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한 줄의 문장마다 한 권의 책이 응축된 듯한 423편의 글과 박노해 시인이 20여 년간 기록해온 세계의 숨은 빛을 담은 컬러사진이 어우러져 실렸다. 총 880쪽에 달하여 마치 경전이나 사전 같아 보이는 두께감,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와 하늘빛 천으로 감싼 만듦새는 작은 핸드백처럼 아름답다. 표지에 상징처럼 새겨진 ‘걷는 사람’의 고전적 이미지가 눈길을 끈다. 박노해 시인이 2008년 고대 문명의 발상지 알 자지라Al Jazeera 평원에서 만난 ‘걷는 독서’를 하는 소년을 찍은 사진에서 따왔다. “따사로운 햇살은 파릇한 밀싹을 어루만지고,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입 맞추며 오래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선조들의 복장과 걸음과 음정 그대로 근대의 묵독 이전의 낭송 전통으로 ‘걷는 독서’.” 박노해 시인은 이 오랜 독서 행위인 ‘걷는 독서’의 체험을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전하고자 했다. 『걷는 독서』는 언제 어느 곳을 걸으며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을, 삶의 모든 화두가 담겨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이 《걷는 독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걷는 독서라니?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꼭 책을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걸으면서 묵상하고, 주위 자연과 교감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걷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박 시인은 어린 날 마을 언덕길이나 바닷가 방죽에서 풀 뜯는 소의 고삐를 쥐고 책을 읽었고, 학교가 끝나면 진달래꽃, 조팝꽃, 산수국꽃 핀 산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답니다.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그러다보면 책 속의 활자와 길의 풍경들 사이로 어떤 전언(傳言)이 들려오곤 했답니다. 감옥 독방에 있을 때에도 박 시인은 ‘걷는 독서’를 계속합니다. 비록 세상 맨 밑바닥 끝자리에 놓인 두 걸음 반짜리 길의 반복이었으나, ‘걷는 독서’를 하는 동안은 박시인의 정신 공간은 그 어떤 탐험가나 정복자보다 광활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을 박시인은 감탄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철저히 고립되고 감시받는 감옥 독방의 그 짧고도 기나긴 길에서 아, 나는 얼마나 많은 인물과 사상을 마주하고 얼마나 깊은 시간과 차원의 신비를 여행했던가!”

자유의 몸이 된 뒤, 박 시인의 걷는 독서는 국경 너머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 시인은 자신의 인생의 풍경을 단 한 장에 새긴다면 ‘걷는 독서’를 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그리하여 ‘걷는 독서’는 모든 것을 빼앗긴 시인의 인생에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 박 시인만의 자유였고 시인만의 향연이었다고 합니다.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그렇게 평생 ‘걷는 독서’를 해온 박 시인은 그동안 그렇게 해온 독서를 시로, 책으로, 사진으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걷는 독서’가 책으로 나온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번 책은 종전의 책과 다릅니다. 책의 오른쪽 페이지마다 짧은 경구, 격언 같은 말들이 하나씩 적혀있습니다. 왼쪽 페이지에는 시인이 ‘평화’를 화두로 지구촌 분쟁의 현장을 누비며 찍은 사진 가운데 그에 걸맞은 사진이 실려있고요. 그러니까 이번 책에는 시인의 생각이 응축되고 응축되어 삶의 혜안이 번쩍이는 두세 줄의 경구로 실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인은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이 책은 지난 30여 년 동안 날마다 계속해온 나의 ‘걷는 독서’ 길에서 번쩍, 불꽃이 일면 발걸음을 멈추고 수첩에 새겨온 ‘한 생각’이다. 눈물로 쓴 일기장이고 간절한 기도문이며 내 삶의 고백록이자 나직한 부르짖음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걷는 존재이고 만남의 존재이고 읽는 존재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삭막한 이 시대에,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사라지지 말자고 이제 와 내 품속의 편지를 띄워 보낸다. 이 《걷는 독서》가 그대 안에 있는 하많은 생각과 지식들을 ‘목적의 단 한 줄’로 꿰어내는 삶의 화두가 되고 창조의 영감이 되고 어려운 날의 도약대가 되기를.

어디서든 어디서라도 나만의 길을 걸으며 ‘걷는 독서’를 멈추지 말자. 간절한 마음으로 읽을 때, 사랑, 사랑의 불로 읽어버릴 때, 《걷는 독서》는 나를 키우고 나를 지키고 나를 밀어 올리는 신비한 그 힘을 그대 자신으로부터 길어 내줄 테니. ‘걷는 독서’를 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저 영원의 빛으로 이어진 두 세상 사이를 걸어가고 있으니.”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이제 박 시인이 말하는 ‘걷는 독서’가 뭐라는 얘기는 그만 하고, 책에 실린 ‘걷는 독서’의 결정체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제가 그 결정체를 보면서 느낀 점을 각 경구마다 사족처럼 달고도 싶으나, 각자 조용히 묵상할 수 있게, 그저 박시인의 경구만 보여드립니다.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1.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둠이 깊어서가 아니다. 너무 현란한 빛에 눈이 멀어서이다.

2. 삶은 짧아도 영원을 사는 것. 영원이란 ‘끝도 없이’가 아니라 ‘지금 완전히’ 사는 것이다.

3. 행복은 그림자 같은 것. 잡으러 뛰어가면 달아나고 문득 돌아보면 가만히 나를 따라오는 것.

4. 내가 소유한 것들이 나를 소유하게 하지 말며, 내가 올라선 자리가 나를 붙박게 하지 말기를.

5. 어둠 속을 떨며 걸어온 인생은 알리라. 아침에 눈을 뜨면 눈부신 세상이 있고 나에게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큰 경이인지.

6. 똑똑한 사람은 알맞게 옳은 말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때맞춰 침묵할 줄 안다.

7. 악의 완성은 선의 얼굴을 갖는 것이다.

8.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

9. 정치의 본질은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

10. 온몸으로 살아낸 하루는 삶의 이야기를 남긴다. 나만의 이야기가 없는 하루는 살아도 산 날이 아니다.

11.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여기서 그만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지금 스스로 그어버린 그 선이 평생 나의 한계선이 되리니.

12. 두려운 것은 답을 틀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물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13. 세상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나에게 하나뿐인 그 존재. 못나도 울 엄마, 못나도 울 아빠.

14. 신독(愼獨), 홀로 있어도 삼가함. 홀로 있을 때의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이다.

15. 하늘이 흐르는 구름을 붙잡지 않듯이, 그렇게 집착하지 말고 흘러갈 게 있다.

16. 하르르 하르르 꽃잎이 질 때면 지는 꽃잎 사이로 하늘을 보다 이대로 그만 죽어도 좋았다.

17. ‘바빠서’라는 건 없다. 나에게 우선순위가 아닐 뿐.

18. 쌉쌀한 커피 한 모금. 그윽한 여운 한 모금. 인생의 고독 한 모금.

19. 죽는 날까지 자기 안에 소년, 소녀가 살아있기를.

20. 조로한 젊음을 보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미숙한 어른을 보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박노해 걷는 독서 - bagnohae geodneun dogseo

어휴! 최소한만 인용하려고 하였는데, 스무 개나 인용하였네요. 각 사람이 살아온 삶이 다 다르니, 책에 실린 423개의 경구는 읽는 사람마다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 경구가 다양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걷는 독서》를 음미하며 어떤 경구가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지 시험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라 카페 갤러리(종로구 자하문로 10길 28)에서는 9월 26일까지 《걷는 독서》전을 하고 있습니다. 박 시인의 삶이 응축된 경구와 그에 걸맞은 사진 작품 57점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지요. 시간이 되시면 라 카페 갤러리도 방문하여 크게 확대한 <《걷는 독서》를 감상해보시지요.

박노해 시인은 이 오랜 독서 행위인 ‘걷는 독서’의 체험을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전하고자 했다. 『걷는 독서』는 언제 어느 곳을 걸으며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을, 삶의 모든 화두가 담겨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진정한 독서의 완성은 삶”이기에
지금까지도 모든 글을 오래된 만년필로만 쓰고 있는 박노해 시인. 1980년대 공장에서 철야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지하 단칸방에서 써낸 첫 시집 『노동의 새벽』도, 무기수로 옥중에 갇혀 감시의 눈을 피해 갱지에 눌러쓴 『사람만이 희망이다』도 육필 원고였다. 그 작은 감옥 독방에서도, 국경 너머 분쟁 현장에서도 박노해 시인이 멈추지 않고 이어온 일생의 의례이자 창조의 원천이 바로 ‘걷는 독서’였다. 상처투성이 삶 속에서 온몸으로 살고 사랑하고 저항해온 삶과 사상의 정수가 담긴 책 『걷는 독서』, 그렇기에 이토록 간결하고 강력하다.

“만일 내가 한 달에 몇 병씩 쓰는 잉크 병에 내 붉은 피를 담아 쓴다면, 그러면 난 어떻게 쓸까.” “독서의 완성은 삶”이기에 한 자 한 자 목숨 걸고 살아낸 것만을 쓰겠다는 원칙과 각오를 세운 박노해 시인.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경험하느라,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더 많이 읽을수록 미로에 빠지고, 자기 자신과 멀어지는 시대. 지금이야말로 내 삶을 비추는 ‘단 한 줄의 글’, ‘단 한 권의 책’이 필요한 때다. 응축된 문장 사이로 영감이 깃들고, 가슴을 울리는 서정 사이로 새로운 나를 마주하는 체험을 선사할 책 『걷는 독서』.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하고, 삶의 수많은 문제 앞에서 나직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최초 공개 컬러사진과 최고의 영문 번역 수록
2010년부터 이어온 ‘박노해 사진전’은 흑백 아날로그사진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데, 이번 책에는 그간 촬영해온 수십만 장의 사진 중 컬러 작품만을 엄선하여 담았다. 한 편 한 편마다 그 문장에 생기와 빛을 더하는 사진이 다채롭게 감각을 일깨운다.
좋은 문장을 품격 있는 영어로 동시에 읽는 기쁨도 있다. 한국문학 번역의 독보적인 대가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Brother Anthony of Taize)가 박노해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하여 우리말의 깊은 뜻과 운율까지 살린 영문을 나란히 수록하였다.

‘걷는 독서’와 함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박노해 시인이 차곡차곡 품에 담아온 글을 이제 그대에게 두꺼운 편지로 띄워 보낸다. 잠 못 드는 누군가의 새벽을 안아주던 한 줄, 위태롭던 하루를 버텨내게 하는 한 줄, 노트에 적으며 희망을 새겨준 한 줄, 잊었던 근본 질문을 던져 생각의 힘을 주는 한 줄. 그렇게 어둠 속의 등불 같은 문장으로 내 삶을 비춰줄 ‘단 한 권의 책’, 『걷는 독서』. 책을 펼치면 어느새 광활한 광야를, 아름드리 나무 숲길을, 눈부신 설원을 걸으며, 또 다른 나에게로의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들고 돌아서고 싶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걷는 독서』의 한 문장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어디서든 어디서라도 나만의 길을 걸으며 ‘걷는 독서’를 멈추지 말자. 간절한 마음으로 읽을 때, 사랑, 사랑의 불로 읽어버릴 때, 『걷는 독서』는 나를 키우고 나를 지키고 나를 밀어 올리는 신비한 그 힘을 그대 자신으로부터 길어 내줄 테니.” (박노해, 『걷는 독서』 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