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의 살이다.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26-30)

주의 만찬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식은 그 자체가 아니라 예식을 통한 의미와 그에 따른 성취에 목적이 있다. 사도 바울은 예식의 뜻을 풀어 설명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고 했다.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바를 더욱 잘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자. 요한복음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8-51) 하셨다. 또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라는 말도 기억하자.

이와 더불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하신 것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타인의 믿음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심정으로 살게 되어짐을 기념하기 위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 예식을 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자기의 만찬
그러나 진정한 의미를 발견치 못하는 만찬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 자신만의 만찬이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고전11:20-21)가 그것을 이른 말이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하시되, 성만찬의 의미를 모른 채 먹고 마시는 자와는 만찬을 하시지 않는다. 의미를 알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의미대로 살아가는 수고를 하는 자와만 성찬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말씀 떡'과 '말씀 포도주'를 먹고 마시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살을 베고 피를 쏟아내는 애타는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내지 못하는 자들과는 함께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주의 만찬을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만의 만찬을 먹고 있는가?

요한복음 6:53-69 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1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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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는 2천년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수없이 많은 종교적인 가르침과 가치들이 교회의 다양한 변화들에 따라 생성되고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갔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았던 가치들 중 하나는 바로 성찬례 전통이다. 성찬례는 그리스도 신학의 주제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루어졌고 수많은 의미들이 추구되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성찬례를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개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확립에도 분명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공식적인 성찬례문으로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고린토전서 11장 23-26절을 분석하고(2) 이어서 성찬례가 초기 교회와 주변 세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한 다음(3) 성찬례를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벌어졌던 교리논쟁을 살펴볼 것이고(4) 마지막으로 해석학적 반성을 시도해 볼 것이다(5). 오늘날 우리에게 성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또한 성체의 의미를 추구하는데 과학적 증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학적 증명에 온전히 기대다보면 인간의 사유는 빈곤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사자의 삶에 변화가 없으면 성체는 전적으로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점이다. 성체란 언제나 성체를 받아 모신 다음이 중요하다. 진정한 성찬은 그래야만 한다. 성찬례와 관련해 이 글에서 제기된 질문들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The history of the Church has been for 2000 years. During this time, there were many values that appeared and then disappeared, changing the tendencies of the Church in the various ways. What are, then, the permanent values that remained intact in these 2000 years of history of the Church? One of them is surely the worship done every Sunday, especially the Eucharist. Although our subject is known by a variety of meanings in the different branches of theology, it is certain that, through the Eucharist, communication with God is finally possible. Moreover, it takes the roll of confirming the identity of every Christian. The first step of this article will be analysing the Last Supper of Jesus and the text 1Cor 11,23-26(I.II). The second part will deal with the Situation of the Eucharist in the early Church(III), the third step is the different point of view between catholic and protestant church(IV) ending with the hermeneutic reflection and conclusion(V). Naturally, the questions raised above will be constantly shown in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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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charist, Last Supper of Jesus, early Church, catholic church, protestan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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