 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