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없는 사람 - gaeseong eobsneun salam

확실히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다름
일본인은 소수취향에 대해서도 그럴수 있지~ 하고 넘기는 반면

한국에서는 소수취향이라하면 바로 저 더러운새끼, 미친새끼 소리가 나오면서 조리돌림함

하나의 예를들어 남자가 구두신고 치마 입고나오면
한국인들은 막 사진찍어대고 인스타 트위터 페이스북에 올려서

저사람뭐야~ 왜저렇게 입고다녀
하면서 조리돌림 하겠지만

일본에선 그렇게 입고 돌아다녀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내가 궁예가 아니라서 진짜 귀찮아서 관심이 없는건지
사람의 개성을 인정해줘서 신경을 안쓰는건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후자라고 느꼈다.

만약 전자였다면 조금의 시선이나 몸의 미동같은게 느껴졌어야하는데
그런게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느낀 한국과의 제일 큰 차이점

일본은 불편함은 있지만 불합리한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된다.
계약서에 월급 명시하고 이러이러하게 일하게 될겁니다.

알바를해도 몇시부터 몇시까지 일하고 법에따라
이렇게 급여를 받게될겁니다

무조건 법대로 하고 법 못지킬거 같으면 애초에 하지를 않는다.

한국은 회사를가나 알바를하나 주휴수당 삥땅치고
장사안된다고 최저시급도 안주는곳이 흔한데
일본에선 얄짤없음, 무조건 법 우선, 당연한거지만

물론 밑바닥에 좆같은 인간들 있음
일본에서 이삿짐센터 일을했는데
노가다판 아저씨들처럼 막 대하고 험상궃은 인간들이 있음

내가 혐한이 한창일때 가서 그런지 몰라도
양말안신고 왔다고

그게 한국의 문화입니까? 하면서 쿠사리 맥이는 일본인이 있었음
근데 일 묵묵히 하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마주치면
고개인사 살짝하고 일만함

말 존나 길어졌는데

한국은 불합리한 나라고
일본은 불편한 나라라고 보면됨

그런데 그 불편한게 책임관계를 명확히 구분지어놔서
좀 불편할 뿐이지 시스템상으로는 완벽도가 높다는 뜻임

한국은 불합리함.
약속을해놔도 나중가서 멋대로 깨버리고
좀 이용해먹을만 하다 싶으면 가차없이 빨아먹고 버림

이상 1년 워홀충의 일본 평가였음

개성 없는 사람 - gaeseong eobsneun salam

일러스트레이션 이내

영국 팝스타 스팅의 노래 중에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Shape of my heart)라는 명곡이 있다. 영화 <레옹>의 주제가였던 바로 그 노래다.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면 ‘내 심장의 모양’이나 ‘내 마음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노래 속 화자는 후렴구에서 “그건 내 마음의 모양이 아니에요”라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이번 회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의 모양 알아차리기’다. 에세이의 핵심은 저자의 개성이며,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키워야 에세이를 잘 쓸 수 있다고 지난 회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개성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많이 사는 듯하다. 젊은 세대의 전유물처럼 쓰이기도 하고, 통통 튀는 말솜씨라든가 특이하고 강한 성격과 연관되기도 한다. 그런 오해를 막기 위해 ‘마음의 모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모습이 다른데, 자기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이라도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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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을 밝히는 유일한 빛, 자문자답

쉬운 질문을 먼저 던져본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무조건 반대하고, 튀어 보이는 일을 골라 저지르면 내 개성이 드러나고 발전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튀어 보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그만큼 몰개성한 짓도 없을 것이다. 당사자의 내면도 점점 가볍고 하찮아진다. 그의 행동은 모두 타인의 시선을 향한 것이므로. ‘난 남들과 다르다’고 선언한다고 저절로 나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나답게 말하고 행동하면 자연스럽게 남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몇몇 스포츠용품이나 탄산음료 회사들은 이 ‘나다움’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퍼뜨린다. 그들은 먼저 현대는 사람들의 개성을 없애고 규격화하려는 시대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런 집단적 억압에 맞서 일탈하는 것, 사적인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는 것이 개인됨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기업들은 ‘생각하지 않고 느끼는 것, 저지르는 것’을 통해 남들과 달라지고 진정한 나를 찾게 된다는 메시지를 애용한다. 결론은 망설이지 말고 자기들 물건을 사라는 얘기다.

이는 교묘한 궤변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개성을 버리라는 압박을 분명히 받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은 개성이 부족하다’는 억압 역시 함께 받는다. 적어도 지금 사회는 포드가 검은 색 자동차를 대량생산으로 찍어내던 시절보다는 덜 획일적이며, 세상이 요구하는 피상적인 개성의 수준이 높아졌다. 아침에 머리를 다듬고 입을 옷을 고를 때마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려 애쓴다.

그리고 사람의 개성은 기실 충동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오히려 사람들의 충동이야말로 대개 비슷하다. 더운 날에는 비슷비슷하게 목이 마르고, 응원하는 팀이 억울한 판정을 당하면 함께 울분이 치솟으며, 매력적인 사람이 근처를 지나가면 같은 방향으로 신경이 쏠린다. 생각 없이 느끼고, 저지르고 싶은 것을 그 자리에서 해치울수록 우리는 서너 개의 범주로 쉽고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값비싼 ‘신상’ 신발을 신고 최신 유행인 아웃도어 의류를 걸치고 다니면 개성이 커지는 게 아니라 줄어든다.

개성을 발견하고 키우려면 저지르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 느끼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 충동은 마음이라는 바다 표면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는 물결과 같다. 또는 동굴 입구에서 부는 바람과 같다. 프로이트나 융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 동굴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잠수함을 타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 보자. 횃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자. 심리 상담이나 분석을 받지 않아도 되고, 어려운 심리학 이론을 공부할 필요도 없다. 자문자답이 우리의 잠수함이고 횃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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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는?

처음부터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같은 어려운 질문을 던지지는 말자. 쉬운 질문, 오래 생각하면 누구나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질문부터 던져보자. 예를 들어, 당신이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영화가 다섯 편이 넘고, 그 영화들을 다 똑같은 정도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분명히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그 답은 동굴의 어둠 속에 있다.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를 대려면 첫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 두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도 알아야 한다.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를 네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보다는 조금 덜 좋아하고 여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보다는 조금 더 좋아하는 이유도 알아야 한다. 물론 올해의 순위가 지난해의 순위와 다를 수 있고, 내년에는 또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올해의 순위가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그 순위와 이유가 지금 당신의 개성이다. 고작 영화 다섯 편과 그에 대한 설명이지만, 그게 당신과 똑같은 사람은 없다.

좋아하는 영화 1~5위와 이유를 딱 두 줄씩이라도 써보라. 공동 1위나 공동 2위 같은 것이 없게, 분명하게 순서를 매겨보라. 자신이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는지,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전보다 더 잘 알게 된다. 이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발견한다고 할 수도 있고 발명한다고 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내가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는 커티스 핸슨 감독의 <엘에이(LA) 컨피덴셜>이고, 네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다.

자, 이제 조금 더 어려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스스로 성인이라고 느낀다면, 성인이 된 날은 언제인가? 만 20세가 된 그날이었나? 아니라면 언제인가? 왜 그날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살펴야 하고, ‘어른’이란 무엇인지 자신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게 어른인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게 어른인지, 세상의 씁쓸한 면을 알아차리면 어른이 되는 것인지,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당신의 답이 당신의 개성이다. 개성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국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과 견해―인생관, 세계관―를 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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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답이 당신의 개성이다

이런 질문 후보는 무수히 많다. 글쓰기 훈련의 재료로도 그만이다. ‘가을’이라든가 ‘추억’ 같은 제목보다는 답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개인적인 사연을 치열하게 풀 수 있는 제목으로 글쓰기 연습을 하는 게 낫다고 본다. 이를테면 ‘나를 성장시킨 경험 세 가지’, ‘내가 가본 가장 멋진 장소’, ‘오늘 내 기분을 표현하는 단어 네 개’ 같은 식이다.

일기를 쓰는 것은 물론 아주 좋은 연습이다. 그런데 일기장은 단순히 감정을 쏟아내는 대상 이상이 될 수 있다. ‘난 오늘 종일 우울하다’고 썼다면 그 뒤를 ‘왠지 모르겠다’는 맥 빠지는 문장으로 마무리하지 말고 횃불을 들고 동굴 더 깊은 곳을 밝혀보자. 어쩌면 아주 시시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며칠째 비가 와서 그렇다든가. 어쩌면 자신의 좀스러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사촌이 강남 아파트를 샀다는 소식을 아침에 들어서 그랬다든가.

모호하고 모순되는 감정을 억지로 정리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모호함과 모순됨의 모양을 살피라는 것이다.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고, 여행기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이 내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날이 없고, 또 나를 실망시키지 않은 날이 없다. 내가 여기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열렬히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건 확신한다.’ 보부아르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매우 강렬하며, 그게 선망과 환멸이 섞인 복잡한 모양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알수록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그냥요” 같은 대답을 점점 안 하게 된다. 좋아하는 영화 다섯 편의 순위를 매기는 데 사용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좋아하는 책 다섯 권을 고르는 데에도 적용된다. 방금 보고 나온 신작 영화에 대해 흡족하거나 언짢은 까닭에 대해서도 당신만의 의견을 보다 자세하고 정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주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주관이 뚜렷한 사람, 자기 색깔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쓸수록 당신은 더 개성적인 사람, 자기 세계와 무게중심이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 책 한권은커녕 다소 긴 탐사보도 기사조차 읽기 버거워하는 시대, 카드뉴스를 넘어 50초짜리 동영상이 글자를 대체하는 시대에 책이란 어떤 의미일까? 장강명 작가가 상상하는 ‘책 중심 사회’는 많은 이가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해 책을 쓰고, 책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사회다. 책 쓰기가 우리 사회에 왜 이로운지를 함께 모색해보기 위해 장강명 작가가 ‘책 쓰는 법’을 격주로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