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느끼는 과정 - gotong-eul neukkineun gwajeong

네이버 웹툰 ‘병의 맛’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과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어진 학습량을 소화하는 것도 어렵지만,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부분에선 당연하게 다가오면서도 어떻게 보면 난공불락인 요새 같았다. 따돌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내 어린 시절은 그나마 관계라는 과제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시절이 아니었을 텐데도 말이다. 이제 어떤 아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을 보낸다.

고통을 느끼는 과정 - gotong-eul neukkineun gwajeong

여기, 아파하는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검은 것”에 도움을 받지만 때로 공격을 받는 신세다. 그가 사는 현실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다. 검은 물체, 희고 조그마한 사람들, 인기가 많지만 왠지 자신에게 시간을 내주고 고민을 상담해주는 친구, 집 앞 오르막이 지닌 무지막지한 경사. 다른 친구가 없고 학교에서 누가 자신을 바라보면 불편해서 늘 마스크를 쓰고 자기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어버리는 그는 외로이 앉아 점심을 먹는 같은 반 친구를, 소녀가 무심히 돌린 쓸쓸한 등을 본다. 2019년 2월 연재가 끝난 하일권 작(作) 네이버 웹툰 ‘병의 맛’은 그 둘, 소년과 소녀가 만드는 이야기다.

병의 맛이라. 앞 체언에 관형어 역할을 부여하는 조사 “의”를 빼면 “병맛”이다. “병신 같은 맛”을 줄인 이 신조어는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로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출발했다.[1] 인터넷 초창기 인기를 끌던 ‘엽기’가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것에 관한 흥미라면, 병맛은 작품 자체 수준은 조악하나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무시하고 서사가 갑자기 도약하거나 어긋나는 과정에서 얻는 쾌감을 강조한 것이다. 과연 ‘병의 맛’ 주인공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일관성이 떨어진다. 심각하다가 환상으로 넘어가고, 상상 속인가 싶더니 현실에 대한 다른 상(相)이다. 엄밀한 병맛 작품은 아닐지라도, 주인공이 병맛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지은 제목인가 싶기도 하다.

또한 제목을 “병”의 맛으로 읽을 수 있다. 병(病), 질병을 줄여 나타내는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함의까지 포함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염병이라면 타인에게 위해를 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전염병이 아니라면 신체 관리를 잘하지 못한 것 때문은 아니냐는 비난으로 병은 걸린 사람에게 사회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사회학은 ‘낙인 효과’라고 불렀더랬다. 이런 병에게 맛이 있을까. 맛본다는 것은 생생한 경험을 말하는 것이기에, 병이 지닌 맛을 생각하는 일은 그 병에 걸려 경험하는 일을 오롯이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작품 제목은 둘 모두를 의도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소년과 소녀를 둘러싼 사회는 어떤 “병맛”이며, 둘이 걸린 병은 어떤 맛일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길지 않은 웹툰을 놓고 생각해봐야 할 주제들이다.

왕따와 가정폭력이라는 병

소년은 혼자 마왕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검은 것”은 시시때때로 소년을 공격하며, 숨 막혀 죽지 않기 위해, 때로는 맞서 싸우기 위해 소년 또한 검은 것을 조작해 맞서 싸운다. 즉, 소년이 통제할 수 있는 검은 것이 있고, 소년에게 덤벼들려고 기다리고 있는 검은 것이 있다. 언젠가 검은 것에게 습격당해, 숨이 막혀 응급실에 간 소년은 말한다. “피검사를 하고, 링거주사를 맞고, 산소호흡기를 씌워줬는데 이건 떼어주지 않았다”(15화). 검은 것은 심장을 노리거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때로 검은 것이 만든 그물에 갇혀 소년은 방을 빠져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한두 시간이 아니라 며칠, 몇 주씩. 소년은 “아무도 모르는 싸움”(23화)을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 소년을 응원하는 “하얀 사람들”은 소년이 “기억을 잃은 용사”라고, “마왕”을 물리치고 어서 돌아가야 한다고(6화) 말한다.

소년이 우연히 바라보게 된, 쓸쓸해 보이는 등을 가진 소녀. 역시 우연히도(어쩌면 둘 다 친구가 없기 때문이니 필연적이게도) 둘은 국어수행평가를 같이하게 된다(2화). 과제는 “친구에 대해 관찰한 후 상대를 묘사해서 시 쓰기”(5화)다. 다른 사람을, 모든 관계를 피하던 소년은(하여, 일인칭 화자로 진행되는 작품에서 얼굴이 제대로 나오는 사람은 몇 없으며, 엄마는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소녀에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년부터… 이상한 검은 게 보여…”(7화). 소년은 소녀 또한 자신에게 보이는 검은 것을 같이 볼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소녀의 아픔을 짐작해 가기 시작한다. 왜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오랜만에 학교에 나오면 안대를 쓰고 나오는지 말이다.

소년은 집단 괴롭힘으로, 소녀는 가정폭력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작품은 넌지시 전달한다. 무엇보다 이를 독자에게 잘 전달하는 것은 검은 것이다. 검은 것이란 결국 고통을 시각화한 것이다. 고통과 검은 것 모두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갑자기 달려들어 일상을 파괴하며 “목을 졸라”(상징적 의미든 문자적 의미든) 대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소년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우린 자기 고통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천재 문필가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우리는 타인들의 영혼은커녕, 나 자신의 영혼도 알지 못한다.”[2]

나와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더 심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통사회가 비록 공동체를 우선하여 개인을 억압했을지라도, 고통은 신의 이름으로, 또는 사회적 대상화를 통해 그 자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개인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고통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알지 못한다. 에드워드 호퍼. 「밤새는 사람들」 (1942)

반면, 소년은 소녀에게 붙어 있는 검은 것을 발견한다. 고통받는 자가 가진 감수성으로 소녀 또한 고통받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리라. “저것들이 왜 …!!! 순이한테까지 …!!?”(11화). 고통은 소년을 세상과 단절시키는 매개체다. 검은 것은 소년을 다른 사람과 격리한다. 소년이 스스로 자신과 남 사이에 검은 것으로 벽을 만들기도 하고, 검은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해 격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년이 소녀에게서 검은 것을 보고 소녀가 검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 그래서 소년이 검은 것에 목이 졸릴 때 그것을 소녀가 떼어내려 할 때(13화) 둘은 서로를 위로하는 한 걸음을 내디딘다. 아니, 둘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작품은 보여준다. 그것은 “고통이 외롭다(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通)”할 수 있기 때문이다.[3]

하지만 그것은 둘이 나누는 교감일 뿐, 세상은 그들에게 감응하지 않는다. 가해자는 말한다. “그때 사과도 여러 번 하고 다 끝난 일이잖아?”(25화). 의사는 말한다. “불안장애로 인한 공황장애 증상이 … 있어서 … 처방해 드렸었는데 최근에는 어때요?”(25화).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한다. “밥은 먹어야지”(21화). “검은 것”을 보지 못하는 세상 속, 소년과 소녀는 생각한다. “왜 매번 엉망진창일까 우리는”(26화). 여기에 고통이 가져오는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고통은 전달되지 않고 고통받는 자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귀를 막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귀를 막거나 말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잘못했음은 명확하니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문제는 주변에서 보려고 해도 그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두고 엄기호 작가는 말했다. “고통에서는 고통이 주체다.”[3] 기쁨은 기뻐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행복은 행복해하는 사람 것이다. 심지어 고통과 맞닿아 있는 슬픔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슬퍼하는 사람에게 속한다. 그러나 고통은 고통받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다. 하여, 고통받는 사람을 보는 주변 사람에게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고통이 스쳐 지나간 자리만 보일 뿐. 그것은 아마 고통이 보이는 특수한 성질과 관계되어 있을지 모른다. 어떠한 원인에서 발생하는 다른 감각과 달리, 고통은 고통을 재생산하곤 하니까.

고통은 치유하는 것인가, 받아들이는 것인가

생물학에선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고통 대신 통증을 다룬다. 통증이란, 특정 자극으로 인해 신경 반응이 나타나고 이것이 뇌로 전달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신경생리학적으로 볼 때 통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급성 통증(acute pain)과 만성 통증(chronic pain)이다. 급성 통증이란, 급성 자극(acute stimuli)이 Aδ와 C 섬유라고 부르는 구심성 신경(afferents, 중추신경계 쪽으로 신경 반응을 전달하는 신경 섬유)을 통해 척수로 빠르고 날카로운 통증(Aδ 섬유)과 그 뒤를 잇는 둔하고 쑤시는 감각(C 섬유)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4]

말단에서 발생한 통증 신호는 Aδ, C 섬유를 통해 척수 등뿔(dorsal horn)에 위치한 신경으로 전달된다. 척수에서 전백색질교련(anterior white commissure)을 통해 반대쪽으로 건너가 척수시상로(spinothalamic tract)를 타고 올라가 뇌에 도달한 신호는 뇌섬엽(insular cortex),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등으로 확산하여 통증을 다른 감각과 구분하고 불쾌감 등을 느끼게 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보통 급성 통증을 일으킨 원인, 즉 조직 손상과 염증이 해소된 이후 통증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 회복이 일어난 뒤에도 통증은 계속된다. 이런 만성 통증이 왜 일어나는지는 아직 연구 중이다. 통증, 특히 만성 통증은 오랫동안 증상(symptom), 즉 환자가 주관적으로 느껴 호소하는 것으로 분류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는 신경 기능 자체에 변화가 발생한다는 가설을 지지하고 있다.[4] 따라서 만성 통증 자체를 질병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더불어 신경성 통증(neuropathic pain)과 같이 급성 통증에 이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만성적으로 통증을 일으키는 증상들을 분류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따라서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질병분류 11판(ICD-11)에 만성 통증을 질병으로 추가하고 그 정의 또한 “3개월 이상 지속하거나 재발하는 통증”으로 변경하려고 준비 중이다.[5]

정리하면, 어떤 원인으로 발생했다 해도 그 회복 또는 변화와 무관하게 계속되는 통증이 만성 통증이다. 주목할 점은, 만성기로 들어서면 애초에 통증을 일으켰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통증에 의해서건 다른 원인에 의해서건, 만성 통증 환자의 뇌에선 기능적, 구조적, 화학적 변화가 관찰된다.[6] 통증이 지속하는 이유가 신경계에서 나타난 변화에 기인하는 한[7] 만성 통증은 겉에서 보아선 도저히 알 수 없다. 마치 어떤 화학 약품이 많은 사람의 입에는 아무 맛도 없지만 어떤 사람 입에는 무척 쓴 것처럼, 만성 통증 또한 누군가의 입에만 쓰디쓴 맛으로 느껴지는 “병”이다. 그리고 그 치료는 무척 어렵다. 원인을 제거한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데다가,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은 잠시 통증을 완화해 줄 뿐인 진통제와 요법들뿐이다. 항우울제나 뇌심부 자극(deep brain stimulation) 등이 만성 통증 치료를 위해 연구되고 있는 것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진통제가 장기 복용 시 여러 문제를 일으켜서이기도 하지만, 진통제로 통증을 잠시 없애는 것은 만성 통증에 대한 해결책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성 통증의 공포-회피 모형. 공포로 인해 만성 통증 상태가 지속하는 양상을 나타낸 모형이다. 근골격계 통증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지만 다른 통증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통증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출처는 논문.[8] 시각화는 필자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통증이라는 “병의 맛”은 끊어지지 않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어떤 이유로 발생한 통증은 구조적 변화를 통해 다시 통증을 만들어 내고, 그리하여 대상이 그 통증 주변을 계속 맴돌게 만든다. 통증은, 고통은(사회적 원인까지 모두 포함해도 무리는 없으니) 말려든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덫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악순환을 끊어내거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능한 한 줄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을 다시 쌓아가는 것이 해결책이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고통을 다루는 우리 모습을 비춰보자. 우리는 인과적인 설명에 익숙하다. 무엇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느냐고 묻고, 그 원인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몇 번 시도해보다가 해결에 이르지 않으면 그만두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묻곤 한다. 이게 정말 원인이냐고. 학원폭력을 마주한 소년에게 사회는 그렇게 묻는다. 네가 아파하는 원인이 무엇이냐고. 작품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가정폭력을 마주한 소녀에게 사회는 똑같이 원인을 물었을 것이다. 원인은 해소될 수도, 정리될 수도 있다. 가해자는 사과하고(심지어 진심 어린 자세로) 재발 방지를 약속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고통이 만성화할 만큼 오래되었다면, “원인”을 해결했다 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사건도, 그리하여 우리가 느낀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국가는 누군가를 원인으로 지적했고 처벌했지만?그리고 그 “원인”이 그저 면피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희생자 가족들은,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은 처벌로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모두, 고통의 악순환에 빠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나뉘지 않는다. 고통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고통을 듣고자 하는 사람 또한 고통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 견디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3]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이 만드는 연대가 대항을 위해 우리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고통이 순환을 만들어 낸다면, 그리하여 그 순환이 모래 지옥처럼 사람들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면, 고통을 마주하는 것은 그저 연대하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 그 순환을 적극적으로 끊어내려는 시도가 고통을 대하는 자세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난한 일이며, 아무런 소용도 없어 보일 때가 많더라도 말이다. 같은 자리를 맴돌지 않으려면, 매인 끈을 풀어내야 한다. 그 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고통받는 자에게 고통을 잊으라고 강요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잊으라고 잊히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쉬운 일일까. 그것은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통이 있음을 알면서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으려는 노력이다. 학교폭력을 당한 이에게, 가정폭력으로 밤마다 소스라치는 이에게 사과 한마디나 주변에서 던지는 위안으로는 부족하다. 그 고통을 일으킨 원인은 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또한 그 고통이 있어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고통을 마주한 이들이 이룬 연대로도 힘에 부친다.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함께해야 하는 이유다.

김준혁/치과의사, 부산대 의료인문학교실 박사과정(의료윤리학)

참고문헌

[1] 하경헌. TV 병맛에 빠지다. 경향신문. 2013년 9월 6일.

[2] Woolf V. On Being Ill. Massachusetts: Paris Press. 2012. p. 11. [3]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나무연필, 2018. [4] Deer TR, Gordin V, Leong MS, eds. Treatment of Chronic Pain by Medical Approaches. Springer. 2015. [5] Treede R et al. Chronic Pain as a Symptom or a Disease: The IASP Classification of Chronic Pain for the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11). Pain. 2019;160(1):19-27. [6] Tracey I, Bushnell MC. How Neuroimaging Studies Have Challenged Us to Rethink: Is Chronic Pain a Disease? J Pain. 2009;10(11):1113-1120. [7] Raffaeli W, Arnaudo E. Pain as a Disease: an Overview. J Pain Res. 2017;10:2003-2008. [8] Vlaeyen JWS, Linton SJ. Fear-avoidance and its Consequences in Chronic Musculoskeletal Pain: A State of the Art. Pain.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