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미국 경제 - 1cha segyedaejeon migug gyeongje

[현대] 국가의 완성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변화 - 경제 공황, 국제연맹, 바이마르 공화국, 파시즘

제1차 세계 대전의 끝과 세계 경제 중심지의 변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미국은 실제적으로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고

전쟁을 하고 있는 다른 여러 나라에 전쟁 무기 등을 수출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독일의 U-보트가 연합군의 물자 보급로를 막기 위해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상선들이 공격 받게 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중립적 입장을 포기하고 참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미국의 공업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은 힘을 얻어 독일군을 무찔렀으며,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세계의 중심은 유럽으로 부터 미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프랑과 파운드의 가치는 떨어지고 독일의 마르크는 거의 가치를 잃었다.

반면 미국은 군수 물자의 수출 등으로 호황을 누려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국의 호황과 경제 공황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일찍이 없었던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뉴욕에서는 고층빌딩이 세워지고, 기계화로 생산이 향상되었다.

자동차의 생산량도 급증하고, 할부 제도의 실시는 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신제품만 나오면 불티나게 팔리던 자동차와 전기 제품들도 과잉 공급 되면서 제고가 쌓여가고

농촌에서도 농작물이 과잉 생산되면서 농작물의 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됨으로 해서,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은 좁아져만 갔다.

1929년 10월 24일, 이제까지 치솟던 주가는 큰 폭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여겼지만 주가 폭락은 한없이 내려만 갔다.

이리하여 주가의 대폭락으로 인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공황이 일어났고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미국의 공황은 세계 경제를 대혼란 속으로 몰아 넣었다.

대공황이 확산되자 전 세계에서 도산하는 회사가 속출하였고, 거리는 실업자들로 넘쳤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세계 경제 공황이 오기전에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가격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고 가격의 변동은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게 한다는 이론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정부가 경제에 신경쓰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공황을 통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고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고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32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그는 뉴딜 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경제를 조절하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미국의 은행중 5분의 1이 문을 닫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재무상태가 부실한 200여개의 은행을 폐쇄하고 예금자의 돈은 새로이 발족한

연방 예금보증공사에서 찾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또 루스벨트는 농산물의 가격 하락과 과잉 생산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나누어 주고 생산량을 하락시키면

농작물의 값이 상승해서 농민들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댐을 건설하여 홍수로 인한 피해를 막고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1935년 4월, 의회의 법제화로 창설된 WPA(건설공사 진행국)는 홍수를 막고

중서부 지역 경작지의 극심한 토양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댐을 건설했다.

또한 1920년부터 금주법이 실시되어 술을 거래하는 갱과

이를 단속하는 경찰사이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1933년 루즈벨트에 의해 폐지되었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적자 예산 때문에 공화당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 국민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다.

 결국 뉴딜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 미국의 경제는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나타냈다.

뉴딜 정책은 불황에 시달린 다른 나라들이 절망 속에서 전체주의 체제로 돌아서고 있을 때

미국을 자유로운 국가로 지켜 주었고, 현대 사회 형성에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제 연맹의 탄생,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 준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국제 연맹이 탄생되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들어졌으나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맹하지 못했다.

폐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도 빠지게 되었다.

이 결과 새 국제 조약 기구인 국제 연맹은 각국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지 못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군축 회의를 할 때는 군사 시설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뒷전으로는 서로 다투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이 군함을 만들고 해군력을 강화했다.

1921년 미국 대통령 하딩은 일본의 군비 확장을 통한 태평양 지역 진출에 대하여 경계하기 시작하였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중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일본 등 9개국이 참가한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여,

각국의 해군 군비 제한 문제와 일본의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진출 관련 문제를 토의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과 전후 배상 문제

독일은 패전 뒤 1918년 11월, 독일은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을 선포하였다. 

제헌 의회가 바이마르에서 소집되었으며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민주적 헌법을 제정하고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18개 연방으로 구성되는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패전국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919년 바르사유 조약안이 바이마르 공화국 대표들에게 제시되었다.

그들은 연합국 측이 휴전 조약과 윌슨의 14개 조항을 기초로 하여

강화 조약 문안을 작성할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1921년 4월, 독일이 물어야 할 전쟁 배상금은 1,320억 마르크였으나

1년뒤 독일은 10억 마르크를 물어 주고는 폭싹 주저앉았다.

독일의 루르 지방은 많은 탄광이 있어 철강 공업을 중심으로 하여 기계 공업과 금속 공업 등이

발달한 유럽 최대의 공업 지대였다.

 1923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피해가 컸던 프랑스는 역시 피해국인 벨기에와 함께

군대를 보내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했다.

이에 루르 지방에서는 대규모 파업이 시작되었다.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에 실업자가 무더기로 늘어 독일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독일이 전후 배상금 지불에 어려움을 겪자 독일의 배상 기간을 연장해 주고

미국의 대부 원조를 통해 독일 재정을 개편하는 '도스 플랜'을 실시했다.

이 계획에 의해 독일이 배상해야할 1차 대전의 배상금은 무려 92년에 걸쳐 갚게 되었다.

1차대전 배상금 92년만에 다 갚아

독일이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부과된 전쟁배상금의 지불을 독일 통일 20주년에 맞춰 92년 만에 완료하게 된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1차 세계대전 전쟁배상금 잔여분 지불을 위해 발행된 채권이

독일 통일 20주년 기념일인 다음달 3일로 만기가 도래한다고 28일 밝혔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전쟁배상금 잔여분 7,000만유로(9,400만달러)를 치르고 배상 책임을 모두 완수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92년 만이다.

전쟁배상금은 1921년 약 66억 파운드로 확정됐으나 독일의 지불 능력에 대한 회의론 속에

연합국들은 1924년 '도스 플랜'과 1929년 '영 플랜' 등을 통해 배상금 규모를 조정했다.

연합국들은 1953년 독일과 새로운 협정을 체결해 일부 전쟁배상금은 독일이 통일되기까지는

지불하지 않도록 규정, 이에 해당하는 배상금 잔여분은 통독 이후 갚기 시작했다.

- 서울 경제, 2010.9.29 -

1925년 프랑스 군은 루트지방에서 철수 했으며,

그해 12월 독일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유럽의 평화를 위해 로카르노 조약을 맺었다.

또한 1926년에는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과 국제 연맹에의 가입으로 독일의 국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차겸 트랙터]

정치.사회적 불안에 의한 파시즘(전체주의)의 등장

유럽은 18세기 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과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사회적 불안 등

위기요인의 격화에 의해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어 가고 있었으며

기존 정치세력이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해 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파시즘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