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장24절 해석 - yohanbog-eum4jang24jeol haeseog

=====4:1,2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남들과 무의미한 충돌을 피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종종 바리새교인들과 변론 하신 일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그들과 충돌하기를 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에 시기심을 발하였다. 예수님께서 실상 세례를 베푸신 일은 없었으나 소문이 잘못 퍼져서 그가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처럼 선전되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진리와 사실대로 믿는 것보다 뜬 소문을 얼른 청취하여 쉬이 전한다.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유대에서 갈릴로 가는 길은, 일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베뢰아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피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할 필요를 느끼셔서 그곳을 직접 통과하시게 되었다.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 "수가"라는 곳은 세겜을 가리킨다고 하나, 유세비우스(Eusebius)이래로 이 두 지방은 각각 다른 곳으로 생각되어 왔다. "수가"는 오늘날의 아스카(Askar)라는 지방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 수 24:32; 창 33:19 참조.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 여기 이른바, "그대로"란 말은 피곤한 태도를 숨김 없이 그대로 나타내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그대로 나타내신 태도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체휼(體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 4:15). "제 육시"는 유대시간으로 말한 것인데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를 가리킨다.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하신 동기는, 그 자신의 갈증을 멈추시기 위함보다 그 여인의 영적 요구를 채워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청구하신다. 그러나 그의 청구는, 언제든지 우리를 유익하게 해 주시기 위한 동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면 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물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알게 된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 그의 옷을 보고 알았는지, 혹은 그의 말을 듣고 알았는지 우리는 추측하기 어렵다. 어쨌든, 예수님은 일반 유대인과는 달리 민족 차별의 기분이나 감정을 전연 가지지 않으셨으므로 그 여자로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른 민족을 형제시하심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이스라엘 민족더러 그들 중에서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동포와 같이 대우하라고 하셨다(레 19:34).

======4:1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선물을 가리키고,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란 말은 메시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샘에서 솟아는 "생수"로써 성령을 비유하셨다.

=====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靈的)으로 알아 듣지 못하고 오해하였다. 곧, 물 길을 그릇도 없고 그 우물은 깊은데 거기서 생수를 길어낼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어디 다른 우물에서 길어 올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실상 그 지방에는 다른 우물이 없었다. 옛날에 야곱도 그 우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4:12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신다고 하니, 그 여자는, 야곱보다 위대한 자가 아니고는 그런 더 좋은 물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생수"란 것을 이 세상의 음료수로 아는 착각에서 한 말이다.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예수님은, 여기 물질적 생수와 영적 생수와의 구분을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란 말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을 다 함께 가리킨 것이니, 기독교 구원의 보편성, 곧, 무차별성을 보여준다.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란 말은 영적 기갈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생수로 비유한다(사 58:11). "솟아난다"는 말은 그 영적 생명이 무궁 무진할 것을 가리킨다.

====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 여자는 또 다시 주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늘 갈증 없이 생(生)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또한 물 길러 다니는 수고도 면하려 한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의 욕심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영적 요구를 채우려 함보다 육적 요구를 채우려 하는데 급급하다.

=====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주인공 없는 환경에서 중대한 생명 문제 있는 말씀을 주시기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만 여자에게 전도할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에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취하므로(불법하게라도) 이세상 만족을 찾았다. 심지어 방금 예수님의 전도를 듣는 중에 생수란 것도 이 세상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먼저 그릇된 인생관이 깨어져야한다. 그 여자의 생활은 개편되어야 한다. 그 뒤에야 진정한 생수를 받을 만한 준비가 성립된다. 생수 곧 복음이라는 보화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야 사는 법이다(마 13:45-46).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6:63). 사마리아 여자의 육적사상은 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부러 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육적 심리에 대한 심판이었다.

=====4:17,1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그 여자는 한 남편을 사귄 것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나 사귀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그 여자의 생활상을 지적하시면서 그 가슴을 뜨끔하게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다섯 남편이란 것을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한다. 곧, 사마리아 지방에는, 바벧론, 구다(Cuthah), 아와(Auva),하맛(Hamath), 스발와임(Sepharvaim)등 다섯 나라 사람들을 식민하였는데(왕하 17:24), 그 다섯 나라에서 들어온 이방 신(異邦神)이 역시 다섯이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남편은, 이교 사상(異敎思想)과 혼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그들의 종합 종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해석은 너무 상상적이다. 차라리 여기 이른 바 "남편"들은, 그 여자의 생활에 여러번 개가(改嫁)하게 된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생각된다.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이 여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에 놀라 이제 겨우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 그 여자는 중심에 있어서 이제부터 종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초자연(하나님)을 접촉하기 전에는 진정한 종교심과 영적 사색을 가져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이제부터 정상적으로 예수님에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4:20,21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여야 할 것을 본래부터 주장하여왔다(신 12:5, 16:2, 26:2). 사마리아 사람들은 게르심산에서 예배하여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바벧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을 게르심산에 세웠다(400 B.C). 그 뒤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미워하였다. 그 여자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신약적 예배를 보여 주시므로 문제 해결을 주신다. 곧, 이제부터는, 게르심산이니 예루살렘이니 할 것 없고, 오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영적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란 말은 이 부분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약적 예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는 예배는 어떤 장소의 제재를 받는 외부적 예배가 아니고,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의식(意識)하고 부르면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게서 남이니라 -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5경만 믿고 다른 선지서들을 버렸으니 만큼,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을 전부 가졌으니 만큼, 진정한 종교를 받았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보수하였고 메시야(그리스도)도 그들 중에서 나오실 것인 만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하시게 되었다.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 )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하였다.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이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를 대망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신 18:15-18에 있는 모세의 예언에 기준하여, 사마리아인들도 메시야를 대망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 5경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심리가 이제 진정한 종교로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메시야인신 것을 알려 주신다. 이 부분(1-26)의 의미를 좀 더 명백히 알기 위하여 앞에 있는 강해를 자세히 읽음이 좋다.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 "제자들이 돌아왔다" 함은,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동네에 들어갔다 온 것을 말함이다(8절). 유대 랍비들의 예법대로는, 유대 남자가 거리에서 여자로 더불어 말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사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심이 이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에 그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았다.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그때의 물동이는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그것을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갔다. 그 여자는 그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중하였다. 그는 급히 동네에 들어가서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그 여자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알아 맞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 때문에 그를 믿었다. 그는 이제 그 사실에 대하여 증거한다.

=====4:31-34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양식으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참된 양식이라고 생각하셨다. 영적 양식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구속사업을 완성하심이다. 슐라텔(Schlatter)은 이 귀절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생명의 근거가 되며, 그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라고 하였다(Dieses Einssein mit dem gottlichen Willen, das ihn dem gottlichen Wirken dienstbar macht, ist der Grund seines Lebens und der Quell seiner Kraft.-Der Evangelist Johannes, P.130).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수한 의미로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 신자도 하나님의 일을 하므로 하늘의 생명력을 받는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한하여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이룰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요 6:2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금보다 귀하다(엡 2:8; 벧전 1:7). 우리가 전쟁하듯이 힘쓰지 않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딤전 6:12에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으며, 히 12:4에는 말하기를,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자는 믿음으로 남들을 위하여 행해야 될 선한 일들도 책임 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상 죽은 믿음이다(약 2:17,26). 엡 2:10에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다.

=====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하나의 속담으로서, 사람들이 추수 때를 고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일에 대하여는 미리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 추수에 대하여는 등한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적 추수의 때는 그때에 임박하였으니 만큼, 예수님은 화급히 일하셔야 될 것을 느끼고 일하셨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영적 추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영적 추수는 무엇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 두었던 진리가 이제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는데, 제자들이 그 성취된 진리, 곧,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영적 추수이다.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삯도 받고"란 말씀은 그 아래 말씀이 해설한다. 곧, "삯"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받음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 영생에 들어가도록 인도함이다. 믿음에 순종하여 돌아오는 자들은 그 전도자에게 상급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복음으로 돌아온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였고(빌 4: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살전 2:19).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 심은자는 수고할 뿐이고 거두지는 못한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수고에 해당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둔다"함은 제자들의 수고에 해당된다. =====4:38
이 귀절에 대하여는, 37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여기 말한대로,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사(役事)때문에 생겼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 역사를 누구에게 물어보신 일도 없이 아신 것은 (16-18),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 이것은, 마치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바울에게 한 말과 같다. 그 여자는 말하기를,"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하였다(행 16:14-15). 전도자를 귀하게 아는 그들 자신도 귀하다.

=====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그들의 믿음은 점점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친히 예수님 자신을 보았고, 또 그의 말씀을 듣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구주"라고 한 것도 (42절) 퍽 자라난 믿음으로 한 말이다.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 이것은, 남들의 증거에 의뢰함보다 자기들이 친히 예수님을 듣고 본 사실에 근거한 신앙을 말함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서기관의 그것과 달라서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신앙을 얻는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을 일찍부터 알았을 것이다(Godet).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도하실 때에 자기가 세상의 구주(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구주)이신 사실을 가르치셨다.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로 가시며 - "이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기간을 말한다(40절).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것은, 하나의 도중 행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일에 이틀을 잡으신 것을 보아,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개하는 열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릴리로 가시는 동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 왜 그리로 가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학설이 있다. (1) 고향이란 말은 유대를 가리켰거나(Keil),예루살렘을 가리켰다고 한다(Hoskyns). 그렇다면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께서 유대나 예루살렘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줄 아시고 갈릴리로 가신다는 뜻이겠다. (2)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심은 고향 나사렛에 가심과 다르다. 그가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고, 나사렛 이외의 다른 갈릴리 지방에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Calvin,Lagrange). (3)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실 때는 갈릴리를 목적지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향 갈릴리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도 초지(初志)대로 관철하시기 위하여 그리로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Grosheide).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의 하신 일(권능 있는 일)을 본 까닭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보다 떨어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었다(41절). 어떤 권능을 보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 믿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신앙이다.

====4:46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왕의 신하"는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함이다. 여기 "그 아들"이란 말의 헬라 원어(* )에 관사(冠詞)가 있음을 보아 "외아들"을 의미한다(Grosheide). "가버나움"은, 수리아에서 애굽으로 갈 때에 지나게 되는 도시로서 거기 관리들과 세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왕의 신하로서 사환을 보내지 않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을 보니, 예수님께 대한 그의 존경이 컸다.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이적 행하실 것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저 사람의 불신앙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인격을 믿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다.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왕의 신하의 신앙은 저렇게 약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1) 거리나 시간에 제재를 받을 듯이 생각하였으며, (2) 죽은 다음에는 못 고칠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맡아 취급하신다.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예수님은, 그 사람과 같이 가시지도 않고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다. 그는 아무 방법도 사용하시지 않고, 먼 거리에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마디 말씀만 하시므로 고쳐 주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를 보여 주심이다. 여기 "살았다"란 말의 헬라 원어(* )는 현재동사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 바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 "살아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 것일까? 그것은, 여기서 질병을 고침 받음에 관하여 사용된 말이니 만큼, 물론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다. 그러면, "살아난다"는 말이 요한 복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이 말이 예외의 의미(곧, 육신적 생명의 뜻)를 가진다는 말인가?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물론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 구원도 마침내 영생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도외시(度外視)될것은 아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써 영생에 관한 설교(11:25-26)의 기회를 삼으신 것이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곧, 4:46-53의 말씀은, 5장에 있는 영생의 생명 주시는 (영생은 몸을 제외하지 않음)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말씀의 예비적 계단이다. 요한 복음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살린다는 말씀) 귀절들을 영화(靈化)하여 버리는 해석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6).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부딪혀 믿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과연 건전한 신앙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고 믿음을 주셨으니, 그것이 그의 아들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심령의 병(불신앙 병)을 고치시는 것을 위주한다.

=====4:51,52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이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상고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그 아이가 어느 시간에 나았는지 상고해 보므로 그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 시간과 일치한 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의 신기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신앙은 한층 더 굳세어졌다. "제 칠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한 시 경이다.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 아비가 예수님을 믿음에 따라 그의 온 가족이 믿음은, 계약 원리(契約原理)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실현이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그 집의 대표자인 만큼,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 온 집을 축복하신다. 창 17:7; 시 105:8-10 참조.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표적"이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는 2:11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신 표적으로써, 예수님은 자연계의 주님이신 사실을 나타내셨다. 여기 "두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 거리(距離)를 초월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시고저 하시는 일을 거리 관계로 못하시는 법이 없다.



4:1
주께서 아신지라 -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가졌던 대
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붓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를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떠나 갈
릴리로 향하신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에게 악감을 품
고 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때 그들의 분노에 자신을 내 맡기기를 원치 않으셨
다. 이것이 그가 유대를 떠나게 된 동기이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사마리
아에 가서 거하시려고 간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해야겠기
에 그곳에 가셨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의 부활에 의해 복음의 문이 열릴 때
까지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모으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무였다. 그는 이스라엘
양에게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교훈으로 사마리아인들을 영광스럽게 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고, 어떻게 보면, 우발적인-나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갈릴리로 물러가 자
신을 숨기려 했을까? 예수께서는 그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한 순
간이라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그의 시간을 이렇게 활용했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래
서 그는 정확한 순서를 따라 꾸준히 그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기를 원했다. 이는 또한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어떠한 두려움도 우리를 막지 못하도록 마음을 굳게 먹어
야 하며 동시에 지나치게 경솔하여 위험 속에 뛰어들어서도 안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자기의 소명에 열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중간 길을 택할 것이다.
비록 주님의 종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항상 주님을 따르려 할지라도, 무턱대
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주의 길로 정연히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명
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질주하지 않도록 유의할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바리새인들
만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것을 다른 서기관들은 우호적이었
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바리새파는 그당시 승승장구의 분노에 가득차 있었다. 아
니,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의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에
게 더 많은 제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기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들은
요한에게 기울어져 있어 그의 영예와 명성을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에 요한이 제자들을 보았을 때 바리새인
들은 요한을 나쁘게 보았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보고 그
들은 한층 더 격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이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의 전령에 불과하
다고 고백한 때부터 더 큰 무리가 그리스도께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한은 이
미 그의 사역을 거의 끝낸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점차 가르치는 직분과 세례의 직분
을 그리스도에게 넘겨 주었다.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의 손을
의탁하여 행하신 세례를 그리스도의 세례라고 부른다. 이는 그 세례를 베푸는 사람의
인격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힘이 세례의 주(主)에 달려 있음을 가
르쳐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례의 주가 되시는 예수의 이름과 명에 의해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직접 베풀어진 것과 다름없이 우리의
세례가 우리를 깨끗게 하고 새롭게 하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특별한 힘을 얻게 된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외적으로 이 예식을 행하는 것을 삼가신 것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스스로 세례를 베풀지 않고 비천한 사람의 손을 의탁해 세례를 행한
것은 그렇게 해도 세례의 능력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시대를 통하여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에 의하여 내적으로 우
리에게 세례를 베풀 뿐만 아니라, 우리가 비천한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징, 그 자체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늘로서 손을 내밀어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신 것과 똑같이 간주되
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집행한 세례가 그리스도의 세례라면 어떤 사역자가 세례
를 베풀든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례가 사역자의 악덕에 의하여 더럽혀
졌다고 헛소리를 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는 재세례파(Anabaptists)들을 논박하
기에 충분하다. 어거스틴도 도나티스파(The Donatists)에 대항하여 같은 논법을 적절
히 구사하였다.


4:5
수가라 하는 동네 - 제롬(Jerome)은 바울라(Paula)의 비문(碑文)에 수가는 세겜
(Sichem)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분명히 세겜은 수가의 옛날 이름이
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가 살 때 쯤은 아마 수가라는 이름이 쓰였던 것 같다. 장소
에 관하여는, 수가가 그리심 산 옆에 있던 동네라는 데에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이곳은 시모온과 레위가 그 주민들을 살해했던 곳(창34:25)으로 세겜 사람 아비
멜렉 이후에 이곳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곳은 편리한 곳이었고 그곳에 세
번째 동네가 들어섰다. 그리고 이곳을 제롬의 시대에 네아볼리라고 불렀다. 이 모든
내용을 한데 모아 복음서 저자는 모든 논쟁을 제거하고 있다. 모세의 글에서 이곳은
야곱이 요셉의 자손들에게 주었던 땅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심 산은 세겜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
는 나중에 이곳에 성전이 세워졌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이곳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살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6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 그는 피로한 척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쳐 있었다. 사
도가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말한 대로, 우리를 체휼(體恤)하고 우리와 고통을 함께
맛보기 위하여, 우리의 약함을 스스로 짊어지셨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시간이라는
요소도 있었다. 그는 당시 30세로서 피곤하여 한낮에 우물가에서 쉬어 가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제 육시는 낮 12시였다. 유대인의 시간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
까지 12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고 복음서 저자
가 말할 때 그는 피곤한 사람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구했을 때, 그는 단순히 그녀를 교훈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한 의도만으로 그리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갈증이 그로 하여금 무엇이든 마시고 싶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이 기회를 그 여자를 가르치는 데 활용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
니었따.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필요보다 이 여자의 구원을 앞세우셨기 때문이다. 그
래서 그는 참으로 경건한 가운데 그 여자를 훈계할 수만 있다면 그 여자에게 이야기하
는 여가와 기회를 족하다는 듯, 자신의 갈증을 잊어 버렸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눈에
보이는 물과 영적인 물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천국의 복음으로 자기에게 물을 거부했
던 그녀의 마음에 물을 주고 있는 것이다.


4:9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 이와 같은 힐문은 유대민족이 평상시에 사마리아
인에게 보여주었던 멸시에 대한 보복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외래민족 사이에 난 찌꺼기
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더럽혔고 여러가지 패역하
고 헛된 예식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그들은 유대인의 멸시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
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육신적인 멸시와 증오의 구실로
삼았던 것이 분명하다.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그와 같이 부패한 것에
대해 슬퍼하고 안타까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주어진 땅을 사마리아인들이 차지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시기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가 순수하고 바른 것
이라면 이들의 분파 작용에는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그의 사도들을 내어 보낼 때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라고
금했던 것이다(마10:5). 그러나 이 여자가 행한 것은 거의 우리 모든 이들에게 자연스
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존경받은 인간의 본성 안에 안주해 있어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악덕이나 악행을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인정치 않거나
우리의 행동을 긍정치 않을 때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화를 낸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검토해 보라. 하나님의 성령이 이를 제거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마음에 교만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유대인들이 자기 백성의
미신을 정죄하고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라는 유대인을 통하여 유대인들 모두를 모욕했
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나는 이 여자가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이말을 복음서 저자가 설명하기 위하여 삽입한 말씀으로 보고
있다. 어떤 의미로 택하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당신은 우리가 불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비웃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생
각한다. 만일 누가 이를 달리 해석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 않다. 나아가
서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유를 불문하고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하
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거짓된 열성을 빙자하여 사마리아인을
멸시했다. 따라서 죄악된 정욕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들은 쉽게 극
단으로 빠져 들어갔다.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그리스도는 이제 이 기회를 통해 그의 성령의 은혜
와 능력을 전하고 있다. 그것도 주님께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말괄량이
같은 여자에게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고 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훌륭
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이 불행한 여인에게 갑자기 창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따르는
제자가 될 만한 요소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은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물론 모든 여자가 창녀는 아니다. 또 모든 남자가 어떠한
무서운 죄를 범한 것으로 낙인이 찍힌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자신의 뛰
어남을 내세워 천국 복음과 양자됨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
은 사람과의 대화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하나의 모형으
로서, 우리에게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은사를 주실 때에 어떤 자격이나 가치에 따라 사
람을 택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선 언뜻 보기에는 주님께
서 유대에 그와 같이 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지나치고 이 여자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
누는 것이 놀랍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인격 가운데 선지자 이사야가 한 말씀
의 진리가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
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
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라는 문구와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하는 이 두 글귀를 나는 서로 다른 것으로 읽는
다. 그리고 나는 후자가 전자를 풀이하는 것으로 본다. 그 여자가 그리스도를 대면함
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만일
'또'라고 하는 연사(連辭)대신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 즉 네게 말하는 이가 누
구인지 알았더면"이라는 설명을 붙였다면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그가 우리에게 어떠
한 축복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깨달을 때에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교훈
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병을 먼저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미 충분히
마신 사람을 마시라고 초청하지 않고 목마른 자를 초청하시고, 이미 배부른 자를 부르
지 않고 배고픈 자를 부르신다. 그리고 우리가 비어있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충만으로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느끼고 외부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이미 인정하고
있는 사람은 건전한 진보를 하고 있지만, 즉각적인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다면
자신의 죄악 아래서 괴로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슬픔
가운데 시간을 낭비할 뿐이며, 아니면 가톨릭 교도들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피상
적이고 쓸데 없는 헛된 일에 기력을 탕진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치유책을 찾아 헛되이 방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직접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전시
되어 있고 그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알 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축복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효험이 있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주님의 축복에 대해
알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 축복을 구하도록 유도하며 우리의 마
음에 불을 붙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네가 알았다면 네가 구하였을 것이다"고 말
씀하신다. 이 말씀의 목적은 결코 희미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갈증을
더하게 하셔서 그가 그 여자에게 베푸는 생명을 거절하지 않도로 유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그
에게 드려질 때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
이 없다면 구하는 열심은 곧 식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만나셔서 만족하게 해줄 준비를 갖추고 계실때는 싫증을 느끼거나 뒤로 미룰 이유가
없다. 사람의 불신(不信)만이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주님께서 그 상황 하에게 '물'이라는 말을 취하셔서 이를 성령에
비유하고 있지만, 이런 비유는 성경에 흔히 있는 예로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바싹 마른 불모지와 같은 존재로서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축여주기까지
는, 아무런 습기도 없고 활기도 없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순전한 물'이라
고 불리우고 있는데 이 때는 우리를 덮고 있는 더러움으로 부터 우리를 깨끗이 씻는다
는 다른 의미로 물을 성령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과 또 이와 비슷한 말
씀을 하는 곳에서 둘은 주님께서 우리안에 생명을 소생시키고 지켜주고 완성시키는 숨
은 역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복음 전도를 지칭하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중생의 모든 은혜를 포함시
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려고 보내심을 받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물을 인간에
게 축복이 없음으로 고생하는 것과 대조시키고 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서는 이를 생수(生水)라고 부르신다. 생명을 공급하는 효과가 있다는 의미에서라기 보
다 다른 종류의 물과 대조해서 생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원천에서 흘러 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수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4:11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했던 것처럼, 사마리아
인들도 유대인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여인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멸
시할 뿐 아니라 비웃기까지 한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이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약속하고 있다
는 듯이, 다른 비유로 그에게 맞서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는 그의 조상 야곱보
다도 자신을 높인 데 대하여 예수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다. "야곱은 자기와 자기 가족
이 이 우물에서 마시고 만족했는데 당신은 이보다 더 좋은 물이 있다는 말입니까?"라
고 그 여자는 말하고 있다. 이 비교가 잘못되었음은 그녀가 종을 주인과 또 죽은 사람
을 살아계신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다는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정도로 사람의 인격
을 높이지 않도로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의 나타나는 곳마
다 그 선물을 경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그러므로 경건함에 뛰어난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또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을 알아주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그들 위에 뛰어나시고 그리스도께서 더 밝게 비추시도록 유의할 것이
다. 세상의 모든 빛은 그리스도의 밝은 빛 앞에 자리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는 또한 사마리아인들이 거짓되게 자기들이 거룩한 조상의 후손임을 자랑한 것에 유의
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생자요, 음란한 조속인 가톨릭 교도들이
교만스럽게 믿음의 조상들을 자랑하면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낮게 보고 있다. 비
록 사마리아인들이 육신을 따라 야곱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참 하나님을 떠나
경건한 믿음에서 이탈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자랑은 어처구니가 없는 자랑이 될 것이
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 원뿌리가 구스인의 혈통이라 하더라도, 아니면 깨끗하지 못한
이방인의 후예라 하더라도, 그들은 거룩한 조상들에 대한 자기들의 주장을 아직 포기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한다. 그릇되이 인간의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빛을 스스로 포기한 채 그들의 이름을
오용(誤用)하고 있는 조상들과 아무런 공통점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13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는 말이
별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 자기의 교훈이 심지어 조롱거리가 되고 있음을
아셨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한 말씀을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두 가지
종류의 물의 용도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한 종류의 물은 임시적으로 몸을 위한 것이
고, 또 다른 물의 특징은 영혼을 영원히 소생시키는 것이다. 몸은 부패하는 것이기 때
문에 몸을 지탱시켜주는 보조물도 따라서 소멸되는 것이고 일시적일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그러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은 영원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신자
들이 그들의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더 풍성한 은혜를 사모한다는 사실과 상통하는 것
이다. 주님은 우리가 첫날부터 완전히 만족하기 위하여 물을 마신다는 뜻으로 말씀하
신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은 계속적으로 흐르는 실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신
령한 은사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 메마르게 될 위험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 생애를 두고 목이 마르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이나 짧은 기간 동안만을 위하여 성령
을 마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영원한 샘물로 부터 마신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고 그것도 전 생애를 두고 갈증을 느낀
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소생케 하는 물이 늘 예비되어 있다. 아무리 적은 은혜를 받았
다 하더라도, 이 물은 계속해서 생기를 공급함으로 그들이 완전히 고갈 되는 적은 없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만족을 욕망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상
태와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4:1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다음의 이 말씀은 이미 한 말씀을 더 분명
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계속적인 생명수의 흐름이 신자 안에 하늘의 영원함을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단명한 생애를 통하여-보전해 준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는 잠시 동안만 우리에게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복스러운 영
원의 세계까지 한없이 흘러 넘치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는 그 은혜에 의하여 시작된
썩지 않을 생명이 완전히 완성될 때까지 흐름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4:15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 이 여자가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물에 대하여 말씀하
고 계심을 완전히 알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스도를 멸시
하고 있는 만큼, 그분의 약속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말하는 이의 권위
를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간접
적으로 "당신은 자신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가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행동으로 보이시지요!"라고 그를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4:16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이것은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 말같이 보인다. 우리는 그
리스도께서 이 여자의 뻔뻔스러움에 낙심해서 화제를 바꾼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을 그 여자가 조롱거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그 병원에 적절한 치료책을 적용했다. 그녀의 죄를 책망하심으로 그녀의 양
심을 때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는 훌륭한 본보기다
-그 여자가 자원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려 하지 않자, 주님께서는 거의 강제적으로
그녀를 인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무관심하고 양심이 거의 마비되어 있는 사
람들은 죄의식으로 상처를 입어야 한다는 점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
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되어 멸시했던 그분이 자기들의 재판관임을 깨
달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의 신화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천하
고 얄팍한 기지(機知)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항하기를 주저치 않았던 사람들은 모
두 이와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도 심판을 받지 않고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굴복을 당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완악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향유가 맛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는, 거기에 초를 쳐서 맛을 돋구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
게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극을 받아 회개하게 되기까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심
각하게 감동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직접 효험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비참함을 목격함으로 낮아지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러한 지식만이 우리의 즐거움을 제거함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때마다, 우
리 각자가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보다 더 적절한 치유책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여 겸손히 우리가 무시하고 멸
시했던 하나님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4:17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 이 여자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위의 경고를 통하여 그녀의
마음을 찔러 회개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자애(自
愛)는 우리를 혼취케 하고 마비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첫번째 책망이나 자극에
우리는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느리고 무딘
우리의 마음에 대하여도 적절한 치료책을 갖고 계신다. 그는 그 여자의 병의 근원을
더 깊이 파헤치고 있다. 주님은 그녀의 죄악을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서 그녀의 한 가지 간음 행위만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여자가 방탕한
생활로 말미암아 남편으로 하여금 이혼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여섯번째 남편을 얻기에 이르렀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하나님께서 너를 합당한 남편들과 연합시켜 주셨지만, 너는 범죄를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너의 이혼 경력은 너의 명예를 앗아가 버렸다. 따라서 나는 자신을 포
기하고 윤락 행위에 자신을 방임해 버렸다."


4:19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이제 주님의 책망이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 여
자는 겸손히 자신의 과오를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전에 거부했던 그리스도의 교
훈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원에 따라 그리스도의 가르
침을 받고 싶어한다. 내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회개는 참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관문으로서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교하는 문을 열어준다. 이 여자는 그의 경험을 통하
여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그 기회를 포착해야 됨을 가르쳐 주고 있
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손을 펴서 우리를 초청하지 않고는 결코 선지자를 칭송하시
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께 제대로 감사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롬10:15).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 어떤 이들은 이 여자가 그리스도의 책망
을 불쾌하게 느껴서 그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간교하게 화제를 바꾸었다고 그릇된 견해
를 피력하고 있다. 오히려 그 여자는 특정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화제를 옮기고 있
다. 자기의 죄를 깨달은 이 여자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는 법에 대하여 일반적인
가르침을 받기 원했다. 여기서 그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하
여 선지자에게 상담을 요구한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어
떻게 예배받기를 원하시는지를 그에게 친히 여쭈어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여러가지 예배 방법을 창안해내는 것보다 더 패역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예배 형식에 대하여 계속적
인 충돌이 있었다. 이스라엘 10지파가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사마리아에 거주하게 된
구다인(Cutheans)과 기타 외국인들은 질병으로 인하여 율법의 예식을 채택하고 이스라
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왕하17:24), 종교는 그들 사이
에서 여러가지 부패와 결합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대제사장 요한의 아들이며 야두스의 형제인 마낫세(Manasseh)가 그리심 산 위
에 성전을 건립한 후로 이 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일은 바사(Persia)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가 그의 총독 산발랏을 통하여 유대지방을 점령하고 있을 동안에 일어났다.
마낫세는 한 총독의 딸과 결혼했다. 그것은 그의 형제보다 열등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낫세는 거기서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요세푸스(Josephus)가 기
록하고 있는 것처럼, 뇌물을 주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변절자를 사들였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는 이 여인이 한 말에서 사마리아인들이 보통 참된 신앙을 버
린 변절자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은 조상들에게서 전례(前
例)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원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단 패역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그들은 그러한 예배를 드리게 된 구실과
핑계를 지어내는 데 그들의 고집을 드러냈다. 나는 경박하고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들
이 때때로 벌레에 물리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성자(聖者)가 굉장한 일을 했
다고 듣기만하면 즉시 무비판적으로 이를 붙들어 선례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이 또다
른 과오는 그들이 조상들의 행위를 자기들의 잘못을 가리는 구실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가톨릭 교도들에게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여 선조들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고 편벽되이 행하는 자들에 대
한 경고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여러가지로 이 죄에 빠지고 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상이라 불리울 가치도 없는 사람들을 조상이라고
따르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가톨릭 교도들이
계속 조상들에 대해 나팔을 불어대면서도 선지자와 사도들에 대하여는 시간을 배당하
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존경할 가치가 있는 몇 사람을 언급하면, 그들은 그
네들과 같은 방대한 무리의 사람들을 모아서 아직 이러한 야만적 행위가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종교가 크게 타락하고 교리의 순수성이 크게 흐려졌던 타락한 시대로 내려
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 외에는 어느 누구도 조상이라 불리
울 수 없다는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의 뛰어난 믿음에 의하여
조상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조상들의 행위에서 성급하게 보편적인 율법을 세움으로 종종 잘못을 저지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를 어떤 초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지 않으면 조상에게 충분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잊고 그들의 악덕을 무조건 미덕(美德)으로 바꾸어 행동에 혼란을 일으
킨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시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리는
우리가 평가하려는 사람의 수준으로 기준 자체를 낮추어 버린다. 한마디로 줄여서, 조
상을 모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으나, 세상은 조상들의 본보기를 따름으로 죄책을
느끼지 않고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번째 큰 오류는 편벽된 모방이다. 예를 들어 같은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지도 않고
같은 명령을 받지도 않은 우리가 조상 가운데 누가 한 것이든 우리를 위한 전례로 끌
어들인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이 모세가 행한 것을 본따서(출2:12) 자기 형제에게 행
한 대로 검으로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거나, 비느하스가 음행한 자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어떤 사람이 음행한 자를 처형하려고 하는 것 등이다(민 25:7).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비인간적인 야만 행위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처
럼 되기를 원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네 아들 이
삭을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한 명령이 한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
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한 명령인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장난기있는 비교와
경쟁은 대개 교만과 지나친 자신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
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주장할 때 생기는 오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중 아무도 조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조상을 원
숭이처럼 흉내낼 뿐이다. 옛날 선진들의 글을 면밀히 검토한 사람들은 옛날 수도 생활
의 상당한 부분의 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므로 우리
가 의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각 조상의 정신과 소명
이 무엇이었으며 그가 개인적으로 받은 명령이 무엇인가를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
이다. 이 세번째 오류와 가까이 연관된 잘못이 또 하나 있으니, 이는 각자 양상이 서
로 다른 시대(時代)들을 혼동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각 시대마다 다른 행동 규범을 정
해 주셨음을 생각하지 않고 조상들의 예를 모방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우리는 교황
권 아래 놓여 있는 가톨릭교의 파묻혀 있는 방대한 종류의 예식도 이 무지의 소산이라
고 말할 수 있겠다. 가톨릭교가 시작된 직후부터 그들은 어리석게 그리고 격에 맞지
않게 유대교를 흉내냄으로써 이러한 방법으로 죄를 짓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에겐 그들
의 제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된다고, 그리스도
를 제물로 바치는 예식이 고안되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광채를 흐리게 하고 있는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면 그리스도 교회의 상태가 크게 악화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이
와 같이 미친 발상은 후에 더세게 터져서 계속 퍼져 나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항상 다음의 규칙에 유의해야 한
다. 분향과 촛불과 성의(聖衣) 제단, 그릇 그리고 이와 같은 예식은 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 이유는 순종이 어떠한 제사보다도 주님께 더 귀하고 받
으실 만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 순서가 바뀌었다. 그러므로 우
리는 조상들이 율법 아래서 지켰던 것을 생각없이 따라가지 않도록, 주님께서 복음 안
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내용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때에 거룩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으로 간주되던 것이 지금은 하나님을 악하게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
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잘못한 것은 그들 당시의 에식이 야곱 때의 예식과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계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은 후
에 주님께서 선정하신 장소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아무 곳에나 제단을
쌓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온산 위에 성전을 건립하라고 명령
하신 다음부터 그들이 전에 누렸던 자유는 제한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오직 너희의 한
지파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것
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12:8,14)고 명했던 것이다. 전에는 더많은 자유가 허용되었
으나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후부터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율법의 규정하는
것으로 국한시켰다. 벧엘에서 예배하는자들도 비슷한 변명을 했다. 야곱은 이곳에서
거룩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사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정하신
후로는 그곳이 더 이상 벧엘이 못되고 벧아벤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이 여인의 질문 이면에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인들은 조상들의 행한 것을 선례로 택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했다. 비
록 이 여자는 그때까지 자기 백성의 전통을 따라 행했으나 그것으로 만족이 없었다.
여기서 예배란 아무런 종류의 예배를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매일 매일의 기도
는 어디서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배란 제사와 관련된 예배로서 공적으로
엄숙하게 표현하는 신앙의 행위를 가르킨다.


4:21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 이 귀절의 첫 부분은 율법 아래 설정되어 있는 의식적인
예배를 간결하게 폐기하고 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특정한 예배 장
소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오나니 라고 말씀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은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중간에 막힌 담의 헐릴 때가 온다고 말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그 이전의 좁은 범위에서 훨
씬 광대하게 넓히고 계신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도 그 예배에 참예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때가 이르리라 - 주님께서는 미래시제 대신에 현재시제를 쓰고 있다. 이것은 성전과
제사장제도와 기타 외적인 의식에 관한 한 율법이 폐기될 때가 매우 가까이 왔다는 뜻
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그여자가 언급한 조상들(Fathers)
에다 하나님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하면 하나님
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아버지가 되셔서 장소나 민족의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아버지로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이제 앞에서 율법의 폐기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한층 더 상세히 설명하
고 있다. 그 분은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로 사마리아인들이 거짓되게
미신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던 형식을 정죄하고 합당한 예배형식은 유대인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이 차이에 대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예배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신을 얻고 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아무런 확실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지키던 율법이 곧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 이것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경솔하게 또는 생각이 없이 종교에 대한 글을 써서는 안된다는 가르
침을 받기 때문이다. 확실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유
령이나 귀신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없이 자기의 의사
에 따라 인도함을 받을 때는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좋은 의
도는 여기에서 공격을 면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민족 편에서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훨씬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 그런가?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서 남이니라 -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유대인이 이 한가지 점
에서 우월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영원한 구원의 약속을 하셨
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유대인 가운데 나신 그리스도 한분에게 국한시킨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준되고 확인되었기 때문에(고후1:20)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어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
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에 유대인은 그 하
나님에 의해서 그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을 더
좋게 말씀하고 계심에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란 말을 하늘에 속
한 교훈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출현(出現)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구원이 그들이 이를 즐기고 누릴 수 있도록 유대인에게 만겨진 것뿐인데 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 내가 판단하기로는 선
지자들이 미리 예언한 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오리라고 한 것을 암시하여 말씀하
신 것으로 본다(사2:3). 유대인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지식이 결국에는 그들로부터
온 세계로 흘러나가게 된다는 조건 하에서 열방과 구별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집약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태동된 확실한 믿음 안
에서만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자는 모두 우상숭
배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나 헛된 형상을 대치시키게 된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하나
님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의 무지를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
을 버리는 자는 모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참 하나님을 알
지 못할 때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나 헛된 형상을 대치시키게 된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의 무지를 책
망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빛을 상실할 때 즉시 어두움이 우리를 덮쳐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앙 가운데 그들의 조상과 맺어진 언약을 폐기
했을 때 그들은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던 보물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거절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들은 아들을 부인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공통적으로 누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복음의 순수한 믿음을 버리고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발상(發想)을 따라간 사
람들은 다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완고함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나 사
람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스스로 아첨하고 자랑한다 하더라도, 하늘로
부터 울려퍼지는 이 한 가지 말씀이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조리 뒤엎
어 버린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승
인을 얻으려 하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잉태된 지식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4;2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 이제 후반절에 율법의 예배가 폐하여진 것
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다. 주님께서 때가 오나니 또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모세로부터 물려받은 명령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께서
이제 때가 왔다고 말할 때 그는 의식에 대해 종지부를 찍고 이제 개혁(改革)의 때가
이르렀다고 선언하고 있다. 반면에 주님은 성전과 제사장 제도 그리고 그에 관계되는
예식을 인정하고 있다. 개혁할 때까지 이상의 에법이 쓰였던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
이다(히9:10).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에서 예배 받기를 원치
아니하심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것이라
는 한층 더 높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신령으로 예배할 때 그는 어느 곳에서나 에배
를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에배를 신령하다고
부를 수 있는지를 의문시하게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과 외적인 것,
즉 그림자와 본체 사이의 대조법을 주의해야 한다. 기도와 깨끗한 양심과 자기부인(自
己否認)을 마음의 내적인 믿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령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
을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질문을 유도한다. 조상들은 율법 아래서 신령하게 주님을 예배하
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신
령하지 않은 예배는 인정하지 않으셨다. 신령한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되는 것
이다. 이것은 모세가 친히 증거하고 있는 바이다. 모세는 여러 곳에서 율법의 유일한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려는 것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이
를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성경 사방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많은 증거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대표적인 말씀에는 시편 50장, 이사야1장 58절,66절, 미가서 6
장, 아모스 5장이 있다. 그러나 비록 율법 아래서 행해졌던 하나님께 대한 에배가 신
령한 것이었다 해도, 그 예배는 수많은 외적 의식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육
에 속하고 땅에 속한 냄세가 배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4장9절에서 이러한
의식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는 옛날
성소와거기에 속해 있던 모든 것을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히9:1). 그러므
로 우리는 율법 하에서의 예배가 본질상으로는 신령한 것이었으나 그 형식에 있어서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실재자가 공개적으로 오시기 전
에는 모든 예식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과 우리와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믿음과 기도, 감사, 마음의 청결함 그리고 생활의
순수함에 의하여 예배받기를 원하셨다. 비록 율법 아래서 여러가지 부가된 것이 있어
신령과 진리가 휘장으로 가려 지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의 제사로 기뻐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 성전 휘장이 완전히 둘로 갈라졌기 때문에 모호하거나 숨겨
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린아이 상태의 믿음이 요구하는
어느정도 예외적인 경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전은 그리스도
의 적나라한 진리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치가 못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조상
들에게 윤곽만 제시되어 있던 것이 이제 우리에겐 공개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교권 아래서는 이 구분이 혼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전도
(顚倒)되어 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 내에서는 그림자가 유대교 아래에서보다도 더 짙
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우리와 유대인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
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가톨릭 교도들이 이로부터 무슨 핑계와 구실을 만들어 낼지 몰
라도, 우리들은 외적인 형태에 있어서만 조상들과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령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예식에 매이지 않을 수 없
었기 때문이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종 호
화로운 예식으로 교회에 부담을 지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앗아가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이 옛날 유대인들처럼 그와 같은 예식의 도움을 필요로 한
다고 하는 빈약한 변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그의 교회를 다스리기 원하는 방법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날 가톨릭교 내부에서 횡행하고 있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예식보다 주님께서 원하시
는 의식에 더 상치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율법의 그림자는 성령을 가렸던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의 이 가면극은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완전히 망쳐 놓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이와 같이 무섭고 가치없는 부패 행각을
묵과해서는 안되겠다. 이와 같은 남용을 시정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이것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이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아무리 지혜롭게 이론을 전개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규범을 범하는 것을 쉽게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노정된 그들의
완악함을 지나가는 말로 꾸짖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복음이 계시되었을 때 유대인
들이 자기들에게 익숙해 있던 예식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변호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세상이 미신에서 도저히 해방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신령하게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패역하
고 외식하는 예배자들로부터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로 무장한 우리들은 가톨릭
교도들의 모든 발상을 정죄하고 그들의 힐책을 경멸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아야 할 것
이다. 하나님께서 이 단순한 예배로 만족하시고 이러한 예배를 기버하신다고 하는 말
씀을 듣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다만, 가톨릭교도들은 주님께서 원하는 예
배가 장엄한 예식으로 부풀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멸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께서 성령을 소멸한다고 말씀하신 허영된 육신의 자랑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
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말씀드린 내용으로 이
미 명백해졌다. 신령한 예배는 옛날 예식의 덮개를 벗겨 버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
배 중에서 신령한 것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리는 성령안에 있는
것으로서, 의식은 말하자면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가 거짓
과 대조되지 않고 외적인 형상과 대조되고 있음에 다시 한번 유의해야 하겠다. 진리는
신령한 예배의 단순한 본질이다.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 여기 하나님의 성품 자체로부터 재확인되는 말씀이 있다. 인
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의 성품에 맞는 것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울 것이 없
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피상적인 의식으로 가득찬 것을 여러가
지 발상해 낸다. 우리는 물이 불과 상종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과 도저히 통할 수 없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음을 우선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심
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지루해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방탕함
을 억제하는 데 족할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이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너무나 눈이 멀
어 있음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뜻이나 정욕에 굴복시키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겸
손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며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을 알자. 우리가 하나님만
큼 높아질 수는 없는 것이니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인도할 지침
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신부들은 종종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
하여 이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곡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그의 아버지께서 신령한 성품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처럼
사소한 것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4:25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 비록 사마리아 사회의
종교는 여러가지 오류로 더러워지고 혼돈되어 있었지만, 율법에서 취한 몇가지 원칙이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메시아에 관한 것이 그 중에 하나였다. 이 여인은 그
리스도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교회 내에 어떤 비상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예견했을 때,
그녀는 즉시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임박한 때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사람들은 사방 가는 곳마다 폐허가 되고 파괴된 것
을 완전히 회복시켜 줄 메시아가 오리라는 기대로 흥분되어 있었다.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그 여자가 그리스도를 모세나 선지자들 앞
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녀는 몇마디 말로 세 가지를 간추려 말하고 있다. 첫째는 율
법의 가르침이 모든 점에서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다만 기초적인 것이 율법으로 전달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미흡한 점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제자들
을 입적시켜 출발하도록 했다고 한다면 메시아는 제자들을 완성시켜 종결지어 주는 것
이 그의 정당한 직책이었기 때문에, 메시아와 선지자들 간의 대조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이 여자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실 모든 신령한 것의 선생과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우리가 그리
스도의 복음보다 더 좋고 더 완전한 것을 바래서는 안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복음은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향상시킬 수 없는 지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기둥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이 불쌍한 여인을 본받아 자기들의 인
간적인 생각과 발상을 주장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단순한 가르침만으로 만족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복음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고 보충했다고 상상하는 의곡된 말씀이
아니라면 교황과 마호멧의 종교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마치 이와 같은 허튼 소리가
없었다면 복음이 불완전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들을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바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다른 주를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주를 허락치도 않을 것이다.

4:26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 주님께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그 여자에게 인정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말할 나위 없이 자신이그녀가 품고 있는 소망과 일치되는 바로 그
선생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서 그녀의 갈증을 채워 주기 위
해서 더 상세한 교훈을 들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이 불쌍한 여자의
경우에 그의 은혜의 본을 보여줌으로, 우리가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싶어할 때 주님은
반드시 자신의 임무를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를 원했다. 주님께
서 그의 제자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실망케할 위험은 전혀 없다. 우리가
많은 교만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순복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그리고 터키인과 가톨릭 교도들처럼 더 완전한 지혜를 다른 데서 찾는 자들은
끝없는 혼미 속에 끌려다니고 과오의 미궁에 빠져 마땅한 것이다! 다시 "너와 말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하신 말씀에 의하여, 주님께서는 그의 복음의
가르침을 비준하는 도장(印)으로서 메시아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버
지께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성령이 그 위에 머물렀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즉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
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하려 하심이라"(사
61:1).


4:26
제자들이......이상히 여겼으나 -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제자들의 놀람은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인의 비천함에 분개했거나 유대인이 사
마리아인과 이야기하면 유대인은 더럽힘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의 이와 같은 두 가지 감정이 그들의 선생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평범하고 저속한 여인을 존귀히 여긴 것이 무슨 못
할 일이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여긴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왜 스스로를 보지
않는가?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가치없고 쓰레기같은 인간들이 그와 같이 높고 영예로
운 자리에 높아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이 감히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는 점을 유의해
야 한다. 이들이 보여준 본에서,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있을 때에, 우리는 거만스럽게 이를 우리의
이빨 사이에 물고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감
추어져 있는 것이 하늘로서 계시될 때까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공경
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4:27
제자들이......이상히 여겼으나 -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제자들의 놀람은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인의 비천함에 분개했거나 유대인이 사
마리아인과 이야기하면 유대인은 더럽힘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의 이와 같은 두 가지 감정이 그들의 선생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평범하고 저속한 여인을 존귀히 여긴 것이 무슨 못
할 일이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여긴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왜 스스로를 보지
않는가?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가치없고 쓰레기같은 인간들이 그와 같이 높고 영예로
운 자리에 높아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이 감히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는 점을 유의해
야 한다. 이들이 보여준 본에서,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있을 때에, 우리는 거만스럽게 이를 우리의
이빨 사이에 물고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감
추어져 있는 것이 하늘로서 계시될 때까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공경
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 복음서 저자는 이 여자의 불타는 열심을 표현하기 위
하여 이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동네로 돌아갈 대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갔다는
것은 그가 서둘렀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영생에 참여한 자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여 같은 영생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은 믿으므이 특징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은 우리 마음 속에 소극적으로 묻혀진 채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짓기
을 갖고 있으면서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숨겨둘 수는 없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시116:10)고 한 말씀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 여자의 열심과 열성을 더욱 높
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열심에 불을 붙인 것은 조그마한 믿음의 서
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을 깨닫자마자 그분의 이름을
온 동네에 전파했다. 반면에 이 여자는 꾸지람을 들을만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
여자는 아직 무지한 상태이며 배운 것도 없으면서 자기의 믿음의 한계를 넘어 행동했
기 때문이다. 나는 만일 그 여자가 선생의 직분을 맡았다면 규모없이 행동했을 것이라
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기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하자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여자가 자신을 잊고
너무 방자히 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
는 나팔소리나 종소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 그녀는 의심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하여 별로 감동된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녀는 이러한 비밀에 대해 설교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동네 사람들에
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설득시키기에 바빴던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분명한 증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선지자임을 알았다. 이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의 자극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판단할 수 없었기 대문에 이러한 초보적 준비는 그들에게 유익하고 적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추어진 일들이 그녀에게 계시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
의 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이 문제가 일단락되자 그들은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 메시아가 아
닌지 한번 고려해 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한 것을 그들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들에게 약속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발견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행한 바 '모든 것'을 말했다고 거짓말을 하는가? 나
는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음난한 죄만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말로써 그녀의
생활에 많은 죄를 폭로해 보여 주었다고 이미 지적했다. 복음서 저자는 모든 문장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그녀의 고집을 꺾기 위하여 그의 과거와 현재 생활을 적
나라하게 간추려서 폭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자에게서 경건한
열심으로 인하여 자신의 명성을 전혀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전하고 있음을
본다. 그여자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있
기 때문이다.


4:32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주님께서 피로하고 시장하실
때 음식을 거절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허기를
참도록 우리에게 교훈하시려 했다고 한다면, 왜 늘 그리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주님
은 음식을 거절하는 것보다 다른 의도가 있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요점은 그의 현
재 당면한 일에 대한 염려가 그를 사로잡아 그듸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음식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명령을
실행하려는 열심때문에 먹거나 마시는 일에는 관심도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다만 무엇이 먼저 와야하며 무엇이 두번째 와야 하는지를 지적하고 있을 뿐이
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모범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육신적인 안락보다 먼저
우선적으로 중시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에서 이완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모든 사
람은 주님의 일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이 더 효과
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도둑질해 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주님은 필요한 대로 우리의 몸을 돌볼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에 절제있게 신중히 자기 몸을 돌보는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시간
을 조정하실 때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에 너무 얽매이지 않도
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스쳐 지나가버릴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잡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양팔을 벌려 그 기회를 단단히 잡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하신 임무가 너무나 긴박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것을 뒤로
미루고 있다. 그는 음식을 뒤로 미루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사람들을 부르러 달려갔을 때 그리스도의 열심이 식었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이
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삶을 위해서 사는 목적을 상실하지 않을 각오가 서 있다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보다 주님의 일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
을 주님께서 은유로 표하신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화에서 적절하게 취해진 것이
기 때문에 보다 더 은혜로운 선물일 수 있다.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이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더
좋아하는 일이 없고 그가 더 기쁜 마음으로 열심을 내어 하시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율법을 사모하는 것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던 것
과 같다(시19:10).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포기하
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며, 주님의 명령을 기꺼이 순응하는 가운데 불평이 없이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덧붙임으로 자기가 헌신
해서 섬기고 있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에게 맡겨진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자기가 경솔하게 자기
뜻을 따라 어떤 일을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를 자기에게 부과하셨다고 생각하는 일
이 없도록 각자 자기의 소명(부름)에 충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분의
성격은-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잃어버린 영혼의 생명을 회복하고 복음의 빛을 전
파하여 한가지로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의 중요성이 그로
하여금 피로하고 시장하실 때도 먹고 마시는 일을 망각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는 여기서 보통 평범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에 너무
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인간의 구원을 돌보는 것이
었다.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오늘날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
다.


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방금 말한 내용에 이어 이 말씀을 하고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일을 마치는 것보
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일이 얼마나 무르익었는지를
추수에 비교함으로 보여주고 있다. 곡식이 여물었을 때 우리는 추수를 연기할 수 없
다. 그렇지 않으면 곡식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열매가 익었기 때
문에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수확을 연기한다면 열매를 망치
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가 서두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비
교법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문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하늘에 속한 일보다 땅에 속한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
하기를 원했다. 추수 하기를 학수고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달수와 날수를 세는 것이
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늘의 열매를 거두는데 대하여 얼마나 게으른지를 생각하며 놀
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경험은 이러한 패역함이 우리 마음에 내
재(內在)하고 있으며 우리 마음에서 쉽게 떼어낼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지상 생활의 장래를 위해서는 열심히 준비를 갖추지만, 하늘에 속한일을
생각하는 데는 무관심하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외식하는 자여 너희
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새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눅12:56)고
말씀하셨다.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 주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
에 얼마나 부지런히 헌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수고를 위하여 크고
놀라운 보상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열매가 있을 것이며, 더구나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열매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같은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말하기
위해서 보상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거나, 후에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반복하여 말씀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수고하는 이들을 치하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려함이라".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말
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영과의 면류관이 하늘에 예비되어 있다는 말씀
을 듣고 그들의 추수한 열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것이며 영원한 것임을 알 때,
말씀의 일군들에게 격려가 되고 그들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성경 여러 곳
에서 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며, 그것으로 부터 우
리의 공로를 평가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계산을 하고 헤아린다면 우
리는 한결같이 부지런하여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기보다는 게을러서 심판을 받아 마땅
하다는 판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수고한 일군이라도 용서를 비는 기
도와 함께 겸손히 하나님께 부복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 나태함을 시정하고 고무격려하기 위하여 아버지처럼 행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상을 내려 주시려고 계획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 보상의 문제는 믿음에 의
해 의롭게 됨을 뒤엎는 것이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확고히 세워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바가 아니라면 우리 안에서 보상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
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택하신 보증이 되심을 알고 있다. 둘째로, 주님
께서 아무 조건없이 우리와 화해하실 때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함으로 우리의 공
로와 관계 없이 우리를 영접해 주시기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완전하고 죄많은
인생에게 그와 같이 큰 영광을 허락하실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의 요지는 사도들이 가
르치는 데 바쳤던 노고는 힘들고 불쾌한 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들의 말씀 증거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뿌리는 자와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사도들이 다른 이들의 밭에서
열매를 거둔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상의 확
대 해석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자기들이 노력한 노동의 열매
가 타인에게 주어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원망이 새로운 소유주가 뿌려진 것을 즐거
움으로 거두지 못하도록 막지 못할진대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 사이에 마음이 일치
되고 서로 기쁨과 감사의 감정이 있다면 거두는 자들의 기쁨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뿌리는 것과 거두는 것 사이의 대조법을 파악
해야 한다. 뿌리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 때 땅에 뿌리어진 씨
는, 말하자면, 잎사귀가 난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완전히 성숙하
도록 만드는 복음의 가르침은 적절하게 추수에 비유되고 있다. 율법은 나중에 그리스
도 안에 계시된 완전성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1절에
서 쓰고 있는 어린아이와 성인의 비유는 잘 알려진 것으로서 같은 의미를 말하고 있
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현재의 구원을 가져왔기 때문에, 천국의 문
을 열어준 복음이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추수하는 것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
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서 율법 아래 있던 조상들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오
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법은 가르치는 형태와 관계가 있다. 교회의 유아기
가 율법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다가 복음이 전파되자마자 성년기에 도달했던 것처럼 구
원은 선지자들이 뿌려 놓기만 했던 것을 알곡처럼 익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에서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씨뿌리는 것을 반드시
율법과 선지자에만 국한시킨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이방인과 유대인에
게 똑같이 적용시켜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어느정도의 경건의 씨앗이 늘 전 세
계적으로 뿌려졌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철인(哲人)들과 세상의 학
자들의 손을 빌려, 어떤 의미에서, 고매한 사상의 씨를 뿌려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가 없다. 그러나 그 씨는 뿌리부터가 더러워진 것이었고 거기서 솟아난 곡식이라는 것
도 허다한 오류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유해하고 부패한 것을 씨 뿌리는 것
에 비유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얘기다. 더구나 이 귀절 내에서 말하는 '함께 즐거워
함'은 철인이나 세상의 학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매듭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사마리아인들에게 말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모든 것이 부패했지만 그중에도 약간의 경건의 씨가
감추어져 있었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렇기 않다면 왜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한마디
말씀을 듣자마자 그리스도를 찾아 나섰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들이 율법과 선지자로부
터 구속주(Redeemer)가 오시리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유대는 주님께서 그의 선지
자들을 통하여 갈고 닦은 독특한 밭이었다. 그러나 소량의 씨가 사마리아에도 흘러 들
어갔기 때문에, 그곳에도 열매가 무르익었다고 말씀하실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사도들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대답
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세대가 감당하리 만큼 말씀하셨다. 이들은 이미 여
물은 곡식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사마리아인들 속에서, 비록 독보리와 섞여 있긴 하지만,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씨앗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 이것은 사람이 흔
히 다른 사람이 수고한 열매를 받아 먹는다는 의미로 쓰였던 격언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사도들의 기쁨에 참예했지만, 씨뿌리고 수고한 자는 다른 사람이 그 열매를 거두어 갈 때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선지자들 자신이 오늘날 교회 내에서 진행 되고 있는 것을 인식하거나 목격하고 있다고 유추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선지자들이 그들의 시대에 자기들이 거두지 못할 열매를 인하여 이미 기뻐하는 태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베드로가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쓰고 있는 비교도 이와 별 차이가 없다(벧전1:12). 다만 베드로는 모든 신자들을 일반적으로 권고하고 있는데 반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만을 그리고 그들을 통해 복음의 일군들을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을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각자 헌신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래서 일군들 사이에 악한 시기심을 갖지 않도록 원하셨던 것이다. 먼저 어떤 일을 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집중적으로 충성되이 돌봄으로써 자기 뒤에 오는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이 주어진다 해도 이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 익은 열매를 추수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도 똑같은 즐거움으로 자기 일에 임해야 할 것이다. 율법의 선생과 복음 사이에 이루어진 대조는 후자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서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4:39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안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그 여인이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전파
한 것이 얼마나 힘있게 역사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사마리안인들 사
이에 메시아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믿
는지라'라는 말은 그 동네 사람들이 그 여자의 말에 감동되어 그리스도가 하나의 선지
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음이 가르침
을 받을 준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믿음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직
가르침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태도 하나를 보시고 이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시는 것을 보임으로 우리가 그의 말씀을 경외하는 것을 얼마나 존귀히 여
기는가를 배우게 하기 위하여 그저 믿음으로 마음문을 연 것을 믿음이라고 확대하여
표현하셨다. 그들의 믿음은 좀 더 진전있기를 바라는 그들의 욕망에도 잘 나타나 있
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머물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그 후의 결과를 볼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청에 순응한 것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에 머무셨던 이틀 동안에 많은 열매를 맺었음을 볼 수 있
다. 이 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을 때 결코 멈추어서는 안된다
는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준비된 마음이 비방을 받게 될까 염려가 될 때
나 또는 쓸모 없이 끝날것 같아 걱정스러울 때는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여 줄
명철을 구하자. '믿는다'는 말은 이제 그들이 믿을 준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참된 믿음으로 충만해졌다는 의미에서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4:42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 나는 에라스므스의 번역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옛날
번역자가 쓴는 야만적인 어휘로서, 이 희랍어 낱말은 라틴어에 loquentia와
동일한 것으로 말하다 또는 한담(閑談)한다는 뜻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보통 믿
을 수 없는--여자의 혀보다 더 확실한 믿을 만한 증거를 잡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처
럼 보인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잉태된 것이라는 믿음의
특징을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선생으로 모시게 되
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 뿐이다. 그는
지금 눈에 보이게 우리와 함께 계셔서 얼굴을 맞대고 우리와 대화하시는 것은 아니지
만, 누구를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던 간에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만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우리가 언급한 지식이 다른 데서 올 수도 없는 것이다. 죽
을 인생에서 나온 말은 우리의 귀를 채우고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말은
우리의 영혼을 잔잔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가운데 우선적으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의 일군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
스도라는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신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와 같이 확실한 권위를 신뢰함으로 우리는 그의 가르침에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리고 복음의 사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라고 선포할 때, 그들 자신
도 그리스도께 들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부터 우리
는 이곳에서 이틀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요점을 그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가르치
신 것 보다 더 분명하게 가르치셨음을 유추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에 전
하는 구원은 온 세상에 공통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님은 그
들을 정당한 상속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나그네 된 이방인을 하나님이
권속으로 맞아들이고 먼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가르치셨
다.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 언뜻 보아서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씀은 여러가지 해석을 자
아냈다. 어거스틴의 설명은 아주 미묘하고 난해한 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틀 동
안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얻은 것이 오래 동안 갈릴리 사람들 사이에서 얻은 것보다
많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지 않고 사마리아에서 얻은 제자 수가,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 갈릴리에서 얻은 제
자 수보다 더 많기 때문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
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보다 가버나움에서 자주 거하셨기 때문에 가
버나움을 그리스도의 동네(고향)으로 이해한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설명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서 나사렛을 떠나셨을 때 갈릴리의 다른 부분으
로 가셨다고 말한 씨릴 (Cyril)의 의견에 공감한다. 다른 세 명의 복음서 저자들은 그
리스도의 이 증거를 기록할 때에 나사렛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주님의
뜻을 완전히 나타낼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잘 띄이지 않는 자기 고향에
숨어 있고 싶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멸시할 곳으
로 서둘러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이틀간 머물렀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사렛으로 가셨다가 즉시 그 곳을 떠났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요한이 그런 말을 일체 비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짐작하는 모험을 하
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 고향 나사렛이 자기를 멸시함을 아셨을 때 다
른 곳으로 가기를 원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귀절은 즉
시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
적을 인하여 갈릴리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은 존경의 표현이며 멸시의 증거는
아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 나는 이 말씀이 하나의 격언이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격언이 자주 쓰이기 때문에 되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꼭
격언대로 행해진 것처럼, 그 진상을 구할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은 자기 고향에서 보
다는 다른 곳에서 존경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외국인보다 자기 동포
에 의하여 더 존경을 받을 수도 있으며 또 실제로 그럴 때가 있다. 그러나 이 격언은
선지자들이 자기 나라 사람 보다는 다른 곳에서 더 높임을 받는다는 보통 평범한 진리
를 표현하고 있다.
이 격언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람에서 울고
또 어린 시절에 바보 노릇을 한 사람을 어릴 때 이후로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처럼 전
생애를 두고 우리가 멸시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실수가 될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 물든
사람들 사이에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악(惡)이 부가되고 있으니 시기 질투
가 곧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격언이 아마도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들로부터 늘 업
신여김을 받는데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선지자들이 유대지방에서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멸시와 그
들의 완악함을 보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는 존경을 받
지 아니함이 없다고 흥분해서 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의미를 택한다면, 바
울이 에피메니데서(Epimendes)를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부른 것처럼, 선지자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선생에나 다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딛 1:12).


4:45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 이러한 존경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선물은 잘 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많
은 증인 앞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 소문이 널리 전파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
게 가르쳐 줄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표적이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복음의 길을 평탄케 한다는 의미에서 표적의 유용함을 지적
하고 있다.

4:46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어떤 귀인이 있었으니 에
라스므스는 달리 생각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다. 물론 나는 오늘날 공작이니 백
작이니 하는 사람들이 군소 임금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갈릴리의
구조로 볼때 그러한 서열에 해당되는 사람이 가버나움에 살 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가 헤롯 궁에서 일하는 헤롯 왕의 신하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이사로부터 보냄
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다 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는 이러한 왕의 신하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심은 더욱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직
접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 그가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한 것은 그에게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그러
나 그리스도께서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제한했을 때, 그는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
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심으로 행하는 기적에 그리스도의 능력
을 국한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증거하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 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책망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흠을 모른
체 하시고, 그를 그리고 나아가서 모든 유대인들을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저히
못한다고 심하게 꾸짖고 계신다.
그러나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을 보통 친절하게 맞아주시던 주님께서 왜 이 사람은
그와 같이 엄하게 대하셨을까? 주님께서 이 사람을 다른 경우보다 더 심하게 대우하신
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리스도
께서는 그 한사람 보다도 그 민족 전체를 보셨던 것 같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가르침
이 별 권위가 없으며 사람들이 소홀히 할 뿐 아니라 멸시함을 아셨다. 뿐만 아니라 사
람들은 온통 표적과 기사만을 찾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각은 경탄보다는 무지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널리퍼져 있던 말씀에 대한 간악한 멸시가 주님으로 부터
그와 같은 질책을 자아냈던 것이다. 성도 중 어떤 이들이 약속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표적에 의한 확증을 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들의 요구에 친절히 응해주심으로 그들에게 진노하지 않으셨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훨씬 더 큰 악함을 지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표적에 너무나
마음이 빼앗겨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첫째로 그들은 기적에 의하
여 자극을 받기 전에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육신에 속한 마음으로 인해, 가르침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패역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라나면서 하나님의 말
씀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적을 행했을 때 그들은 표적을 보고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정도로 그저 우매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기적을 떠나서는
종교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것도, 경건의 어떠한 연습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와 같은 취지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고 있다. 바울은 유
대인들이 전도에 지나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표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 그리스도
의 은혜나 영생의 약속이나 성령의 숨은 능력 같은 것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표적이외의 다른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복음을 거만스럽게 거절했다. 나는 오늘날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
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먼저 기적을 보여 주시요. 그러면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
이겠습니다"라는 말보다 더 흔한 말이 없다. 마치 그리스도의 진리를 또 다른 말로 설
명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몹시 난처한 입장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
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산더미같이 많은 기사를 보여 준다 해도, 그들이 믿겠다고 말
하는 것은 거짓이다. 몰론 외부적으로 놀라움을 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
는 더 이상 새로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4:47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그가 끈질기게 요청하고 끝내 그가 원하
는 것을 성취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를 거절하고 그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실 것처럼 그를 책망한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주님의
책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특별히 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
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이 참된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그를 가로막고 있는 잘못을 시정하려고 그를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
도 중에 의곡되거나 피상적인 것은 시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해로운 장애
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공신(公臣)은 대개가 거만하고난 체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엄
격한 대우에 기분좋게 응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 사람은 자기의 필요와 아들을
잃을 것이 두려워, 그리스도께서 그를 좀 엄하게 책망하실 때,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고 겸손히 침묵을 지킨 것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게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역경에 의해 낮아지고 우리의 교만과 거만을 억지로
굽히게 되기까지, 놀라우리만큼 조바심이 심하고 걱정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4:49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그가 끈질기게 요청하고 끝내 그가 원하
는 것을 성취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를 거절하고 그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실 것처럼 그를 책망한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주님의
책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특별히 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
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이 참된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그를 가로막고 있는 잘못을 시정하려고 그를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
도 중에 의곡되거나 피상적인 것은 시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해로운 장애
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공신(公臣)은 대개가 거만하고난 체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엄
격한 대우에 기분좋게 응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 사람은 자기의 필요와 아들을
잃을 것이 두려워, 그리스도께서 그를 좀 엄하게 책망하실 때,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고 겸손히 침묵을 지킨 것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게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역경에 의해 낮아지고 우리의 교만과 거만을 억지로
굽히게 되기까지, 놀라우리만큼 조바심이 심하고 걱정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4:50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무지함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그
리스도의 인자와 자비가 빛나고 있음을 본다. 주님께서는 그가 바랐던 것이 이상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 자기 집에 오셔서 자기 아들을 고쳐달
라고 요청했다. 그는 아픈 사람이 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죽은
아들이 살아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서둘
러서 내려와 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두 가지 잘못을 다
용서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약한 믿음이라도 존귀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원했던 것을 다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가 구했
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다는 사실에 유의할 가치가 있다. 그는 그의 아들이 살았
다는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매사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지만 기대 이상의 방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도와주
신다. 이는 우리로 어떠한 것도 주님께 명령하듯이 무엇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
우게 하려 함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의 아
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선지자라
는 확신을 가지고 왔었기 때문에 믿을 준비가 더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한 말씀
을 받았을 때에, 그는 이를 그의 마음에 새겼다. 비록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해야 할 만큼 존귀히 여긴 것은 아니지만, 적은 약속이 그의 마음에 새로운 믿음
을 불어 넣었고 그는 자기 아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
씀이 항상 그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와 같은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
다. 이반(半)은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마디 말씀을 듣고 도움을 얻었는데
여러 편의 설교를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태함을 일깨우기 위해 더욱 더 분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주님께서 은혜로이 약속하시는 것 이상으로
믿을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 여기에 믿음의
결과와 말씀의 권능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한마디 말씀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회생(回生)시킨 것처럼, 순간적으로 그 아버지는 믿음으로 다시 건강한 아들을 얻는
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실 때마다 그의 능력은 언제나 그
가 약속한 것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지 아니함이 주님을
향하여 문을 닫아 버리지만 않는다면 주님은 언제나 그가 약속한 것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지 아니함이 주님을 향하여 문을 닫아 버리지만 않
는다면 주님은 언제나 약속하신 바를 이행하신다. 나는 주님께서 즉시 손을 뻗쳐 우리
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계속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흔하게 자주 있는 일도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응답을 연기하실 때는 그에게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
의 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 자신은 사실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
리가 제거하지 않고 있는 장애물을 대항해서 싸우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도움이 즉시
나타나지 않을 때는,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불신(不信)이 도사리고 있는지, 또는 우리
의 믿음이 얼마나 미온적이며 제한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의 은택을
지상 아무곳에나 되는대로 흩어놓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데 대하여 우리는 놀랄 것이
없다. 주님께서는 마음에 믿음의 문을 열고 그 은택을 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
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다. 비록 주님께서 같은 방법으로 늘 자기 백성을 돕지는 않
지만, 어떤 사람의 믿음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믿는 자들은 선지자의 말한
바,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참으로 빨리 성취되고 있다는 말씀
의 진실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 그 사람이 자기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충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표적의 진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빛을 꺼버리려는 그히 악의적인 소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은 갖가지 술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도록 기만하기에 바쁘다. 그러므로 표적이 우리에게 마당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표적이 아주 분명히 확인됨으로 의심의 여지가 근절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감사할 줄을 모른다 해도, 이상에 기록된 내용을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역사를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4:53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 복음서 저자가 이것을 그 사람의 시작으로 언급
한 것은 약간 어처구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믿으니라'(believe)라는 말이-이 말씀에서-믿음의 진행을 가르킨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의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율법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 찾아왔을 때 이미 믿음을 맛본 상태였음을 우리는 인식해야겠다. 그가 후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아들의 생명에 관계해서 믿은 그런 믿음이 아닌 특별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들인 상태에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선언했다는 의미에서 다른 방향에서 믿기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자기 아들의 병이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나았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고 복음의 편에 서서 자신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그에게는 그 기적을 목격한 온 가족이 함께 증거하고 있었다. 그가 또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께 인도하려고 최선을 다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