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야구 선수 명단 - gogyoyagu seonsu myeongdan

▎호남야구는 한국야구의 ‘마르지 않는 샘물’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좋은 선수를 찾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2013 고교야구 주말리그 개막일인 3월 16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성남고와 휘문고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고 있다.

지난해 프로야구는 700만 관중 돌파에 성공했다. 야구계는 늘어난 관중만큼이나 유소년 야구선수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사정은 다르다. 현장의 프로구단 관계자들은 “해가 갈수록 야구인재가 준다”고 한다. “특히나 한국야구의 ‘마르지 않는 샘물’ 역할을 하던 호남야구의 젖줄이 끊기고 있다”고 그들은 우려한다. 한때 스타 야구선수들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했던 호남 야구는 왜 몰락하고 있나?

“허허 참, 프로야구 순위가 어쩌면 이렇게 고교야구 순위랑 똑같은지 모르겠네.” 5월 13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스포츠신문을 읽던 모 구단 스카우트는 연방 혀를 찼다. 이날 마산구장에선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스카우트는 고교 유망주를 물색할 요량으로 이틀 전부터 마산구장에 출근하던 차였다.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기자에게 “단순한 우연인지, 예정된 필연인지 모르겠지만”이란 전제를 달고서 “올 시즌 프로야구 상·하위권 팀들과 고교야구 상·하위권 팀들의 연고지가 거의 일치한다”고 말했다.

당시 프로야구 정규 시즌 1위는 넥센이었다. 이어 삼성이 2위, 두산 3위, KIA 4위, 롯데 5위, SK 6위, LG 7위, 한화 8위, 신생구단 NC가 9위였다. 상위 5개 팀의 연고지를 보자면 넥센·두산은 서울, 삼성은 대구, KIA는 광주, 롯데는 부산이었다. 반면 하위 4개 팀의 연고지는 SK가 인천, LG가 서울, 한화가 대전, NC가 창원이었다.

그렇다면 고교야구 순위는 어떻게 될까? 이 스카우트는 “황금사자기 대회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전력만 본다면 전국 고교야구 랭킹 1위 지역은 서울, 2위가 대구, 3위가 부산”이라며 “광주·인천·대전·창원은 고교야구팀들의 전력도 약하지만, 눈에 띄는 유망주도 서울·대구·부산에 비해 적다”고 설명했다.

아마추어 야구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야구라>의 배지헌 기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배 기자는 “올해는 서울·대구·부산지역 고교야구팀의 강세가 눈에 띈다”며 “반면 호남·충청·인천지역의 고교야구팀은 흉작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야구는 지역 고교야구팀이 주요 선수 공급처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해태(KIA의 전신)가 한국시리즈 우승 9회를 차지했던 것도 호남지역에 광주일고·군산상고·광주상고(현 광주 동성고)·광주 진흥고 등 야구 명문고가 즐비했던 까닭이다. 이들 고교에선 해마다 많은 유망주를 배출했고, 해태는 이 선수들을 영입해 강팀의 면모를 유지했다.

2000년 이후 프로팀과 연고지 고교의 연관성 줄어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경북지역엔 경북고·대구고·대구상고(현 대구 상원고)·포철공고 등이 있어 삼성은 1982년부터 현재까지 31년 동안 ‘스타 군단’의 명맥을 유지해왔다.

어쩌면 올 시즌 프로야구 순위와 고교야구 지역 랭킹이 일치한 것도 이러한 관계 때문인지 모른다. 서울·대구·부산에 야구 유망주가 많기에 세 곳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팀들이 이들 유망주를 해마다 수혈 받아 ‘강팀’이 됐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카우트 경력 25년 차의 LG 김현홍 스카우트 부장은 “양자의 연관성은 크지 않다”고 단언한다. “각 팀 주전선수의 출신지역과 출신고를 따져보면 알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9개 구단의 주요 선수들을 살펴보면 연고지 고교 출신은 의외로 적다. 1위 넥센만 해도 1군 등록선수 25인 가운데 서울지역 고교 출신은 8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넥센이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했던 서울지역 고교 출신 선수는 문성현·김영민·강윤구·송신영·허도환 등 5명뿐이다.

삼성도 다르지 않다. 1군 주전선수 가운데 연고지 대구지역 고교 출신은 7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선수는 죄다 경남·호남·서울지역 고교 출신들이다. 이는 다른 팀도 같아 주전선수 가운데 적게는 60%, 많게는 80%가 다른 연고지 고교 출신이다.

김 부장은 “과거만 해도 연고지 고교가 강하면 프로팀도 강팀이 되게 마련이었다”며 “1980년대까지 각 구단의 주전선수는 90% 이상이 연고지 고교 출신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신인 지명회의 제도가 바뀌며 프로팀과 연고지 고교의 연관성이 크게 줄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6년까지 1차 지명 시 각 구단이 연고지 고교 출신 선수들을 지명할 수 있는 한도가 10명이었다. 광주·대구·부산·서울 등 연고지에 명문 고교팀이 많은 프로팀은 지역 유망주를 풍족하게 수혈할 수 있었다. 반면 인천·대전을 기반으로 하는 태평양·빙그레(한화의 전신)는 지역 고교야구팀이 원체 약하고, 적어 큰 손해를 봤다. 당시 성적만 봐도 해태·롯데·OB·삼성은 늘 상위권이었고, 태평양과 빙그레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987년부터 1차 지명 한도를 1명으로 줄인 것도 전력 평준화 차원에서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KBO는 같은 해 ‘고졸우선지명’이란 제도를 만들어 각 팀이 연고 지역 내 고교 졸업반 선수를 3명까지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1차 지명 한도를 줄이자 해태·삼성·롯데 등이 강하게 반발한 통에 이를 달래려는 취지로 만든 제도였다. 그러나 애초 바랐던 전력 평준화가 이뤄지지 않자 KBO는 다시 제도를 고쳤고, 1차 지명 제도만 남겨둔 채 2000년부터 고졸우선지명제도를 폐지했다.

사실상 구단이 연고지 고교 선수를 마음 놓고 지명할 기회가 1차 지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여기다 2010년부턴 지역 연고 선수를 지명하는 마지막 기회였던 1차 지명 제도가 사라지고, 전년도 성적 역순에 따라 지역 연고와 상관없이 구단이 뽑고 싶은 선수를 선발하는 ‘전면 드래프트’가 시행되며 프로팀과 연고지 고교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사실이다. 1차 지명 제도가 마지막으로 시행된 2009년, 8개 구단은 연고지 고교 출신 신인을 1명씩 선택했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LG는 1차 지명 선수로 경기고 유격수 오지환, 넥센은 장충고 좌완 강윤구, 삼성은 경북고 내야수 김상수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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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드래프트’는 프로팀과 연고지 고교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기업이 없던 호남지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2010년 8월 16일 열린 2011 신인선수 지명회의에서 1차로 지명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두산 충암고 최현진, 한화 광주제일고 유창식, 삼성 경남고 신창민, KIA 덕수고 한승혁, LG 휘문고 임찬규, 롯데 중앙대 김명성, SK 경남고 서진용, 넥센 동의대 윤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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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야구는 서울·영남과의 3강 구도에서 탈락하는 듯하다. 2010년 5월 27일 오후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제65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제물포고를 3대 0으로 꺾고 우승한 경남고 선수들이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한국야구의 중심, 호남야구의 파란만장한 역사

하지만 2010년 전면 드래프트가 시행되자 프로팀들은 연고지 선수에 국한하지 않고, 실력이 좋은 유망주를 가장 먼저 선택했다.

2009년 꼴찌를 차지한 덕분에 2010년 신인지명회의에서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행사한 LG는 연고지 고교 출신을 배제하고, 천안북일고-고려대 출신의 사이드암 신정락을 택했다.

넥센도 서울 고교 출신이 아닌 광주 진흥고 좌완 김정훈을 선택했다. 삼성 역시 1라운드 지명자는 배명고의 임진우였고, 두산은 순천 효천고의 좌완 장민익, SK는 광주진흥고-고려대를 졸업한 문광은을 지명했다.

김 부장은 “1982년부터 1999년까지 프로야구를 주름잡았던 해태·롯데가 2000년대 들어 갑자기 약팀이 된 것도 신인지명제도가 바뀌며 ‘고졸우선지명제도’가 폐지된 2000년부터”라며 “SK·현대(넥센의 전신)는 되레 연고지에 국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수를 뽑으며 강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고지를 우선한 신인지명이 점점 사라지고, 전면 드래프트가 도입되며 팀간 전력 차는 눈에 띄게 줄었다. 많은 야구인은 “과거처럼 KIA·롯데·삼성이 1차 지명 시 10명이나 되는 연고지 고교출신 선수들을 영입했다면 인천 연고지의 SK가 지금처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제도의 변천이 전력 평준화에 도움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늘은 있다. 바로 호남 아마추어 야구의 약세다. 과거 한국야구는 호남·영남·서울지역이 ‘마르지 않는 샘물’ 역할을 해왔다. 세 지역이 삼각대 역할을 했기에 한국 프로야구는 지속적으로 우수자원을 수혈받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호남은 야구역사와 전통이 깊은 지역이다.

호남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한 건 1920년. 군산의 구암리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이 그해 7월 5일 군산소학교 운동장에서 일본인으로 구성된 군산은행팀과 친선 경기를 벌인 게 호남에서 열린 최초의 야구경기였다. 이후 호남엔 많은 야구팀이 생겨났고, 1930년엔 당시로선 거액이던 7000원을 들여 광주에 야구전용구장이 세워졌다. 1931년엔 고창고보가 고시엔대회(전일본고교 야구선수권대회) 예선전에 참가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호남야구 역시 다른 지역처럼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나 일제의 물자수탈이 심했던 목포는 일본인들이 상당수 거주하며 그들로부터 야구룰과 장비를 전수받아 ‘호남야구의 메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내심 원했던 ‘야구를 통한 내선일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되레 야구는 반일의 상징이 됐다. 1921년 전주 신흥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신흥학교와 주한 일본인이 주축이 된 전주체육회의 경기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 경기를 보려고 신흥학교 운동장엔 1000명이 넘는 관중이 몰렸다. 그들은 대놓고 신흥학교를 응원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신흥학교의 승리를 염원했다. 결국 신흥학교가 22대 16으로 전주체육회를 꺾자 운동장은 축제를 넘어 반일의 장이 됐다. 일제의 강압적 지배에 억눌렸던 민심이 야구를 통해 한순간에 폭발하자 일본 군경은 운동장으로 급히 출동해 관중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호남야구가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건 1945년 해방 이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1949년 6월에 열린 청룡기 쟁탈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부터였다. 당시 광주서중은 전남 대표로 청룡기에 참가했지만, 광주서중을 주목하는 야구인은 거의 없었다. 광주가 야구 변방이었던 데다 당시는 장태영이 버틴 경남중이 원체 강해 광주서중은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최사인 자유신문사의 ‘우승팀 알아맞히기’ 현상 모에서도 총 1311통의 엽서 가운데 광주서중 우승을 점친 엽서는 단 8통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주서중은 경남중과의 결승전에서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대 1 승리를 거뒀다. 가뜩이나 광주서중이 9회초까지 0대 1로 뒤지다 9회 말 극적인 동점을 만들고, 연장 11회 끝내기 안타로 승리한 대역전극이라, 세간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 광주서중의 우승은 남야구 발전에 기폭제가 됐다. 광주서중을 우승으로 이끈 나무꾼 출신의 김양중이 지역 스타로 떠오르며 야구를 하겠다는 지역 아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72년 7월에 열린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전은 호남야구가 명실공히 한국야구의 중심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당시 군산상고는 ‘경남의 야구 명문’ 부산고와 일전을 치렀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동대문야구장엔 두 팀의 경기를 보려고 2만2000여 명의 구름관중이 몰렸다. 8회까지 군산상고는 부산고에 1대 4로 뒤졌다. 현장에 있던 야구인과 관중은 내심 부산고의 우승을 예상했다. 하지만, 군산상고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9회말 군산상고는 만루에서 김일권이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1점을 따라붙고서 양기탁의 동점 2타점 적시타에 이어 김준환이 회심의 끝내기 좌전적시타를 치며 대역전에 성공했다. 23년 전 광주서중의 대역전극을 군산상고가 다시 한번 재현한 것이었다. 지금은 원광대 감독으로 후진양성에 애쓰는 김준환은 “당시 군산상고의 우승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며 “첫째는 광주에 국한된 호남야구가 전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고, 둘째는 김양중 선생밖에 없던 호남야구 스타가 이후 대거 늘어나는 기회가 됐다”고 회상했다.

실제 군산상고 우승을 이끌었던 김준환·김봉연은 지금의 아이돌 스타 못지 않은 큰 인기를 끌며 많은 유소년 야구선수의 롤모델이 됐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호남야구는 해태로 결집했다. 광주일고·광주상고·광주진흥고·군산상고·전주고 출신 선수들이 뭉친 해태는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9번이나 챔피언 반지를 끼며 명실공히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우뚝 선다.

해태엔 스타선수도 많아 김봉연·김준환·김종모·김성한·이순철·선동열·이강철·조계현·이종범·홍현우·고 김상진·임창용 등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 선수들은 모두 호남 출신들로 해태의 전성시대는 곧 호남야구의 활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KIA의 에이스로 활약 중인 김진우는 “어린 시절 해태 선배들의 경기를 보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또래 아이가 많았다”며 “그땐 광주에서 야구하는 우릴 보고 서울과 남지역 유소년 야구선수들이 무척 부러워했다”고 회상했다. 그 즈음엔 야구선수로 대성하려고 광주지역 고교로 진학하는 서울의 중학교 선수도 많았다.

한때는 서울 출신이 광주로 야구유학 오기도

호남야구는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시발점은 선동열과 이종범이었다. 광주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해태의 에이스로 활약하던 선동열은 1996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국보급 투수’로 불렸던 선동열의 국외 진출은 ‘한국 프로출신’으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1962년 백인천이 일본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에 입단한 바 있지만, 당시 백인천은 경동고를 졸업한 18살의 신인선수였고, 1993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 역시 한양대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경우였다. 1997년엔 선동열의 해태 동료이자 광주일고 후배인 이종범이 주니치에 입단하며 호남야구의 국외 진출은 가속화한다.

호남야구는 미국 진출에도 적극적이었다. 1998년 광주일고-인하대를 졸업한 서재응이 당시로선 파격적인 135만 달러를 받고 뉴욕 메츠에 입단했고, 정확히 1년 후 광주일고-성균관대 출신의 김병현이 225만 달러를 받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을 입었다. 여기다 같은 해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최희섭이 120만 달러에 시카고 컵스와 계약하며 야구계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광주일고에 다녀야 한다’는 속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도 연이은 광주일고 출신의 빅리그행이 신기했는지“서재응·김병현·최희섭은 모두 같은 고교 출신”이라며 “광주는 미국의 LA와 뉴욕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야구도시”라고 설명했다.

국내 프로리그에선 해태가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국외에선 광주일고 출신 야구선수들이 맹활약하며 호남야구는 사상 최고의 주가를 올린다. 하지만, 2001년 8월 해태가 KIA로 인수되고, ‘고졸우선지명’이 폐지되면서 호남야구는 서서히 하향세를타기 시작한다. 2010년부터 시행한 전면 드래프트는 호남야구 하락세의 결정타로 작용했다.

“호남이 유망주 텃밭이었다는 건 다 옛날 일이에요. 요즘 호남야구를 보면 흉작도 그런 흉작이 없어요. 호남지역 고교를 눈 씻고 찾아봐도 좋은 선수를 발견하기 어렵다니까요.” 5월 13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만난 한 스카우트는 몇 번이고 “지금의 호남야구를 과거와 비교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적자면 호남야구는 영남과 서울에 밀린 지 오래다.

물론 올 시즌을 앞두고 KBO가 발표한 1군 등록선수 명단을 보면 이 말엔 다소 어폐가 있다. KBO의 자료에 따르면 개막전 1군 등록선수 234명 가운데 호남 고교 출신은 39명으로 19%나 된다. 코칭스태프 비율은 더해 9개 구단 감독 가운데 3명(KIA 선동열·LG 김기태·넥센 염경엽)이 광주일고 출신이고, 무려 14명의 코치가 호남 출신이다. 하지만, 이 스카우트는 역시 “그건 과거의 일이고, 최근 10년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일까? 2002∼2012년까지 10년간 신인지명회의를 통해 프로에 입문한 선수는 912명이다. 이 가운데 5월 13일 기준 1군에서 뛰는 호남 고교 출신 선수는 24명이다. 고작 2.6%밖에 되지 않는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신인 흉작이던 지난해를 제외하고 2010·2011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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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직 메이저리거 서재응 선수(뉴욕 메츠)가 2004년 1월 16일 자신의 모교인 광주화정초등학교를 찾아 ‘1일 야구교실’을 갖고 후배들 앞에서 투구폼을 선보이고 있다. 2 호남의 전통 강호 광주일고의 위세는 예전만 못하다. 선동렬·서재응·최희섭·김병현

최근 10년간 호남야구 급격히 쇠락세

한화 정영기 스카우트 팀장은 호남야구의 하락세를 세 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호남은 축구보단 야구 열기가 뜨거웠다. 해태가 잘하면서 야구팬도 많았다. 아들이 운동에 소질이 있다 싶으면 야구부로 데려와 테스트를 보는 아버지가 부지기수였다. 이종범·김진우·한기주가 다 그런 케이스다. 하지만, 해태가 KIA로 인수되고 한동안 팀 성적이 좋지 않으면서 호남야구 열기가 많이 식었다. 대신 축구선수 박지성이 전남 고흥 출신임이 알려지면서 5∼6년 전부턴 야구보다 축구를 하는 호남지역 아이가 많아졌다.

둘째는 프로구단의 지원 부족이다. 1차 지명 제도가 유지됐을 때만 해도 해태는 부족한 살림에도 자기 팀에 유망주를 데려가려고 지역 야구부 관리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점점 연고지 지명이 줄고, 2010년부터 전면 드래프트가 시행되며 지역 야구부지원이 격감했다. KIA뿐만 아니라 다른 팀도 사정은 비슷했다.

‘우리 팀에 올 선수도 아닌데 큰돈 써가며 지역 야구부를 관리할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이 우세한 게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 야구부 재정이 시원찮은 호남지역 중·고교 야구부로선 KIA의 지원이 끊기면서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을 거다. 셋째는 호남 중학교 유망주의 연이은 전학이다. 경제는 발전했지만, 여전히 중·고교 야구선수 대부분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태다. 그중에는 회비를 못내 감독 눈치를 보는 아이도 많다.

그걸 노려 다른 지역 고교야구부에서 ‘우리 지역 중학교로 오면 학비·회비는 물론 용돈까지 주겠다’고 유혹하기 일쑤다. 다른 지역 중학교로 전학 오면 대부분의 선수가 자신을 유혹한 고교야구부로 진학하게 마련이다. 호남지역 중학교에 유망주가 많은데 정작 호남지역 고교엔 눈에 띄는 선수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낙후된 야구 인프라도 호남야구 침체에 한몫하고 있다. 호남야구 인프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낙후한 상태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국야구장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수도권의 야구장은 61개다. 부산·경남은 18개, 대구·경북은 19개다. 반면 전북은 8개, 광주·전남은 12개에 불과하다.

이토록 호남지역 야구 인프라가 다른 지역보다 낙후한 건 지자체의 무관심과 기업 후원이 적은 탓이 크다. 광주지역 모 고교 감독은 “사회인 야구장과 유소년 야구장을 지어달라는 시민의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박광태 전 광주시장이 몇 년 전 수천억 원을 들여 돔구장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며 “시민의 복지와 편의는 뒤로 한 채 자신의 치적만 쌓으려는 지자체장들 때문에 호남지역 야구 인프라가 지금껏 1980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지역 내 유력기업이나 지역 출신 재계 유력인사가 많지 않다는 것도 악재다. 해태 4번 타자 출신의 김봉연 극동대 교수는 “호남엔 서울이나 영남처럼 대기업이 거의 소재하지 않는다”며 “호남출신 대기업 오너도 태부족해 호남 야구는 그동안 기업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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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야구의 쇠퇴는 경제적 낙후도 한몫한 듯하다. 프로야구 10구단 창단 선정 과정에서 호남 야구인들이 똘똘 뭉쳐 ‘부영’을 지원한 것도 호남야구 발전과 인프라 증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올해 1월 1일 오후 군산상고와 전주고를 방문해 후원금을 전달했다.

김 교수는 “10구단 창단 선정 시 호남 야구인들이 똘똘 뭉쳐 ‘부영’을 지원한 것도 부영의 10구단 창단이 곧 호남야구 발전과 인프라 증대로 이어지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라며 “호남의 경제적 낙후는 야구도 예외는 아니다”고 밝혔다.

아마추어 야구계의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

최근 아마추어 야구계엔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한꺼번에 전해졌다. 좋은 뉴스는 1차 지명 제도의 부활이었다.

KBO는 “올 시즌부터 전면 드래프트 제도를 폐지하고, 과거처럼 연고지 고교출신 선수들을 지명하는 1차 지명 제도를 부활하겠다”고 밝혔다.

아마추어 야구계는 1차 지명 부활로 프로 구단들이 중·고교 야구부에 대한 지원을 넓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면 나쁜 뉴스는 주말리그의 폐단 지속이다.

2010년 문화관광부와 교육과학부가 공동으로 ‘선진형 학교 운동부 운영 시스템 구축 계획’을 밝히자 대한야구협회는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겠다”며 2011년부터 고교야구대회를 기존 평일 토너먼트 방식에서 주말에만 경기를 치르는 ‘주말리그’제도로 전환했다. 주말리그 도입 이후 고교야구대회는 통폐합됐고, 주말과 공휴일·방학을 활용해 권역별 리그대회와 전·후반기 왕중왕전이 열렸다.

주말리그는 ‘공부하는 학생선수’란 구호답게 학원스포츠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상당수 고교팀이 주말리그의 허점을 악용하는 바람에 현재 고교야구는 편법이 판치고 있다. 모 구단 스카우트는 “주말에만 경기를 치른다는 게 문제다. 각 팀 감독이 에이스를 주말마다 등판시켜 프로 스카우트들은 다른 투수의 투구를 전혀 볼 수 없다”며 “투수 한 명으로 한 시즌을 치르는 고교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 스카우트는 “편법이 판치는 주말리그제를 바로 잡지 않으면 결국 프로팀에서 유망주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는 한국 프로야구의 젖줄이 끊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주말리그의 기본 취지는 살리되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해 고교야구 발전 방향을 새롭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해마다 메이저리그행을 선언했던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은 갈수록 줄고 있다. 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계약금으로 100만 달러를 제시해도 ‘한국에 남겠다’는 고교선수가 많다”며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입단하고선 대부분이 ‘한국에서 뛰다가 FA(자유계약선수)가 됐을 때 미국 무대를 밟겠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LG 김현홍 스카우트 팀장은 “미국 무대에 직행한 선수 가운데 대졸로는 박찬호, 고졸로는 추신수를 빼고 대부분이 실패했다는 걸 학부모와 학생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다”며 “이제 더는 메이저리그가 유망주 확보의 위협세력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덧붙여 김 팀장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도 그걸 아는지 예전같으면 KBO에 초고교급 선수만을 신분조회했을 텐데, 요즘은 ‘저 친구도 선수인가’ 싶은 B급 선수들도 무작위로 신분조회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