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의 손자 1 회 - hyeonjaui sonja 1 hoe

사고로 죽었을 청년이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이세계에서 환생! 구국의 영웅 「현자」 멀린 월포드에게 거둬진 그는 신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손자로서 마린의 기술을 흡수해가며 놀라운 힘을 얻게 된 신이었지만, 그가 열다섯 살이 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앗차차...상식을 가르치는 걸 깜빡했구먼!" 이런 이유로 신은 상식과 친구를 얻기 위해 알스하이드 고등 마법학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규격 외》 소년의 파격적인 이세계 판타지 라이프, 여기서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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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실존인물

한국

동양

서양

창작물

한국 창작물

동양 창작물
(특촬물 · 만화, 애니메이션 · 소설, 라이트 노벨 · 게임)

서양 창작물

1. 개요2. 명단

2.1. 삼국통일 이전2.2. 통일신라시대2.3. 후삼국시대2.4. 고려시대2.5. 조선시대2.6. 대한제국2.7. 일제강점기2.8. 미군정2.9.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9.1. 20세기

2.9.1.1. 1940년대2.9.1.2. 1950년대2.9.1.3. 1960년대2.9.1.4. 1970년대2.9.1.5. 1980년대2.9.1.6. 1990년대2.9.1.7. 2000년대

2.9.2. 21세기

2.9.2.1. 2000년대2.9.2.2. 2010년대2.9.2.3. 2020년대


1. 개요[편집]

실존 인물 중 한국인의 유언을 정리한 항목. 다만 한국사에 관련된 외국인의 유언도 포함되어 있다.

2. 명단[편집]

2.1. 삼국통일 이전[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그는 이제 잡혀 있고, 좌장군만이 홀로 병사들을 합하여 전쟁이 매우 격렬하니, 맞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구나.

조선상 노인[1]

?~BC108.4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리거라.

동명성왕[2]

BC58.4~BC19.9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었던 까닭에 활을 당겨 부러뜨려 되갚았던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였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자라 하여 칼을 보내 자결을 명하시니, 어찌 아버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해명태자[3]

BC12~AD9.3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괴유

?~22.10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남해 차차웅[4]

BC50~AD24.9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는 어머니의 그릇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왕자

?~32.11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곳에 묻으라. 다시 능묘를 만들지 말라.

민중왕[5]

?~48

탈해는 신분이 나라의 친척이고 지위는 날 보좌한 신하이니 공과 명성이 누차에 현저히 드러났다. 짐(朕)의 두 아들[6]은 그 재주가 그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뒤에는 그로 하여금 대위(大位)를 잇게 하려 하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유리 이사금

?~57.10

나는 이미 늙어 만사에 귀찮음을 느낀다.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다. 하물며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를 총괄하여 오래도록 사직에 공을 쌓았으며 신하와 백성들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부탁함에 있어 적임자를 얻었다고 가히 이를 수 있다. 너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니, 영원히 경사스러울 것이다!

태조대왕[7]

47~121[8]

애통하고도 원통하도다! 내가 그 당시 선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어찌 반란을 일으키려는 무리를 보고도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한스럽게도 선왕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셔서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지금 임금은 이제 막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이거늘, 의롭지 않게도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무도한 이때에 사는 것은 빨리 죽는 것만 못하다.

고복장[9]

?~147.3

지금 네가 차마 이 늙은 형을 해치려 들 수 있겠느냐?

고발기

?~197.5

내가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뵙겠는가? 만일 여러 신하들이 나를 차마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의 능 옆에 장사 지내주기를 청하노라.

왕후 우씨

?~234.9

우리 임금이 큰 나라에 죄를 짓고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사구(司寇)에게 맡기려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군졸들의 음식거리나 되고자 합니다.

유유[10]

?~246.10

왕후가 저를 이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저의 미천한 목숨에 은혜를 베푸셔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찌 감히 다시 대왕의 곁에서 모시기를 바라겠습니까?

관나부인

?~251.4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석우로[11]

?~253.4

선조 왕들은 오직 멀고 가까운 지역의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묘지기 일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잡아온 한인과 예인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

374~412.10

내가 계림에서 개돼지로 살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계림에서 매를 맞을지언정 왜의 벼슬은 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림의 신하다!

박제상

363~419

나는 우둔하고 밝지 못해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이렇게까지 되었다. 백성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위기가 오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지만 너는 이곳에서 죽어도 이로울 것이 없다. 어려움을 피해 국통을 이어라.

개로왕

433~475.9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성왕[12]

?~554.12

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으나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이고 이 성을 되찾겠다!

찬덕[13]

?~612.1

전에 나의 아버지가 여기에서 숨을 거두셨다. 내가 지금 또한 여기에서 백제인과 더불어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해론[14]

?~618

나는 어느 해 어느 달의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주시오.

선덕여왕

?~647.1.8

충신은 죽을지언정 임금을 잊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만 드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줄곧 때를 보고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부릴 때에는 반드시 싸울 땅을 살피고 골라야 하는데, 상류에 자리잡아 적을 이끌어내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기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좁고 험준한 곳에 거병하여 그들을 막은 다음에야 이길 수 있습니다.

성충[15]

?~656

내가 아까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고 깃대를 꺾지 못했으니 깊이 한스러운 일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리라.

김관창

645~660.7.10

썩어빠진 개새끼야! 이 썩을 놈아!

복신[16]

?~663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짓을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연개소문[17]

603~665

2.2. 통일신라시대[18][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제가 신하로서 온 힘을 다하여 왕을 받들려고 하였으나 노복의 병이 이와 같이 깊으니, 오늘 이후에 다시는 왕의 용안을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행히도 훌륭한 왕께서 저를 등용하면서 의심하지 않으셨고, 일을 맡기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의 현명함에 의지하여 작은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삼한이 한 집안을 이루고,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니, 비록 태평함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예로부터 왕위를 이은 군주를 보건대 처음에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끝까지 잘하는 사람은 드물어서, 여러 대에 걸쳐 쌓은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아주 애통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그것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움을 유념하시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셔서,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김유신[19]

595~673.7.1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아니다. 싸우고자 하는 자는 어찌 나오지 않느냐!

소나[20]

?~675.9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나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할 것이다.[21]

문무왕

626~681.7.1

과인은 나라의 운이 어지럽고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 있는 임금을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므로,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겠는가? 위나라 임금의 서릉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22]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쓰면 서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 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열흘 뒤에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힘써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의 성과 요새를 지키는 일과 주현(州縣)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23]

나의 유골을 동해에 뿌려 주어라.

효성왕

?~742.5

과인이 자질이 부족하면서도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지켜보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에 실망을 줄까 염려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전전긍긍하며 마치 깊은 연못과 얇은 얼음판을 건너듯이 하였다. 재상과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보필하는 데 힘입어 왕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갑자기 병이 들어 열흘 정도가 되니, 정신이 혼미하고 멍한 사이에 아침 이슬보다 앞서 사라질까 두렵다. 생각하건대 앞선 왕들이 이루어놓으신 대업은 그 주인이 없으면 안 되고, 군사와 정치에 관련된 여러 사무는 잠시라도 중지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서불한 의정은 앞선 황제의 손자요 과인의 숙부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총명하고 민첩하며 너그럽고 인자하다.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가까이서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다스릴 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벗어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맡기고자 한다. 정사를 맡길 만한 사람을 얻었으니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물며 태어나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큰 법칙이며, 오래 사는 것과 일찍 죽는 것, 길고 짧은 것은 운명의 이미 정해진 분수이다. 죽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이루는 것이니 살아있는 이들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을 다 바쳐서 죽은 이를 보내고 산 이를 섬기는 데 혹시라도 예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라 안에 널리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리도록 하라.

문성왕

?~857.9

병이 위급하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나 나의 누이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선덕왕, 진덕왕의 옛일을 본받아서 그를 왕으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강왕

?~887.7.5

2.3. 후삼국시대[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

궁예

857~918.6.14.

2.4. 고려시대[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이 예로부터 이러한 것이니라.[24]

왕건

877.1.4~943.5.29

사람의 생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죄 있는 자를 용서하여 연명하려 하겠느냐. 또한 내가 대사면령을 내리고 죽으면 나를 계승할 자가 무엇으로 새로운 왕의 은혜를 베풀겠느냐.

고려 성종[25]

960.12.26~997.10.27

네 이놈! 너도 고려 사람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강조[26]

964(?)~1010

짐은 부족한 몸으로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지켜왔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명에는 끝이 있어 병세가 더하고, 애처롭게도 하늘이 이 몸을 돌보지 않아 이미 죽을 날에 이르렀다. 정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으므로, 이제 군국정사를 전부 태자 훈(勳)에게 위임하고 왕위를 전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나의 간곡한 말을 받아들여 충과 효를 다하기를 힘써라.

고려 문종

1019.12.1~1083.7.18

내 병이 크게 더하여 형세가 다시 낫지 못하겠다. 이에 중한 소임을 너에게 전하여 준다. 내가 지금 생각하니 평생에 행한 일이 잘한 것은 적고 잘못한 것은 많다. 나를 본받지 말고 다만 옛날 성현의 도를 생각하고 우리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지위에서 게으르지 말고 길이 백성을 복되게 하라.

고려 예종

1079~1122.4

선사께서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구려. 내 갈 길은 결정되었소.

금강거사 윤언이[27]

1090~1149

다만 화살 때문에 일어난 소동 당시 재앙이 죄 없는 사람에게 미쳤으니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 것도 마땅한 일이다.

김돈중

?~1170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에 있노라.

보조국사 지눌

1158~1210.3.27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불순한 모의를 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다. 너는 오늘부터 문병을 끊어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결코 부르지 않겠다.

최충헌[28]

1148~1219.9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노진의

?~1278

뒷날에 돌아오면 다시 여러분과 더불어 거듭 한바탕 흥겹게 놀겠소.

보각국사 일연

1206~1289.7.8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 견금여석).

최원직[29]

?~1331

내가 내일 창릉에 배알하고 주정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공민왕[30]

1330.5~1374.9.21

내 평생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최영[31]

1316~1388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

이원계

1330~1388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 정몽주

1337.11.22~1392.4.4

2.5. 조선시대[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죽었지만 나는 미움 받을 짓을 안했으니 괜찮다.

남은[32]

1354 ~1398.8.26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 편을 배반하고 저 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

삼봉 정도전[33]

1342~1398.8.26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에서 죽사온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이지란

1331~1402.4.9

나를 조상님들이 계신 함흥 땅에 묻어다오.

태조[34]

1335.10.11~1408.5.24

나는 죄가 없는데 매를 견디지 못해서 죽는다!

강상인[35]

?~1418

앞으로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말아라!

심온[36]

1375~1419

내 상 중에는 주상께 고기 반찬 드시게 해라.
양녕대군을 잘 부탁하라

태종[37]

1367.5.16~1422.5.10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38]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경암 허조

1369~1439.12.28

왜인과 야인을 대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평안에 빠져 있다가 혹 해이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언제나 하루와 같이 정신을 바짝 차려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세종[39][40]

1397.5.15~ 1450.3.30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가마)을 대령하라!

절재 김종서[41]

1383~1453.10.10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인수 박팽년

1417~ 1456

북소리 둥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뉘엿뉘엿 해는 지려 하누나. 황천에는 주막도 없다 하는데 오늘 밤엔 뉘 집에 자고 갈거나(절명시).

매죽헌 성삼문

1418~1456.6.8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

양녕대군[42]

1394~1462.9.7

(신하들이 예종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운이 떠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43]

세조

1417.9.29~1468.9.8

석실은 유명무실한 것이므로 쓰는 것이 옳지 못하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무덤에 석실과 석곽(石槨)을 마련하지 말라.[44]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남이

1441~1468.10.27

전부터 발에 종기가 있어 좀 아프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소.

예종

1450.1.1~1469.11.28

아무쪼록 앞으로 일본과 실화(失和 : 분쟁유발)하지 마시옵소서.[45]

보한재 신숙주

1417~1475.6.21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불교의 법을 따르지 말며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관에 넣어 달라.[46]

인생이란 여기서 그치는가![47]

너희는 대학과 중용은 너무 많이 읽지 말거라. 죽을 때가 다 된 지금도 그 글들이 눈에 선하구나.

괴애 김수온

1410~1481.6.7

처음 부지런하고 나중에 게으른 것은 인지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에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압구 한명회[48]

1415~1487.11.14

원자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임금이 거동하는 길 옆에 묻어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폐비 윤씨[49]

1455.6.1~1482.8.16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묻어주오.

매월당 김시습[50]

1435~1493.3.31

나의 사후 100년 동안 누구도 폐비 문제를 거론하지 못한다.

성종[51]

1457.7.30~1494.12.25

신이 바라는 것은 특별한 것은 없으나, 다만 경연에 부지런히 임하시고 형벌과 시사는 법도에 맞게 하소서.

보진재 노사신[52]

1427~1498.9.6

신이 중죄를 범하였는데 몸과 머리가 나누어짐을 면하게 되었으니, 성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감히 조금인들 지체하겠습니까?

이세좌[53]

1445~1504

국가에서 신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이다.
신의 나이 70이 다 되고, 몸에 병이 쌓여 있으니, 죽어도 다른 생각이 없겠습니다만, 신이 소시부터 변방에서 일하였으며, 나라 일에는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진심 갈력하였습니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한 가지 죄도 없습니다. 이 말을 주상께 전달하기 바랍니다.

이극균[54]

1437~1504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을 수 있습니까?

내시 김처선[55]

?~1505.4.1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유한입니다.

임숭재[56]

? ~ 1505

중전이 보고 싶다…

연산군[57][58]

1476.11.7~1506.11.6

나라가 간신배에게 속아 공신을 죽이려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간언하지 않는가?

신윤무[59]

?~1513.10.24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60]

정암 조광조

1482.8.10~1519.12.20

성상께서 내 목을 보전하고자 사약을 내리셨거늘 어찌 너희들이 내 목을 얽으려 하느냐![61]

(자식들에게) 내가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모두 태워 나의 허물이 더 무거워지지 않도록 해라.

지정 남곤[62]

1471~1527.3.10

복성군과 박씨에 대해서는 신으로서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신(臣)이 조정에 죄를 짓고도 3∼4년을 연명하였으니 천은(天恩)이 중하다.

이항

? ~ 1533.6.2

원수 김안로! 원수 김안로! 원수 김안로!

소요정 심정

1471~1531.12.1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 주고, 대신들이 따른 뒤에라야 내 노열(勞熱)이 덜해질 것 같다. 이러한 때에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중종

1488.3.5~1544.11.15

경들은 내 기후[63]를 보라…

인종[64]

1515.2.25~1545.7.1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 오래이니 마음이 편안하구나.

화담 서경덕

1489~1546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그냥 동문 밖에 내쳐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먹게 하여 천하 여인들의 본보기로 삼으라.

황진이

?~?

그대도 한잔 마시겠는가?

금호 임형수[65]

1514~1547

내 기운은 마찬가지이니 문안하지 말라.

명종

1534.5.22~1567.6.28

저 매형에게 물을 줘라.

퇴계 이황[66]

1501.11.25~1570.12.8

하늘의 해가 참 맑구나.

남명 조식

1501.6.16~1572.2.8

널 내가 낳았구나.

쌍취헌 권철[67]

1503~1578.8.1

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 이로 인해 병이 심해져도 이 또한 천명이다.

율곡 이이[68]

1536.12.26~1584.1.16

올해는 내 나이 세 번째 아홉수에 해당하는 해인데 마침 오늘 연꽃들이 서리를 맞아 붉게 변했으므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가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나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허난설헌

1563~1589.3.19

내가 죽거든 내 목에 있는 사마귀를 근거로 하여 내 시신을 거두도록 하거라.

송상현[69]

1551~1592.5.22

장부가 국난을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랴. 이 땅이 나의 죽을 곳이다!

중봉 조헌[70]

1544~1592.8.18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이종인[71]

?~1593.6.29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김천일

1537~1593.6.29

뜻을 먼저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가니 천명임을 어찌할 것인가. 또한 적이 도망쳐 물러가면 나라는 회복되겠지만 조정의 붕당은 누가 능히 깨뜨릴 것인가.

학봉 김성일

1538~1593

이 녀석이 소용없는 짓을 하는구나.

송강 정철[72]

1536.12.6~1593.12.18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충무공 이순신[73]

1545.3.8~1598.11.19

힘써 좋은 일만 생각하고 힘써 좋은 일만 행하라.

서애 류성룡

1542.10.1~1607.5.13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서산대사 휴정[74]

1520.3.26~1604.1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말이 있어도 듣지 말라.

선조[75]

1552.11.11~1608.2.1

이 세상에 조금만 머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오래 머물렀구나.

사명대사 유정

1544.10.17~1610.8.26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소!!!

교산 허균[76]

1569.11.3~1618.8.24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77] or 여러분, 한때의 가난을 한탄하지 말고 참고 견디시오.[78]

관송 이이첨

1560~1623.3.14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모두 네 탓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며 효자가 될 수 있는가.

이위경[79]

1586~1623.3.14

이덕형[80] 등과 함께 힘껏 일해 보고 싶다.

박홍도[81]

1576~1623

무도한 임금이 독촉하여 그렇게 하게 하는데 내가 어쩔 수 있었겠는가.

김순[82]

?~1623

조정에서는 내가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시키거나 기르지 못하게 했다. 강적을 대적했으니 죽는 건 내 직분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구나!

성은 남이흥[83]

1575~1627.1.21

속이 답답하니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불을 가져오라.

선원 김상용[84]

1561~1637.1.22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삼학사 오달제

1609.7.8 ~ 1637.5.13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주어라.

광해군[85]

1575.4.26~1641.7.1

너도 똑같이 될 것이다. 이놈아!

심기원[86]

1587~1644.3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임경업[87]

1594~1646

작은아버지[88]와 조 귀인이 이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다오!

민회빈 강씨

1611~1646.3.15

내가 죽거들랑 내 눈을 뽑아서 남대문에 걸어 두거라! 이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겠노라!

김홍욱[89]

1602~1654

김자점과 이시백은 나와 같이 대하라, 귀인 조씨의 형제들을 잘 보살펴주어라.

인조[90]

1595.11.7 ~ 1649.5.8

가귀[91]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효종[92]

1619.5.22~1659.5.4

내 어찌 대신의 뜻을 모르겠는가. 다만 정신이 이러하여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종

1641.2.4~1674.8.18

내가 죽거든, 비갈을 세우지 말고 시호를 청하지도 말며, 다만 조그만 표석에 이름 석 자만 쓰라.

동춘당 송준길

1606.12.28~1672.12.2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백호 윤휴[93]

1617.10.14~1680.5.20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 또는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

우암 송시열

1607.11.12~1689.7.24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이봉상

1676~1728.3.15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

사도세자[94]

(양력) 1735.2.13~1762.07.12

전교(傳敎)한다.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영조

(양력) 1694.10.31~1776.04.22

수정전…. 수정전….

정조[95]

1752.9.22~1800.6.28

땅을 내려다보며 죽느니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겠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96]

1760~1801.4.8

깨끗이 목욕시켜다오.

연암 박지원

1737.2.5~1805.10.20

인생에 끝이 왔으면 떠나야지.

혜보 유득공

1748.12.24~1807.9.1

집 뒤의 동산에 매장하고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라.

다산 정약용

1762.6.16~1836.2.22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97]
1821.8.21~1846.9.16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가포 임상옥

1779~1855

죽는 기분 말인가? 처음 죽어보는 거라 잘 모르겠군. 내 죽은 다음에 다시 말해주지.

정지윤[98]

1808~1858

저 등잔불을 꺼 주시오.

김삿갓

1807.3.13~1863.3.29

운현궁...

민승호[99]

1830~서력 1875년 1월 5일.

늙은 신하가 역적을 키웠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었구나.

홍순목[100]

1816~1884

때가 오매 천하가 모두 한 힘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해몽 전봉준

1854~1895.3.30

살려주시오.

명성황후[101]

1851.9.25~1895.8.20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로써 동족에게 죽는건 천명이야!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싶지는 않소!

도원 김홍집[102]

1842~1896.2.11

차라리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왜놈에게 죽을 수는 없다.

해운당 김하락[103]

1846~1896.7.13

2.6. 대한제국[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주상이 보고 싶구나.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

흥선 대원군[104]

1820.12.21~1898.2.22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박승환

1869.9.7~1907.8.1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민영환

1861.8.7~1905.11.30

나라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랴.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

의병장 왕산 허위

1854.4.1~1908.10.21

형님, 형님! 누가 나를 찔렀소?

신돌석[105]

1878.11.3~1908.12.12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106]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107]

안중근 의사

1879.9.2~1910.3.26

2.7. 일제강점기[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죽기가 쉽지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 내가 이렇게도 어리석은가. 내가 죽은 후 내 글은 창강 김택영에게 맡기거라.

매천 황현[108]

1855~1910.9.7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이재명 의사

1887.10.16.~1910.9.13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이범진[109]

1852.9.3. ~ 1911.1.13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이용구[110]

1868.2.14~1912.5.22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111]

부재 이상설

1871.1.27~1917.3.2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겠다. 8보(步)만 걷게 해다오.[112]

김알렉산드라

1885~1918.9.16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조선 독립 만세...

유관순

1902.12.16~ 1920.9.28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강우규

1855.420~1920.11.29

독립운동이라고? 상해에 있는 놈들은 모두 폭도이다. 이 자들이 어떻게 독립을 시킨다는 것이냐?

민원식

1886 ~ 1921

정부… 정부!

예관 신규식[113]

1880.2.22~1922.9.25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구별이 없어야 된다.
우리가 이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 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 민족의 통일을 요구하여야 되겠오.
一. 전족통일(全族統一)이라 함은 말로 주장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물론 극란한 일이오, 그러나 제일 먼저 주의할 것은 적어도 우리 광복사업에 헌신하려고 자처한 건전분자들은 지중(至重)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운 이상에는 환경의 어떠함을 물문(勿問)하고 다 한데 뭉쳐야 되겠오. 물론 어떤 나라에나 각 당파의 분별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을 보는 민족들은 사당 혹은 붕당을 짓지 않음이 사실이니 여하튼 우리도 이 점에 크게 주의하여 장래 국가대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되겠오.
二. 독립운동은 우리의 제일 중대한 사업인 즉, 이를 기성코자 함에는 하등의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못하게 됨이 사실이오. 바로 말하자면 즉 우리 민족의 체면이나 장래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위험성을 가진 일이 아니면 무엇이나 광복사업에 대하여 일호라도 이익 있게 보이는 일은 다 실행하도록 주의하여야만 되겠오.
이같이 말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즉 우리가 장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지 제일 먼저 기초되는 독립국가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오.
三. 독립운동의 성패는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문제이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일에 성공코자 하면 우리가 통일적 행동을 하여야 되겠으며 단결되어 일하려면 독립운동이라 하는 전민족을 살리려는 대사업에 목표를 두고 이 일을 진행함에 사개인(私個人) 사이에 교분 혹은 감정관계의 어떠함을 일체 돌아보지 말아야 되겠오.
나의 말한 몇 가지 일이 실행키에 어렵지 않음은 아니나 하려면 아니 될 것은 없고 잘 될 터이오.
이는 다른 말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소.

백암 박은식[114]

1859.9.30~ 1925.11.1

일명(一命)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認准)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유수(幽囚)에 곤(困)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病)이 심중한 일언(一言)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 지금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中外)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曉然)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순종[115]

1874.3.25~1926.4.25

네 이놈들! 니들은 내가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왔지?

월남 이상재

1850.10.26~1927.3.29[116]

일본에게 속았다.

이지용[117]

1870.10.23~1928.6.30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백야 김좌진

1889.12.16~1930.1.24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자신을 데리러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소파 방정환

1899.11.9~1931.7.23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

남강 이승훈[118]

1864.3.25~1930.5.9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니 더 이상 남길 말은 없다.

윤봉길 의사

1908.6.21~1932.12.19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의사

1896.1.19~1934.6.5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성재 이동휘

1873.6.20~ 1935.1.31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 발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단재 신채호[119]

1880.12.8~1936.2.21

멜론이 먹고 싶소.

이상

1910.8.20~1937.4.17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선산 같은 데 쓸 생각을 말고, 서울 공동묘지에, 유상규[120] 군이 누워 있는 공동묘지에 나를 묻어주오.

도산 안창호

1878.11.9~1938.3.10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못 보아도 너희들은 꼭 볼 것이니…

한서 남궁억

1863.12.27~1939.4.5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

석오 이동녕

1869.2.17~ 1940.3.13

이놈들아! 천조대신보다 하나님이 더 높아!

이기풍[121]

1865.12.23~1942.6.20

내 삶이 유언이다.

규암 김약연[122]

1868.9.12~1942.10.29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123]

소양 주기철

1897.11.25~ 1944.4.21

나는 이제 간다. 나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가지만 조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된다하여 곧 바로 자주자립국가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일제에 지배당하였던 기간만큼의 혼란의 시기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주자립국가를 이루게 되고 세계 속에 우뚝 솟는 국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만해 한용운[124]

1879.8.29~ 1944.6.29

2.8. 미군정[편집]

유언

인물

생몰년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

윤치호

1865.1.23~ 1945.12.9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야기할 필요 없다.[125]

김용환

1887.2.27~1946.7.10

가타야마 군,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게.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네. 죽으면 곧바로 하나님에게 갈 걸세. 내게는 자신이 있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게. 가타야마 군, 자네는 젊으니까 몸을 소중히 하게. 그리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나님 계신 곳에서 만납시다.

구약성경의 시편 51편을 읽어 주시오.[126]

홍사익

1889.3.4~1946.9.26.

이보시게, 만공. 우리가 함께한 게 일흔다섯 해이나, 오늘로 자네와 내가 이별할 인연이 되었나 보구려. 그럼 잘 있게나.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다.그리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127]

만공 선사

1871.3.7~1946.10.12

조국… 조선…

몽양 여운형

1886.5.25~1947.7.19

2.9.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2.9.1. 20세기[편집]

2.9.1.1. 1940년대[편집]

194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지금의 임시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 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 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납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배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공사를 할 때― 자살하려다 살패하였다. 서대문감옥에서 안매산(安梅山) 명근 형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고 조용히 묻거늘 나는 찬성하였다. 그가 3~4일 동안 배가 아프니 머리가 아프니 하는 핑계로 음식을 끊었으나, 눈치 빠른 왜놈 간수가 알아차리고 의사에게 진찰케 하고 매산을 결박한 후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을 풀어넣었다. 결국 매산이 "자살을 단념하겠노라'고 통고를 한 것을 보면,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라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128]

백범 김구

1876.8.29~1949.6.26

2.9.1.2. 1950년대[편집]

195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

이관술[129]

1902.4.25~1950.7.3

장관님께 내가 죄송해하더라고 전해주게.

채병덕

1914.4.17~1950.7.26.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130]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이우근[131][132][133]

?~1950.8.11

나는 공산군이 아니오. 나는 석두명[134]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

석주명[135]

1908.11.13~1950.10.6

내가 살아온 생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한 걸음 한 발짝 걷고 옮길 때도 언제나 머리 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갈라진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의 합작과 통일을 주장해왔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기필코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신념이자 의지였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쓰러지면 조국 통일의 완성은 누가 해 줄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 남도 북도 같은 민족이고 좌익도 우익도 같은 민족이다. 조상과 핏줄이 하나인 민족이 왜 통일을 할 수 없겠는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꼭 해야 한다는 의지와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념과 책임감을 통감하고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개인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통탄할 일이다.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 정권욕에 의해서 통일도 못하고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하는 이 참극을 가져오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비분을 금할 수 없다.

우사 김규식

1881.1.29~ 1950.12.10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인촌 김성수

1891.10.11~ 1955.2.18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이정 박헌영[136][137]

1900.5.28~1956.12.5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잘못하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리의 귀중한 절개를 훼손당할 염려가 있소. 각자의 처신에 특별히 주의합시다.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소.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주오.

소앙 조용은

1887.4.30~1958.9.10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만 주시오.[138]

죽산 조봉암

1898.9.25~1959.7.31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

우장춘 박사[139]

1898.4.8~1959.8.10

2.9.1.3. 1960년대[편집]

196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와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칩니다.

진영숙 열사[140]

?~1960.4.19

저 아우들을 먼저 치료해주세요.

김치호 열사[141]

?~1960.4.19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142]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정재[143]

1917.1.6~1961.10.19

늙으신 어머님을 두고 먼저 떠나게 되어 죄송스럽다.

임화수

1921~1961.12.21

죽음을 앞에 두고 '조선어 첫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최후에 이르러 나는 나를 진우로 인식한 것이다.[144]

이진우[145]

1940~1962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할 것이며, 강역고<疆域考>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한 책이다.

박창화[146]

1889.05.09~1962.03.06

통일이 안 돼서... 유림들이 잘해 나가야...

심산 김창숙

1879.7.10~1962.5.10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

최영오 일병

1938~1963.3.19

점자책은 쌓지 말고 꽂아 두어라.[147]

송암 박두성[148]

1888.4.26~1963.8.25

천당이 가까운지 알았더니만 멀어… 멀어…

박수근

1914.2.21~1965.5.6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1875.3.26~1965.7.19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다. 모름지기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

김종오

1921~1966

억울하다! 아직....더.. 아직 더 활동할 수 있어, 아직 죽긴 억울하다!

김승호

1918.7.13~1968.12.1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149]

이승복[150]

1959.12.9 ~ 1968.12.9

2.9.1.4. 1970년대[편집]

197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탑승객이 다칠까 봐 몸을 던졌다.

전명세[151]

1931~1971.1.23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김활란

1899.1.18~1970.2.10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 어머니, 내가 못 다한 일 꼭 어머니가 이루어 주십시오.[152] / 배가 고프다…[153]

전태일 열사

1948.9.28~1970.11.13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주고, 딸 유재라에게는 내 묘소 주변 5천 평 부지를 준다. 단, 그곳은 유한동산으로 가꾸며, 울타리도 절대 치지 말고 유한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154] 학생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여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아들 유일선은 4년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 그리고 아내(호미리)는 재라가 노후를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 내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모두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155]

1895.1.15~1971.3.11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서(東西)에 전해 주!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1907.10.2~1971.5.9

내 평생에 제일 큰 실수는 공산주의를 따른 것이다. 너희들을 두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이 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갖다 묻어 다오.

심영

1910.9.3~1971.7.24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의 기아산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나라와 내 민족의 덕이다. 나라가 독립되고 국력이 신장되지 않으면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한스럽다. 온 겨레가 잘살아보자고 일으킨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길 바란다.[156]

학산 김철호[157]

1905?[158]~1973.11.22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일본에서 속고만 살아… 속아 살았어요. 속아 살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박정희 씨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영수 씨와 죽은 분[159]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저도 그분들 곁으로 같이 보내주세요… 제 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재혼해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전해주세요....

문세광[160]

1951.12.26~1974.12.20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친다.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시정되었으면 한다.

김대두

1949.10.11~1976.12.28.

이승에서 어머니를 못 뵙는다면 무덤에서 어머니를 뵙고 싶다.

방영근

1948~1976.12.28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누명을 벗도록 해주십시오.
여기 검사, 판사도 나와 있지만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기독교인으로 죽습니다.
천당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거짓으로 고발해 나를 죽게한 모든 사람들은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복수할 것입니다.

오휘웅[161]

1945.03.02~1979.09.13

나는 괜찮아…

박정희 대통령[162]

1917.11.14~1979.10.26

김 부장, 김 부장 왜 이래!

차지철

1934.11.16~1979.10.26

2.9.1.5. 1980년대[편집]

198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며 내가 한 일들이 비록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그러나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헌신했지만 건군 초기에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을 잊을 수 없으며 그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써왔고 오늘날의 대해군의 발전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란을 몸소 겪었으며 일제의 탄압과 그 무서운 고문도 직접 겪었다. 따라서 바라는 것은 이 땅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학정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피로써 싸워준 UN군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손원일 제독

1909.6.22~1980.2.15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 있는 국가요 또한 그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대업은 조국통일이며 조국통일에 목적이 있는 한 우리 국민은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족의 새로운 번영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번 시련도 온 국민이 수천년에 걸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처리해온 위대한 민족혼을 발휘하여 서로 믿고 존중하며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단결하여 온 국민이 더욱 기쁜 마음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고락을 같이 하면서 이번 기회를 새로운 번영의 터전으로 삼아주길 빈다. 강한 성위요, 방패와 병기가 되신 주님께서 나를 키워주고 오늘 이 날 이 때까지 품어준 우리 대한민국 국군을 그 강한 오른팔로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서 간성으로서의 소금의 직분을 다할 것을 믿습니다.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을 떳떳하게 잘 길러서 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염려해 주시고 애써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

박흥주[163]

1939.12.15~1980.3.6.

이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 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164]

김재규[165]

1926.3.6~1980.5.24

우리의 죽음은 저들의 야만성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땅에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윤상원[166]

1950.9.18~1980.5.27

일본군 출신 정일권과 백선엽이 모함 공작을 벌여 광복군의 씨를 말렸다.[167]

김홍일 장군

1898.9.23~1980.8.8

전체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다면,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

박관현[168]

1953.6.10~1982.10.12.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시라소니 이성순

1916.2.29~1983.1.25

내 죽거든 마당이 보이는 넓적한 곳에 묻어달라.

김정호

1952.5.27~1985.11.29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이한열 열사

1966.8.29~1987.7.5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죽지 못한 게 한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나라의 법이 이렇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내 할 말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남기겠다. 내 유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이다!!

지강헌[169]

1954~1988.10.16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유재하[170]

1962. 6.6 ~ 1987.11.1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가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나라. 이구 씨가 보고 싶어요

덕혜옹주[171]

1912.5.25.~1989.4.21.

2.9.1.6. 1990년대[편집]

199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

가수 김현식

1958.1.7~1990.11.1

추락한다. 탈출하겠다. 아, 전방에 마을이 보인다. 탈출 불가…

이상희 대위

1968~1991.12.13

보안과장님 금년엔 꼭 진급하십시오!

윤도영[172]

1953~1991.12.18

(울먹이며)피해 아동에게 미안합니다... 부모님께 너무 큰 죄를 졌습니다...

홍순영

1967.03.02~1991.12.18

이 쓸모없고 하찮은 목숨에 아무런 미련 없습니다.

윤용필

1959~1992.12.29

가난해서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국선 변호사는 형식적으로 얼굴만 내밉니다
검사님께 부탁합니다. (사건 기록을) 피해자 위주로 허위 작성하는 수가 있습니다.
작은 사건을 크게 만들 수 있고 가해자에게 인색합니다. 공직에서 뇌물 받아 먹고 돈과 배경없으면 처벌당하는 것을 재검토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김삼중

1955~1992.12.29

참선 잘 하그래이.

성철 스님

1912.4.6~1993.11.4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정일권

1917.11.21~1994.1.17

내 소원은 죽은 다음 대성산혁명렬사릉 동지들 옆에 묻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겠다고 김정일 당 조직비서도 내게 약속했다.

김일성[173]

1912.4.15~1994.7.8

나는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론에 의해 심증으로 재판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죄 지은 것은 달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고수의 죄를 개별적으로 낱낱이 따져 파악하지 않고 언론 보도에 의해서만 처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오태환

1959~1994.10.06

(불교식 삼배를 한 뒤) 나는 한겨례신문만 봅니다. 가장 정직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족에게 죄송합니다
저를 마지막으로 앞으로 두 번 다시 사형 집행이 없기를 바랍니다.

서채택

1946~1994.10.06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환

1968~1995.11.02

죄인 주님 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이 죄인을 받아주옵소서

강동은

1972.10.27~1995.11.02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빕니다. 나는 큰 죄를 짓고 죄인의 몸으로 이곳에 왔지만 내가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납시다.

김현양

1972.6.17~1995.11.02

...할 말 없습니다.

문상록

1971~1995.11.02

소장님, 목사님, 자매님 여러분들로 인해 영안을 뜨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형수는 세상 사람이 보는 것 같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이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형 제도가 없어지고 종신형으로 대체하여 재소자 위해 전도하고 살 수 있도록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날로 마무리하지만, 재소자를 위해 전도하며 살기를 원했는데…

강문섭

1974~1995.11.02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 예수님 안 믿는 분이 계시다면 꼭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피해자 분께 죄송합니다.

백병옥

1974~1995.11.02

제 몸을 실험용으로 필요한 데 쓰기를 바랍니다.

온보현

1957.4.6~1995.11.2

엄마, 대성공이야~~ 낼 갈게....
짐 다 싸 놨어 새벽에 갈게
엄마가 해주는 밥하고 김치 너무 먹고 싶어.....[174]

김성재

1972.4.18~1995.11.20

내가 하늘나라로 떠나거든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내 몸은 태워서 부산 앞바다에 뿌려주기 바란다.

장기려

1911.10.5~ 1995.12.25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을 한글로 적는 것은 아무래도 유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 이 글을 봤을 때 나를 이해하길 바래서이다. 내가 오랫동안 각오해 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약을 복용해왔다. 그 이유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2집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활동 중 군대도 가야하고 내 가족들을 또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엔 너무도 벅차다. 새해를 맞이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난 이제껏 진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사람들에겐 정말 죄송하다.
하나님, 부모님, 전무님, 실장님, 정형.승만.세진(이 셋은 동등하다.) 태석이 등등 너무 미안하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내 동생들이 이루었으면 좋겠다. 난 항상 생각해 왔다. 무엇이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못 이긴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난 더 이상 힘이 없다. 차라리 미국에서 평범하게 공부나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게 할 말은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진실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 못 하겠지만 나를 정말 지켜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도 알 것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없길 바란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PR을 잘해 2집이 많이 성공적이길 빈다.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난 항상 밝게 살아왔으니까..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는데...그러고 싶었는데... 전무님께 정말 죄송하구요 실장님께도 죄송하구요 다른 바램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리 어머니 좀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정현이 승만이 세진이는 정말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그리고 저 용서해주세요....그게 저의 마지막 바램이에요.

여러분 서지원이에요. 서지원입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저 사랑해주신 거 정말 감사하구요.
더 이상 저를 못 보게 되더라도 저를 항상 기억해주시구요.
여러분 다 몸 건강히 새해 복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구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서지원

1976.2.19~1996.1.1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음악에 눈이 뜨이는 것 같다. #

김광석

1964.1.22~1996.1.6

간첩...

이한영

1960.4.2~1997.2.25

돈 많은 자들을 증오한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가지지 못한 것 뿐이다.

김선자

1939~1997.12.30

내 사체를 병원에 기증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고 구원 얻기를 바랍니다.

유영택

1968~1997.12.30

내 시신은 화장(火葬)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175]

최종현

1929.11.21~1998.8.26

2.9.1.7. 2000년대[176][편집]

200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안녕?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환성이야.
정말 만나고 싶었어.
넌 내 목소리 듣고 싶지도 않았니?

제가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저의 이 좋은 기분을 전해드리려고
이렇게 왔거든요.

어때요?
제 좋은 기분이 전해지나요?
조금 전까지 기분 나빠한 일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기분 전환하면서
좋은 기분으로 하루 잘 보내세요.
아셨죠?

김환성

1981.02.14~2000.06.15[177][178]

2.9.2. 21세기[편집]

2.9.2.1. 2000년대[편집]

200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저 세상에 가서도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순정효황후 위패가 모셔져 있는 백운사에서 49재를 지내달라.

성옥염 상궁

1920~2001.5.4

에이, 괜히 왔다 가네.

중광 스님

1934.1.4~2002.3.9

"아들아, 내가 이제 가야겠다. 근데 너 내가 왜 죽는지 아느냐?" (장소팔) / "아니 아버지. 금방 회복되실 텐데 어찌 그런 말씀을… 돌아가신다면 몸이 아프셔서." (아들) / "아니다. 심심해서 죽는다. 너도 늙어봐라. 늙으면 진짜 할 일도 없고 심심해 죽겠다. 그래서 세상을 뜨는 거야(더 재밌는 게 없나 하고)."

만담가 장소팔

1922~2002.4.22

엎드려! 쏘란 말이야...!

윤영하 해군 소령

1973.11.24~2002.06.29

잘 잤어요. 여긴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179]

송혜정[DG]

~2003.02.18

...좀 있으면 중앙로역을 지난다.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181]

서동민[DG]

1982~2003.02.18

저녁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깐 오늘 빨리 퇴근해요![183]

김인옥[DG]

1974~2003.02.18

지현아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줘.[185]

허현[DG]

1976~2003.02.18

엄마가 여기 와도 못 들어와![187]

김귀순 씨의 딸[DG]

~2003.02.18

아... 안 돼... 안 돼![189]

이현진[DG]

1984~2003.02.18

불이 났어. 나 먼저 하늘나라 간다. 할렐루야...아멘.[191]

김창제[DG]

1935~2003.02.18

엄마 지하철에 불이 났어.
(엄마: 영아야, 정신 차려야 돼.)
엄마 숨을 못 쉬겠어.
(엄마: 영아, 영아, 영아...)
숨이 차서 더 이상 통화를 못하겠어. 엄마 그만 전화해.
(엄마: 영아야, 제발 엄마 얼굴을 떠올려 봐.)
엄마 사랑해...[193]

이선영[DG]

1984~2003.02.18

어무이! 지하철에 불이 나 난리라예.
(황점자 씨: 뭐하노, 빨리 나온나.)
못 나갈 것 같아예. 저 죽지 싶어예. 어머이 애들 잘 좀 키워주이소.[195]

박정순[DG]

1972~2003.02.18

열차에 불이 났다. 살아 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꿋꿋하게 살아라.[197]

최금자[DG]

1941~2003.02.18

내 한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면, 나 죽은 게 아깝지 않아요.

육우당[199]

1984.08.07~2003.04.26

명예회장님께서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회장 모실때 보면 저희 자식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 당신 너무 자주하는 윙크 버릇을 고치세요. /지이 엄마, 모든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짐만 남기는군요. 지이, 영이, 영선, 이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은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지이야, 오늘 보니 더 이뻐졌더군. 나 때문에 너의 생활이.... 사랑해. 영이, 너를 볼 때마다 어른이 되가는 것을 느끼는데 너는 굳건히 잘 살 것이야. 영선아, 너하고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구나. 지이, 영이, 영선, 엄마 잘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라.[200]

정몽헌[201]

1948.09.14~2003.08.04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장명부[202]

1950.12.27~2005.4.13

노 대통령에게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이라크에 한국 군인들을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그들의 자식을 이라크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모든 한국 군인들은 이라크에서 나가야 합니다.
제발,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왜 당신은 왜 당신은 한국군을 이라크에 보냈나요?
고국에 게신 한국 동포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발, 대통령님! 제발 부시! 제발, 노무현 대통령! 제발 이라크에서 나가 주십시오.
제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203]

김선일[204]

1970.09.13~2004.06.22

엄마 사랑해. 내가 꼭 지켜줄 거야.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게 돼버렸는데 인정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힘듦을 알겠어…

엄마 생각하면 살아야 하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내가 꼭 지켜줄 거야. 늘 옆에서 꼭 지켜줄 거야.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 혼자 버티고 이겨보려 했는데… 안 돼… 감정도 없고… 내가 아니니까. 일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맨날 기도했는데 무모한 바람이었지. 일년 전이면 원래 나처럼 살 수 있는데 말야.

아빠 얼굴을 그저께 봐서 다행이야.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 하나뿐인 오빠. 나보다 훨씬 잘났는데 사랑을 못 받아서 미안해. 나 때문에 오빠 서운한 적 많았을 거야.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먹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가족끼리 한 집에서 살면서. 10년뒤쯤이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다 해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장 많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엄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꼭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
마지막 통화: 언니…고마웠고 미안했고 힘들었어. 꼭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했던 사람. 고마웠어-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날 사랑해 줬던 사람들-만나고 싶고 함께 웃고 싶었는데…일부러 피한 게 아니야. 소중한 걸 알지만 이젠 허락지 않아서 미안해.

이은주

1980.12.22~2005.2.22

맛있어, 맛있어. (おいしい、おいしい。)[205]

백남준

1932. 07. 20~2006. 0
1. 29

인성검사를 했는데,

답변들이 다섯가지야.

아주그렇다,꽤 그렇다,보통 그렇다,그렇지 않다, 매우 아니다

이런식으로 되있는데,

질문에 대해
답을 체크할때마다

내가 정신병자 일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도중에 포기.

hugspa[206]

1989?~2006.3.22

나 살고 싶다!

김형은[207]

1981.4.25~2007.1.10

여기 생활은 괜찮아. 한국 식당이 와서 밥 해주는데 반찬도 많고 군대 밥보다 맛있고 고기도 끼니마다 나와. … 여기 위험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구 6개월 동안 건강히 있다가 갈 테니까 그때 봐요. 그럼 나중에 전화할게!-2006.9.29. 아프가니스탄에서 막내 장호가.[208] 또는 라덴이 형 잡으러 간다.[209][210]

윤장호 하사(당시 병장, 사후 추서.)[211]

1980.9.21~2007.2.27

나는 모세처럼 바다를 가르고 내 동포들을 이끌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떠날 수도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아이들과 형제자매들을 위한 것이다.내 삶이 이렇게 끝나기를 기대해왔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너희들이 나한테 해준 만큼 총알로 되갚아주마.
내가 이런 짓을 할 때까지 너희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힘없고 약한 나의 형제자매들 박해받는 동양인들을 위해서 나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212]

조승희

1984.1.18~2007.4.16

어머니… 어머니 아아, 어머니…

권정생

1937.9.10~2007.5.7

아직 죽기는 이르다.[213]

이언

1981.2.5~2008.8.21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희 사랑해주세요. 욕하지 마시고 사랑해주세요. 우리 선희처럼 착한 사람 없어요. 어려운 가정 꿋꿋이 이끌어나가고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하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린 적 없고 힘들어도, 자신이 가장 힘들 텐데도 웃으면서 격려해주고 이런 사람 없어요. 제발 저 대신 우리 선희 감싸주고 사랑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중략) 선희야 사랑해. 이 방법밖에 없어서 미안해. 사랑해 선희야. 미안하고 미안하고 사랑해 미치도록…. 장기는 만약 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다 써주세요. 죽고 나서 빨리 발견되면 쓸 수 있을 텐데…. 기도할게요.

안재환

1972.6.8~2008.8.22?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 사채니 뭐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나를 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최진실

1968.12.24~2008.10.2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수환 추기경

1922.7.2~2009.2.16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214]

노무현 전 대통령

1946.9.1~2009.5.23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215]

김대중 전 대통령

1924.1.6~2009.8.18

아빠, 밖에 천둥이 쳐요.

이석규[216]

2003.08.26~2009.11.08

현재 사형을 폐지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요즘 사형제도 문제가 다시... 덧 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217]

정남규

1969.3.1~2009.11.22

2.9.2.2. 2010년대[편집]

201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Everything is good.[218]

이태석

1962.11.5~2010.1.13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법정[219]

1932.10.8~2010.3.11

오늘 안으로 모든 실종자들을 책임지고 구조해 내겠다.

한주호[220]

1958.9.8~2010.3.30

그동안 잘 대해줘서 고맙다.[221]

손창섭

1922~2010.6.23

아버지 대신 내가 아파야 하는데… 미안해, 미안해.

박용하

1977.8.12~2010.6.30

성도들에게 감사한다.[222]

옥한흠

1938.12.5~2010.9.2

드디어 이사가끝났다 내군생활에도 말년에 편지를 써보는군
내일 날씨안좋다던데 배 꼭 뜨길기도한다.[223]

서정우 병장

1989.8.13~2010.11.23

내가 죽으면 나를 청바지 입혀서 화장해 달라.

트위스트 김[224]

1936.4.6~2010.11.30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최고은[225]

1979~2011.1.29

항공기 진동이 너무 심해서 고도 컨트롤이 안 돼... 곧 디칭(비상착수)할 것 같애... 아...

이정웅[226]

1969~2011.7.28

공을 던지고 싶다….

최동원[227][228]

1958.5.24~2011.9.14

내려오다 죽을 뻔했네. 목표 A지점에 도착 실패. 눈과 가스를 동반한 낙석으로 운행 중단한다.
전진캠프로 하산할 예정이다.

박영석[229]

1963.11.2~2011.10.20?

1. 미국과의 심리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합법적인 핵 보유국으로 올라 미국의 영향력을 크게 악화시켜야 하며 국제제재를 풀어 경제 발전을 위한 대외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6자 회담을 우리가 핵을 없애는 회의가 아니라 우리가 핵을 인정하고 핵 보유를 합법적으로 전 세계에 공식화하는 회의로 만들어야 하며, 제재를 푸는 회의가 되어야 한다.
2. 중국은 현재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지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국가이다.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자신의 유훈의 집행과, 김정남을 비롯한 친정 식구들의 거취, 국내외 자금관리책을 고모인 김경희에게 맡기도록 하라.
4. 너의 큰형인 김정남에게 배려해야 한다. 그 아이는 절대 나쁜 애가 아니다. 그의 애로를 덜어주도록 해야한다.
5. 내 시신은 영구 보존하라.

김정일[230]

1941.02.16~2011.12.17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제가 그동안 말을 못하지만, 매일 라면이 없어지고, 먹을 게 없어지고, 갖가지가 없어진 이유가 있어요. 제 친구들이라고 했는데 서원규하고 우재관이라는 애들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절 괴롭혔어요. 매일 라면을 먹거나 가져가고 쌀국수나, 용가리, 만두, 스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걸 매일 먹거나 가져갔어요.

3월 중순에 XXX라는 애가 같이 게임[231]을 하자고 했는데 협박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매일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 등수는 떨어지고, 2학기 때쯤 제가 일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 애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해서 엄마한테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빡지까지 써줬어요. 게다가 매일 우리 집에 와서 고 나중에는 XXX이라는 애하고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키우라는 양은 더 늘고, 폭행 정도도 늘고, 수업시간에는 공부하지 말고, 시험문제 다 찍고, 돈벌라 하고, 물로 고문하고, 모욕을 하고, 단소로 두들겨 패고, 우리 가족을 욕하고, 문제집을 공부 못 하도록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몰래 따돌리고, 온갖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는 등 그런 짓을 했어요.
12월에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또 밀레 옷을 사라고 해서 자기가 가져가고, 매일 나는 그 녀석들 때문에 엄마한테 돈 달라하고, 화내고, 매일 게임하고, 공부 안하고, 말도 안 듣고 뭘 사달라는 등 계속 불효만 했어요.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너무 죄송했어요. 하지만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가족이었기에 쉽게 죽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몸은 성치 않아서 매일 피곤했고, 상처도 잘 낫지 않고, 병도 잘 낫지 않았어요. 또 요즘 들어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는 전화를 했을 거에요. 그 녀석들이 저한테 시켜서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은 다음 오시기 전에 나갔어요.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남한테 말하려고 했지만 협박을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쯤에 김○○이나 윤○○이란 애들이 자세하게 설명해줄 거예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은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저를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저를 폭행했어요. 또 제 몸에 칼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을 욕했어요. 저는 참아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걔들이 나가고 난 뒤, 저는 제 자신이 비통했어요. 사실 알고 보면 매일 화내시지만 마음씨 착한 우리아빠, 나에게 베푸는 건 아낌도 없는 우리엄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우리 형을 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제가 일찍 철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마 여기 없었을 거에요. 매일 장난기 심하게 하고 철이 안든 척 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아마 제가하는 일은 엄청 큰 불효인지도 몰라요. 집에 먹을 게 없어졌거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내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단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살며 효도도 한번도 안한 제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러웠어요. 제 이야기는 다 끝이 났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저희 가족을 기다릴게요.

12월 19일 전 엄마한테 무지하게 혼났어요. 저로서는 억울했지만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 녀석들은 그날 짜증난다며 제 영어자습서를 찢고 3학년 때 수업하지 말라고 XXX은 한문, XXX는 수학책을 가져갔어요. 그리고 그날 제 라디오 선을 뽑아 제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 하였고, 5시 20분쯤부터는 아까 한 이야기와 똑같아요.

저는 정말 엄마한테 죄송해서 자살도 하지 않았어요. 어제(12월 19일) 혼날 때의 엄마의 모습은 절 혼내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저를 걱정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부모님한테나 선생님, 경찰 등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걔들의 보복이 너무 두려웠어요. 대부분의 학교친구들은 저에게 잘 대해줬어요. 예를 들면 윤○○, 김○○, ○○○, ○○○, 최○○, 이○○, 장○○, 황○○, 최○○, 전○○, 이○○, 장○○, 이○○, 김○○, 남○○, 유○○ 등 솔직히 거의 모두가 저에게 잘해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저는 매일매일 가족들 몰래 제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가끔 저에게 용돈도 주시는 아빠, 고맙습니다.
매일 제가 불효를 했지만 웃으면서 넘어가 주시고, 저를 너무나 잘 생각해주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항상 그 녀석들이 먹을 걸 다 먹어도 나를 용서해주고, 나에게 잘해주던 우리 형, 고마워.
그리고 항상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내 친구들, 고마워.
또 학교에서 잘하는 게 없던 저를 잘 격려해주시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서 또 문 열고 저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제가 진실을 말해서 억울함과 우리가족 간의 오해와 다툼이 없어진 대신,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들을 포기했네요. 더 이상 가족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저는 오히려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려서 후련하기도 해요. 우리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우리는 한 곳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아마도 저는 좋은 곳은 못갈 거 같지만 우리 가족들은 꼭 좋은 곳을 갔으면 좋겠네요.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괴롭힘 당하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저의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분명히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권승민 올림-

P.S.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권승민[232]

1998.2.25~2011.12.20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강영우[233]

1944.1.16~2012.2.24

모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머니 사랑한다.

우정호[234]

1988.9.30~2012.8.23

우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못난 자식이 그동안 가슴에 못을 박아드렸는데 이렇게 또다시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드리고 떠나게 된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이젠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가져갑니다. 이 못난 아들 세상을 더는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어 이만 삶을 놓으려고 합니다. 행복한 날들 가슴 뿌듯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이 드네요.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환희, 준희야. 너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아빠마저 주고 가는구나, 불쌍한 애들... 이 모자란 부모를 용서하지 말아라. 법적 분쟁을 위해[235] 저의 재산은, 누나 조성미에게 전부 남깁니다.

조성민

1973.4.5~2013.1.6

고마워[236]

임윤택

1980.11.15~2013 2.11

남자도 사람이다![237] / 믿고 싶다. 남성을 일으킬 수 있다니.[238]

성재기[239]

1967.9.11~2013.7.26

고향과 지역주민으로부터 큰 사랑과 은혜만 입고 보답도 못했습니다. 지역의 산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그렇게 소중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서민, 농민, 어렵고 소외받는 분들 눈물을 닦아주고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정치 하고 싶었는데... 부족하고 어리석은 탓에 많은 분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웠네요. 어려운 때, 진실의 촛불을 들어야 할 때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과분한 사랑으로 맡겨주신 막중한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당과 당원동지들에게 한없이 미안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새로운 희망을 찾는 노력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미안하고 감사합니다.[240]

김종률

1962. 12. 25~2013. 8.13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

채명신

1926.11.27~2013.11.25

충사.. 죠죠.. 러브라이브..
다음주까지 기다려야 겨우볼수있겠네요
어우 뭔 제주도를 3박4일로 가는지..링크

최민석(하루카씨)[SE][242]

1997.07.24~2014.4.16

배가 출발해야 하는데 2시간째 대기중이네요 아~ 피곤해 링크

전현탁(건9왕)[SE][244][245]

1997.04.15~2014.4.16

지금 타고 있다고요. 침몰하는 거에..살려달라고요.링크

최성호(레네미아(어르미))[SE][247]

1997.06.23~2014.4.16

엄마. 엄마 미안해. 아빠도, 너무 미안하고. 엄마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정말.

김영은[SE]

1997.10.29~2014.4.16

저 진환이 친구 준민인데 진환이한테 전해드릴게요. 별 일 없을 거예요.

박준민[SE]

1997.11.20~2014.4.16

걱정하지 마. 너희들부터 나가고 선생님은 나중에 나갈게.

최혜정[SE]

1990.11.26~2014.4.16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

고창석[SE][252]

1974.07.31~2014.4.16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야 한다.[253]
'배가 침몰해. 구명조끼 없어. 미안해. 사랑해....[254]

전수영[SE][256]

1989.7.4~2014.4.16

나가려는데 문이 안 열린다. 하지만 헬기도 오고 구조하고 있으니 걱정마라. 괜찮다.

최창복[SE][258]

19??~2014.4.16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 해. 끊어.

양대홍[SE][260]

1969~2014.4.16

만약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다 하고 떠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가 남기는 이야기 편지 또한 내 유언장이다. 결혼 전 자살 충동의 경향이 굉장히 센 편이어서 조절하는 훈련이나 치료를 받았는데 아이들이 생기고부터는 너무 행복해서 저절로 치유가 됐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아들,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숨을 못 쉬겠어...[261]

신해철[262]

1968.5.6~2014.10.27

6개월만 더 있었으면...

김자옥[263]

1951.10.11~2014.11.16

언론인 들어라. 훌륭하신 분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생활하시죠. 저널리즘! 이것이 언론인들의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부디 잃어버린 저너리즘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짓눌러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최경락

1969~2014.12.23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264] 2억
김기춘 10만달러
이병기
이완구

성완종

1951.8.20 ~ 2015.4.9

짱구는 꼭 마무리짓고 싶다.

오세홍[265]

1951.7.17~2015.5.22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드디어 직선제로 선출된 부산대학교 총장이 처음의 약속을 여러 번 번복하더니 최종적으로 총장 직선제 포기를 선언하고 교육부 방침대로 일종의 총장 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부산대학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였는데, 참담한 심정일 뿐이다.

문제는 현 상황에서 교육부의 방침대로 일종의 간선제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서 올려도 시국선언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여러 국·공립대에서 올린 총장 후보를 총장으로 임용하지 않아 대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란 점이다.

교육부의 방침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주주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사건부터 무뎌있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학에서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오직 총장직선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 된다.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이며 국·공립대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닌 부산대학교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이라도 이런 참당한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를 봐도 부산대학교는 그런 역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총장 직선제 수호를 위해서 여러 교수들이 농성 등 많은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교수 총투표를 통해 총장 직선제에 대한 뜻이 여러 차례, 갈수록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총장 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너무 무뎌있다는 방증이다.

대학 내 절대권력을 가진 총장은 일종의 독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수회장이 무기한 단식농성이 들어갔고, 오늘 12일째이다. 그런데 휴가를 떠났다 돌아온 총장은 아무 반응이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은 충격요법밖에 없다.
메일을 통해 전체 교수들에게 그 뜻을 전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교수끼리 보는 방법으로 이미 전체교수 투표를 통해 확인한 바 있는 상황에서 별 소용이 없다. 늘 그랬다.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시국선언 등을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나도 그동안 이를 위해 시국선언에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지만, 개선된 것을 보고 듣지 못했다. 그것보다는 8·90년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방식으로 유인물을 뿌리는 게 보다 오히려 새롭게 관심을 끌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지난 날 민주화 투쟁의 방식이 충격요법으로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근래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내 자신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래도 그 희생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 몫을 담당하겠다.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중요하고 그 역할을 부산대학교가 담당해야 하며,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걸 감당할 사람이 해야 한다. 그래야 무뎌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각성이 되고 진정한 대학의 민주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가 굳건해질 것이다.

고현철

1961.6.10~2015.8.17

건강하게 지내라.

김상순

1937.10.20~2015.8.25

통합과 화합.

김영삼 전 대통령[266]

1929.1.14~2015.11.22

아…큰일을 마쳤네.[267]

이기택

1937.7.25~2016.2.20

뒷일을 부탁합니다.

김관홍[268]

1973.6.20~2016.6.17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례를 치러달라.

김영한[269]

1957.9.27~2016.8.21

코미디언 중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조의금을 받지 마라.

구봉서

1926.11.5~2016.8.27

사기혐의로 피소된건 너무 억울하다. 사랑한다.

하일성

1949.2.18~2016.9.8

박근혜는 내란사범 한 · 일협정 매국질 즉각 손 떼고 물러나라! 경찰은 내란사범 박근혜를 체포하라. 경찰의 공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경찰은 해산하라!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나의 죽음이 어떤 집단의 이익이 아닌 민중의 승리가 되어야 한다. 제도화된 수사로 소신공양을 수식하지 마라. 나는 우주의 원소로 돌아가니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마라!

정원

1953.11.9~2017.1.9

매우 고통스럽다, 매우 고통스럽다. 액체 스프레이를 맞았다.
[270]#

김정남[271]

1971.5.10~2017.2.13

긴급 상황입니다.
본선 2번 포트 물이.샙니ㅏ
포트쪽으로 긴급게
ㄱ울고 ㅣㅆ니다[272][273]

폴라리스 쉬핑 스텔라 데이지호 선장

19??~2017.3.31

내가 죽고 나서 허례허식에 돈 쓰지 말고 배우란 직업이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런 것에 돈 쓰지 마라. 그리고 연명 치료 하지 말고,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같은 거 하지 마.

김영애

1951.4.21~2017.4.9

유산은 내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기고 시신 처리는 그 가족에게 맡기겠다.

마광수

1951.4.14~2017.9.5

(전략)
세상과 부딪히는 건 내 몫이 아니었나봐.
세상에 알려지는 건 내 삶이 아니었나봐.
다 그래서 힘든 거더라. 부딪혀서, 알려져서 힘들더라. 왜 그걸 택했을까. 웃긴 일이다. 지금껏 버티고 있었던게 용하지. 무슨 말을 더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안녕.[274]

종현

1990.4.8~2017.12.18

그 과정에서 모멸감으로, 혹은 수치심을 느낀 제 후배들에게 먼저 마음깊이 사죄의 말을 올립니다. 덕분에 이제라도 저의 교만과 그릇됨을 뉘우칠 수 있게 되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청주대학교와 지금도 예술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정진하고 있을 청주대학교 연극학과생들에게 부끄러운 사과문을 쓰고 있는 저의 사죄를 전합니다.[275][276]

조민기

1965.11.5~2018.3.9

내가 죽으면 헬기 타고 8도 산하에 흩뿌려달라.[277]

김종필

1926.1.7~2018.06.23

저는 감금, 협박, 성추행, 강요는 절대 없었으며
당당하게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고 싶었지만
제 말을 믿지 않고 피해자라는 모델들이 거짓말에
의존한 수사, 일부 왜곡 과장된 보도로 인해
사회적으로 저는 이미 매장당했고 제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진실된 판결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롭고 너무 힘들어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억울한 누명은 풀리지가 않을 것
같아 정말 살고 싶었지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신경 많이 써주신 지인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죄송합니다.

스튜디오 실장 A씨

1976~2018.7.9

많이 피곤했지, 고생했네.[278][279]

노회찬[280]

1956.8.31~2018.7.23

내가 병세 때문에 너무 예민했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는데... 관대해져라.

정미홍

1958.7.27~2018.7.25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 사랑한다.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피해자 신모 씨[281]

1997~2018.10.14

딸: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재산 없다.
딸: 어머니에게 하실 말씀은요?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했다고 전해줘.[282]
프레임을 마친다.[283]

신성일

1937.5.8.~2018.11.4

문자 지금 봤네. 씩씩한 후배들과 함께해서 행복하고 즐거웠어.[284]

김일

1966.12.3~2018.11.18

세월호 사고시 기무사와 기무부대원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했음.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 때의 일을 사찰로 단죄한다니 정말 안타깝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지만 전역 이후 복잡한 정치상황과 얽혀 제대로 되는 일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금 모처럼 여러 비즈니스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즈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여러 사람에게 미안하다. 영장심사를 담당해준 판사님께 경의를 표하며 이번 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검찰 측에게도 미안하며 내가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으로 하고 모두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군 검찰 및 재판부에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가족, 친지, 그리고 나를 그동안 성원해준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군을 사랑했던 선후배 동료들께 누를 끼쳐 죄송하고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더욱 힘내서 열심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60평생 잘 살다가 갑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십시오.

이재수[285]

1958~2018.12.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주시오.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을 지원하는 문제를 나를 대신해 끝까지 해주시오.#

김복동

1926.5.1~2019.1.28

내용도 안보고 서브컬쳐를 무시했다.

영신중학교 학생 A군[286]

2004~2019.03.25

가족과 잘 협력해 사이좋게 이끌라.[287]

조양호

1949.3.8~2019.4.8

지금까지 남편 김대중과 자신을 사랑해준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하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또한 동교동 사저는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고, 노벨평화상 기금은 대통령 추모사업 기금으로 사용해달라.[288]

이희호

1922.9.21~2019.6.10

가족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 장례는 크게 치르지 마라. 조용하게 치러달라. 여보 사랑해.

정두언

1957.3.6~2019.7.16

그래도 행복했다.

강한옥[289]

1927~2019.10.29

항상 희망을 간직하십시오.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깁니다.

차동엽[290]

1958.5.31~2019.11.12

❄️[291]

김성훈[292]

1998.2.4~2019.11.23

잘자.

구하라[293]

1991.1.13~2019.11.24

2.9.2.3. 2020년대[편집]

2020년대

유언

인물

생몰년

당분간 키네써요

YouTuBe 리튬 Li Gaming[294]

2006 ~ 2020.06.07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최숙현

1998.06.08 ~ 2020.06.26

저를 믿어주고 응원해주신 팬여러분 감사합니다. 의석아 내 뒤를 부탁한다. 꼭 뉴스커뮤니티 유영기를 법의심판을 받게 해줘. 유영기 때문에 피해당한 내 팬들 또는 지인 누나들 형님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풀어주기 바란다. 천지암형님 제 억울한 원혼을 달래주세요. 제 삶은 여기까지 같습니다. 죽는게 두렵고 무섭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습니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신 가족과 누나들 형님들 팬들에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저는 단지 여려분보다 빨리 죽는거구요. 천지암형님께서 제 장례를 치뤄줬으면 좋겠네요. 제 장례식은 웃으면서 재밌게 해주세요.

진워렌버핏

1980.02.21 ~ 2020.07.08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 모두 안녕

박원순

1955.02.11 ~ 2020.07.09

1. 전우에게 인사하고 싶으니 유해를 바로 묻지 말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들러라.
2. 경기도 평택의 미군 부대를 찾아 부대 내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메시지를 남겨달라.[295]

백선엽

1920.11.23~ 2020.07.10

내가 과연 어떻게 되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죽는게 쉽진 않겠지만..
많이 미안해 엄마. 그냥 미안하단 말밖에 못하겠네.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296]

고유민

1995.02.09 ~ 2020.07.28

여러분 건강조심하세요..#[297]

ampstyle

1987.05.23 ~ 2020.09.06

정말 모두에게 너무 미안하다ㅡㅡ 나 때문에 이유 없이 고통 받고 욕 먹는 크루들, 친구들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내 갈 길로 떠나려고 함ㅡㅡ 끝까지 이기적일거니 차라리 미워하고 원망해주길

정말 지금까지 여한 없이 불행했고, 행복했으며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모든 날이 더할나위 없었던, 내 인생 전부이자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조준기를 가족으로, 대표로, 친구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해줬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리 부족한 나를 항상 보듬아주고 응원해줘서 고마웠다고. 이렇게 얼굴도 못 보고 죄만 짓고 떠나 너무 가슴 아프다고

정말 너무 미안해 모두.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나자!

*추신 : 코로나 시국이니 장례식은 가족끼리만 해주고, 지인들 부조는 남은 우리 가족들+크루들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 **은행 조준기(여행에미치다)로 보내놔주면 좋겠음ㅡㅡ

**사건은 사건 그 자체만으로의 과실을 따져주길. 불필요한 인과들로, 불필요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크루들이 새로이 시작해 나갈 때, 부디 많은 도움과 응원도 부탁드립니다. 잘못은 내가 혼자 한건데, 나머지 19명 까지 같이 싸잡아 욕 할 필요 없잖아요? 얼마나 능력 있고, 성실하며 나보단 그얼마나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괜히 나 때문에 이들 또한 피해 본 사람들인걸요.[298]

조준기[299]

1989.08.19~2020.09.09

로이 뷰캐넌의.. 그 The Messiah Will Come Again 그것도 유명한 곡이죠.. or 항상 감사합니다^^

디젤집시[300]

1972.04.29 ~ 2020.09.28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4:27 ~ 4:32)

한원주[301]

1926~2020.09.30

아니... 허... 나 조울증인가봐.. 내일 봐요.. 내일 봐요! 내일 킬게요~ 안녕~ 단바 단바~ 응.. 잘자고~ 안녕안녕! #

단팽이

1996.02.13 ~ 2021.01.30

처음에 제 본명 보고서 신기하다 생각하면서 보셨던 분들도 많으셨을텐데... 처음에는 신비한 느낌 마사지 여신 막 이런 얘기두 듣고 그런걸로 도 많이들 좋아해 주셔서 감사드렸고 제가 좀 어 너무 섹시한 쪽으로 어그로를 끌렸고 해서 실망하셨던 분들한테도 죄송한 마음이고 너무 상업적으로 접근을 했던거 같아요. 저한테 마사지 한번 받아보고 싶다 하셨던 분들한테 한번씩 또 해드리면 참 좋았을거 같은데... 방송을 한다는 그런걸로 좀 몸값을 높이고 그랬어서 죄송해요.

결혼을 안하냐는 질문들이 많아서 이제... 하~ 마지막인데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신비감을 갖고 계시는게 좋을거 같아서 말을 안할게요. 저는 좀 상처가 많아요. 그래서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고...

그리고 조울증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방송을 시작하고 그게 좀 다시 도져서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정신과 약을 3년정도 먹다보니까 너무 정신과 약을 먹는게 싫어졌었거든요. 정신과 약을 안먹고 버텨오다가... 요즘에는 계속 무기력이 저를 좀 지배했던거 같아요. 자는게 제일 행복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을 시키고 돈을 벌고 있는데... 나한테 잘해주지도 않고있었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좀 많이 안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거를 '좀 그만하고 싶다.' 어디 따듯한 나라가서 유유히 혼자 살고싶다라는 생각을 많이했는데 코로나가 끝날 생각도 안하고 저는 점점 좀 많이 지쳐가고 그래서 좀... 옛날부터 모아니면 도 이런 편이었어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돼서 가족들이랑 저를 좋아해주셨던 분들이랑... 제가 책임져야할 숍식구들이랑 지인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그리고 그동안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드릴려고 영상한 30번 찍은거 같아요. 외국팬분들한테도 영어로 좀 하면 좋은데... Hello, I'm Maetel. Thank you for loving me... Good bye.[302]

메텔

1985.12.29 ~ 2021.02.03

노동해방 백기완[303]

백기완

1932.02.29~2021.02.15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정진석 니콜라오

1931.12.07 ~ 2021.04.27

항상 좋은 그림위해 애써주시는 staff 분들. 감사합니다:)#[304]

제이윤

1982.09.27~2021.05.13

‘어느 자리에 있든 쫓기는 사람은 계속 쫓기게 된다. 어떤 자리에 있든 즐기는 자가 돼서 낭만 있게 살아라’

임영일[305]

1961~2021.05.19

병원에서 나가면 이맘때 날씨가 되어있을까용???😍🌹#[306]

이정주

1991.01.28 ~ 2021.05.30

대한민국을 밝혀라! 재신이 지도 하에 인화로 뭉쳐라. 기행복. 대한민국 해군만세.

최영섭[307]

1928.04.02 ~ 2021.07.08

충분해. 응 알았습니다. 엄청 추워. 엄청 추워. 오케이.

김홍빈[308]

1964.11.20 ~ 2021.07.19

우리 국민 모두 행복했으면...

이완구

1950.07.16~2021.10.14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노태우 전 대통령

1932.12.04~2021.10.26

잘가요 형님!!#[309]

김준성(자비스)[310]

199?~2021.11.[311]

아깝네. 바이 운동하러감. # (1시간 21분 53초부터.)

김경보

2001.07.21~2021.11.08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312]

전두환 전 대통령

1931.01.18~2021.11.23

이제 내 사회생활은 끝났다. 검찰과 언론이 나를 죽였다.

유한기

1955~2021.12.10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313]

김철민

1967.01.20~2021.12.16

일단은.. 10시가 넘었네요 여러분, 짧게 한다고 했는데 꽤 많이 했어요. 그쵸? 내일 여러분 얼굴로 봅시다. (많이 해 줬다는 채팅을 보고) 많이 해주기는, 재밌어서 한거지, 뭘 해줘. 내일은, 얼굴 보고 놀자고~ 예쁜 옷 입고 올게요~ 그럼 다들 잘 자고~

나처럼.. 이렇게.. 허약해지지 말고 잘 챙겨 드시고~ 운동도 많이 하시고~ 그럽시다. 영양제도 챙겨 드시고~ 저도 잘 먹을게요~ 이따 자기 전에 또, 먹고 자겠습니다 ~ 두끼 챙겨먹을 거야.
(중략) 가끔, 뭐 휴방날이든, 뭐 아픈 날이든 못킬 것 같을 때 이렇게 한 번씩 키는 것 괜찮을 듯? 응. 뭐 별로 힘들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고. 그럼 갈게요 ~ 내일 얼굴 보고 봅시다 ~

(잘 쉬고 제발 오래 방송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도네이션을 보고) 네~ 알겠습니다 잘 쉬고 올게요. 어이고 10만원 너무 고마워요.

(중략) 내일은 리액션도 몸 좋긴 하면 해 줄게. 그럼 내일 볼게 안녕안녕~ 트바트바~[314]

잼미님

1995.01.07~2022.01.24 (추정)

안녕...잘자.......

부디 그대 나를 잡아줘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제발 이 거친 파도가
날 집어삼키지 않게
부디 그대 나를 안아줘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제발 이 거친 바람이
나를 넘어뜨리려 해
저기 우리 함께 눈물짓던
그때 그 모습이 보여
이젠 눈이 부시던 날의 기억
그래 그 순간 하나로 살 테니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고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아직 모든 것들이 꿈만 같아
부디 다시 한번 나를 깨워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이제 잡은 두 손을 다신
놓지 마 제발
그대 이렇게 다시 떠나가는 날
이젠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
우리 이렇게 헤어지면
언젠가는 또다시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고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아직 모든 것들이 꿈만 같아
부디 다시 한번 나를 깨워줘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아줘
부디 다시 한번 나를 안아줘[315]
#

김인혁

1995.07.14~2022.02.04

.
.
그냥 날이 좋아서_,#

선가희

2000.10.07~2022.03.04

적당히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

정필도

1941.07.27~2022.03.21

여러분 제 말 잘 들리시나요? 마지막으로 영상 올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남깁니다. 제가 일주일전까지 멀쩡했는데 일주일 사이에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앞으로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덕분에 유튜브 수익으로 맛있는 거 사먹고, 댓글로 응원받아서 행복했어요. 제 마지막까지 인스타에 기록 남길거니까 영상 더보기로 인스타 아이디 검색해서 찾아오시면 될 것 같아요. 너무 고맙고, 유튜브 하길 너무 잘한 것 같아요. 그러면 이만 영상 마칠게요. 모두들 안녕. 다음 생애에, 꼭 봐요. 제가 언제 태어나서 100만 조회수가 넘어보고, 8천~9천명이 저를 구독해주시겠어요. 모두 고마워. 안녕.[316]

꾸밍

1999.06.18~2022.05.25

여러분들 오랫동안 시달리고 답답했습니다.
사실 이 화창한 계절이 돌아왔으니까,
여러분들 활짝 열린 세상 나오셔서 금수강산의 맛을 실컷 보시길 바랍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317]

송해

1927.04.27~2022.06.08

먼저 가서 미안해.
특히 엄마 아빠 할머니 오빠 제일 미안해.
마음이 내 마음이 살고 싶지가 않다고 소리를 질러.
내가 없는 일상이 어쩌면 허전하겠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살아줘.내가 다 지켜보고 있을게. 울지마. 몸 상해.

난 지금 하나도 슬프지 않아. 아주 의연하고 덤덤해.
아마 오랫동안 생각을 해와서 그런것 같아.

나는 너무너무 분에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어.
그래서 그게 나에게 충분해.
이정도면 됐어. 그러니 아무도 탓하지 말고 살아줘.

나는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잘 살아 모두들.
내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고 힘든 사람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어.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 어쩌면 내 전부였고 내 일부였어. 근데 그 삶은 사는게 쉽지가 않았어. 다른 어떤것도 하고싶지가 않아. 그게 너무 절망적이었어. 하고 싶은게 있다는건 축복이지만 그것만 하고 싶다는건 저주라는 것도 깨달았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까 지옥에 보내시진 않으시겠지.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앞으로 나를 돌봐주실거야. 그러니 모두들 걱정하지마.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들. 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워. 그게 나의 힘이었고 내 웃음이었어. 절대 잊지 못할 추억 가지고 끝까지 살았으니 나는 성공한 인생인것 같다. 부족하고 참을성도 없는 나를 품어주고 이해해줘서 너무 고마웠어. 표현 잘 못 해서 미안했어. 그래도 내 마음 알아줄거지.

그리고 나와 맺었던 모든 소중한 인연들 특히 선생님들 너무 감사하고 존경했어요. 인생의 수많은 것들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 울지마. 부탁이야.

유주은

1995.05.03. ~ 2022.08.29.

엄마 나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 희생자 김 모 군

2008 ~ 2022.09.06.

이철 의료원장, 2011년 10월 2일
내가 죽으면 장례식·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를 바라며,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법적절차가 필요하면 미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성명 : 김동길
주소 :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92
생년월일 : 1928년 10월 2일# [318]

연세대 의대생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319]

김동길

1928.10.02. ~ 2022.10.04.

(차를) 뺄 수가 없어. 다 막혀서. 큰일 났다 야. 열 수가 없어, 지금 문을. 지금 난리야. #[320]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화재사고 희생자 전우영 씨

1956 ~ 2022.12.29.


[1] 니계상 삼, 한음, 장군 왕협과 모의할 때의 발언이다. 모의 직후 앞서 언급한 인물들과 함께 한나라에 항복하러 가는 도중 전사하였다.[2]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 세자 유류에게 전했다는 고명(顧命), 즉 유언이다.[3]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로, 첫째 도절을 이어 태자에 올랐다. 이웃 황룡국에서 선물한 강궁을 꺾어 이웃 나라와의 화친을 깼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받았다. 이 말을 한 직후 나가 여진(礪津)의 동쪽 들판에 창을 꽂고 말을 타고 뛰어들어 자결했다.[4]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즉위 기사에 기록된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서 '선왕(先王)의 고명(顧命)'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5] 죽기 1년 전인 47년 7월 민중원으로 사냥을 갔다가 석굴을 발견한 뒤 신하들에게 남긴 말이다.[6]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훗날 늦게나마 왕위에 오르니 각각 파사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이다.[7] 《삼국사기》에서는 146년 12월 아들 수성에게 양위하며 한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태조대왕 후기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받는 현재로서는 《후한서》의 기록에 따라 121년 사망 당시 수성에게 남긴 유언으로 보기도 한다.[8] 《후한서》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165년 3월에 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9] 2세기 전반에 활동한 인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123년 10월 우보(右輔)가 된 이후 좌보(左輔) 목도루, 왕의 아들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였다. 차대왕 즉위 직전인 146년 10월 태조대왕에게 수성의 숙청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3월 차대왕에 의해 숙청되었다고 한다. 숙청 당시 멀고 가까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10] 비류수 전투 당시 고구려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위나라의 군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계책을 꾸며,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장수를 죽인 뒤 본인도 같이 죽은 충신이다.[11] 나해 이사금의 아들로 이 시기 신라의 명장으로 유명하다. 왜국 사신이 왔을 때 그의 무용을 띄워주자 술김에 "기회가 되면 너희 나라에 쳐들어가 너희 왕은 소금 만드는 노비로,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겠다"(…)라고 말한 것이 침공의 빌미가 되었다. 이 말을 남긴 직후 왜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아내는 이를 한으로 여겨 왜군 사신이 왔을 때 접대를 자청하고는 똑같은 방식으로 화형시켜 버린다. 이 결과 다시 대대적인 침공을 당하는데, 이번의 경우엔 격퇴할 수 있었다. 뒷날 우로의 아들은 흘해 이사금이 된다.[12]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속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 일본서기[13] 신라 진평왕 때 가잠성 성주. 가잠성을 공격한 백제군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 말을 남기고 느티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다.[14] 찬덕의 아들. 아버지의 공덕으로 출세해서 가잠성을 탈환했다. 그러다가 다시 백제군이 성에 쳐들어오자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15] 옥사에서 굶어 죽어갈 때 쓴 상소문이다. 의자왕은 이 상소를 무시했고, 결국 백제가 생존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16] 백제 부흥군의 장군. 풍왕과 갈등하던 끝에 결국 제거되었는데 복신의 처형을 망설이던 부여풍에게 달솔 덕집득이 반역자는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하자 덕집득을 노려보며 욕한 말이다. 원문은 '腐狗癡奴'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말이다.[17]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멸망한다. 이 유언 역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18] 원래는 '남북국시대'가 옳은 용어이지만, 아래의 인물들이 모두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편의상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19] 673년 6월 병석에 있을 때 문병을 온 문무왕에게 한 말.[20] 말갈족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외친 말이다. 이후 분노하여 적진을 향해 돌진하자, 말갈인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화살만 쏘아대는 바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끝내 고슴도치마냥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 쓰러져 전사하였다.[21] 《삼국유사》 〈기이〉의 기록으로,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앞의 문장을 말한 뒤 법사가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묻자 왕이 뒤의 문장으로 대답했다고 한다.[22]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의 대목은 현재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는 〈문무왕릉비(682)〉에도 등장하여 1차 사료와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23]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24] 고려사에 기록된 원문은 '浮生 自古然矣'이다.[25] 죽기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자는 신하 왕융의 상소에 내린 대답.[26] 통주에서 패하여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는데 요 성종의 회유를 받자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함께 잡힌 부장 이현운이 거란에 충성을 맹세하자 그를 걷어차며 일갈한 말.[27] 고려시대의 문신. 동북 9성으로 유명한 윤관의 아들로 김부식과 대립했다. 말년에 은거하여 '관승'이라는 승려와 함께 풀을 엮어서 만든 암자에서 지냈는데, 관승은 윤언이에게 "먼저 가는 사람이 여기 앉아 죽으면 죽어서 변전한다"고 말했다. 죽던 날 식사를 마치고 관승에게 "내가 갈 때가 되었으니 작별을 고하오"라고 말했고 관승이 전송하자 이 말을 남기고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암자 벽에 사세구를 써 놓고 앉은 채로 죽었다고 한다. 윤언이의 사세구는 사세구/한국 항목 참고.[28]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 자신의 가문에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내린 명령인데 과연 최충헌의 예상대로 그런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최충헌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여 최우를 유인하려 했으나 이미 최충헌이 문병을 끊으라고 말한 뒤라 먹히지 않았고 이내 진압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60년에 달하는 최씨정권의 시작을 연 인물답다면 인물다운 유언[29] 뒤에 나오는 최영 장군의 아버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에서 보이듯 이를 최영이 한 말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다만 최영 자신은 이 유언을 받아들여 검소하게 살긴 했다.[30] 그러나 최만생은 홍륜 일행에게 공민왕의 계획을 알려주고 같이 공민왕을 살해했다. 그후 홍륜과 최만생은 이인임에게 처형을 당했다.[31] 무덤에는 정말로 풀이 나지 않았지만 후세에 풀을 심었다고 한다.[32] 이는 무인정사 당시 무사히 도망쳤다가 자수하고자 할 때 주위에서 말리자 한 말로 실제로도 남은은 정도전과는 달리 별로 미움사지 않는 사람이었고 남은을 죽인 태종 이방원도 후에는 남은이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며 남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나 어쨌든 당시에는 제거대상이었는지 결국 죽었다.[33] 이방원의 습격을 받자 아들 정담이 "오늘 일은 정안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묻자 그에 대한 대답. 이보다는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가 유명하다. 사세구/한국 참고. 사실 기록상으로는 이보다 뒤에 정안군 앞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것이 나중이지만 이 부분은 의심을 받기도 한다.[34] 죽기 전 아들 태종에게 한 말. 그러나 태종은 창업자를 변방에 모실 수 없다는 이유로 장지를 도성 근처에 쓰되,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아버지 무덤의 봉분으로 삼았다. 원래 이성계는 사랑했던 아내 신덕왕후의 정릉에 같이 묻히고 싶었던 듯 하지만 아들이 신덕왕후를 증오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릉에 묻히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함흥에 묻히자고 생각해서 이런 유언을 한 것 같다.[35] 조선 초기의 무신. 태종 이방원을 도와 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나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세종의 장인 심온을 제거하려는 태종의 옥사에 휘말려 거열형으로 죽었다. 거열형을 당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36] 야사에서 나오는 유언으로 태종과 붙어 자신을 죽이는데 일조한 박은을 두고 겨냥한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37] 알다시피 세종대왕이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세종대왕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유언을 하였다. 실제로도 후일 상례를 너무 잘 챙기다가 죽는 왕도 나왔고 그보다도 이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왔으니 태종의 말은 현실성 있는 말이다.[38] 그런데 사실 세종도 세종이지만 전대인 태종 역시도 허조에게는 은인이다. 그 허조를 직접 잘 쓰라고 세종에게 지시한 사람이 태종이기 때문. 물론 세종은 어차피 태종이 말 안 해줘도 알아서 잘 썼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직접 골라준 인재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39]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2월 14일 기축 3번째 기사 - 임금이 동부승지 정이한(鄭而漢)에게 이르기를, "왜인·야인을 접대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 하고, 즉시 예조와 병조에 명하여, 해당되는 관리를 경계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이 앞서 임금의 몸이 완전하게 평복되지 못하여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사건을 아뢰지 않았으므로,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건을 아뢰매,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 처리하기를 물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밤 2고(鼓)에 이르러 도로 편치 않았다.(2월 14일은 음력 기준이며 세종이 숨을 거둔 것은 17일이지만 실록에 기록된 세종 본인의 발언으로서는 마지막 기록이다.)[40] 약 140년뒤 조선은 왜인에게 침략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41] 수양대군에게 철퇴로 얻어맞은 다음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다시 살해하러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자신이 투옥되리라 생각했는지 친 호통. 이 직후 살해되었다. 두번 죽은 셈.[42]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43]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세상을 떠났다.[44] 이 유언 때문에 기존의 석곽묘를 쓰지 않고 석회를 다져 넣었는데, 오히려 공기의 유입을 막는 이런 구조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대부 미라도 바로 그것.[45] 징비록에 기록된 유언. 허나 약 약 120년 후 조선은 임진왜란의 전화에 휩쓸리게 된다.[46] 실록에 기록된 공식적인 유언. 평소에 책을 좋아하던 것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신숙주다운 유언이라 할 수 있겠다.[47]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한 말이라고 한다.[48] 죽기 직전에 성종에게 올린 말. 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고 한다.[49] 사사 당시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말. 다만 이는 실록에 기록되지는 않은 야사의 기록이다.[50] 그후 3년 뒤에 사람들이 무덤을 파 보니 시체가 전혀 썩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김시습이 죽어 부처가 되었다고 여기고 화장을 해 사리를 봉안했다.[51] 그러나 겨우 10여 년만에 그의 아들 연산군이 이 일에 대해 희대의 복수극을 펼치게 된다.[52] 세조~연산군 대의 문관. 글에 뛰어난 문사였다. 사림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해 미움을 많이 샀으나, 무오사화 때는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있어야 한다"면서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모습을 보여 후일 사림에게 욕을 먹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를 무척 총애했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엔….[53]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사형 집행을 담당했었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령받았는데, 죽을 상황에서도 '은혜가 지극히 중하다' 고 하는 것은 '몸과 머리가 나누어짐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 조선 시대에는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사약형이 가장 명예로운 처형법이었고, 그 다음이 교수형, 그리고 다음이 참수나 능지처참 등이었다. 연산군이 이세좌를 숙청한 내용은 갑자사화 항목을 참고 바람. 참고로 연산군은 후에 죽은 이세좌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것도 모자라 머리를 효수하고 그 효수한 머리가 썩어버리자 뼈를 으깨어 바람에 날려보낸다...[54] 이세좌를 위해 온건한 의견을 올렸으며, 연산군에게 검소와 절약을 권하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금부도사에게 이 유언을 전해듣고 대노한 연산군은 이극균과 가까웠던 무사들을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55] 연산군의 학정에 간언하다가 전신에 화살을 맞았다. 그리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이 칼로 팔다리를 자른 후 걸어보라고 명하자 처선이 조롱한 말.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처선의 혀를 잘라버렸다.[56] 연산의 대표적 총신. 2012년 한국 영화 간신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다. 연산에게 수많은 미인을 바치며 그의 타락을 도왔으며 죽는 유언까지도 연산에 대한 아부였고 연산은 그를 매우 총애하여 그의 집으로 직통되는 길을 민가 수십채를 헐어 놓고 했으며 그가 죽자 매우 상심했다 한다. 바로 위의 사람과 참 대비된다.[57] 연산군은 중전 신씨와 같은 곳으로 유배되지 못했다. 신씨는 일찌기 연산군의 학정을 말리려 눈물을 흘리며 간했으나 연산군은 그 말을 듣지도,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도 않았다. 장녹수를 비롯한 난잡한 생활 속에도 황금에 중전의 덕을 기려 새기라고 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이 중전 신씨를 유달리 챙긴 일화가 꽤 있다. 심지어 아예 없는 예법과 절차를 만들면서까지 직접 옥책을 내리려 한 적도 있다.[58]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문장이다. 미쳐 날뛰던 갑자사화 때조차 유일한 브레이크 역할을 한 것이 폐비 신씨이다. 연산군이 폐위 후 유배를 갈 때도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59] 중종반정의 공신. 의정부 소속 종이었던 정막개의 고변으로 인해 역모 혐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매를 이기지 못한 끝에 혐의를 인정하고 능지처참당했다. 집행 직전에 대간이었던 집의 김협을 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며 김협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막개는 이 불분명한 역모 고변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나 정3품 당상관 자리에 올랐다.[60] 공식적인 유언.[61] 사약을 받고 나서 절명하지 않자 집행을 빨리 끝내기 위해 나졸들이 조광조의 목을 줄로 얽으려고 하자 이런 말로 일갈했다. 곧 독한 술을 가져다가 잔뜩 마시고 나서 절명했다고 한다.[62] 초기에는 역시 촉망받는 신진 관료였으나 조광조 일파가 수구세력으로 몰아가면서 돌변하여 결국 기묘사화에 앞장선 인물. 이후 국정도 나름대로 무난하게 이끌고, 외교문서는 사실상 전담했으며 영의정 자리에도 올랐다. 하지만 조광조를 죽인 일을 후회하여, 자신의 글을 자식들에게 모두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의 명필이자 뛰어난 문사였던 남곤의 글은 고작 시 한 수만 전해온다. 다른 기묘사화의 주도자들이 후에 조광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반면, 남곤은 천수를 누렸는데 아마도 이런 반성이 원인이 아니었을까.[63] 몸의 상태를 뜻하는 표현으로 쓰였다.[64] 그 전에 유조로 조광조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이복 동생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내렸다.[65] 그냥 평범한 유언같지만 사실은 사약 마시기 직전에 사약을 가지고 온 의금부 서리에게 농담으로 건넨 말이다. 다만 이게 실질적 유언은 아니다. 그 이후에도 말한 내용은 있는데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66] 이황은 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했는데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였다.[67] 권율의 아버지. 40이 넘도록 니트질벼슬살이를 하지 않던 아들 권율에게 이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이 말에 권율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벼슬길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고 한다.[68] 죽기 이틀 전에 남긴 말. 북쪽 변경으로 부임가는 서익을 만나려 했는데 가족들이 이를 말리자 한 말이다. 서익에게 <시무 6조>를 써 주고 이틀 뒤에 사망했다.[69] 북향사배를 끝내고 다시 전투에 임하면서.[70] 금산에서 1400여명의 의병으로 열 배의 적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하라는 부하의 말에 대답.[71]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자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왜병 두 명을 양팔에 끼고 강물에 뛰어들며 한 말. 이것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고 선조실록에서는 진주성 촉석루에서 분전하다가 이마에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2] 숨이 끊어지기 직전 아들이 손가락에 피를 내어 그의 입에 넣어주자 한 말.[73]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유언이라고도 할수 있는 이순신의 이 유언에 대해 최근에는 '후대에 누군가 임의로 붙여넣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정황상 그런 어감의 유언을 남기셨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戰方急, 愼勿言我死"이란 말은 가장 신빙성이 높은 1643년 이전 판본에는 등장하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찍은 1712년과 1795년 판본에만 등장한다. 즉 누군가가 임의로 붙여넣었다는 것.#. 하지만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 기사에 이원익이 이순신의 유언에 대해 이순신의 아들 이예에게 들은 내용을 인조에게 보고하는 기사가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유언 그대로이다. 따라서 이순신이 직접 한 유언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여기서 한 번 더 와전되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위인전의 창작.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와 유명해졌다. 상식적으로 총사령관의 죽음을 적한테는 당연히 알리지 말아야하는거고 잘 알다시피 여기서의 대상은 바로 아군이다. 전투 중 총사령관이 전사한 사실을 알면 병사들이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고 당황하겠는가?[74] 입적 직전 자신을 그린 영정을 보고 한 말.[75] 죽기 직전 광해군에게 남긴 말. 그러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76]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반란(혹은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을 부정했다.[77] 첫번째는 반정의 주모자인 이귀에게 처지를 하소연했으나 무시당하고 한탄에 차서 한 말. 당시 같이 참형당한 이위경이 아래처럼 반발했다고 전한다.[78] 두번째는 이이첨의 유언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이위경이 했다는 설도 있다.[79] 처형 직전 이이첨에게 반발하며 내지른 말. 그러나 이해득실에 따라 요리조리 편을 바꾼 이위경이 이렇게 몹몰이 할 자격이 있을지는….[80] 한음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다.[8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 때 반정군에게 잡혀 왔는데 인조가 군사에게 그를 묶으라고 하자 저 말을 하면서 애걸 했지만 군사가 발로 그의 입을 차며 네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후 박홍도를 살해하였다.#[82] 광해군 때의 조도사로 인조반정 이후 처형되었다.#[83]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이괄의 난 진압 때에도 활약했으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자결 직전에 남긴 말.[84] 김상용은 지독한 혐연가였으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기 위해 불씨를 찾았는데도 없자 거짓으로 담배를 피우겠다며 불씨를 달라고 한 말이다. 이것 때문에 후일 조정에서 김상용이 자살이 맞네 아니네 논란이 일었다...만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한건 인조 뿐이었고 대다수 신하들은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상용의 손자 등의 증언이 뒤따르자 자살로 인정했다.[85] 유언대로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밑에 묻혔다.[86] 자신을 산채로 5토막 내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자점에게 한 말. 이후 김자점은 효종 즉위 후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지만, 심기원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87] 허나 이 유언은 실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 남명이 죽지않고 남아있었다만 그 남명이 임경업이 죽기 불과 1년 전, 수도인 남경을 빼앗겨 시한부 신세가 되어버렸다.[88] 小叔, 당시 봉림대군. 즉, 효종. 혹은 인평대군으로 보는 설도 있다.[89] 인조, 효종조의 강직한 신료로 김자점을 맨 처음 탄핵한 사람이기도 했다. 민회빈 강씨의 죽음의 억울함을 지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형신을 받고 죽었다. 심지어 구언의 기간이었는데도! 김홍욱은 조정의 신료들에게 말하는 자를 죽여놓고 무사한 나라가 있었소? 라면서 왕을 설득해줄 것을 청했으나 죽게 될 것이 자명해지자 평소때 성격이 살아나서 나오는 오자서의 유언을 본뜬 말을 남기고 죽었다. 참고로 영조비 정순왕후 김씨의 5대조이자 추사 김정희의 7대조.[90] 김자점은 효종의 눈밖에 나있었기에 신속히 제거되었으나 이시백은 영의정까지 올라가며 중용되었고, 귀인 조씨의 자녀들(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도 조씨와 효명옹주의 남편 김세룡(김자점 손자)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는 와중에도 효종의 지극한 보호를 받아 귀양만 갔다가 숭선군과 낙선군은 1656년, 효명옹주는 1658년 해배되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과 숙종도 이들을 배려해주어서 다들 천수를 누렸다.[91] 어의 신가귀[92] 머리 위에 있던 종기를 어의 신가귀가 따서 피가 쏟아지자 한 말. 그러나 이 직후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다.[93] 송시열의 전 친구이자 라이벌. 주자에 대한 해석을 두고 대립하여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으로 유명하다. 숙종 때 환국으로 인해 사약을 받았는데 사약을 받기 전 남긴 말.[94]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되는 날 뒤주를 지키던 군사들이 세자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뒤주를 흔들자, 뒤주 속에서 세자가 한 말. 영화 사도에도 이 일이 재현되어 있다. 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째에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95] 정조가 의식을 잃으며 되뇌었다는 말. 수정전은 당시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던 곳이다. 정조 24년(1800) 6월 28일, "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처하는 곳이다."란 기록이 있다. 독살설 떡밥과는 별개의 문제. 참고로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까지 정조의 병간호를 했다.[96] 정약용의 셋째 형. 이 말을 남기고 하늘을 바라본 채 참수형을 당했다.[97] 여기서부터는 그레고리력이다.[98] 정수동, 혹은 정만서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해학가. 죽기 직전 친구들이 그 기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하는데 그를 소개한 어떤 책에는 아내에게 질문으로 한 말인 "저승에서도 외상 술을 마실 수 있을까?" 라 소개되어 있다.[99] 폭탄으로 인한 암살 사건 당시 남긴 말. 운현궁은 당시 흥선대원군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흥선대원군이 암살의 배후라는 설이 있으나 굳이 흥선대원군이 민승호를 죽여서 얻는 실익이 없다는 주장 또한 있다. 암살 사건의 범인과 배후는 결국 오리무중으로 남았다.[100]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이 말을 한 뒤 손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101] 매천야록의 기록이다. 사바틴 보고서에 의하면 말할 틈도 없이 죽었다[102] 이후 순검이 휘두른 칼에 맞아 사망 혹은 고종이 불러들인 보부상들에 의해 정병하와 함께 구타, 사망하고 갈갈이 찢겨져 종로-광화문을 돌아다니게 된다.[103]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후 폭우가 쏟아질 때 물에 빠져 순국하였다.[104] 대원군은 죽기 직전까지도 연신 고종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불효자란 오명을 쓰게 되었다.[105] 다만 이는 야사에서 나와서 신뢰성이 낮다.[106]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 안 의사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간수들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107] 가족들에게 남긴 실질적 유언. 안타깝게도 안 의사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행방을 찾지 못한 상황이며 효창원에 있는 묘는 가묘이다.[108]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아편덩어리를 삼켜 음독자살하였다. 아편을 삼킨 직후에 한 말.[109] 이위종의 아버지이자 외교관.[110] 이걸 들은 우치다 료헤이는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이라고 말했다 한다.[111] 그래서 이상설의 시신은 불태워지고 재가 바다에 날려졌다.[112]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최후 진술[113] 독립운동가로 신해혁명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과 함께 쑨원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정부 승인받도록 이끄는 데 커다란 활약을 했다.[114] 출처[115]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전해지기로는 순종은 이 유언을 이준구에게 남겼다고 하는데 이준구는 순종보다 한 달 정도 빨리 사망했다.[116] 사망 하루 전 병문안을 온 두 제자들에게 한 유언. 이 말을 하고 돌아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17] 도박으로 망하고 사망한다. 개명 전 동명이인인 이용구도 유사한 유언을 남김.[118] 일제의 방해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하나 성리학적 윤리가 남아있던 당시에는 시신을 해부하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던 터라 지켜지 않았을 수도 있다.[119] 그러나 그의 시신은 주변인들의 중론을 따라 국내로 들어와 안장되었다.하라고 한 사람은 못해주는데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그렇게 됐다[120]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 안창호의 비서이자 제자이기도 했다.[121]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이자 순교자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122] 독립운동가로 간도에서 교육 활동과 개신교 보급에 힘썼다. 제자들이 임종 직전 남길 말이 있냐는 말에 대한 질문.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김약연은 간도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명동학교를 세웠는데 윤동주, 문익환 등이 여기서 수학했다.[123] 평양 형무소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중 남긴 말.[124] 출처[125] 평생을 노름꾼이자 가문을 말아먹은 파락호인 척 하고 주변 사람들 몰래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송금한 걸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친구의 말에 한 대답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126] 시편 51편 1절만 옮겨보면 이렇다.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127] 이 때문에 수덕사에서 다비식을 진행하는 경우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덕숭산 수덕사의 가풍이자 문도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이 되었다.[128] 백범일지의 후기에 쓴 글.[129]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사, 정치인.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대표적 학살 가해자인 헌병 중위 심용현이 "어이, 이관술.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나?"고 조롱하자 이에 응수한 대답이다. 그리고 바로 학살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민족 만세란 말은 부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30] 이 문장은 편지를 쓸 당시 상황을 영화화한 포화 속으로 포스터에서 인용되었다.[131]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문근 사도 요한 신부의 동생으로,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다 한국전쟁 발발로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1950년 8월 10일 71명의 학도병만으로 인민군의 진격을 막은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하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전해지지 못하고 사후 수습할 때 몸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132] 이 편지 부분은 당시 포항여중 전투를 영화화한 포화 속으로에서도 나온다. 극 중에서는 최승현(빅뱅의 T.O.P)이 쓴다. 근데 배역과 실제와는 나이와 학력 등 전혀 맞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133] 이문근 신부는 여러 성가를 작곡한 작곡가이다. 이우근도 가톨릭계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피난 와중에도 김대건 신부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 성지를 들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134] 석주명의 고향인 평안도 사투리는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아 'ㅈ'를 'ㄷ'로 발음한다.[135] '나비 박사'로 유명한 나비연구가. 한반도의 나비를 깊이 연구하고 모든 종류를 정리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만나 그가 평생을 기울여 채집한 나비 75만 마리로 만들어진 표본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가던 중 늦다고 빨리 가다가 대낮에 총 매고 술 먹던 청년과 스쳤는데 부딪힘을 당한 청년이 술김에 미쳐버렸는지 석주명을 향해 저기 인민군 장교가 간다며 붙잡는다. 이에 석주명은 이와 같은 말을 남겼으나 이것은 유언이 되어버렸다.. 술 먹은 청년들은 말을 무시하고 석주명을 쏴죽이고 히히 웃고는 거적에 말아 개천 옆에 유기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천하의 개쌍놈들[136] 1956년 처형 직전 남긴 말.[137] 그러나 마지막 약속이자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망 이후 처와 두 아이는 소식이 없다.[138] 교수형 직전 남긴 말이다. 이 말에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고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운 후 처형대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하 대표적인 조작된 사건이자 사법살인. 자세한 내용은 진보당 사건을 참고.[139] 죽기 직전에 벼를 한번 보고 싶다고 제자들에게 말했고 제자들이 한국농업연구소에서 벼를 가져와 병상의 박사에게 쥐어주자 한 말. 왜 최후에 흔하디 흔한 벼를 보고 싶어했는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텐데,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쌀이 남아도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후에 통일벼까지 만들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가 컸기 때문에 벼의 생산량이 중요했다. 벼의 이기작은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추위때문에 성과가 나지 않고 있다.[140] 1960년 4월 19일 데모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 미아리 고개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 당시 한성여중 2학년.[141]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중상을 입었지만 같이 총상을 당한 고등학생들에게 응급처치를 양보하고 사망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수학물리과 3학년.[142] 대표적으로 임화수.[143] 1961년 사형 집행 전에 남긴 말.[144] 옥중편지 중에서[145] 재일 한국인. 여고생을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로 학급 내 무기명 투표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당시 18세). 미성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형당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0년 12월 12일자 방송에서도 그를 다루었다.[146] 화랑세기의 저자로 유명한 떡밥왕. 아들에게 이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47] 점자책을 쌓아두면 책의 무게에 눌려 나중에 점자를 읽기 힘들어진다.[148]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의 창안자.[149] 북한에서 온 남파 간첩이 이승복 어린이에게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자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공비들은 대검으로 이승복의 입을 찢어 살해했다.[150] 실제로 이 말을 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이승복 항목 참조.[151] 수습 조종사로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때 납치범이 갖고 있던 점화 된 폭탄을 몸으로 막아 큰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 후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일등 보국훈장을 받았다.[152] 이 말은 모친 이소선 여사를 평생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게 만든 유언이 된다. 이 여사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라고 오열하며 대답했다고 한다.[153] 처음은 분신을 하면서 외친 말, 2번째는 분신 이후 쓰러지면서 남긴 말이고, 마지막 둘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배고프다는 말 그대로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하던 날 이틀 전에 라면 하나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154] 유한중학교는 중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지역 주민들의 희망사항 때문에 설립되었다가 점차 중학교가 늘어나면서 1978년에 폐교되고 대신 유한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지금의 유한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지금도 건재.[155] 그런데 놀라운 점으로,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그 1만 달러조차 안 받으려고 했다! (유일링은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유일선이 그 1만 달러의 실질적 상속자였다.) 마지못해 받긴 했으나, 반만 쓰고 남은 돈은 사회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 유언에 따라 유일한 박사의 전 재산은 유한양행에서 설립한 재단에 증여되었으며, 유일한 박사의 딸 유재라 여사도 유언을 그대로 이행한 것을 넘어 1991년 타계하면서 아버지의 길을 따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156] 이 내용은 실질적으로 공개된 유언이고, 사망 2일 전인 1973년 11월 20일 장남인 김상문 전 삼천리자전거 대표(당시 기아산업 부사장)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해 오늘의 기아산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모두가 나라의 덕이다. 나라가 독립되고 국력이 신장하지 않으면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다.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는 데 힘이 되기 바란다.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윤리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종업원들은 남이 아니라 내 식구요, 동기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항상 따뜻하게 보살피는 데 정성을 다하여라. 우리 회사에는 고생을 많이 한 임원들이 있다. 애비를 대하듯 그분들을 잘 모셔야 한다."[157]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회사인 기아자동차와 국내 최대의 자전거 제조사인 삼천리자전거의 창업주. 박정희가 주도해서 일으킨 5.16 군사정변 후, 부정축재자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게 했을 당시 기아도 5천만원이라는 엄청난 벌금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평생을 기술자로 살아온 인물의 유언이었다.[158] 참고로 출생년도가 서적마다 다르다. 1905년이라 기록한 책도 있고 1906년이라 기록한 책도 있다. 일단 여기서는 1905년이라 기록했다.[159] 당시 합창단원으로서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생 장봉화(1957-1974) 양.[160] 실제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161] 실제로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뻔뻔하게 잡아떼기보단 진짜 억울해서 남긴 말일 수도 있다.[162]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주변에서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묻자 이 말을 했다고 한다. 흔히 박정희의 마지막 말로 알려져 있다.[163] 김재규의 부하이자 10.26 사건의 가담자. 군사재판으로 1심 사형 확정후 집행장에서 최후진술[164] 하지만 그의 유언과는 다르게 그의 최후진술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10.26 사건과 관련한 다른 진술들과 기록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10.26 사건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65]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듣고 싶은 이는https://www.youtube.com/watch?v=ftjlJ-kt_Dw&t=685s 이곳에서 들으면 된다.[166] 1980년 5월 26일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167] 박경석에게 남겼다는 말.[168]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5.18 민주화운동이 끝난 뒤에 지명 수배되었다가 1982년 4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옥중 단식투쟁을 하다가 사망하였다.[169] 88년도에 일어난 지강헌 일당 인질 탈주극 사건에서 지강헌이 했던말. 그 후에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하고서 그 음악을 들으며 그 후 유리파편을 목에 찔러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특공대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참고할 것. 다만, 영화다운 허구도 섞여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170] 이 말을 형에게 하고 동창회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결국 이 말이 유언이 되었다.[171] 사실 글 자체는 1983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에 KBS 뉴스파노라마 취재팀이 낙선재를 찾아 낙서에 가까운 친필 메모를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기 때문.[172] 그는 끝까지 폭행치사를 주장하고 실제로 논란이 많았지만 끝내 사형이 집행되자 이렇게 말했다. 해당 보안과장은 그날 잠을 못 이뤘다 한다.[173] 그러나 김정일은 우상숭배를 위해 유언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엠버밍해서 주석궁에 박제했다. 김일성의 빨치산 출신 동지들이 수령의 유언을 지켜줄 것에 대한 공동명의로 된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바쳤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유언이 무시당하는 것은 한국사 태조들의 전통 게다가 김정일 본인은 아예 자신을 박제하게 했다.[174] 11월 19일 성공적으로 지상파 라이브 공연을 끝낸 다음 어머니에게 한 말. 저 말을 하고 난 뒤 다음 날 김성재는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다.[175] 시신 화장은 이루어졌으나 화장시설에 관한 사항은 님비현상과 대기업이 장묘사업에 나서냐는 등의 부정적 여론으로 답보 상태였다가 세종특별자치시 은하수공원에 화장터를 지어 기증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176]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177] 2000년 6월 10일 감기몸살로 입원, 걱정하는 팬들을 위해 사망 3일 전 음성사서함을 통해 남긴 말로 사실상 유언이 되었다. 놀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평소 김환성이 팬들에게 자주 말하던 말투와 내용으로 음성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 메시지를 남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3일 후 사망했다.[178] 이 날은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이 진행되고 있던 날이었다.[179] 대구 지하철 참사 사고 발생 7분 전(오전 9시 46분) 예비 신부 송혜정 씨가 예비 신랑 이호용 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DG] 180.1 180.2 180.3 180.4 180.5 180.6 180.7 180.8 180.9 180.10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181] 대구 지하철 참사 3분 전 오전 9시 50분, 서동민씨가 선배 송두수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183] 대구 지하철 사고 발생 4분 전(오전 9시 49분) 김인옥 씨가 남편 이홍원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185] 개신교 모임 강사 허현 씨가 강사 강지현 씨에게.[187] 오전 9시 54분(사고 발생 1분 후), 대학생 딸이 어머니 김귀순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189] 오전 9시 58분(대구 지하철 사고 발생 5분 후), 어머니에게.[191] 부인에게 한 마지막 말.[193] 장계순 씨와 딸 이선영 씨의 마지막 휴대전화 통화 내용.[195] 노모 황점자 씨에게. 이날 그는 직장을 얻으러 가는 중이었다.[197] 아들에게 남긴 말.[199] 청소년 동성애자이고 천주교 신자이다. 이 내용은 유서 중 일부분.[200] 전자는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후자는 가족에게 쓴 글이다.[201]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투신하기 전에 쓴 글.[202] 죽으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 벽에 남긴 글.[203] 실제 진술은 영어로 했다. 항목 참조[204]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에게 납치되어 피살된 한국인 희생자.[205] 아내가 차려준 장어 덮밥을 먹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206] 네이버 지식iN 자살 사건의 사망자. 이 글은 자살 당일 블로그에 올린 인성검사라는 제목의 마지막 글이다.[207] 기사원문[208] 고인이 부모에게 2006년 9월 29일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보낸 지 1년도 채 안되어서 고인이 되었다.[209] 고인의 미니홈피 상단의 마지막 자기소개문구.[210] 유서를 찾을 수 없어서 이 둘로 대체함.[211] 탈레반 연관 무장테러단체의 자폭테러에 휘말린 한국 군인. 2006년 9월에 다산부대 8진 소속으로 통역병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2007년 2월 27일 바그람 기지에서 자살폭탄테러로 인해 전사하였다. 향년 27세. 통역병인 터라 현지인 기술교육 통역을 위해 기지 정문 앞에 나가 있던 중에 변을 당했다. 미군 1명과 현지인 20명 등이 사망한 테러였다. 사망 당시 병장 계급이었고 사후 하사 추서.[212] 해당 발언은 유언의 일부이다. 전체를 보고 싶다면 항목 참조[213] 사고나기 몇달전 미니홈피에 남긴글.[214] 사저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란 이름의 hwp 파일의 내용.[215] 일기장의 마지막 문구.[216] 탤런트 이광기의 둘째 아들. 사망 이틀 전 신종플루 판정을 받고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인공호흡기를 끼고도 이광기와 정상적으로 소통을 했다고 한다. 대화 내용은 그저 퇴원하면 장난감을 사준다는, 흔히 부자가 나누는 대화를 했다고. 얼마 안 가 곧 의식을 잃었고,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하려했지만 이광기가 석규 군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여서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 그만하라고 했다고 한다. 글로는 저리 적었지만, 심폐소생술은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아마, 아버지로서 마지막만큼은 편히 보내고 싶은 심정에 나온 말로 보인다.[217] 자살 직전 노트에 남긴 메모. 이외에 별다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기사 참조[218] 선종 직전에 남겼다는 말로서, 특이하게 영어로 유언을 남겼다. 의미는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혹은 "모든 것이 다 좋다.", "다 괜찮다."로 해석된다. 이 유언을 끝으로 손을 들어 모여있던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에게 강복을 준 후 선종.[219] 입적 전 날 남긴 말. 유언장에는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고 쓰여있다.[220] 천안함 피격 사건 구조작전 중 순직자[221] 부인에게 남겼다고 하는 말.[222] 소천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수첩에 이 말을 적었다. 출처[223] 연평도 포격전 전날 싸이월드에 쓴 글[224]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의 조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배우이다.[225]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 2006년 영화 <격정 소나타> 제작 이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가 이웃집 문 앞에 이 말을 쓴 쪽지를 놓았는데, 이를 본 이웃사람이 최씨의 집을 찾아갔지만 최씨는 이미 숨져 있었다. 사망 전에 췌장염과 갑상선 항진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국내의 복지 수준과 민생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드라마의 제왕의 등장인물 이고은은 이 최고은 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226] 아시아나항공 991편 추락 사고 당시 부기장.[227] 가족들은 그가 의식을 잃을 때마다 야구공을 손에 쥐어줬는데,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에서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손에서 야구공을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228] 그의 아들이 KCTC에 참여한 동영상도 존재한다.참조[229] 한국 등산가로 8천미터 14좌 산을 최단시간으로 등정하고 북극과 남극도 등정하여 세계 최초 탐험가 그랜드슬램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러나 2011년 10월 20일 안나푸르나를 새로운 등정로로 올라가서 그 날 마지막으로 실종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사망날짜가 정확하지 않다. [230] 그러나 이 유언 중 이루어진 것은 시신 영구보존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없다. 미국한테 기싸움에서 눌려 빌빌 기고 있으며, 중국은 이미 북한을 이용해 먹었다. 또한, 김정남과 관련된 것은 전부가 간단히 씹혀버렸다. 그리고 김정남은 김정일이 사망한 지 6년 후 살해당했다. 지 애비 유언도 씹었으면서 자기 껀 이루어지길 바랐나? 자업자득[231] 메이플스토리 [232] 2011년 대구 중학생 집단괴롭힘 자살사건의 피해자.[233] 한국계 첫 백악관 차관보이자 한국인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234] KT 롤스터 소속의 게이머, 향년 만 23세. 사망 직전 어머님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포모스에서 25세라고 한 것은 출생년도인 1988년을 1살로 보았기 때문.[235] 문맥상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236] 임윤택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당시 일어나지도 못할 몸상태였지만 아내를 불러 있는 힘껏 안아주며 말했다고. 본인의 어머니에게는 "엄마" 라고 한마디 하며 돈봉투를 건네드렸다고 한다.[237] 마포대교에서 투신하기 전 남긴 말이라고 한다.[238] 투신하기 전 트위터에 올린 글.[239] 푸른늑대회(당시에는 남성연대)의 대표였다.[240] 투신 2시간 전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SE] 241.1 241.2 241.3 241.4 241.5 241.6 241.7 241.8 241.9 241.10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242] 실제 유언은 아니고 마지막으로 루리웹에 올린 게시글. 사고 당일인 4월 16일에는 생사불명이었으나, 4월 20일 새벽,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가득 들어찼다.[244] 세월호 사고 1일 전이자 세월호 출항 날이었던 4월 15일은 현탁 학생의 생일이었다. 당시 현탁 학생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이제 나온다면서 뽐뿌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링크[245] 사고 당일에는 생존자 확인조차 서두르는 중이라 생사불명으로 확인했으나, 사고로부터 2주 후인 5월 1일,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차올랐다.[247] 최성호 군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트위터에 업로드한 글이며, 이 글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트윗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역시 사고 당일에는 생사불명이었으며, 4일 뒤인 4월 20일,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가득 차올랐다.[252] 사망 당시 향년 43세였으며 끝내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2017년 5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253] 사고직후 어머니와의 통화중.[254] 침몰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보낸 남자친구와의 마지막 문자.[256] 사망 당시 25세였으며 기간제 교사인 이지혜 국어교사와 함께 아이들을 구하고 5월 19일에 발견되었다.[258] 마지막으로 며느리와 한 통화라고 한다.[260] 당시 세월호 사무장.[261]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신해철이 의식을 잃기 직전의 말. 신해철의 매니저가 언급한 말로 이 말이 결국 사실상 유언이 돼버렸다.[262] 2014년 10월 의료사고로 사망. 유서 자체는 그가 생전에 썼던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다.[263] 장남의 결혼이 이듬해 3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죽기 전 아들의 결혼을 매우 기대했고, 며느리가 될 사람도 매우 마음에 들어해 주변에 자랑했었다는 지인들의 말이 있었다.[264] 이 부산시장이 당시 현임이던 서병수인지, 전임 허남식인지는 끝내 미제로 남았다.[265] 암 투병 중이었던 그의, 딸인 오소영 씨가 성우 갤러리에 글을 올리면서 그의 말을 대신해서 전했다. #[266] 죽기 전 차남 김현철 씨에게 필담으로 남긴 유언이다. 글을 넘기기 전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라는 말을 남겼고, 이 글을 쓴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아무런 말과 글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267] 죽기 직전에 한 말은 아니고, 사망 전날, 6년간 집필해온 자서전의 원고 작업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한 말이다.[268]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이다.[269]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이었으나,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과의 갈등으로, 민정수석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후 과음으로 간이 안 좋아져서 사망하였다. [270] 원문은 영어이다. (Very painful, very painful, I was sprayed liquid.)[271] 김일성의 장손이자, 김정일의 장남이다.[272] 맞춤법대로 수정하면 '긴급상황입니다. 본선 2번 포트에 물이 새고 있습니다. 포트 쪽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습니다.[273] 침몰사고 직후 선장이 선사 당직자에게 보낸 마지막 카카오톡 문자[274] 스스로 목숨을 끊기 9일 전 디어클라우드의 보컬 나인에게 유서를 전달했으며, 자신이 사망한 뒤에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275] 실제 유서는 따로 존재하지만, 미공개 상태이다.[276] 자신의 행위를 후배를 위한 것이었다고 포장하며 잘못을 회피하는 듯한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사망 직전은 아니고 2018. 2. 27의 공식 사과 입장을 밝히기 전인 26일에 보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네티즌의 여론은 반반이지만 대체로는 애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이기적이고 비겁한 선택을 했으며 죄없는 피해자들에게 죄책감을 심기까지 했기 때문. 그외에도 언론의 과도한 여론몰이에 대해 성토하는 의견이 존재한다.[277] 자신의 외동딸인 예리 씨에게.[278] 투신 직전 자신의 수행 비서에게 마지막 격려를 한 마지막 말이다.[279] 유서에는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라고 썼다.[280] 정의당의 원내대표로,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자살했다.[281] 범인 김성수에게 기습당하기 1시간 전에 여자친구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282] #[283] #[284] 후배 성우 정재헌에게 보낸 생전 마지막 문자 메시지 내용. 이 문자를 보내고 난 뒤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285] 박근혜의 동생인 박지만과 전인범의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중장 예편.[286] 학생 본인은 현자의 손자를 읽고 있었다가 교사의 오해로 인해 얼차려를 받고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항목 참조[287]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진 그룹의 회장연임을 계속해서 희망하는 외아들 조원태가 사업에 다시한번 관여하려는 누나 조현아에게 으르렁 대기 시작했고 누나의 편을 들어준 여동생 에밀리 리 조에게까지 경영권 싸움을 시작하는 등 3남매가 졸지에 원수지간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원태는 이 문제로 인해서 어머니인 이명희 이사장의 집에서 꽃병을 깨뜨리고 난동까지 부린 것은 덤.[288] 하지만 차남 김홍업과 삼남 김홍걸이 동교동 사저와 노벨평화상 기금 상속/소유 문제로 다투고 있어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홍걸이 동교동 사저 부지를 국유화하겠다고 하면서 갈등이 깊어질 것으로 보이나 김홍걸이 더불어민주당에서 제명되면서 동교동 사저 부지 국유화는 무산되었다. 2021년 6월 9일 이희호의 2주기 전날에 김홍업과 김홍걸은 동교동 사저에서 만나서 극적인 화해를 했고 유언대로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기로 합의했다.[289]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문재인이 트위터 계정에 남긴 글에서 유언 내용이 대략적으로 공개되었다.[290] 무지개 원리로 유명했던 가톨릭 사제.[291] 눈[雪]의 결정 이모지[292] 실족사 하루 전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293] 자살하기 하루 전인 2019년 11월 23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294] 원주 아파트 일가족 살인사건의 피해자. 사망 몇 시간 전 유튜브에 업로드한 영상의 더보기란 내용이다.[295] 장녀가 전한 두 가지 내용[296] 개인 컴퓨터에서 발견된 유서 전문[297] 입원 중 올린 마지막 트윗 내용. 트윗을 올린 지 3일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298] 9월 1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유서 내용.[299] 여행에 미치다 대표[300]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기 3일 전 유튜브에 남긴 마지막 말과 자막.[301] 국내 최고령 현역의사.[302] 생전 유튜브 마지막 영상.[303] 생전 투병 중 마지막으로 쓴 글귀.[304] 2021년 4월 14일 마지막으로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글이다.[305] 야구선수 임찬규의 아버지[306] 림프종으로 투병하던 중 마지막으로 투고한 인스타그램 포스팅 내용이다.[307] 대한민국 예비역 해군 대령이자 최재형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의 부친.[308] 구조대가 전화기 배터리가 충분한지, 몸은 괜찮은지 물어본 것에 대한 답변. 남도일보[309] 사망 전 올라온 마지막 영상에서 박민규가 복불복에 걸려 강제 귀가하게 되자 한 말. 이 말이 영상 속 그의 마지막 말이다.[310] 더블비의 매니저 겸 카메라맨.[311]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1994년생인 더블비 멤버인 장명준, 박민규에게 형님이라 부르고 진국이네 멤버인 1997년생 신일국, 1998년생 오진영이 형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김준성(자비스)는 1995~1996년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