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패션 - 1990nyeondae hangug paesyeon

[컬처 까talk]거리에 넘치는 ‘세기말 감성’

1990년대 한국 패션 - 1990nyeondae hangug paesyeon
화려한 색상이 돋보이는 가수 룰라의 1997년 패션(왼쪽 사진), ‘청청패션’과 베레모, 타원형 선글라스로 완성한 마마무 화사의 90년대 스타일.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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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 색안경 위에 착용한 헤어밴드와 똑딱이 머리핀. 상반신에는 홀치기염색 크롭티(배꼽티)를 걸쳐 건강미와 활동성을 드러냈다. 한 손엔 형광색 파워숄더(어깨가 각진) 재킷을 들고 하의는 펑퍼짐한 배기팬츠(힙합 바지) 차림. 금방이라도 무리 지어 힙합 댄스를 출 듯하다.

1990년대 여성그룹 ‘디바’를 다시 본 이야기가 아니다. 제니, 설현, 선미, 현아 같은 아이돌 가수들의 요즘 공항 패션이나 화보 속 옷차림이다. 래퍼 비와이는 얇은 빨간 띠 로고가 선명한 벙거지 모자를 썼다.

1990년대 패션이 돌아왔다. 유별난 소수의 극한 ‘뉴트로(새 복고)’ 체험이 아니다. 올여름 배꼽티를 입은 젊은 행인들에게서 20여 년 전의 환영을 봤다면 그것은 환영이 아닌 실제다. 시내 곳곳에선 요즘 1990년대 패션 파티도 열린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1990년대생 벨라 하디드, 켄들 제너 같은 유명 모델이 약속한 듯 1990년대 스타일을 뽐내는 화보가 넘실댄다. 그 시절 그 패션은 어떻게, 왜 슬그머니 우리 곁에 다시 왔나.

○ ‘내 파티에 이승연, 문희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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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유명 블로거 김혜영 씨가 주최한 1990년대 콘셉트의 베이비샤워 파티 ‘83년생 김혜영’의 모습. 화려한 색상의 옷은 물론 짙은 립스틱 등 ‘세기말 감성’이 폭발했다. 참석자들은 서울 종로구 동묘시장과 SPA 브랜드 매장을 다니며 취향에 맞는 90년대 패션을 완성시켰다. 박지훈 씨 제공

블로거 김혜영 씨(36)는 최근 출산을 앞두고 지인 15명을 초대한 베이비샤워 파티, ‘83년생 김혜영’을 열었다. 드레스코드는 ‘90년대 스타일’. 초청받은 참가자들은 행사 2주 전부터 분주해졌다. 서울 종로구 동묘시장 광장시장부터 온라인 쇼핑몰까지 뒤지고 돌아다녔다. 눈길을 사로잡을 ‘그 시절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다.

당일 파티 현장에는 어두운 색 립 라이너로 빈틈없이 입술을 채우고 베레모를 쓴 배우 이승연, 힙합 바지에 헤어피스를 단 가수 문희준이 등장했다. 물론 연예인 본인이 아니다. 1990년대의 그들을 흉내 낸 참가자들. ‘모조 이승연’은 1990년대 TV 토크쇼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 진행 당시의 스타일을 감쪽같이 재현했다.

당대의 통신기기 삐삐부터 록그룹 ‘Y2K’의 사인 CD, 루즈삭스, 헤어피스, 크롭티, 배기팬츠, 플라스틱 헤어핀과 베레모(빵모자)까지…. 이른바 세기말 감성이 폭발했다. 여성그룹 ‘샤크라’의 패션 콘셉트로 꾸며 파티에 참가한 박지훈 씨(33)는 “1990년대에 초중학생이었는데 당시에는 구매력이 없어서 해보지 못했던 루즈삭스 같은 것들을 이번에 직접 체험하니 즐거웠다. 이정현 같은 1990년대 가수를 보면 분장과 무대가 굉장히 파격적이다. 평소 무채색 옷만 입다 세기말 감성으로 꾸미니 자유로워진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 Z세대 울린 X세대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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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브랜드 마이클코어스가 11일 미국 뉴욕 패션위크에서 내년 봄·여름 컬렉션으로 선보인 물방울무늬 드레스. 뉴욕=AP 뉴시스

“캘빈(클라인)과 나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1981년 배우 브룩 실즈가 모델로 등장한 캘빈클라인 의류 광고 문구다. 당시 15세이던 실즈가 이 문구에 맞춰 도발적 포즈를 취했는데 논란과 함께 여성성과 섹시함을 강조한 캘빈클라인의 인기도 반등했다.

38년 뒤, 캘빈클라인의 새 모델인 17세 가수 빌리 아일리시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펑퍼짐한 옷을 입지. 아무도 그 속을 모르니까 몸매 품평을 못 하잖아. 난 내 캘빈 속에서 진실을 말해.”

근 40년 차의 두 광고는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내면은 판이하다. 전자가 사회가 만든 전형적 여성상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개성과 다양성을 내세운다.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와 보수적 분위기를 1990년대 X세대가 자유와 개성으로 탈피하려 한 움직임이 패션에 남아 Z세대에 울림을 주는 형국이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는 1990년대 TV 뉴스 화면 속에서 배꼽티를 입은 여성이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 친숙함과 과감함 사이

1990년대 패션 붐은 업데이트나 재해석이 아닌 동일 재현으로 가고 있다. 패션 회사들도 적극적이다. 프라다는 얇고 붉은 띠 모양 로고인 리네아 로사를 부활시키고 당시 유행한 나일론 백팩을 그 모습 그대로 재출시했다. 타미힐피거도 1990년대의 로고 장식을 다시 사용한다.

과장된 색채 등 맥시멀리즘의 이면에 담백한 미니멀리즘이 공존한 것도 1990년대 패션의 강점으로 꼽힌다. 진정아 더블유 매거진 디지털 에디터는 “(고 존 F 케네디 2세의 부인) 캐럴린 베셋케네디, 모델 케이트 모스가 1990년대에 보여준 정제되고 담백한 스타일이 현재 스타일리시하게 받아들여진다. 첨단 경향을 과하게 좇는 것을 촌스럽게 생각하는 20, 30대에게 1990년대 문화는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친숙함이 있다. 1960∼80년대 패션에 비해 동시대와 접점이 많고 실용적이란 점도 90년대 패션의 매력이다”라고 했다.

임희윤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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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말마다 안방극장이 1990년대 패션으로 물들고 있다. MBC 예능 ‘놀면 뭐하니’의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SSAK3)’ 덕분이다. 이효리·비·유재석의 ‘부캐(부 캐릭터)’ 린다G‧비룡‧유두래곤으로 구성된 90년대풍 혼성 댄스 그룹 싹쓰리는 오는 25일 정식 데뷔를 앞두고 커버 곡과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90년대 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노래와 스타일이 볼거리인데, 특히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0년대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패션이 화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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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5일 공식 데뷔를 앞두고 있는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의 음악과 스타일이 화제다. 사진 MBC '놀면 뭐하니' 공식 인스타그램

90년대 정조준, '뉴트로 패션'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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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쓰리 멤버들이 선보이는 90년대 감성의 복고 패션이 눈길을 끈다. 커다란 링 귀걸이와 90년대식 메이크업이 돋보이는 린다G(이효리). 사진 MBC '놀면 뭐하니' 공식 인스타그램

은색 아이 섀도로 눈물샘에 포인트를 준 린다G(이효리)의 90년대식 메이크업은 푸른색 야구 유니폼, 망사 토시, 커다란 링 귀걸이와 세트처럼 잘 어올린다. 검정 베레모와 이보다 더 까만 선글라스, 무릎까지 벨트를 길게 내려트린 유두래곤(유재석)에게선 옛날 뮤직비디오 스타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 앞섶을 모두 풀어헤쳐 복근을 과다하게 드러낸 올 화이트 ‘오버’ 스타일에 황금 룡 조각 지팡이까지 짚은 비룡(비) 역시 온몸으로 90년대를 표현한다. 지난 4일 방송된 싹쓰리의 커버 곡 ‘여름 안에서’ 뮤직비디오 속 멤버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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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풍미했던 혼성 그룹이 3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현대에 재등장한 듯한 모습이다. 사진 비 인스타그램

이들의 90년대 패션 콘셉트는 지난달 27일 ‘슈스스’ 한혜연 스타일리스트를 만나면서 구체화했다. 한혜연 스타일리스트는 “싹쓰리 스타일링을 위해 멤버별로 개성 있는 스타일을 연출했던 90년대 미국의 3인조 혼성 댄스 그룹 ‘디-라이트(Deee-Lite)’ 스타일을 참고했다”며 “홍일점 린다G는 가장 튀고 에너제틱하게, 유두래곤은 베레모 등으로 복고풍 느낌을 강하게, 체격이 좋고 춤을 많이 추는 비룡은 90년대 힙합 스타일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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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거지와 베레모, 선글라스 등 90년대의 과감한 패션 스타일을 충실히 반영한 싹쓰리의 스타일링 콘셉트. 사진 MBC '놀면 뭐하니' 공식 인스타그램

이날 싹쓰리는 총 3컷의 앨범 화보 사진을 찍었다. 린다G는 깅엄 패턴의 집업 드레스에 벨트 백을 허리에 두르고 미래적인 분위기의 선글라스를 써 6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던 ‘모즈룩’을 90년대식으로 연출했다. 손으로 직접 짠 듯한 니트 스커트, 흰색 크롭티(배꼽티), 통굽 플랫폼 슈즈, 초록색 그래픽 패턴의 쫄바지와 반다나(홀치기 염색) 손수건 역시 톡톡 튀는 90년대 패션을 보여줬다. 비룡은 컬러 블록 재킷에 오버사이즈 셔츠, 버뮤다 팬츠, 벙거지로 힙합 꾸러기 룩을 연출했다. 유두래곤은 나팔바지와 패턴 블라우스, 라펠이 큰 재킷 등으로 펑키한 분위기를 살리는가 하면, 헤어밴드와 점프슈트로 90년대 스트리트 패션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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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헤어 밴드와 핑크색 봄버 재킷, 발토시 등 추억의 패션 아이템이 총출동했다. 사진 MBC '놀면 뭐하니' 공식 인스타그램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입은 90년대 스타일의 옷들이 실제로는 모두 2020년 봄여름을 겨냥해 출시된 신제품이라는 사실이다. 린다G의 깅엄 패턴 집업 드레스는 루이 비통, 초록색 그래픽 쫄바지는 몽클레르, 비룡의 컬러 블록 재킷은 프라다, 봄버 재킷은 디올 옴므 제품이다. 유두래곤의 복고풍 슈트는 구찌 2020 봄여름 컬렉션이다. 싹쓰리의 패션이 30년 전 스타일을 추구하면서도 전혀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최근 패션계의 가장 큰 트렌드는 ‘90년대로의 회귀’다.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시도는 아카이브를 뒤져 90년대 유행했던 아이템을 현대식으로 다듬어 새로운 디자인을 내는 작업이다. 이는 30‧40대에게는 친밀감을, 10‧20대에게는 새로움을 준다는 전략이다. 한혜연 스타일리스트는 “프린트나 패턴이 과거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면 실루엣은 요즘식으로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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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비)의 스타일링에 활용됐던 프라다 2020 SS 컬렉션. 사진 프라다

왜 90년대 패션인가

패션은 돌고 돈다지만 왜 하필 90년대로 돌아간 걸까. 트렌드 전문가들은 90년대 패션의 다양성에 주목했다. 이정민 ‘트렌드랩 506’ 대표는 “90년대엔 단순한 패션부터 전위적이고 과장된 패션, 모던한 패션과 포스트모던 패션 등이 모두 섞여 있었다”며 “지금 보면 ‘오버스러운’ 패션도 과감하게 시도하고 각자의 개성을 중시했던 패션의 황금기”라고 설명했다. 개인의 취향을 강조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현대의 소비 주체이자 자기 주장이 강한 Z세대의 코드와 잘 맞아 떨어진다. Z세대가 낯선 90년대 패션 스타일에 호감을 갖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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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면 '오버스러운' 패션도 당시에는 개성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사진 MBC '놀면 뭐하니' 공식 인스타그램

한국의 90년대 역시 경제 활성화로 ‘오렌지족’ ‘X세대’ 등 젊은 소비 주체를 지칭하는 유행어까지 등장했던 시기다. 한혜연 스타일리스는 “슈트부터 스트리트 패션까지 다양한 디자인 시도와 실험이 이루어졌던 시기”라며 “3040세대에겐 화려했고 풍요로웠던 그때 그 시절 패션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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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래곤(유재석)의 스타일링에 활용됐던 구찌 2020 SS 컬렉션. 사진 구찌 홈페이지

30년의 시차도 한 몫 했다. 10년 전 스타일은 그닥 새롭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년 전 스타일은 전혀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복고풍 스타일의 진수, ‘싹쓰리’ 패션 탐구 #2020년 유행템으로 돌아온 90년대 패션 #개성 강조, 자기 주장 강한 Z세대와 코드 맞아

이정민 대표는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 중인 디자이너들의 나이도 주목했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72년생)를 제외하곤,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80년생), 디올 옴므의 킴 존스(79년생), 보테가 베네타의 다니엘 리(86년생),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81년생) 등 80년대생 디자이너들이 패션계를 주도하고 있다. 이 대표는 “그들이 10대 때 보고 자랐던 패션이 바로 90년대 스타일”이라며 “기억과 경험으로 자연스레 90년대 패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